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간청함을 인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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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비유

누가복음 11장 5~13절
누가복음은 기도에 대해서 강조하며,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을 자세히 전해줍니다. 누가복음 전체에서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셨던 것을 봅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의 삶은 지속적인 기도의 삶이었습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던 제자들은 예수님께 와서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고(1), 그때 예수님은 그 유명한 ‘주기도문’(2-4)을 가르쳐 주십니다. 이것은 주님이 기도하신 기도문이 아니라 가르쳐주신 기도문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에 나오는 주기도문과는 약간 말이 다릅니다. 그래도 내용은 같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다음에 나오는 내용이 오늘 본문인데, 여기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에 대해 더 설명해 주십니다. 이것이 소위 간청하는 기도인데 이 간청 기도란 어떤 것입니까? 그 의미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밤중에 떡을 구하러 온 이웃의 비유 (5~8절)
5~8절을 보면, 예수님이 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이것도 역시 비유입니다. 이 비유 내용은 당시 이스라엘 북부 갈릴리 지역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여행자들은 중동 지방의 뜨거운 햇빛을 피해 저녁 늦게 여행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 여행자 중 한 사람이 자정 12시에 친구의 집에 찾아온 상황을 이야기하십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5절)
여기서 ‘밤중에’가 자정을 말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나그네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을 당연히 여겼습니다. 나그네가 자기 집을 방문하면, 집주인은 그것이 귀찮은 일이 아니라 많은 집 중에서도 자기 집을 나그네가 선택함으로 자기가 친절을 베풀 기회를 주어 고맙다고 여기면서, 손님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잠자리를 제공하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그네는 아주 늦은 밤에 갑자기 친구 집에 도착함으로써 집주인인 친구가 아주 곤란한 상황에 빠지게 한 겁니다. 그 집에 더 이상 먹을 것이 남아있지 않을 늦은 시간에 옴으로써, 나그네에게 친절을 베푸는 책임을 이행하지 못할지 모를 난처한 상황이 되도록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집주인은 급히 자기 마을 친구 집에 가서 떡 세 덩이를 빌리려고 시도합니다. 그런데 가 보니까 밤이 너무 늦어서 이미 불이 다 꺼져 있습니다. 해만 지면 캄캄해집니다. 밤 12시라는 것은 이미 잠자리에 든지 몇 시간이 지난 다음입니다.
당시 문화로 볼 때, 밤에 남의 집 불도 다 꺼졌는데 문을 두드린다는 것, 그것도 밤 12시에 문을 두드린다는 것은 아주 위급한 상황이 아닌 다음에는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행위였습니다. 요즘도 그렇게 하면 실례가 아닙니까? 그 당시는 더욱더 그랬습니다. 문도 잠겨있다면 그것은 잠자는 것을 방해할 생각을 아예 하지 말라는 것을 뜻합니다. 망설이면서 돌아갈까도 생각했지만, 염치불구하고 문을 두드리며 간청합니다.
“여보게, 빵 남은 게 있으면 세 개만 꾸어 주게. 내 친구가 여행하다 조금 전 내게 왔는데, 그에게 줄 것이 없어서 그러네.” 그러자 안에서 소리가 들려옵니다. “나를 괴롭히지 말게. 문은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잠자리에 누웠으니, 지금 일어나서 자네에게 빵을 줄 수 없는 상황이네.”
