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교회의 두 가지 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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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서론
하나님의 뜻을 이 땅위에 세우고 복음을 전파하는 가장 좋은 도구는 교회 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 세워집니다.
지난 시간에는 교회의 두 가지 사역, 즉 말씀 사역과 구제사역에 대해 알아 보았습니다.
좋은 교회는 말씀 사역과 구제 사역이 옳바르게 자리 잡힌 교회 입니다.
초대교회 즉 예루살렘 교회는 그야말로 부흥하는 교회 였습니다.
그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좋은 교회였습니다.
초대교회의 역동성은 인위적인 것도 아니고 진정한 하나님의 역사 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구성원들은 누구라 말할 것없이 이제 막 성령을 받은 초신자 그룹이었습니다.
막 시작하는 교회의 성장은 사도들의 가르침으로 시작 되었습니다.
제자들과 성도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으로 양육되고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믿는 사람 즉 성도 간에는 서로 교제하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신의 소유를 아깝게 여기지 않고 희생하고 힘을 합하여 약한 사람을 도와주고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예루살렘 교회는 주일만 모인 것이 아니라 날마다 한 마음으로 교회의 대소사를 함께하고 교회에 모여 말씀과 기도와 예배를 드리고 함께 구제사역을 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자발적이었고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하였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그 결과 교회는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고 구원 받는 사람들을 날마다 더하여 주시었습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보통은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교회는 여기 까지 일것입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하고 이 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만으로도 자부심이 느껴질만 합니다.
그렇다면 더 좋은 교회는 어떤 교회 일까요?
초기 예루살렘 교회의 구성을 보면 사도와 제자, 집사들 그리고 일반 성도의 그룹으로 이뤄져 있었습니다.
이제, 사도들의 가르침은 차츰 차츰 열매를 맺어 갑니다.
그것은 일곱 집사를 세우는 결실로 나타납니다.
일곱집사 중 안디옥의 개종자 니골라를 제외하고는 모두 헬라파 유대인 이었습니다.
지금 까지 예루살렘 교회의 주축이 아람어를 쓰는 정통 유대인이었는데,
이제 하나님께서 헬라어에 능숙하고 헬레니즘 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은 일곱집사를 세웠다는 것은 무슨 의미 일까요?
단지, 헬라파 유대인들의 구제를 위해서 였을까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최종적으로 더 좋은 교회는 결국 선교적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지금 까지의 체계를 세우고 내실을 다지는 시간들이 필요 했던 것입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양육된 제자들과 일곱집사들과 그들과 한마음으로 사역하는 성도의 그룹으로 세워진 단단한 공동체가 된 예루살렘 교회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요?
하나님은 이제 그들에게 어떤 사명을 부여 하실까요?
오늘 스데반의 순교의 기사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질문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 교회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가?
하나님은 오늘 교회에서 내가 어떻게 헌신 하기를 원하실까?
오늘 이 질문에 답에 대해 깊히 묵상하는 은혜로운 시간 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1.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평신도 사역자, 스데반
1.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평신도 사역자, 스데반
누가의 집필 방식에 대해 눈치 채셨겠지만
누가는 교회 내의 큰 흐름을 설명한 후 그 실질적인 예를 들어 설명 하는 방식을 취합니다.
예컨데, 구제를 위해 재산을 팔고 서로 모든 물건을 통용했던 초대교회의 움직임에 대해 설명하고 좋은 예로 바나바,
나쁜 예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예를 차례대로 제시 하는 식입니다.
오늘 본문은 일곱집사를 세운 이야기의 연장 선상 입니다.
그 일곱 집사들의 한 예로 스데반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으로 양육 받아 세워진 제자들과 일곱 집사들은 자신들이 보고 배운 것을 수행하기 시작 합니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주목할만 것은 스데반이 큰 기사와 표적을 행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주로 사도들과 관련되어 나타나던 기사와 표적이 놀랍게도 사도가 아닌 스데반 집사 즉 평신도 사역자를 통해서도 나타나기 시작 합니다.
이제 사도와 평신도 제자와의 경계가 무너지고 사도 만큼이나 성령에 충만한 평신도 리더로 성장하고 있는 집사 그룹의 예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 내의 계층이 명확한 한국교회에서는 받아들이기 난해한 주제 입니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 집사도 서리 집사 안수 집사 와 같은 직분을 마치 믿음이 좋은 순서인양 착각하는 것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은 초대교회의 역사를 조금만 공부해보면 금방 알게 됩니다.
