우리는 주의 가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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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마태복음 12장 50절(신약 21쪽)
설교제목: 우리는 주의 가족입니다.
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반갑습니다.
오늘도 은혜의 자리에 나오신 분들을 축복합니다.
우리 서로를 축복합시다.
‘감사합니다. 당신 덕분에 행복합니다.’
# 축복후
잘 아시는 것처럼 5월이 이른바 가정의 달이잖아요. 이번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에 관한 얘기를 나누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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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 오늘은 ‘가족’에 관한 주제를 놓고 성경 말씀을 나누고자 하는데요. 이와 관련해서 먼저 소개할 것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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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영화감독 중에 ‘고레에다 히로카즈’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가족’이라는 주제로 계속해서 영화를 만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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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18년 그의 작품은 칸 영화제의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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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작품은 우리말로는 ‘어느 가족’이라고 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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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일본어 제목은 ‘만비키 카조쿠’입니다. 일본어 만비키는 ‘좀도둑’을 뜻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영어 제목도 같은 뜻을 가진 ‘shoplifters’로 되어 있습니다.
오늘 설교의 주제와 관련이 있어서 이 영화의 편집 영상을 잠깐 같이 보려고 합니다. 유튜브에 있는 영상을 시간관계상 제가 더 줄여서 편집한 것인데요. 2시간이 넘는 영화를 줄이다 보니 많은 명장면을 생략하게 돼서 개인적으로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혹시 찾아보실 수 있다면 직접 영화를 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참고로 영화는 15세 이상 관람등급입니다. 오늘은 아쉽더라도 제가 준비한 영상을 잠깐 같이 보겠습니다.
# 영상: 약 6분 30초(영화 ‘어느 가족’ 편집영상)
방금 본 영상을 통해 알 수 있지만, 영화 어느 가족은 평범한듯하면서도 전혀 평범하지 않은 가족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혹시 영화를 찾아보실 분들에게는 좀 죄송하지만, 영화 속 약간의 비밀을 이야기 하자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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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나오는 가족은 본래 혈연으로 이뤄진 가족이 아닙니다.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또 자녀들로 나오는 아키, 쇼타, 유리 모두가 전혀 핏줄로 이어져 있지 않습니다. 방금 본 영상을 통해 유리라는 아이는 가정폭력이 있던 곳에서 탈출해 나온 것을 알 수 있고요. 그 외에 가족들도 다들 나름의 사연을 가진 사람입니다.
영화 어느 가족에서는 사실 가족이 아닌 이들을 통해 가족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요. 이를 통해 감독은 아마도 이렇게 질문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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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가족은 무엇일까요?’ 영화 어느 가족은 우리에게 혈연으로 이뤄지지 않은 어떤 가족의 모습 또 좀도둑질로 생계를 이어가는 이상한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가족에 관해 생각하게 합니다. 그들이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가족이라는 것은 진정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해 보라고 말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가족에 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저는 결혼 전과 후로 가족에 관한 관심과 이해가 달라졌습니다. 결혼 전에 저에게 가족은 늘 삶의 2순위였습니다. 어쩌면, 그보다 더 낮을지도 모릅니다. 저의 지난 과거를 돌아보며 참 어리석고 나빴다고 생각하는 일이 있습니다. 가족과 친척들에게 있었던 중요한 행사에 잘 참석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중에서 가장 최악은 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은 것입니다. 물론 저에게도 변명거리가 있긴 합니다. 당시 저는 충주에 있는 교회에서 교육전도사로 사역하고 있을 때였고, 동생의 결혼식은 주일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주일에 자리를 비운다는 것은 사역자로서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은 제가 처한 형편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너무나 이기적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사실 저는 교회 일을 핑계 삼고 있었습니다. 진짜 문제는 당시에 제가 저에게만 너무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동생 또는 가족과 친척에 관한 일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만약 동생의 결혼식에 갈 수 있는 형편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저는 고민하거나 그 선택을 주저했을 겁니다. 그래서 사실 처음부터 당시 속했던 교회에는 동생의 결혼식이 있다는 얘기를 꺼내지도 않았습니다.
한편 제가 결혼할 때 동생은 가족들과 함께 와주었고 결혼 선배로서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어리석은 저는 그 일을 뒤늦게 후회합니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기에 앞으로도 계속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결혼을 통해 가족의 존재를 다시 생각합니다. 가족의 존재를 소홀히 여기면 삶의 후회가 가득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결혼 이후에는 되도록 가족 행사에 참여하고자 애를 씁니다. 또 삶에서 후회할 일을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으로 가족에 관한 관심과 이해가 조금씩 달라집니다. 가족은 삶에서 결코 가벼이 여길 만한 존재가 아니라고 말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여기 계신 성도분들께서도 나름대로 가족에 관해 이런저런 생각이 있을 줄 압니다. 제가 지금까지는 좀 주관적인 측면에서 가족을 이야기했는데요. 이제는 객관적인 측면에서 가족을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현재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오는 가족의 정의는 이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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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부부를 중심으로 한,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집단. 또는 그 구성원. 혼인, 혈연, 입양 등으로 이루어진다.” 법적으로는 민법 제779조 가족의 범위에 이렇게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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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79조 (가족의 범위)
① 다음의 자는 가족으로 한다.
