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616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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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진동시키는 복음
세상을 진동시키는 복음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도 함께 말씀을 듣기 원하는 마음으로 이자리에 오신 여러분들을 환영합니다. 주님께서 여러분들의 마음 가운데 크신 말씀의 은혜를 듬뿍 부어주시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지난주에는 정말 오래간만에 5일동안 컨퍼를 다녀왔죠? 어때요? 다들 좀 잘 쉬고 왔나요?
아마 5일이라는 긴 시간동안 휴식을 하고오다보니 마음이 좀 싱숭생숭하고 적응이 잘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저는 여러분들과 같이 기숙사생활을 성인이 되고 신대원때만 했다보니, 여러분들의 모습을 보면 뭐가 생각이 나나면, 군대 생각이 나요.
핸드폰도 못쓰고, 한 곳에 모여서 생활하면서, 아침에 운동도 하고, 부모님 면회도 오고 이런 것들이 마치 제 군대생활을 떠올리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 컨퍼도 어떻게 느껴지냐면, 휴가를 갔다온 군인의 마음으로 보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1학년들의 이번 컨퍼는 마치 신병위로휴가를 갔다온 마음이지 않을까 비교를 해봤는데요, 저는 그때 어땠냐면, 휴가가 하루하루 끝나갈 때마다 막 벌써부터 걱정이 되고, 가기 싫고, 그랬던 마음이 있었고, 결국 돌아가게 되면, 며칠간 부대생활이 적응이 안되더라구요. 모드 전환이 빨리 안되는 것이죠.
우리 14기 친구들의 마음이 아마 이렇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우리 12기 13기 친구들은 그정도는 아닐거에요. 제 군대생활에서도 일병과 상병이 되면 이제 부대가 좀더 친숙한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제 집을 왔다갔다하는 것도 어느정도 익숙해지는 거죠.
그리고 특히 고3 12기 친구들은 거의 병장의 마음이지 않을까 싶어요. 이제 슬슬 기숙사 생활을 마무리할 때가 다가오고, 그것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죠.
물론 여기서 군생활과 기숙사 생활의 큰 차이가 있다면, 군대는 어떻게든 시간만 보내면 잘 끝나지만, 기숙사는 시험을 치러야 한다는 사실이겠죠.
그래서 고3친구들도 아마 복잡한 마음이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제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군생활동안 제가 가장 성장한 것이 바로 신앙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군생활하면서 진짜 별별일을 많이 겪는데, 그러한 아픔 속에서 오히려 주님을 더 찾게 되고, 의지하게 되고, 신앙을 통해 힘을 얻고 했었거든요?
아마 여러분들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여러분들의 삶도 걱정과 염려가 많겠지만, 그럴 수록 오히려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께 우리의 시선을 향한다면, 주님은 우리에게 더 큰 위로와 견뎌낼 힘을 주실거에요.
우리 친구들도 이것을 기억하면서, 오늘의 말씀 가운데에도 큰 은혜를 누리시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우리가 계속 나누고 있는 사도행전의 말씀이에요. 우리 한번 더 물어볼게요. 사도행전은 어떤 내용이 나타나있는 성경이죠?
그렇죠. 사도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신 선교의 내용들이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도 역시 그 선교의 내용이 등장할텐데요, 오늘은 여러 사도들 중 바울 사도와 관련한 사건이 등장을 합니다.
그러면 어떤 사건이 바울에게 일어나는지 한번 함께 살펴봅시다.
오늘 말씀 23절을 보시면, ‘이 도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다’고 기록을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도’는 무엇일까요? 당연히 그리스도의 복음이겠죠. 바울이 열심히 복음의 도를 전파하여 에베소 지역 가운데 많은 이들이 주님의 복음을 믿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 때문에 소동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물론 이 사도행전에서 기록된 일들이 복음 전파로 인해 벌어지는 여러가지 소동들을 담고 있죠.
우리가 지난번에 나누었던 것처럼 고발도 당하기도 하고, 또 병자들을 일으키기도 하고, 여러가지 일들이 이들에게 일어납니다.
그런데 오늘 나눌 이야기는 그정도의 소동이 아니었습니다. 말씀을 기록한 누가마저도 뭐라고 기록했어요? 적지 않은 소동이라고 기록할 정도니까 뭔가 큰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이죠.
