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는 어떤 사람인가?

‘교회를 부탁합니다’ 시리즈 ➁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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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도서 1:5~9
오늘은 <교회를 부탁합니다> 두 번째 시간으로 디도서 1장 5~9절에 있는 말씀으로 ‘장로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여러분, ‘장로는 어떤 사람인가?’를 꼭 알 필요가 있을까요? 그것도 굳이 주일날 설교 시간에 ‘왜 장로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사람을 장로로 세어야 하는지를 배워야 할 이유가 뭐냐?’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아마 계실 겁니다. 젊은 청년들이나 아직 40대밖에 되지 않은 젊은 집사님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실 것 같은데요. 그런데요. 여러분, 오늘 말씀은 저를 비롯한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한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공동체이건 간에 그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리더는 중요하기 때문이죠. 또한 올해 8월 말에 있을 장로 선거에 있어 과연 성경에서 말하는 장로의 자격은 무엇인지에 대해 함께 알아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우리 하름교회의 리더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함께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미국에 있는 300개 기업을 대상으로 2022년도에 조사한 ‘CEO와 근로자의 임금 격차 조사’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최고 경영자와 일반 직원의 임금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를 조사해 본 것입니다. 평균적으로 이 300개 대기업에 해당하는 직장들에서는 최고 경영자와 일반직원의 임금이 670대 1로 조사되었습니다. 누가 670일까요? 당연히 CEO들이죠. 경영자 한 사람이 일반 직원 한 사람 연봉의 670배를 더 받는 것이죠. 엄청난 차이 아닙니까?
그러면 기업이 왜 이렇게 경영자와 일반 직원의 급여의 차이를 크게 두고 있을까요? 바로 회사의 방향을 결정하고 회사가 가지고 있는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 한 사람이 내리는 판단이 그 회사의 존폐를 결정할 수도 있기 때문이죠.
마찬가지로 한 교회의 리더가 되는 것도 이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아시다시피 저는 부교역자 생활만 20년 가까이 했고, 부목사 때는 매주 설교할 일이 없었는데, 담임목사가 되고 나니까 매 주일 설교하는 일이 엄청나게 부담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우리 살림하시는 여신도회들의 마음을 알 것 같아요. ‘오늘 저녁은 뭐 해 먹나?’ 저도 ‘이번 주일은 어떤 영의 양식을 준비해야 하나?’ 날마다 이 생각뿐이에요. 또 교회의 어떤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에 다들 의견을 묻다가 ‘목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저에게 물어보시는데, 제가 말하는 대로 결정되는 것도 보았기 때문에 더더욱 담임목사의 자리가 부담이 크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 어떤 단체이건 리더는 정말 중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디도서에 나와 있는 ‘교회의 리더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그를 세우는 기준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떤 마음으로 리더를 특히 장로를 바라봐야 하는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지난 시간에 설교한 것처럼, 이 디도서 1장은 바울이 디도에게 편지를 쓰면서 1~4절까지 바울이 하나님의 종,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어떤 사명을 받았는지 설명하고 있고요. 그런 다음에 ‘디도 너도 같은 믿음으로 사명을 이어받아야 한다’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4절까지 교회의 사명을 이야기한 다음에 이제 본론을 시작하는데요. 5절은 앞으로 그가 하게 될 모든 이야기 전체를 압축해 주는 문장입니다. 5절 합독
5 내가 너를 그레데에 남겨 둔 이유는 남은 일을 정리하고 내가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바울이 디도를 그레데섬에 남겨 놓은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남은 일을 정리하는 것 또 하나는 각 성에 장로를 세우는 일인 것이죠. 특별히 이 두 번째, 각 성에 장로들을 세워야만 했는데요. 이 ‘장로들을 세운다’라고 할 때, 그 앞에 ‘내가 명한 대로’라고 되어 있죠? 한마디로 말하면 ‘네 마음대로’ 세워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미 너에게 알려준 기준이 있다’라는 것이죠. 그리고 ‘그 기준에 따라서 교회의 장로들을 세워야 한다’라고 권면합니다. 교회의 리더인 장로를 세우는데 있어 원칙이 있어야 하고 그 원칙에 맞게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잘못된 지도자를 세우면 그 지도자가 있는 공동체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군대에는 ‘소대장’이라는 직위가 있습니다. 이 소대장이 되려면 반드시 이수해야 하는 과목이 있는데 나침반을 가지고 길을 찾는 ‘독도법’이라는 훈련입니다. 지도를 보고 지도에 나와 있는 어느 지점으로 부대원들을 데리고 가는 실전 기술인데요. 그런데 이 독도법을 소대장들은 다 알고 있어야 하는 거예요. 왜 그렇습니까? 내가 지도를 보고 가는 대로 소대원들이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같이 길눈이 어두운 사람은 소대장을 못했잖아요.