당시 전형적인 갈릴리 지역의 집은 창문 하나가 나 있는 방 하나짜리 집이었습니다. 가족들은 모두 같은 침상에 누워서 밤의 추운 기운을 녹이기 위해 서로 꼭 붙어 잤습니다. 그러니까 이 집주인이 다 같이 붙어 자는 상황에서 일어나게 되면 전체 가족들을 다 깨울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게다가 당시에는 자녀도 많았습니다. 자기 때문에 식구들이 다 깨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나 지금 잠자리에 든 집주인이 한밤중에 찾아온 친구의 부탁을 끝까지 거절하게 되면 그에게 찾아온 나그네를 대접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친구가 수치를 당하게 하는 것이 됩니다. 또한 당시 갈릴리 지방의 문화로 볼 때, 이러한 일은 나그네가 찾아온 그 집만의 수치가 아니라 마을 전체의 수치가 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8절)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떡을 주게 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친구라는 사실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 간청함을 인하여” 떡(빵)을 준다고 하십니다. ‘간청함’이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헬라어 원어로 ‘수치를 모르다’, ‘수치를 피하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또한 ‘끈기’, ‘끈덕짐’, ‘뻔뻔함’이라고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8절에서 이 ‘간청함’의 주어가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냥 보면 한밤중에 찾아와 떡을 좀 달라고 간절히 요청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나그네를 대접하지 않는 마을이라는 수치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 비록 귀찮지만 일어나 빵을 가져다주는 집주인을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신약성경 사본 중에서 ‘간청함’이 끈질기게 졸라대는 것이라고 나와 있는 사본도 있고, 누워있던 사람이 명성을 지키기 위해서 그런 것이라고 쓰인 사본도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개역개정’ 성경에는 간절히 요청한다는 식으로 되어있지만, 성경의 주를 보시면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했다는 해석도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둘 중에 어느 해석이 맞는지가 명확하지 않고, 두 해석이 다 가능합니다. 대개는 첫 번째 해석이 맞는다고 생각해서, 하나님께 기도할 때 떡을 요청한 친구와 같이 우리가 끈질기게 때로는 뻔뻔하게 계속해서 기도해야 한다고 적용합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그가 친구로서 그렇게 하지는 않을지라도, 만일 네가 계속해서 충분히 긴 시간 동안 문을 두드린다면, 그는 자신의 명성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일어나서 네가 원하는 것을 줄 것이다.”
자고 있던 집주인은 문을 두드리는 친구가 손님을 대접하지 못하게 될 때, 그 친구뿐 아니라 떡을 주기를 거부한 자기 자신과 자기 가족, 더 나아가 마을 전체에게 수치가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던 사람들은 다 그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유, 저런, 저런.’ 하면서 ‘그래도 떡을 줘야지, 떡을 줘야지.’라고 다들 생각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사람만이 아니고 그 마을 전체가 야박한 마을이라고 불리며 수치를 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수치를 당하지 않기 위해, 자기와 가족과 마을의 명성을 지키기 위해, 비록 아주 귀찮지만, 가족들이 깰 수도 있지만 일어나서 문을 열고 떡을 구하며 찾아온 친구가 원하는 대로 떡을 주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단순하게 우리가 원하니까 우리의 욕구를 채워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필요를 채우심으로써 하나님 이름의 영광이 드러나는 방향으로 우리 기도에 응답해 주십니다. 특히 이런 식으로 우리가 주님의 영광이나 명예를 걸고 하는 기도에 아주 약하십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민수기 14장에 나오는 모세의 기도입니다.
거기서 어떤 일이 있었는가 하면, 열두 정탐꾼을 파견해서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전에 그것을 알아보도록 합니다. 그랬을 때 열 명은 돌아와서 “우린 저들을 도저히 이길 수 없다. 저 사람들은 거인이고 우리는 그들의 눈에 메뚜기와 같았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땅을 악평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좋은 땅이라고 해놓고 나중에는 악평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이 땅은 좋은 땅이다. 하나님이 이 땅을 우리에게 이미 주셨다.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열 명은 “아니다. 우리는 메뚜기 같다.”라고 했습니다. 그랬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수아와 갈렙의 말을 듣지 않고 그 열 명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와 갈렙이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은 아주 좋은 땅이며 하나님을 거역하지 말고 그 땅 주민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지만, 백성들은 다른 열 명의 정탐꾼들 말을 듣고 그 두 사람을 돌로 치려고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진노하시면서, 행하신 모든 기적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을 다 멸하시고 모세만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도록 해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놀랍게도 모세가 이렇게 기도합니다.