초대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은 평신도 사역자들이 민간에 나가 아주 주도적으로 사역을 펼치는 방향으로 발전해 갑니다.
그것을 설명하는 사건이 바로 회당에서의 논쟁 기사 입니다.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말하자면 교회도 아닌 유대교인들의 본거지인 회당에서 교리적인 논쟁을 했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회당에서 공회 까지 끌려가서 논쟁하게 됩니다.
평신도가 사도의 도움도 없이 홀로 당당히 교리 논쟁을 했다는 것은 그 당시 집사 라는 직분이 가지는 무게감을 보여줍니다.
“스데반은 또한 사도가 아닌 사람으로서 산헤드린 앞에서 믿음을 변론했던 첫 그리스도인이고(행 6:12) 믿음 때문에 순교 당했던 최초의 순교자다”(행 7:57–60). 윌리암 시몬스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스데반의 증거함을 능히 당할 자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스데반은 지혜와 성령이 충만하였기 때문 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놀라운 사실은 오늘 본문 이후에 등장 하는 7장 전체가 스데반이 이 논쟁의 반론으로 제시하는 그의 설교 라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에서도 찾아 보기 힘든 특이한 기록 입니다.
스데반의 설교에는 성령에 충만한 지혜와 복음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여실히 들어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지면을 할애 했다는 것은 스데반의 설교와 그의 신앙이 사도행전 시대에 있어 아주 중요한 기점이 된다는 의미 이기도 합니다.
또한 교회가 세워지는 시기에서 교회가 나아갈 방향에서 중요한 기점이 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이제 누구든지
성령에 충만하면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만큼이나 예전에는 집사와 교회 직분자들의 자격과 자질은 무거운 기준을 따랐습니다.
현대교회의 집사 직분에 대한 기준은 초대교회의 기준을 따릅니다.
“집사는 당회의 지도 아래 빈곤한 자를 돌보며 교회의 서무, 회계와 구제에 관한 사무를 담당한다(여기서 ‘당회의 지도 아래’라는 말은 영적인 범위를 벗어나지 않도록 목사와 장로의 영적 지도를 받아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정규신학공부와 훈련을 받은 자가 목회자가 되고 교회의 리더가 되는 것은 교회와 교단의 질서를 위해 필요한 규칙 입니다.
하지만 평신도의 역할에 대한 제한을 지나치게 두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구세군에서는 집사직분은 하사관으로 등치 시킬 수 있습니다.
구세군의 하사관 이라고 하면 영어로 ‘Local Officer’ 라고 합니다.
정교, 가정단장, 장년서기, 장년부교, 회개석부교, 신병부교, 봉사부교 등의 평신도 리더를 총칭하는 용어가 하사관 입니다.
구세군에는 이 하사관들의 훌륭한 신앙의 모범들이 역사적으로 많이 있는데, 그 중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경기도 파주 구세군에서 정교로 섬기시던 염규호 정교님이 계셨습니다.
정교님의 부인인 임명애 부교님은 3.1 만세 운동 때, 100여명의 사람들을 조직하여 만세 운동을 하였던 분 입니다.
당시 임신 중이셨는데, 가석방 되었다가 아이를 낳고 다시 수감 되어 갓난 아기를 감옥에서 키워야 했습니다. 그때 함께 수감 되었던 사람이 유관순 열사였고 젖은 기저귀가 얼지 않게 자신의 몸에 품어주는 등 서로 힘이 되어주던 사이 였다는 것이 역사 기록으로 발견 되었습니다.
이 분외에도 구세군 하사관들은 이 땅에 복음을 전하고 이웃을 섬기고 정의를 세우는 일과 나라를 사랑하는 일에 앞장 섰습니다.
스데반을 통해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구세군의 병사로서 하사관으로서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스데반은 자기 생각과 지식으로 논쟁 하지 않고 “성령과 지혜”로 했습니다.
스데반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따라 사도들이 보여준 대로 따르고
성령이 인도 하시는 대로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행했습니다.
종종 나는 목회자급 성도야 라고 말하는 분들을 만날때가 있습니다.