그럼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느냐, 이어지는 24절을 보면 데메드리오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데메드리오는 은장색 일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즉 은을 가지고서 가공하여 우상을 만들고, 신전에 필요한 물건들을 만드는 등, 에베소 지역의 신전 관련 일들을 주된 업무로 하던 사람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그가 행복하게 돈을 벌고 있는데, 어느 순간 에베소에 한 사람이 등장을 합니다. 그게 누구에요? 바울이라는 사람이었죠.
뭐 처음에는 그냥 그런 사람이 왔나보다 싶었겠지만, 바울은 그의 삶에 아주 큰 영향을 끼치게 되죠. 왜일까요? 바울이 맨날 와서 하는 말들이 예수라는 사람을 믿으라는 건데, 그걸 믿으면 우리 에베소의 신 아데미 여신을 섬기지 않아야 한다는 거에요.
근데 하필 그 바울의 말들이 인기가 있는 거죠. 그래서 정말 많은 이들이 예수를 믿기 시작한거에요.
그럼 어떻게 되겠어요? 여신을 믿는 사람들이 없어지니 자연스럽게 우상을 제작하는 수요가 줄게 되겠죠. 여러분들 경제 한번쯤 배워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수요가 주는데, 공급이 그대로면 어떻게 돼요? 재고가 쌓이고, 재고가 쌓이면 어떻게 돼요? 공급자가 손해를 보게 되고, 그러면 더 수요가 줄고 하면서 마지막에는 뭐가 오죠? 공황이 찾아오게 되죠.
딱 1차대전 끝나고 미국이 그랬죠. 군수물자 팔면서 돈을 많이 벌다가 전쟁이 끝나니까 그게 다 재고로 변하고, 그러니 일하는 사람을 줄여야 하고, 거기다가 군인들도 다 돌아오니까 실업자들이 양산되고, 그러다보니 소비가 더 줄고, 악순환이 생기면서 대공황이 찾아온 것이죠. 그리고 결국 2차대전으로 수요가 늘면서 대공황이 해결됩니다.
아마도 데메드리오는 그걸 바로 캐치했을거에요. ‘이거 저 바울이라는 사람 계속 두게 되면, 우리가 쪽박을 차겠다’ 생각한 것이죠. 그래서 무슨 일을 계획하냐면, 가장 먼저 같은 동종업계 사람들을 찾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선동을 시작합니다.
‘너희도 보지 않았냐, 우리가 아데미 신상으로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데, 저 바울이라는 사람이 사람이 만든 신상은 신이 아니라고 하니, 그러면 우리의 이 사업이 보잘것 없는 일이 되고, 우리의 아데미 여신도 그깟 사람 하나 때문에 위엄을 잃으시지 않겠냐. 우리가 행동해야 한다’
그러자 그 자리의 사람들이 제대로 선동되어서 거리에 나가 외친것이죠.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라고 말이죠.
여러분들도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시위들이 나타나게 되면, 특히 당시같이 어떤 시민의식과 같은 것들이 아직 부족한 사회에서 이런 일이 발생하면 어떻게 되냐면, 사람들이 감정적으로 휩싸이게 됩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발생해요? 29절을 보면, 바울과 함께 사역을 감당하던 가이오와 아리스다고가 시위대에게 붙들리게 된거에요. 그들을 붙잡고 뭐했겠어요? 거의 인민재판을 할 것처럼 그들을 가운데 두고 몰아세웠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상당히 위험한 상황이 찾아오게 된 것이죠.
그러한 일이 있다보니 바울이 먼저 발벗고 나서 그들을 구하고자 시위대가 있는 연극장으로 향하려 하지만, 제자들이 이를 말립니다. 아무래도 시위대 자체가 감정적으로 동요가 있는 상황이다보니 바울도 위험에 처할 것을 염려했던 것이겠죠.
뿐만 아니라 관리들 중에서도 바울과 친분이 있던 이들도 바울에게 연극장에 들어가지 말 것을 요청합니다.
사실 이후로도 나오겠지만, 당시 에베소의 관리들을 비롯한 고위층 인사들은 바울에게 호의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가 로마 시민권자이고 본래 유대인 엘리트였다보니 고위층 인사들과 잘 맞기도 했겠죠. 하지만 하나님은 이러한 친분들까지도 사용하셔서 바울의 사역을 도우십니다.