정한 기준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이 리더가 되면 공동체 전체가 엉뚱한 방향을 향해 그것도 열심히 달려갈 수 있기 때문에 바울은 ‘내가 명한 대로’ 리더를 세우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뒤에 나오는 바울이 말한 기준들이 나오게 되는데요. 6절을 보면 가정 안에서 그는 이런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게 나오고 7절과 8절을 보면 사회 안에서 그는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게 나오고 있습니다.
먼저 6절을 보면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거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고 나옵니다. 여러분, 장로를 피택했어요. 그런데 첫 번째 기준이 ‘가정생활’에 대한 부분이에요. 아니, 장로는 교회 생활을 잘하는 사람이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가정에 대한 부분을 먼저 언급하고 있습니다. 아내에 대한 것이 나오고요. 그런 다음에 자녀에 관한 것이 나옵니다.
여기에 가정생활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아넹클레토스(ἀνέγκλητος)’는 ‘전혀 흠이 없다.’ ‘책망할 것이 전혀 없다.’ 그런 완벽함의 뜻이 아니라, ‘거의 완벽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것 아닙니까? 부부 사이가 완벽할 수 없다는 거예요. 우리 모두는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죠. 다만, 결정적인 흠이 없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성추행를 한 목사가 그 결정적인 흠을 갖고 목회를 계속 할 수 있겠습니까? 두 집 살림을 차리거나 수억 원 대의 사기를 친 분이 장로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결정적인 흠은 없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살다 보면 이런저런 이유로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갈등이 일어나고 부부간에도 다툴 수 있잖아요? 문제가 있을 수 있어요. 하지만, 최소한 법적으로 결정적인 흠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한 아내의 남편’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요. 이 표현을 들으면 ‘혹시 그시대는 두 아내를 둔 남편도 많았나?’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 시대에도 아내를 한 명만 두어야 했는데, 그레데라는 지역이 가지고 있는 문화를 보면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 그레데라는 섬은 그리스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정착한 섬이었는데, 성적으로 굉장히 문란한 곳이었습니다. 게다가 무역항구가 있었기 때문에 너무 개방이 되어서 아주 문란했고 남자들도 여러 명의 첩을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미 교회 안에도 여러 아내와 첩을 둔 성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경우 장로가 되려면 본처를 남겨 두고 다른 첩들은 정리해야만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세우신 가정의 기준에 부합한 본을 보여주어야 하는 사람이 바로 교회의 리더 장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저 사람은 책임감 있고 건실한 가장이야’ 이 정도는 인정받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죠.
두 번째로는 ‘믿는 자녀’라고 하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 말은 단순하게 내가 자식이 몇 명 있는데, 그중의 한 명이라도 신앙이 없다면 장로가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뜻이 아니라, 자녀는 자녀인데 ‘믿는 자녀’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믿는 자녀 앞에 수식어를 잘 보세요. 6절 중간부터죠.
6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거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지라
우리는 늘 ‘믿느냐? 안 믿느냐?’ 이것만을 강조하는데 원래 앞에는 꽤 긴 수식어가 있지 않습니까?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거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라는 것입니다. 이 ‘방탕’ ‘비난을 받다’ ‘불순종’ 모두 다 법적인 용어들 아닙니까?