“15 그런데 이제 주님께서 이 백성을 한 사람을 처리하듯 단번에 죽이시면, 주님께서 하신 일을 들은 나라들은 16 ‘그들의 주가 자기 백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데리고 갈 능력이 없어서, 그들을 광야에서 죽였다’ 하고 말할 것입니다... 19 이집트를 떠날 때부터 이제까지 주님께서 이 백성을 용서하신 것처럼, 이제 주님의 그 크신 사랑으로 이 백성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민 14:15-16, 19, 새번역)
모세는 이때 하나님의 명성이 땅에 떨어진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용서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모세의 이러한 기도를 들으시면서 내심 얼마나 기쁘셨겠습니까?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서 일부러 강하게 나오신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들으신 다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말대로 사하노라”(민 14:20). 금방 용서한다고 하십니다.
사실은 하나님이 용서하려는 마음이 있으셨는데, 어떻게 보면 모세의 믿음을 테스트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자신의 영광을 구한 것이 아니라 백성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진정으로 위하는 마음으로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그의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기도 응답을 잘 받을 수 있는 비결을 여기서 배우게 됩니다. 자기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기도할 때, 그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할 때 기도에 응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2.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9~13절)
하나님의 뜻대로 구할 때 들어주신다는 확신 가운데 기도해야 한다는 원리에 대해 예수님은 계속해서 설명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마태복음 7:7에도 나오는 말씀입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이 세 가지 명령이 현재형 명령어로 되어있습니다. 헬라어에는 한국말에 없는 용법이 있는데, 현재형 계속성 동사가 있습니다. 한 번 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이것을 하라고 할 때 계속하라는 뜻이 거기 들어가 있습니다.
즉, 한 번만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고 끝낼 것이 아니라, 안 되도 계속해서 하라는 것입니다. 한 번 기도했는데 안 됐다고 포기하지 말고, 계속하라는 뜻입니다. 또한 지금 당장만이 아니라, 조금 하다 마는 게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해서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예수님은 그 당시 누구나 다 알만한 또 다른 이야기를 하십니다. 아들이 생선이나 알을 달라고 하는데 뱀이나 전갈을 주는 아비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것도 일종의 비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자녀가 뱀을 달라고 하면 누가 주겠습니까? 코브라 독사가 있는데 재미있어 보이니까 저 뱀을 달라고 하면 누가 주겠습니까? 또 사막의 전갈은 그 독이 얼마나 무시무시합니까? 그런데 전갈을 가리키며 참 재미있게 생겼으니 자기가 갖고 싶다고 하면, 어느 아버지가 자녀에게 그런 걸 주겠습니까? 그대로 줄 부모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13절)
악한 사람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는데, 하늘에 계신 아버지, 선하시고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보통 기도할 때 하는 표현 중에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라는 식으로 표현하지만, 사실 그것은 너무나 부족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그냥 많은 정도나 풍성한 정도가 아니라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더 커질 수 없는 사랑을 가지신 분, 사랑 그 자체인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는 게 무슨 뜻입니까?
이 말씀을 예수님이 하시던 그 당시에는 아직 오순절 때 성령이 내려오시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은 상황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아직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또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전, 성령이 오시기 전입니다. 그래서 엄격히 이야기하면, 이때도 아직 구약 시대라고 볼 수 있는데, 구약 시대 때는 성령님(하나님의 영)이 왔다 갔다 하셨습니다. 와서 역사하다 떠나는 식으로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예수님이 “하늘 아버지께서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말씀하셨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성령은 이미 2천 년 오순절 때 오셨고, 또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는 것이 성경의 약속입니다. 그것이 분명하지만, 성령을 달라는 기도는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주와 구세주로 믿어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 그래서 성령을 받은 사람도 성령을 계속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안 계시기 때문에 달라고 구하는 게 아니고, 성령의 충만함을 위해, 성령의 역사를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할 때가 많습니까? 왜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지 않고 자꾸 원하시지 않는 일을 하며, 또 왜 죄를 짓습니까? 그것이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할 때입니다. 성령이 충만하다는 말은 뭔가 몸이 막 뜨거워지고 무슨 현상이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그런 것도 있을 수 있지만, 그게 아니라 성령님의 지배를 받는 상태, 즉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순종하며 살면 그 삶이 곧 천국입니다. 그것이 성령으로 충만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말씀대로 살지 않고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고 내가 주인으로 살 때, 그때가 바로 우리가 죄를 범할 때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죄지을 때 보면 성령 충만하지 않을 때, 즉 내가 주인 노릇을 할 때입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을 위해, 성령의 역사를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에게 가장 주고 싶어 하시는 선물이 바로 성령이라는 사실입니다. 성령은 물건이 아닙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의 세 위격 중 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정말 우리에게 성령을 주기를 기뻐하십니다.