자. 그렇게 바울은 연극장에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직 사태는 진행중이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연극장에 모여서 서로 소리를 높이고 있는데, 여기서 재미난 장면이 등장하죠. 32절을 보면, 막 서로서로 자기 얘기를 하고 있는데, 이 무리들이 질서정연하게 이걸 준비한 것이 아니다보니 정말 많은 무리들이 섞여버린 거에요. 그래서 모인 무리의 대부분이 왜 여기에 모인지조차 모르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연출되기까지 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거에요. 제가 중학생때 좋아했던 영화중에 하나가 찰리 채플린 무성영화였는데, 여러 영화들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모던타임즈입니다. 20세기 말 마치 기계처럼 인간미 없이 돌아가는 당시 사회를 풍자한 영화였는데, 그 영화 중간에 이런 내용이 등장해요.
주인공 찰리 채플린이 그날도 공장에서 일하고 나오는데, 퇴근길에 어떤 트럭이 지나가다가 깃발을 떨어뜨려요. 그래서 채플린이 그 깃발을 주워서 가는 트럭에게 이거 깃발 가져가라고 막 흔드는데, 하필 그 뒤로 시위대가 행진하는거에요. 채플린은 엉겹결에 마치 시위대 리더인 것처럼 되어버린 것이죠. 그래서 결국 경찰들에게 시위 주동자로 잡혀 끌려가게 됩니다.
이런 것처럼 그냥 거리에서 사람들이 나와서 뭐라뭐라 하니까 뭐지 하고 궁금해서 같이 따라온 사람도 있고, 그냥 아데미 아데미 외치니까 뭔지도 모르고 같이 외치고 있는 사람도 있고, 그런 사람들이 다 모여서 시끌시끌하게 된 거에요.
그런데 그 무리들 중에 어떤 무리가 있었느냐, 바로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아마 처음 들으면 좀 이상할거에요. 왜죠? 유대인들은 누굴 섬겨요? 하나님을 섬깁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왜 아데미 외치는 시위대에 같이 있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유대인 공동체가 정치적 이해타산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지난번 보았던 것처럼 나름대로 자신들끼리 예배를 드렸고, 그 안에서 나름대로 잘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바울을 비롯한 그리스도인들이 오더니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상한 얘기를 막 시끄럽게 하고 다니는거에요. 안그래도 그게 불편했는데, 이제는 시민들까지도 시끄럽게 되니까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어떤 생각이 드는거에요?
‘저희는 저들과 달라요’를 말하고 싶었던 것이죠. ‘우리는 저기 그리스도인들하고는 달라서 그렇게 시끄럽게 하고 싶지는 않다’ 이런 식으로 자신들을 변호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 그룹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알렉산더라는 사람을 내보내는데, 이게 오히려 역풍을 맞습니다. 누가 그랬겠죠. ‘야 쟤도 유대인이야! 저기 바울하고 똑같은 사람들이야!’ 그러니 어땠겠어요? 더 난리가 나서 아데미를 외친거에요.
근데 그게 2시간이나 지속이 되니, 누군가는 이 사태를 정리해야 하는 상황이 찾아왔죠.
그리고 그것을 위해 서기장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죠. ‘에베소 사람들아 우리 에베소가 아데미 여신과 제우스로부터 내려온 우상을 섬기는 신전지기인거 누가 모르겠냐’ ‘그런데 지금 저기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지도 않고 여신을 비방하지도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들을 붙잡아서 시끄럽게 하고 있는데, 너희가 진짜 고발하고 싶으면, 시시비비를 가리고 싶으면 나중에 재판 날이 있으니까 그때 정식으로 절차대로 고소를 하던지 아니면 민회에서 해결을 하던지 하면 되는데, 아무 까닭 없이 이렇게 소요를 일으키느냐’ ‘이거 잘못하면 우리도 책임을 물게 되는데 우리는 이 불법 집회를 보고하고 싶지 않다’라고 하면서 ‘해산하세요’하며 해산을 시킵니다.
여기까지가 오늘 함께 읽은 말씀입니다. 사실 이렇게 보면 그냥 하나의 해프닝처럼 여길 수도 있는데요, 사실 이는 그렇게 간단한 사건은 아니었습니다.