목사든 장로든 자식 교육에 대해서는 장담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저도 자녀 둘이 있지만, 정말 부모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자식이더라고요. ‘얘네들이 목사 자녀로서 믿는 자녀인지 아닌지’ 구분이 안 될 때가 많아요. 하지만 적어도 부모로서 하나님 앞에서 말씀과 기도로 잘 양육했다면, 또 세상적인 성공보다는 하나님에게 합당한 자녀가 되기를 바라며 양육했다면, 누군가로부터 방탕하다고 비난당하고 아버지에게 불순종할 일은 없을 거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바울은 ‘자신의 육신의 자녀에게 존경과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는 이가 성도들의 영적인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겠는가?’라고 묻고 있는 것이죠. 오히려 장로로서 교인들 앞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보다 신앙의 부모로서 신앙의 양심에 따라 말씀대로 살아가도록 노력하는 부모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장로의 자격이 있다는 것이죠.
여러분, 장로는 누구입니까? 그 첫 번째가 바로 가정에서 가장 가까운 배우자에게, 자녀에게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 시대의 장로는 목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가르치는 장로가 바로 목사였습니다.
목사인 저 역시도 가정에서 먼저 인정받는 건실한 가장이어야 합니다. 저 역시 완벽할 수 없습니다. 우리 장로님들도 마찬가지실 겁니다. 그래서 저도 그렇고 우리 장로님들도 좋은 부모, 좋은 배우자가 되기 위해 노력이 필요하고요. 또 교회가 도와줘야 합니다. 교회에만 충성하게 한다면 아버지는 가정을 돌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는 장로 피택을 할 때 아내와 자녀들에게 ‘우리 남편이 혹은 아내가 우리 아빠 엄마가 장로를 해도 되는지’ 동의서를 받는 교회도 있다고 합니다.
저도 한때 ‘독립투사’처럼 가정을 등한시하고 목회에만 매달린 적이 있었지만, 가정이 안정되지 않고서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역을 할 수가 없더라고요. 주의 일만 열심히 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 가정을 알아서 지켜주시지 않습니다. 가정을 잘 돌보는 일이 바로 주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을 잘 돌본 후에 교회를 섬기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의 좋은 장로는 한순간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회 공동체에 의해서 만들어져 가는 것입니다. 좋은 공동체가 먼저 되어야 좋은 장로, 좋은 목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하름교회가 바로 그런 좋은 영적 리더들을 만들어 가는 하늘아래 아름다운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런데 여기서 ‘장로’라는 호칭이 ‘감독’이라는 호칭으로 바뀌기 시작하는데요. 이 말씀이 기록된 시대만 하더라도 ‘장로’와 ‘감독’이 같은 표현이었기 때문입니다. 7~8절 합독
7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득을 탐하지 아니하며
8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행을 좋아하며 신중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말씀드린 것처럼, 7~9절은 주로 개인적인 인격이나 사회적인 평판과 관련이 되어 있는데요. ‘청지기’라는 말은 주인의 것을 관리하는 사람을 부를 때 쓰는 표현 아닙니까? 주인이 청지기한테 무언가를 맡겨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청지기가 교회의 리더인 장로예요. 그럼 무엇을 맡기신 겁니까? 바로 주님이 주인 되시는 교회와 성도들을 맡기신 것입니다.
청지기는 주인의식을 가지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교회를 개인의 소유물처럼 간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역시 ‘책망할 것이 없고’라고 나오죠? 청지기가 주인 행세를 하면 책망받을 일이 많아질 것이기 때문이죠.