둘째, 성령 안에 좋은 것이 다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같은 내용이 나오는 마태복음 7장을 보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라고 하셨다고 나와 있습니다. 아마 둘 다 하셨을 겁니다.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그런데 나중에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특히 성령 사건을 기록했기 때문에, 여기서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기록한 것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우리가 평소에 달라고 하던 것들을 달라고 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평소에 ‘주님, 답답해 죽겠습니다. 내 삶은 왜 이렇습니까?’라고 하던 사람이 성령님의 역사를 정말 체험하게 되면 막혔던 가슴이 뻥 뚫어지고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성령을 통해서 주님의 은혜가 넘치게 되면 인간관계가 달라집니다.
보는 눈이 달라지기 때문에 삶의 문제가 문제로 보이지 않게 됩니다. 지금 상황은 똑같고 여전히 어려운데, 이전에는 두려워하고 괴로워하고 염려했는데, 성령 충만하게 되면 상황은 똑같은데 별 게 아닌 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셋째, 성령은 아무에게나 주시는 것이 아니라, 구하는 자에게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여기서 구한다는 단어가 바로 간청한다는 단어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간청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아주 귀찮을 정도로 졸라대기 때문에 준다는 뜻이 될 수도 있고, 들어 주는 쪽에서 명예에 손상이 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준다는 뜻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간절히 요청한다고 해도 자녀가 뱀이나 전갈 같이 위험한 것을 달라고 하면 그런 것들이 해가 될 줄을 알면서도 귀찮으니까 그냥 줘버릴 부모는 없습니다. 만약 부모가 그런 것을 준다면 진짜 부모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까 해로운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을 달라고 목숨 걸고 매달릴 때 주신다는 것입니다. 특히 성령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는 것입니다. 목숨 걸고 성령을 달라고 구하는데 왜 안 주시겠습니까?
성령을 달라고 성령의 역사와 성령의 충만을 구하는 사람은 뭔가를 아는 사람입니다. 성령이 가장 좋은 것이라는 사실을, 성령만 계시면 다 된다는 비밀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십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성령의 역사와 성령의 충만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3. 기도에 관하여 기억할 점들
성령을 받으리라는 약속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면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진로를 놓고 ‘하나님, 제 앞길을 좀 열어주십시오.’라고 하는데 길이 열리지 않습니다. ‘내 자녀가 좋은 학교 가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데 다 떨어집니다. ‘하나님, 사업이 잘되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데 사업이 망하게 됐습니다. ‘우리 부모님이 건강하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데 불치병에 걸리십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닌데 이럴 때가 많습니다.
또한 가족이나 친구를 전도하려 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래서 ‘내가 주님의 복음을 전해야지.’라고 작정하며 기도하는데 오히려 기독교에 대해 점점 더 비판적으로 되어 갑니다. 인간관계에 문제가 생겨서 ‘주님, 이 관계를 풀어주십시오.’라고 기도하지만 상대방이 좀처럼 마음을 풀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아주 찬 바람이 쌩쌩 불고 시베리아 한파가 점점 더 몰아칩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에 대해 이런 식으로 응답받지 못할 때 당연히 실망하고 좌절하고 화도 납니다. ‘아니, 내가 이렇게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왜 안 들어주시나?’ 하지만 우리는 현실을 냉정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게 기도하고 있는가? 아니, 기도하고 있기는 한가? 이것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복권에 당첨되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게 아니라 헌금도 많이 하고 좋은 일도 많이 하고 가난한 사람도 돕고 다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복권에 당첨되게 해주십시오.” 드디어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복권 좀 사고 기도해라.” 복권을 사야 당첨되지, 사지 않으면서 어떻게 당첨이 됩니까?