첫째로, 유대인들을 제외한 이방인들에게서 조직적인 복음 반대 운동이 일어난 것이구요, 둘째로, 실제 전도여행의 일원들이 위협을 당하는 상황도 발생했습니다.
결국 이것은 무엇이냐, 앞으로 바울을 비롯한 그리스도인들이 겪게 될 대대적인 박해를 미리 경험한 순간이었다는 것이죠.
그리고 머지 않아 사도들을 비롯한 복음 전파자들은 결국 복음을 전하다 실제로 목숨을 잃게 되는 일들을 겪게 됩니다. 여기서는 위협 뿐이었겠지만, 이제는 실제적인 공격이 가해진 것이죠.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무엇을 볼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일은 세상을 동요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사실은 그리 쉽고 행복한 일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이 세상의 뜻과는 다르기 때문이죠.
가장 대표적으로, 사도행전 이후로 초대교회 성도들이 로마 제국에 의해 박해를 당하게 되는데요, 그 박해는 물론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기 위한 사단의 역사도 있겠죠. 하지만 그들도 역시 표면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그들이 오직 하나의 신, 그것도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는다는 것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로마 제국에게 그것은 좋은 방향이 아니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통치방식은 여러 점령지의 신들을 그대로 모아서 만신전이라는 곳에서 함께 예배하게 하고, 결과적으로는 그것들을 지배하는 로마 황제를 신과 같이 여기는 방법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만을 섬기는 그리스도인들과는 전혀 맞지가 않았죠. 로마제국의 통치 방향성과 어긋났던 것입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이 다른 민족들과는 달랐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함께 모여 서로 교제하며 서로를 형제 자매로 부르면서 공동체가함께 살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은 전혀 방탕하거나 하지 않고, 말씀을 읽으며 경건한 생활을 했습니다.
하지만 로마인들을 비롯한 이방인들의 눈에 그러한 모습은 이상한 별종과 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여러 오해들도 생겨났죠. 성찬식을 하면서 예수님의 몸과 피를 나누는 것을 보고 식인 행위를 한다고 여겼고, 서로를 형제 자매로 부르는 것을 보고서는 근친상간을 일삼는다는 오해를 하였습니다.
결국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의 주류사회로부터 점점 멀어져갔고, 결과적으로는 많은 핍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부터 이미 신앙은 세상의 주류들과는 항상 부딪쳐 왔습니다.
이는 우리도 다르지 않죠. 세상에서는 시험을 앞두고는 오로지 공부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죠. 그리고 혹여나 옆사람이 뒤쳐지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것을 기뻐하고, 더 뒤쳐지도록 할 방법을 연구합니다. 그래야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우리들은 다릅니다. 물론 공부도 중요하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입니다. 또한 하나님과 함께 연합된 우리 공동체입니다. 그렇기에 공동체가 연약한 모습을 보이고 힘들어한다면 기꺼이 우리의 것을 사용하여 도와줍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공동체의 올바른 모습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것을 잘 아는 우리임에도 우리는 종종 세상적인 것들에 유혹을 받게 됩니다. 왜 그렇죠? 결국에는 그들이 주류와 같이 살아가기 때문이죠. 그러다보니 저게 맞는 것인가? 하고 생각을 하게도 됩니다.
과연 그럴까요? 물론 마음 속으로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계시겠죠. 하지만 깊은 우리의 이성으로는 ‘그렇다면 우리는 매번 고통을 당하며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생각이 가득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충돌이 우리를 항상 괴롭히는 것이죠. 믿음 생활을 하고 그 안에서 고통을 당할 수 있다는 것 알겠어. 하지만 그래도 삶을 살아가야 하는데 그 안에서 행복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것이죠.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삶이 행복하기를 바라고, 고통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그 마음은 누구도 마찬가지냐?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그의 백성들이 그를 섬김으로 인해 고통만을 당하기를 원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대체 무엇을 하시느냐? 하나님은 그의 방식대로 일하십니다. 우리의 상식과는 다르게, 그만의 방법, 어쩌면 가장 좋은 방법으로 일하신다는 것이죠.