그러면서 장로에게 있어서는 안 되는 여섯 가지 성품을 말하고, 8절은 장로가 갖추어야 할 여섯 가지 성품을 말합니다. 그런 다음 9절에서는 가장 중요한 것 하나를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7절의 하지 않아야 할 것들입니다. 7절
7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득을 탐하지 아니하며
역시 ‘책망할 것이 없고’에 이어 다섯 가지를 쭉 이야기하는데요. 교만, 혈기, 술, 권세, 돈이 그것입니다. 이것은 리더들에게 노출되기 쉬운 유혹들 아닙니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것이 모든 시대에 모두 적용되는 자격 요건이 아니라, 당시 방탕하고 타락한 그레데를 배경으로 특별히 요구되던 자격들이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 시대를 생각하면 어떤 항목들이 더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때보다 사회가 더 복잡해졌고, 우리가 받는 유혹의 종류도 달라졌기 때문이죠. 저의 경우는 술을 하지 않으니까 술에 대해서는 유혹을 안 받아요. 하지만, 물질이나 성적으로는 얼마든지 유혹을 받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이 저에게는 술중독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사탄이 우리를 미혹하는 방식이 더욱 교묘하고 악랄해졌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제시하는 이 기준들은 거의 다 개인적인 성품이나 습관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리더는 가정을 다스리지 못하면 교회를 다스리기도 어렵지만, 자기 자신을 다스리지 못해도 교회를 다스리기가 어려운 법입니다.
그중에서 바울은 ‘제 고집대로 하면 안 된다.’라고 합니다. 자기 확신에 빠져 자기가 잘못된 말을 하는데, 내가 잘못된 말을 한다는 것조차도 모르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분들이 제 무서운 것 같아요. 내 말이 옳고 진리라고 생각하면서 자꾸 잘못된 말을 한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겠습니까? 그래서 장로는 자기 고집대로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말씀으로 쳐서 자기를 복종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우리 당회를 두고 기도하는 것도 다른 게 아닙니다. 미숙한 젊은 목사가 당회장이라고 해서 제 고집대로 하지 않기를 저는 진심으로 원해요. 저를 비롯한 우리 장로님들 한 분 한 분이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고 한마음이 되어 나를 쳐 복종할 수 있는 당회가 되는 것이 제 바람이자 소원입니다. 여러분들도 당회를 위해 기도하실 때 그렇게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런가하면 장로는 ‘급히 화를 내지 않아야’ 합니다. 가끔 나는 뒤끝이 없어 하시면서 막 화를 내시는 분들이 계세요. 그러면서 뒤끝이 없으시대요. 그런 분들 때문에 더 많이 상처받는 것 아시죠?
제가 있었던 지방의 한 노회는 노회원들의 출석을 부르면서부터 노회원들끼리 싸우는 노회가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노회가 시작할 때부터 급히 화를 내며 싸우기 시작해요. 노회원들이면 다 목사님들이고 장로님들 아닙니까? 저는 그분들이 싸우다가 예배 시간이 되니까 함께 찬송가를 부르고 “아멘”하시는 모습에 정말 기절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잘 헤어졌다가요. 다음에 만나면 또 싸워요.
여러분, 장로는 급히 화를 내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온다고 하셨습니다. 영적 리더가, 청지기가 급히 화를 내지 않으려면 늘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마음을 점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약1:21)’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아셔야 할 것은, ‘분노’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어떤 동기에서 화를 내는지가 문제라는 사실입니다. ‘급히’ 분을 내는 경우라고 하지 않습니까? 나를 보호하고자 하는 때는 ‘급히’ 분노할 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지 않는 삶에 대한 분노, 즉 불의에 대한 거룩한 분노도 있다는 것입니다. 장로는 나를 보호하고자 ‘급히’ 분노를 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가하면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라고 합니다. 이것은 술 자체를 비방하는 말이 아닙니다. 역시 그레데 섬의 독특한 상황을 염두에 둔 지적인데요. 프랑스의 와인이나, 독일의 맥주처럼 우리와는 전혀 다른 술 문화가 있는 나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술을 즐기지 말라는 것은 무언가 중독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유기성 목사님의 아내가 되시는 박리부가 사모님은 남편 목사님만큼이나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으로 유명하신 분이십니다. 겸손하시고 신실하셔서 그 교회 성도들이 정말 다 좋아하시더라고요. 그런 분이 얼마 전 중보기도모임에서 간증을 하시는데, 기도해야 할 시간에 유튜브에서 드라마 요약한 것 있잖아요? 당신이 그 영상을 알고리즘해서 자꾸 그것만 보고 있더라는 거예요. 또 요리 레시피 소개하는 영상들. 