1. 배우자, 직계혈족 및 형제자매
2. 직계혈족의 배우자, 배우자의 직계혈족 및 배우자의 형제자매
② 제1항 제2호의 경우에는 생계를 같이 하는 경우에 한한다. [전문개정 2005. 3. 31.]
말이 좀 복잡하지만, 간단히 말하면요. 기본적으로 가족은 혈연 곧 핏줄로 연결된 공동체를 일컫고 법적으로 부부 또는 부모를 통해 맺어진 관계를 말합니다.
그러나 가족의 형태는 계속해서 여러 모양으로 변화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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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전통적 가족 형태는 남자 중심의 3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이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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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 이르러서는 부부와 미혼 자녀로 구성된 핵가족으로 변하였습니다. 그 형태도 매우 다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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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가 없고 부부만으로 구성된 무자녀가족, 자녀의 학업 또는 부부의 맞벌이 등의 이유로 서로 떨어져 생활하는 비동거가족, 부모의 이혼이나 사별로 부모 중 한 명과 자녀로 구성된 한부모가족, 부모의 재혼으로 재결합가족 그리고 조부모와 손자로 이뤄진 조손가족 등이 있습니다.
이처럼 가족이라는 것이 객관적으로 보면, 혈연을 중심으로 혼인법이나 가족법으로 인정된 관계를 뜻함을 알 수 있는데요. 그 형태는 시대에 따라서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고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가족이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고 계속해서 변화됨을 말해줍니다.
이렇게 다양한 가족의 형태를 보면서 저는 생각해 봅니다. 가족의 모양은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지만, 그 다양한 모양에도 가족이라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말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모양은 달라도 비슷한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예를 들면 먹고사는 것에 관계된 경제적 기능과 애정과 지지, 소속감에 따른 정서적 기능 등이 있습니다. 더불어서 가족의 모양이 다양해진다고 해서 가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가족이 그만큼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이렇게 가족이 중요하다는 얘기를 하면서 조금은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습니다. 사실 가족이 우리에게 늘 유쾌한 경험으로 다가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건 제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왜 삶에서 가족을 2순위 이하로 여겼겠습니까? 물론 제가 저밖에 몰랐던 것도 있지만 가족과 함께했던 시간이 늘 편치만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에게도 가족이 마냥 좋게만 여겨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가족으로부터 가장 큰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그래서 무조건 가족이 최고라는 식의 이야기는 조심스러움이 있습니다. 다만 가족에게는 분명 좋은 면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점에 주목해 보았으면 하는데요. 특별히 우리의 신앙과 관계되어서 그 의미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성경에서 가족은 어떤 의미를 지녔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 통로 역할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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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대홍수 심판에서 노아만 아니라 노아의 가족이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새로운 세대가 땅에 번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가족을 택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으로 이끄셨습니다. 게다가 만민을 구원하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마리아와 요셉이라는 한 가족에서 태어난 어린 생명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이처럼 성경에 나타난 가족은 구원을 이루는 매개가 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신앙 안에서 가족의 의미와 역할이 비신앙적 가족과는 다르다는 것을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비신앙적 가족은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것에 목적이나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반면 신앙적 가족은 구원의 문제에 집중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도 확인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 말씀인데, 다시 한번 화면을 보고 같이 읽겠습니다. 마태복음 12장 50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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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2장 50절(신약 21쪽)
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방금 읽은 성경 구절을 통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가족의 요건은 이러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입니다. 이는 가족이란 단지 혈연관계에 묶여 있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 있음을 얘기합니다. 그리고 가족의 의미와 목적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에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신앙 안에서의 가족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공동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구원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배경을 통해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배경은 이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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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모인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행하고 있을 때, 예수님의 가족이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의 가족이 찾아온 까닭은 이러합니다. 일전에 예수님은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내쫓는 이른바 축귀 사역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일로 시끄러워졌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축귀사역을 지켜본 이들 가운데 어떤 이들이 이것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서 행한 것이라고 모함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의 가족이 예수님의 사역을 막고자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마 12:22-32; 막 3:20-30; 눅 11:14-23).