오늘 말씀을 볼까요? 에베소에서 일어난 어쩌면 긴박한 상황일수도 있는 이 상황가운데, 어떻게 이 상황이 마무리되었나요? 하나님께서 벼락을 내리셨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서기장이라는 사람을 통해 그 소요들이 마무리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 일은 그냥 서기장이라는 사람이 그의 힘으로 마무리를 한 것일까요? 물론 표면적으로는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죠.
무슨 이야기냐, 하나님께서 서기장을 통해 일하신 것입니다.
물론 서기장을 비롯해서 여러 에베소의 관리들이 바울과 친분이 있었고, 바울의 복음에도 열려있는 것도 큰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오로지 바울의 역량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일하심과 크신 계획에 속해있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생각으로는 잘 나아가지지가 않습니다. 왜일까요? 서기장이 고넬료처럼 믿는 사람도 아니고, 그냥 세상 관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볼 수 있는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은 믿음 없는 세상 사람들을 통해서도 충분히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비록 그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믿지도 않는다 하더라도 충분히 그의 모든 것을 사용하여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성경에서 등장하죠. 바로 고레스를 통한 포로귀환입니다.
우리가 이전에도 한번 나누었듯,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멸망하고, 남유다의 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사야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그대로 포로로 잡힌 백성들은 결국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그것이 누구를 통해 이루어졌냐, 바로 아까 말했던 고레스를 통해서입니다. 이 고레스가 누구냐면 페르시아 제국의 초대 왕이었습니다.
이 고레스는 칙령을 내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가서 성전도 짓고 알아서 살도록 명령하였습니다.
물론 고레스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페르시아라는 나라의 자비를 보여주기 위한 것일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 모든 역사는 이사야서의 예언을 통해 이미 예언된 것이었습니다. 결국 뭐에요? 하나님께서 고레스 자신도 모르게 그를 사용하여 역사하셨다는 것이죠.
오늘의 본문도 같은 선상인 것입니다. 에베소의 관리들이 바울과 교회들을 위해 무리들을 해산시키신 걸까요? 아마 어쩌면 서기장의 마음에는 ‘시끄러운 일 일으키지 말고 그냥 좋게좋게 해결하자’라는 마음이 컸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자리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겠죠.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그러한 마음까지도 사용하셔서 그의 뜻을 행하십니다. 결과적으로는 세상의 국가와 제도들까지도 사용하셔서 그의 뜻을 이루어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세상의 국가들과 정치인들을 향해 어떻게 해야겠어요? 너희는 맨날 죄만 저지르는 나쁜 사람들, 지옥가라! 해야 할까요? 아니겠죠.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올바른 정의가 이 땅가운데에도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여기서 말하는 위에 있는 권세는 로마 제국을 비롯한 세상의 권세를 의미합니다. 즉, 세상의 지금 세워진 권세들은 하나님의 크신 계획 하에 세워졌다는 것이죠.
그렇기에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으로서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인들이나 위정자들을 존중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른들이 예배때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하는 것이죠.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세상을 향하여서도 기도함으로 나아갈 때, 결국 주님은 우리와 또한 세상의 여러 방법들을 통해 악한 세상을 변화시켜나갈 것입니다.
앞서 초대교회 성도들이 여러 오해로 핍박을 받았다고 했었죠? 그런데요, 놀라운 것은 결국 이후 로마 시민들의 기독교인들을 향한 마음은 긍정적으로 변화했다고 합니다. 왜냐, 자신들도 그 모든 오해들이 오해임을 깨달았을 것이구요, 그들의 삶이 가식이나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정말 진정한 실천임을 깨달았기 때문이겠죠.
이렇게 주님은 우리를 통해서, 또한 세상의 제도들까지도 통해서 그의 뜻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우리 모든 하임 공동체도 오늘 말씀을 기억하면서요, 앞으로 놓인 삶에 어려움이 생기고, 너무 고난만 넘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때, 하나님께서 어떻게든 나에게 일하실 것임을 믿고, 그것을 기대하는 삶을 살아가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뿐만 아니라 우리 공동체, 더 나아가서 우리 사회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세상은 악한 부분들이 존재하지만, 결국 여러분들도 그 곳에 살아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나라를 이끄는 대표들에게 함께하셔서 그들이 올바른 뜻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반드시 주님께서 이 모든 것을 통해 우리의 세상과 우리의 삶을 반드시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찬양 : 한라에서 백두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