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2: 34-43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1 viewNotes
Transcript
들리심과 인자의 영광
들리심과 인자의 영광
지난 주 첫 번째로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라는 말씀으로 본문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사건이 영광의 사건이라고 정의적으로 말씀드릴 수 있지만 그렇게 하면 마치 운동하면 건강해집니다. 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그걸 몰라서 그러느냐는 식으로 답이 나올 것입니다.
그렇지만 본문에서 우리가 살피는 것은 당시 제자들이 그것을 몰랐다는 것과 예수를 믿는다는 우리는 잘 알고 있는가 하는 것이죠. 그럼 여러분은 오히려 반문할 겁니다. 믿는데 아는 것이 중요한가요? 또는 믿고 교회를 다니는데 왜 공부하듯 자세하게 알아야 하는 건가요?라는 식의 질문이죠.
여러분에게 ‘이러저래 해야 건강하니 그렇게 해’라고 말한다면 잔소리가 될 것인데요 만약 비싼 돈을 낸 헬스장의 선생이 말하면 어떨가요? 좀더 비약해서 죽음을 앞둔 부모가 유언으로 한다면 어떨가요? 너무 심한 비유일가요? 하지만 본문은 그 이상 아닌가요? 예수님은 지금 자신의 죽음을 불과 며칠 앞두고 있는 시점에 그것도 사람의 눈에는 가장 비참하고 누구도 꺼려하는 십자가에 매달려 조롱과 멸시를 받는 죽음을 앞두고 있다면 어떻습니까? 그러니까 제자들에게 그 어느때보다 정신을 차리게하고 십자가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연결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의 환호를 받으며 주변만 돌아보아도 마치 무엇인가 되는 모양새를 가질 때 예수님은 제자들을 훈련하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죽음에 대한 확실한 의미를 제자들에게 알려 주셔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 번째가 서두에 말씀드린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라는 예수님의 선언합니다. 그리고 지난주 빌립의 일상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이어서 그렇다면 영광이 무엇인가하는 것이죠. 성경은 구약의 출애굽기와 레위기를 살피면 알 수 있지만 저는 이해를 위해 태양과 빛으로 설명하고자 합니다. 태양은 발광체입니다. 그래서 빛을 발산합니다. 덕분에 우리는 빛의 영향으로 생명을 얻죠. 달은 발광할 수 없지만 태양빛이 얼마나 밝은지 반사를 하는 반사체입니다. 여기에서 영광이 빛이라면 빛이 어떻게 발광하는가? 라는 대립식으로 물어보는 것입니다. 먼저 태양은 수소와 원자핵이 충돌하여 헬륨 원자핵으로 바뀌는 핵융합 반응이 계속해서 거대하게 일어난다라고 말하면 어렵지만 쉽게 끊임없는 폭발로 인해 발생하는 에너지가 빛으로 발산되는 것이죠.
지난주 본문에서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 자기 희생이 폭발이자 이로 인해 빛이 발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시기에는 과학적인 수소, 원자, 폭발 같은 용어가 아니라 별로 와닿지 않습니까? 현재 진행중인 1년여전에 사망한 채수근 수병의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사람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말도 안되는 상황에서 목숨을 잃은 사건을 그저 사고로 둔갑시켜 죽음을 헛되이 만들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면 죽음의 진실을 밝히고 고인이 사람의 생명을 살리려 행한 자기 희생을 기억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죠.
또 한 사건은 24년 1월에는 두 소방관이 화재 현장에 고립되어 생명을 잃었습니다. 직업이 그러니까? 또는 자기가 택한 일 아니냐고 말할 수 있습니까? 혹시라도 주변에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인연을 끊으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이어서 ‘말이 그렇다’ 또는 ‘내 말이 틀렸냐’고 덛붙입니다. 우리 사회는 타인을 위해 희생한 분들에게 명예로운 호칭인 ‘의인’ 즉 의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타심이야 말로 살만한 세상을 만드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하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물며 예수께서 인류가 하나님을 향한 대적 행위로 마땅히 심판받고 죽음으로 치뤄야 하는 형벌에서 나를 대신하여 죽음의 길로 가신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계획을 아버지 하나님께서 하나 밖에 없는 아들에게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핵융합이자 폭발에 해당되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에서 계속적으로 반응하며 끊임없는 자기 폭발로 인해 우리가 생명을 공급받는 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되네이는 ‘은혜 아니면’에서 ‘주의 십자가 영광의 그 빛이 나를 향해 비추어주셨네’라는 표현이 그것입니다. 그렇게 빛을 받으니까 ‘주홍빛보다 더 붉은 내 죄 그리스도의 피로 씻기어 완전한 사랑 주님의 은혜로 새 생명 주게 얻었네’라고 이어지는 것이죠.