가족의 방문 목적을 알았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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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다소 냉정하게 들릴 수 있지만, 가족의 행동이 하나님의 뜻을 거슬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또 이렇게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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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이를 통해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이 하나님의 뜻에 관계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건 하나님의 뜻대로 귀신들린 자를 구하는 것 곧 구원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구원을 이루는 것에 함께하는 자가 예수님의 가족이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 안에서 가족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가족을 통해 우리는 구원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가족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 임하는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나님 뜻을 행하는 자가 신앙 안에서 가족이 됩니다. 이는 하나님을 그 중심에 두고 그 분의 뜻을 따라 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구원이 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사는 주의 가족은 구원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제가 함께 나누고 싶었던 이야기의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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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우리가 주의 가족’입니다. 우리는 신앙 안에서 혈연을 넘어서 가족 됨을 이뤄갑니다. 이로 말미암아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나와 함께 신앙생활하고 내곁에 있는 사람은 우리에게 참으로 소중하고 특별한 존재임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이는 그저 같은 교회에 다닌다는 것으로 그쳐지는 관계가 아닙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구원을 이뤄가는 것에 서로의 존재가 꼭 필요합니다. 그리하여 이렇게 신앙 안에서 맺어진 가족관계를 잘 지켜내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소중한 관계를 잘 지켜낼 수 있을까요? 창세기 2장 23절에서 25절을 통해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화면을 보고 같이 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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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23-25(구약 3쪽)
23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5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방금 읽은 성경 구절은 하나님이 만드신 처음 사람인 아담과 하와가 만나서 연합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언뜻 이 장면은 성경에 등장하는 최초의 부부에 관한 이야기로만 여겨질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러한 이유로 이 성경 구절이 결혼예식에 많이 사용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 한편으로 이 부부가 성경에 등장하는 최초의 공동체였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장면을 통해 우리는 공동체를 이루는 것에 관한 중요한 원리 몇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주목해 볼 것은 23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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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은 하와를 ‘내 뼈중에 뼈, 살중이 살’이라고 부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하와는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왜 하와를 아담의 갈비뼈에서 만드신 것일까요? 이에 관해 제가 흥미롭게 들었던 해설은 이것입니다. 갈비뼈는 아담과 하와의 관계를 나타냅니다. 갈비뼈가 몸의 중앙에 있는 것처럼 두 사람은 수평적인 관계에 놓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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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23절은 아담과 하와가 서로에게 동등한 가치를 지닌 존재가 됨을 일컫습니다. 이는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상호 간의 존중이 필요함을 이야기합니다. 서로를 동등한 인격 또는 자신과 같이 귀한 존재로 보는 것이 공동체를 이루는 하나의 원리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가 서로를 존중하지 않으면 공동체가 잘 유지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둘째, 우리가 주목해 볼 것은 24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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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부모를 떠나서 한 몸을 이루라’고 말씀하십니다. 부모는 자식의 정신적 물질적 토대입니다. 이로부터 떠나는 것은 독립적이고 주체적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또 한 몸을 이루라는 것은 나를 넘어서는 깊은 연대입니다. 그래서 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개인이 다른 사람과 깊은 연대를 이뤄가는 일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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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퍼즐 맞추기를 생각해 보세요. 각각의 퍼즐 조각은 서로 다른 모양을 지니고 있습니다. 결코, 어느 것도 다른 것을 대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퍼즐 조각을 하나라도 잃어버리게 되면 퍼즐을 완성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각각의 퍼즐 조각은 각각의 개성을 지니면서도 전체를 하나로 연합하여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됩니다. 이처럼 공동체는 독립적이고 대체 불가능한 개인이 모여 전체가 하나를 이루는 퍼즐과 같습니다. 이로써 공동체는 서로의 개성을 존중하고 구원이라는 하나의 목적과 그림을 향해 나가야 합니다.
마지막 셋째, 우리가 주목해 볼 것은 25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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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하와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단지 두 사람이 나체로 있다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 이상의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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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세계에서 옷은 그 사람의 지위나 계급을 나타냅니다. 왕과 귀족과 같은 지배계층의 복장과 평민과 노예와 같은 피지배계층의 복장은 달랐습니다. 그리하여 옷은 단지 몸을 보호하거나 가리는 용도 이상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해서 고대 세계에서 벌거벗었다는 것은 그 사람의 명예가 손상을 입은 것이고요. 허물을 내보였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25절은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기록합니다. 이는 서로의 수치와 허물을 덮어줄 수 있는 관계임을 말해줍니다. 이처럼 공동체는 약점을 덮어줄 수 있어야 하는 곳입니다.
오늘 저는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어쩌면 과할 정도로 여러 설명을 했지만, 사실 제가 꼭 하고 싶었던 얘기는 매우 단순합니다. 우리가 주의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관계가 매우 특별하고 소중한 것임을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또 이 관계를 잘 지켜나가는 일이 중요함을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충분히 전달되었는지는 몰라도, 이것 하나만은 꼭 기억했으면 합니다.
여기에 모인 우리는 참으로 소중한 관계입니다. 너무 익숙해져 버려서 우리는 그것을 잊고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잘 돌이켜보면 우리가 이렇게 신앙생활 할 수 있게 된 것은 결코 나 혼자만의 힘으로 된 것은 아닙니다. 마치 가족의 돌봄으로 오늘 내가 이만큼 자라고 성장한 것처럼, 이곳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을 통해 또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맺은 이 소중한 관계를 잘 지켜나가기에 힘썼으면 합니다.
그리하여 바라건대, 우리가 신앙 안에서 아름다운 관계를 이를 수 있기 바랍니다. 우리의 주의 뜻을 따름으로 신앙 안에서 가족으로 부름을 받은 관계임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주신 이 특별한 관계를 잘 이뤄갈 수 있게 해달라고 잠깐 같이 기도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