거기에 중독되어 있는 자신을 보게 되었다고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치볼드 하트의 <숨겨진 중독>이라는 책에는 우리 시대 사람들이 흔히 빠질 수 있는 중독 증상을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책에서 ‘쇼핑 중독’. ‘일 중독’, ‘종교 중독’, ‘술 중독’, ‘성 중독’, ‘음식 중독’ 등을 예로 꼽고 있습니다. 뭔가 자기 열심에 취해서 가정은 내팽개치고 교회 일에만 매달리는 사람은 종교에 중독된 사람입니다. ‘유튜브 중독’, ‘주식 중독’, 심지어 자식을 성공시키고자 ‘유명 대학 중독’에 빠진 부모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레데의 술 중독과 같은 것들 아닙니까? 그레데에는 없는 것들이 우리 시대에는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구타하지 아니하며’ 바로 폭력성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안 될 때 분노를 폭발시키면서 그것을 폭력으로 표현한다면, 그는 절대로 교회의 리더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더러운 이득을 탐하지 아니하며’입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 돈에 대한 탐욕으로 타인에게 손해를 끼치거나 불법을 저지르는 사람은 장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요즘 전세 사기를 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죽하면 전세 사기를 안 당하는 방법에 대한 유튜브 영상이 다 만들어지고 있을 정도고 뉴스에도 많이 보도되었는데요. 이런 사람은 장로의 자격은 물론 그리스도인으로서도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기범들 가운데 기독교인이 없기를 바랍니다.
저는 사회생활이나 사업을 안 해봐서 한국에서 정직한 땀의 대가로 부를 축적하는 게 참 쉽지 않다는 말에 대해 사실 잘 모릅니다. 사업하면서 이중장부를 만들고, 공무원들과 결탁해서 행정적인 편의를 제공받지 못하면 사업이 힘들다고 하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그러나 장로라면 이것이 과연 성경적인지, 적어도 돈 버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저는 세상의 방법에는 좀 어두워도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사업을 하고 돈 관리를 하시는 분들이 더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스스로를 ‘삯꾼’ 목사라고 하는 목회자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다만 성숙한 목사는 자신이 어느 편에 서 있는가를 늘 점검하고 결정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제가 보니까요. 진짜 겸손하신 분들은 언제나 자신이 교만해지지 않을까? 자신의 교만을 늘 걱정하고 다스리시는 분들이더라고요. 반대로 교만한 분들은 자신의 겸손을 오히려 과시하고 우쭐하는 분들이고요. 사람의 눈에는 그게 잘 드러나지 않겠지만, 하나님은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장로가 되어야 합니까? 장로가 갖추어야 할 여섯 가지 성품에 대해 8절부터 나오죠. 8절 합독
8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행을 좋아하며 신중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문자적으로 하면 ‘나그네를 대접한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새가족이나 방문자 즉 처음 보는 사람이 아니라, 나와 안 맞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또는 교회가 너무 낯설어서 교회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장로는 이런 분들을 만나서 잘 교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외모로 차별해서도 안 되고요. 우리 교회에 도움이 될 만한 사람만 환영하는 게 아니라, 도움을 주어야 할 사람도 환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행을 좋아하며’라고 합니다. 어떤 특별한 계기로 큰 선행을 하는 것도 훌륭하지만,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남을 돕고, 나누고, 스스로 섬길 줄 아는 분들을 의미합니다.
‘신중하며’ 이것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옳은 판단을 내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기 위해서라도 술을 즐기지 않아야 했던 것입니다. 맑은 정신으로 자신을 통제할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죠. 차분하고 자제심을 갖춘 사람입니다.
‘의로우며 거룩하며’ 이 두 습관은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지도자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단지 윤리적으로만 깨끗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의’와 ‘거룩’을 추구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기준을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여기는 사람인 것이죠.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포괄하면서 ‘절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절제하며” 자기감정이나 충동, 욕망을 자제한다는 것 아닙니까?