세상에 목회자급 성도 라는 말 자체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저 사관 다운 사관, 정교 다운 정교, 부교 다운 부교가 있을 뿐입니다.
자신을 비운 상태에서 복음의 진리대와 성령의 충만함으로 행할때, 스데반은 평신도 사역자로서 크게 쓰임 받았습니다. 자신이 배운대로 아는 만큼 겸손하게 있는 자리에서 헌신 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 이라는 것을 스데반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2. 복음의 수호자, 스데반
2. 복음의 수호자, 스데반
자유민들은 회당에서 스데반과 논쟁을 하다가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을 당해내지 못하자 더 경렬하게 압박하기 시작 합니다.
말도 안되는 모함을 합니다.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공회로 끌고가 거짓증인들을 세워 공격 합니다.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이 논쟁의 핵심에 대해 14절에 요약 되어 있는데,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이 모함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합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까지 유대인들이 고소했던 내용들 입니다.
유대교의 네가지 핵심 상징
성전, 땅, 율법, 민족
성전을 헐겠다
율법을 고치겠다
라고 말했다고 이것은 신성 모독 이라고 모함 합니다.
예수님도 같은 방식으로 참소 당하셨습니다.
앞에서 말씀 드렸지만 7장 전체는 이에 대한 반박으로서 스데반의 설교 입니다.
윌림암 시몬스의 스데반 설교 요약을 보면,
율법- 율법을 지속적으로 불순종했던 것은 유대인 조상들이었다
성전- 하나님은 성전이라는 건물에 국한 되어 임재 하지 않으신다.
스데반에게, 하나님의 임재를 어떤 “처소”로 삼으려는 모든 시도는 우상숭배와 다를 바 없다(7:48–50)—그것은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진정한 의미에서 성전의 의미와 율법의 의미에 대해 직설적이고 진리에 입각하여 전하고 있습니다.
이런 방식은 순교자적 논증방식이라고 합니다.
경렬한 반격이 있을 것을 알면서도 진리에 입각하여 상대의 비진리를 지적하고 들어내는 방식을 말합니다.
일반적인 인간관계에서는 잘 사용되지 않는 방식 입니다.
왜냐하면 불필요한 분란을 만들 필요는 없기 때문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분이 나고 정의감에 불타서 직설적으로 지적 하지만 사실 그런 방식은 자신을 변호하고 자신의 생각을 관철 시기키 위한 목적이 다분 하기 때문 입니다.
스데반은 달랐습니다.
스데반은 자신을 변호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변호한 것입니다.
스데반은 복음의 수호자 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 외에는 덛붙이거나 사견을 포함시키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자세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과 정확히 일치하는 자세 였습니다.
스데반은 사도들의 가르침으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으며 이 땅에서 예수님이 어떻게 그 뜻을 이루시며 하루 하루를 의미 있게 사셨는지 정확히 이해하고 겸손하게 받들었습니다.
그의 신앙은 복음의 핵심 가운데 확실한데 거했고 이제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사도들과 정확히 일치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고
사도들의 사역에 같은 방식으로 동참하는 평신도 리더로 성장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명령 하셨듯이 복음의 수호자 였고 복음의 증인으로 성장 하였습니다.
3. 천사의 얼굴로 세계선교의 전환점이 되다
3. 천사의 얼굴로 세계선교의 전환점이 되다
스데반은 당당히 말씀을 전합니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한편으로는 마음에 찔림 있었지만 또한편으로는 분노가 치밀어 올라 이를 갑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사람들은 한계에 다달아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게 됩니다.
결국 스데반은 장엄하게 순교하게 됩니다.
스데반의 순교의 순간을 묘사하는 부분을 우리는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마치 십자가에서 운명 하시며 주님이 올린 기도와도 같은 외침 이었습니다.
이 외침 이전에 스데반이 경험한 환상이 있었습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스데반의 죽음은 살인이었습니다.
세상적으로는 처참한 죽음 이었습니다.
사람이 산 사람을 돌로 쳐 죽이는 것은 잔인한 일입니다.
하지만 후대의 사람들이 이 죽음을 신앙인의 영광스런 희생으로서 순교라고 부르는 이유는
스데반의 삶이 천사와 같은 모습으로 항상 하늘을 우러러 보는 삶이었고 그의 최후의 순간에 주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 입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신앙생활 하기 까지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의 순교와 희생이 있었습니다.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왜 수 많은 기독교인들은 죽어야 했을까요?