그러하신 예수님의 자기 희생을 아버지의 인정으로 확인합니다. 28절에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는 ‘하나님 아버지의 소리로 인정되는’ 예수님의 영광을 우리는 빛처럼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내하면 ‘너희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죠. 여름에 나가면 빛으로 더위를 느끼고, 어둠에 있으면 빛으로 인해 밝아짐을 느끼듯 3장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하신 ‘독생자를 보내신’ 빛을 경험하고 계십니까?
빛은 어둠과 공존할 수 없습니다. 빛이 비취는 곳에서는 어둠이 물러납니다. 이처럼 예수의 영광의 빛이 발하면 31절 이 세상에 대한 심판으로 인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납니다. 우리 눈에는 환한 빛의 세상이라고 말하지만 정말 그렇습니까? 세상은 변화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늘 현실이 좋다 할 분들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몇몇 소수의 사람들은 지금이야말로 좋은 시대라고 말합니다. 몇 주전 대기업의 회장은 이혼 소송에 져 1조 4천억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위자료를 물어주게 되었다는 소식이 한국을 떠들석하게 했습니다.
세상 임금이 통치하는 세상은 이런 것입니다. 돈이 없으면 죽고 있으면 사는 세상이고 이를 극복하고자 복지국가를 꿈꾸지만 더디기만 합니다. 이상한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우리나라 모 자동차 회사의 노동자는 한 시간만 배우면 누구나 일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십만개가 넘는 부품을 조립하는 자동차가 단 한 시간만 배우면 가능하다구요? 이미 중요한 공정은 실수가 없는 로봇이 대신하고 사람은 정해진 딱 하나의 일 만 시킨다고 합니다. 로봇 보다 못한 어쩔수 없이 사람이 해야할 수밖에 없는 일을 잘게 쪼개서 한 가지만 시키는 것이죠. 반면 커피 숖 아르바이트는 어떤가요 1시간만 배우면 모든 제품 만드는 걸 다 외워 바로 할 수 있을까요? 절대 그럴 수가 없는 반면 한 시간의 비용은 노동자와 다른 만원에 불과합니다.
일의 숙련도의 평가라면 누가 더 받아야 할까요?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평가하지 않습니다. 더 많이 버는 것이 기준입니다. 더 많이 버는 사람이 더 받는 것을 우리가 이상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복지가 어려운 것이죠. 많이 버는 사람이 세금을 많이 내는 것을 싫어하고 자기의 돈으로 복지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회가 되면 복음서의 다른 본문에서 이 문제를 다뤄보겠습니다. 세상 임금의 기준은 이렇듯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세상을 위하는 것입니다. 창조 원리를 벗어난 세상 임금은 심판 받아야 하고 그래서 주님은 심판주로 오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가 ‘내가 땅에서 들리면(부.과.수)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코 앞으로 다가 왔습니다. 오히려 예수의 죽음은 세상의 심판처럼 보입니다. 로마의 심판, 빌라도의 심판, 종교 지도자들이 심판권을 가지고 행사하는 ‘십자가 처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알리는 시작입니다. 여전히 우리는 알면서도 제자들처럼 모릅니다. 왜 그럴가요? 먼저 우리가 행하는 행동으로 알 수 있는데 알았다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기 때문이죠. 처음에 제시했던 건강하기 위해 다이어트를 하든 운동을 하든 몰라서 안하는 것이 아니죠. 마찬가지로 올바른 예배를 드리는 것도 당연히 몰라서 그렇지 않습니다.