옥한흠 목사님은 목회자의 자질로 제일 먼저 꼽은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억제력’이었습니다. 목사가 돈이나 명예, 추앙받는 것들에 빠지지 않도록 억제해야 한다는 말씀이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명분으로, 교회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얼마든지 큰 대형 교회를 세습하기도 하고 내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 ‘절제’는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자기 내면의 깊은 뒷문을 잘 단속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장로를 세우는 데 있어서 정말 어려운 기준들이 나왔는데요. 이 기준들을 살펴보면서 한 가지 진리가 있습니다. 정말 신기하게도요.
장로를 세우는데, 믿음에 대해서, 소망에 대해서, 사랑에 대해서, 성령 충만에 대해서, 기도를 얼마나 많이 하느냐? 예배를 얼마나 안 빠지느냐? 헌금을 얼마나 많이 하느냐? 봉사를 몇 가지나 하느냐? 이런 언급이 전혀 없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럴까요? 좋은 종교인이 되기 전에 좋은 사람인지를 먼저 점검하라는 것 아닙니까? 교회 안에서 인정받을 만한 무엇무엇을 하는 것 이전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보기에도 목사답고 장로답고 그리스도인다워야 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어떤 분을 장로로 세운다고 할 때, 먼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이 사람에 대해 잘 안다면 ‘아, 그분은 하름교회 장로 해도 되는 사람입니다’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상은요. 교회의 건물을 보지 않습니다. 주차장 시설이나 교회 안에 카페가 있나 없나? 그런 것 보지 않습니다. 교인 수가 몇 명인지, 예산이 얼마인지 관심 없습니다. 세상은 그 교회의 리더를 봅니다. 그 교회의 리더를 통해서 그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를 보는 거예요. 그러면서 교회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통해 ‘예수님은 이런 분이실 거야’ 상상을 하는 것이죠. 그래서 교회 공동체가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살펴보면 교회의 리더 역할이 너무너무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저를 비롯해서요. 우리 모두가 먼저 좋은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종교적이고 신령해 보이는 사람이기 전에 우리 삶 속에서 진실함이 있는 사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는 사람, ‘저 하름교회라면 뭔가같이 해보고 싶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그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리고 ‘저들이 말하는 예수라는 분을 나도 소개받고 싶다, 나도 교회에 다녀보고 싶다.’라는 소문이 날 수 있는 그런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9절 말씀에 바울이 이렇게 정리를 하고 있는데요. 마지막으로 9절 합독
9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어떤 자격을 말합니까?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키는 자’ 여기서 ‘그대로 지키다’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안테코’(ἀντέχω)라는 말은 ‘굳게 붙잡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새번역성경에는 ‘떠받들고’라고 나옵니다. 즉, 장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잡고 떠받드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알고 깨달은 말씀을 붙잡고 세상에 대해서는 어리숙하더라고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성육신적인 삶을 보여주는 사람, 바로 그분이 장로라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치열하게 애쓰고 수고하고 ‘저분을 보면 하나님이 지키시고 보호하시는구나!’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구나!’ 말씀을 붙들고 또 붙들며 살아가는 바로 그분이 장로라는 것입니다.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여러분, 제가 짧은 목회 경력 속에서도요. 진정으로 감동을 주는 권면은요. 그 사람의 ‘말’이 아니라 삶과 인격이더라고요. 반면에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함이라” ‘거슬러 말하다’는 종들이 자기 상전들에게 해서는 안 되는 불순종을 말합니다. 그레데 교회는 거짓 교사의 가르침을 책망하지 못했기에 교회가 큰 어려움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이 시대는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해 성경의 권위를 넘어서려는 시도들, 세속적인 가치관과 하나님이 중심이 아닌 자기중심적인 사고들, 이 모든 것들이 ‘거슬러 말하는’ 행위들 아닙니까? 엿새 동안 자기 자신이 주인 노릇 하다가 주일날만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고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한다면 장로의 자격이 없을 것입니다.