스데반은 죽을 것을 알면서도 순교자의 길을 걸었을까요?
하나님은 예루살렘에 모인 몇 몇 사람들만을 구원 하시고자 하지 않기 때문 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 하기 위해 그 아들을 주셨기 때문 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을 기회를 주기 위해서 입니다.
좋은 교회가 되어 우리 가장 가까운 곳의 형제들을 돕고 전도 하여야 합니다.
더 좋은 교회가 되어 사마리아와 온 유대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이는 불의의 사고나 병마로 인해 사망하고 어떤 이는 세상 영화 누리고 자연사 합니다.
그들의 인생의 마지막을 그 누구도 순교라고 하지 않습니다.
죽는 순간 스데반 처럼,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며 죽는 이에게 순교의 칭호가 주어집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다가 만난 최후 였습니다.
하나님은 스데반을 시대의 전환점으로 영광스럽게 쓰시고자 하였습니다.
이미 그가 대적들 앞에 설교를 시작하는 순간 부터 그는 성령에 사로잡혀 영화롭게 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모습이 마치 천사와 같았습니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스데반의 설교는 유대교의 종말을 고하는 선언 이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는 유대교를 통해 일하신 하나님의 뜻이 악하다거나 율법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하나님이 새 시대를 요구 하신다는 것이고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 그 시대를 열었다는 것을 선언 하고 있다.
톰 라이트는 이것을 설명 하기 위해 한 가지 예를 들어 준다.
기차역에 도착하면 자동차를 두고 가고, 지하철역에 도착하면 기차는 두고 가고, 목적지에 도착하면 여행 자체가 끝난다. 그렇다고 해서, 자동차나 기차나 지하철이 나쁘다거나 그것을 타지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다 좋은 것이며 내가 그것들을 이용한 것은 잘한 일이다.
그런데도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유대교인들은 스데반을 신성모독자로 몰아 죽이게 된다.
스데반의 순교는 외면적으로 상황을 악화 시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한알의 밀알이 썩어져 큰 결실을 맺듯이 그의 순교는 좋은 교회가 더 좋은 교회가 되는 길을 열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를 통해 핍박은 더 거세졌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핍박을 피해 흩어진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였습니다.
그 전환점에 스데반이 쓰임 받았습니다.
지금 까지 예루살렘 교회에서 정통 유대인을 중심으로 세워져 가던 교회가 이제는 세계 선교로 나아가게 된다.
성전 중심에서 소아시아 곳곳에 있던 회당, 시나고그 중심으로
이스라엘 땅에서 열방으로
유대민족에서 이방과 열방으로
전환 됩니다.
오늘 사도행전 6장, 7장은 스데반 한 사람의 평신도 사역자가 세계 선교의 시작점이 되는 놀라운 역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
결론
말씀사역과 구제사역으로 교회가 체계가 잡혀 가는 과정에서도
교회와 복음이 세계선교, 열방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도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평신도 사역자들은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우리 교회는 지금 어느 단계에 있습니까?
우리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 처럼 온전히 세워졌습니까?
우리 교회는 지금 선교하는 교회로 거듭날 준비가 되었습니까?
담임 사관으로서 제가 진단 하기로는
우리 교회가 지향해야 할 방향은 분명 선교하는 교회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우선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일곱 집사가 세워지는 일입니다.
하루 속히 우리 교회에 일곱집사와 같은 평신도 사역자가 자원하여 세워질 때, 그 후 스데반과 다음주에 사펴볼 빌립과 같은 선교적 사역자가 세워질 줄로 믿습니다.
이 스데반과 빌립의 사역은 베드로와 고넬료 그리고 사도들의 사역에 한 예라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그 교회의 방향성 완벽히 동의하고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했던 한 평신도 사역자의 보여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제자들과 집사들은 한 마음과 한뜻이었다는 것을 기억 하십시오.
여러분 혹시 여러분의 소명을 평신도로 제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누구든지 그 이름을 믿는 자는 구원을 받듯이,
누구든지 성령이 임하시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오늘 증인이 되시기를 다짐 하시며,
초대교회의 일곱집사와 같이 자원하여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기도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