나의 마음은 예배의 자세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또한 예배에 대해 나름 압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행동은 그렇지 않으면서 마음은 준비가 되었다고 말만 하고 있는 것이죠. 더 나아가서 이렇게도 말합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보신다. 정말 그런가요? 물론 전하는 설교자의 부족함도 있고 환경에 대한 면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저와 여러분은 그래도 큰 교회부터 작은 교회를 경험했고 좋은 환경도 나쁜 환경도 경험하면서 신앙이 그런 것에 지배 받아서는 안 되는 것즘은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를 위한 준비는 친구를 만나는 준비의 10/1 조차도 하지 않고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당시 유대인들 역시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다’라고 자신이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들린다’는 예수의 말은 금시초문 같은 것이죠. 우리도 같은 처지라 보는 것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삶이 변화지 않는 것은 어쩌면 유대인들처럼 평범성에 빠져 있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많이 아는 것 같은 믿음을 말하고, 명절이면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성전에 헌금하기 위해 돈을 바꾸고, 제물을 바치기 위해 동물을 사는 모습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향해 ‘저분은 참 믿음 좋은 사람이야’ 나도 저런 사람을 본받고 싶다고 말하고 또 그런 사람들은 그런 시선을 즐기며 뽐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8:11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오늘날도 여전히 우리가 불편했던 진실이 교회에 그런 사람들이 꽤 많다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를 말하다가 순식간에 서로에게 등을 돌리고 마는 모습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눈을 밝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들어야 합니다. 한 주에 한 번으로 부족합니다. 수요일에도 주일 오후에도 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나의 잘못된 인식을 깨트려야 합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땀 흘려 뛰고, 심장이 두근할 만큼 숨을 몰아 쉬고 높은 음이 않나와도 배를 붙잡고 연습하는 방법 외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것만이 어둠에 붙잡히지 않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세상은 돈을 벌 목적으로 법적으로 모호한 경계를 틈타 ‘이건 좋은 것’ 더 나아가 ‘이건 좋은 방법’이라고 속이고 돈을 벌어 성장했으니 우리는 괜찮은 기업이라고 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3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면서도 그렇게 행동하는 모습 어디에도 저 사람 참 하나님을 사랑하는구나 하는 마음이 든적이 있나요? 그건 멀리 갈 것도 없이 여러분 보시기에 제가 그렇게 하고 있던가요? 그렇다면 왜 그렇습니까? 이미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답을( 53:1) 주셨습니다.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즉 이사야도 궁금해서 하나님께 물어보니까 39절에 ‘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니’ 라고 하면서 40절에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며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십니다. 읽히기는 하나님께서 못 믿게 하셨다라고 읽혀집니다. / 성취의 사건/
그런 말인가요? 마치 복음이 숨겨졌을 뿐만 아니라 무슨 박사 학위를 따듯 매일 독서실에 책에 파묻혀 살아야 간신히 얻는 자격같은 것인가요? 우리는 대표적으로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 9장에서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자의 변화를 살폈습니다. 특히 9장에서 아들이 눈을 떳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는 대답을 회피하며 이제 아들이 커 자기 앞가림을 하니 아들에게 물어보라고 답하는 이유가 본문 42절이 ‘이는 출교 당할가 두려워함’이라고 했습니다. 이들 역시 그런 현실에 사로 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히려 현실을 두려워하고 직시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현실을 오히려 우습게 보고 하찮게 보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에 빠지면 헤어 나오기 어려우니 별것 아닌 것처럼 또는 무시해도 될 것처럼 믿음이 있으니 용감하게 싸우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더 신중하게 스스로를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내 나음이 괴로우니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말입니다. 그들은 아는 것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렇게 구부러진 길은 결과적으로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43절은 명백하게 이런 사실을 집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다’고 말입니다.
그들이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은 전인격적인 동의가 일어나 범죄에 동참하고 함께 즐기고 마셨다는 것입니다. 최근 영국 bbc에서 한국에서 일어난 버닝썬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유튜브에 업로드 되었습니다. 유명 연예인이 유흥과 쾌락의 길로 들어서 어떻게 돈을 벌고 사업을 유치하며 더 큰 성공을 위해 무슨 일을 벌였는지를 다룬 영상은 충격을 주었습니다. 우리 사회의 가장 어두운면이지만 마치 세상에는 가장 화려하게 빛나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빛을 쫓아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수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 사람들이 버닝썬에 모여 들어 함께 빠져 들어가고 있는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사람들이 보여주는 화려함 그리고 포장된 영광을 사랑하는 우리 주변의 흔한 이야기가 당시의 유대인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2천년의 시간을 넘어 여전히 우리도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기’를 싫어하는 우리의 마음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하기 싫은 것 일분도 참지 못하는 것이 오늘 저와 여러분입니다. 당연히 그렇죠. 하기 싫은 것이니까요? 그럼에도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즉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것은 반드시 그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원리를 떠나서는 말 그대로 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베풀었지만 그럼에도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나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할 것처럼 말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 임금의 교활한 방법입니다.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미련한 방법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비가 와야 물이 있고 그래야 식물이 자라납니다. 농부는 제 아무리 좋은 기술을 가졌다 하더라도 때를 벗어나 농사하는 법이 없습니다. 물이 들어올 때를 기다렸다가 논에 물을 대고 벼를 심고, 우기가 시작되는 여름에는 감자를 심지 않습니다. 미련한 사람들은 한 때를 점치며 노립니다. 반면 미련한 방법을 믿고 준비하는 사람은 때를 따로 돕는 은혜를 바라 봅니다.
히브리서 4:14–16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우리는 ‘얻기 위하여’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야 합니다. 다시 여러분이 눈으로 본 것을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키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께 고침을 받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