책망은 권면보다 당연히 더 어렵기만 합니다. 솔선수범하지 못하고 권위가 없으면 책망하기가 어렵기 때문이죠. 그래서 우리는 더더욱 말씀을 붙들고 사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우리 아이들에게, 우리 자녀손들에게 사랑의 책망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런 기준대로라면 아무도 장로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교회에는 하루아침에 이런 지도자들이 짠! 하고 등장하지 않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훌륭한 지도자는, 좋은 장로는 공동체가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지도자로 세워주는 겸손함과 양보가 있는 공동체가 좋은 공동체입니다. 권면을 해도 권위가 있는 리더, 책망을 해도 그 말을 사랑의 말로 듣는 성숙한 공동체 그런 장로가 있는 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다운 교회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요. 저는 우리 교회가 정말 어른들이 많은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장로는 나이 먹으면서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라고요. 이게 무슨 의미인지 다 아시겠죠? 인생의 깊이가 생기고 영안이 더욱 열려야 한다는 뜻 아닙니까? 저는 우리 하름교회의 장로님들, 권사님들이 늙어가시는 게 아니라, 익어가시는 어른들이 되어 주시길 소망합니다. 저도 아직은 젊고 부족하지만 익어가는 목사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잘 익어가는지 지켜봐 주세요.
또 우리 젊은 제직들께서는요. 세월이 흘러가면 흘러갈수록 ‘이 사람도 장로감이야’ ‘저 사람도 장로감이야’ ‘저 장로님은 진짜 어른이야’ 교인 수가 많아져서 사람만 북적북적거리는 교회보다, ‘교회에 장로감이 많은’ ‘어른이 많은’ 그런 성숙한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바울의 마음을 가지고 진심으로 부탁의 말씀을 드립니다. 교회의 어른이신 여러분, 또 더욱 어른이 되셔야 할 우리 젊은 성도님들! 우리 교회를 잘 부탁드립니다.
저와 우리 성도님들 모두 피로 사신 주님의 교회를 함께 힘있게 세워 갈 수 있는 이 땅을 품은 하늘 아래 아름다운 교회로 세워져 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단찬양 : 이런 교회 되게 하소서
❙합심기도
여러분, 저는 우리 교회에 존경받을만한 어른이 정말 많아지길 소망합니다. ‘누구누구가 장로감인가? 아닌가?’ 이것을 생각하기 전에 내가 먼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가정에서 사회에서 책망할 것이 없는 그런 쓰임새를 갖추게 해 달라고 우리가 그런 마음의 결단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세상은 교회 건물이나 교세를 보지 않습니다. 교회 리더들을 주목하고 그 공동체를 보면서 ‘저들이 믿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생각합니다. 이 시간 우리 자녀손들과 이 하계동땅에 예수님을 보여 줄 수 있는 교회,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욱 성숙해지고 익어가는 어른이 많은 교회, 그런 교회다운 교회를 꿈꾸며 오늘 말씀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합심해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마침기도
사랑의 하나님, 우리가 교회 안에서 어떤 사람인가를 보기 전에 우리 가정 안에서 어떤 사람인가를 먼저 보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목사이고 장로이고 또 권사와 집사로 세움을 받았지만, 정말 건실한 가장으로서 책망할 것이 없는 청지기로서의 삶을 잘 감당하고 있는지요? 부족하고 모자란 것도 많지만, 세상의 이익보다 조금 미숙하더라도 ‘안테코’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잡고 말씀대로 살아가 보려는 성육신적인 삶을 살아가는 저희들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우리 자녀손들에게, 믿지 않는 이들에게 예수님을 보여주고 ‘저 하름교회라면 뭔가 같이해보고 싶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교회다운 교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어른이 많아지고, 모두가 장로감이 되는 그런 교회를 꿈꾸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 드리며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결단의 찬양을 함께 부르겠습니다.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장로는 어떤 사람인가?를 통해 다시 주님 앞에서 쓰임 받을 그릇을 준비하고 다짐하는 우리 성도들 머리 머리 위에 저들의 한 주간의 삶과 기도 제목 위에 지금부터 영원히 함께 계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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