우리의 슬픈 현실은, 우리 기도가 이런 식일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하나님, 이것을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고 자기는 아무것도 안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 방향대로 일을 열심히 해야 하는데, 기도도 잘 안 하지만 노력도 안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기도해 봤자 안 되네. 믿어봐야 안 되네.’라고 하는데, 사실은 그런 말을 하는 분들은 기도를 안 하는 분들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사실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기도하고 나서도 이루어질 것을 믿지도 기대하지도 않으니까 그런 말을 합니다. 아니, 기도를 해놓고도 무엇을 기도했는지조차 곧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사실 기도 노트를 만들어 기록해 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해주셨는데도 이게 기도 응답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자기가 기도한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노동입니다. 어렵습니다.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노력과 시간을 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한두 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에 응답해 주실 때 하나님이 즐겨 쓰시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즉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질질 끄시는 방법입니다. 주기도문에서 우리에게 어떻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까?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2).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실 때, 반드시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고 그의 나라가 임하시는 방향으로 응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또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방향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는 방향으로 응답하십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않으시는 방향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바로 이러한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잘못된 목적을 가지고 기도하거나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기도를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간구를 들어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약 4:2-3). 하지만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잘못 구할 때도 하나님은 우리 기도의 방향을 바꿔주셔서 결국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기도할 수 있도록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잘못된 목적으로 기도했는데, 하다 보니까 내 마음이 변하게 됩니다. ‘주님, 돈을 많이 벌게 해 주세요.’라는 기도는 응답하지 않으실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왜냐하면 돈을 많이 벌게 되면 분명히 믿음을 떠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기도하긴 했는데, 기도하다 보니까 자신의 안락함만을 위해 벌어서는 안 되겠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위해, 또 좋은 일에 사용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 건강을 주세요.’라고 우리는 건강을 위해서 당연히 기도할 수 있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건강한 다음에 뭘 할 것인가가 없는 겁니다. 몸이 아팠는데 건강해지니까 이상한 데 가고 못된 짓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건강을 위해 기도하다 보니까, 건강해서 못된 일 하는 사람도 많은데 그런 데에 나의 건강함이 쓰이면 안 되겠다고 느껴져서 바른길을 가려고 애쓰게 되는 겁니다.
이처럼 우리가 쉬지 않고 기도할 때 기도의 내용에 합당한 삶으로 변화가 됩니다. 그러니까 내 기도 때문에 하나님이 변화되시는 것이 아니라, 기도할 때 내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생각을 다 아시는데 무엇 하러 기도해야 합니까?’ 혹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그런데 무엇 하러 기도합니까? 기도는 하나님을 위한 게 아닙니다. 나를 위한 것입니다. 내가 기도할 때 내 마음이 올바르게 정리됩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내가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기독교는 단순히 종교가 아닙니다. 종교의 핵심이 뭡니까? 규율입니다. 규율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가 종교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해라, 저것을 해라 말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입니다. 관계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곧장 응답을 안 하시고 오래 끄신다면,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너무나 사귀고 싶어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시간을 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도에 바로 응답하지 않으실 때가 많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우리가 성장하고 성숙해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밤중에 문을 두드리는 친구가 귀찮아서 마지못해 떡을 내어주는 사람처럼, 겨우 그 정도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 최고를 주기를 원하십니다. 쏟아부어 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왜 구하지 않겠습니까? 왜 성령을 구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이 바로 기도할 때가 아니겠습니까? 자신을 위해, 가족을 위해, 교회를 위해, 한국을 위해, 북한을 위해, 그리고 세계를 위해기도할 때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성령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와 성령의 충만함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었던 일을 성령께서 해결해 주시는 역사가 우리 각자의 삶에, 또 우리 교회에 일어나야겠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그렇게 해주실 줄 믿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하나님이 가장 주기를 기뻐하시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바로 이렇게 우리가 구하는 자들이 되어서 이러한 놀라운 기도의 역사들이 우리 각 개인과 가정과 또 온 교회 안에 가득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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