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가의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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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우물가의 여인
본문: 요 4:42
오늘 살펴볼 말씀의 마지막 구절을 본문으로 읽겠습니다.
(요4:42) 그 여자에게 이르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 때문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직접 그분의 말을 들었고 이분께서 참으로 세상의 구원자 그리스도이신 줄 알기 때문이라, 하였더라.
And said unto the woman, Now we believe, not because of thy saying: for we have heard him ourselves, and know that this is indeed the Christ, the Saviour of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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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4:1)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요한보다 더 많이 제자를 삼고 침례를 주셨다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시고
When therefore the Lord knew how the Pharisees had heard that Jesus made and baptized more disciples than John,
(요4:2) (그러나 예수님께서 친히 침례를 주지 아니하고 그분의 제자들이 주었더라.)
(Though Jesus himself baptized not, but his disciples,)
(요4:3) 유대를 떠나 다시 갈릴리로 떠나가실 때에
He left Judaea, and departed again into Galilee.
예수님과 침례인 요한 사이의 이간질
지금 흥미로운 부분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과 침례인 요한 사이에 갈등을 조장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데
주님이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는 방식으로 처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지금 그 지역을 떠나고 계신 것입니다.
(요4:4) 반드시 사마리아를 통과해야 하겠으므로
And he must needs go through Samaria.
(요4:5) 그때에 수가라 하는 사마리아의 도시에 이르셨는데 이곳은 야곱이 자기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의 구역에 가깝더라.
Then cometh he to a city of Samaria, which is called Sychar, near to the parcel of ground that Jacob gave to his son Joseph.
(요4:6) 이제 거기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그런즉 예수님께서 여행에 지치셨으므로 우물에 그대로 걸터앉으시니라. 때는 여섯 시쯤 되었더라.
Now Jacob's well was there. Jesus therefore, being wearied with his journey, sat thus on the well: and it was about the sixth hour.
항상 말씀을 증언할 기회를 찾으시는 예수님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지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이 지치고 피곤하고 목이 마르게 되신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신적 능력을 이용해서 인간의 고통을 극복하지 않으십니다.
항상 증언할 기회를 찾으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자신이 육신의 피로로 인해서 쉬고 계실때도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할 기회를 찾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잠깐의 휴식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때 우리는 종종 우리에게 무겁게 느껴지는
구원의 투구와 의의 흉갑을 잠시 벗어놓고 싶을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복음을 선포를 위해 신고 있던 신발을 벗어 놓을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잠시 쉬는 동안에도 복음을 전하기 위한 기회를 찾고 계십니다.
주님은 쉬는 동안에도 아버지를 높일 수 있는 길을 찾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가 우리의 훌륭한 본보기인 이유입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배우고 그분의 삶을 배우기 위해서
성경에서 주님이 보여주는 삶을 자주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싸움에서 쉽게 지치게 됩니다.
우리는 말씀의 검을 들고 있는 것이 힘들어
검을 내려놓고 사라지고 싶고 주저 앉고 싶을때가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않는 곳으로 가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숨어서 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피곤한 가운데에서도 말씀의 검을 들고
아버지를 높이고 아버지를 증거할 기회를 찾고 계십니다.
누군가 주님께로 인도할 기회를 찾고 계신 것입니다.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준비돼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완전히 준비되어 있을때 보다도
아무 준비 없이 혼자 있을때 주님을 전할 최고의 기회를 만날 수 있습니다.
우연히 길에서 만난 친구와 대화를 하다가
주님을 전해야 할 절호의 기회가 주어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기회가 주어졌을때 주님께서 열어준 기회를
우리가 준비되지 않아서 또는 의지가 없어서
주님과 성경을 증거할 기회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지금 예수님은 준비가 되셨습니다
육신적인 것을 먼저 다루시는 주님
(요4:7) 한 사마리아 여자가 물 길으러 오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마실 물을 내게 달라, 하시니
There cometh a woman of Samaria to draw water: Jesus saith unto her, Give me to drink.
예수님의 대화가 육신적인 문제를 먼저 다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4:8) (이는 그분의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도시로 갔기 때문이더라.)
(For his disciples were gone away unto the city to buy meat.)
(요4:9) 그때에 사마리아 여자가 그분께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이면서 어찌 사마리아 여자인 내게 마실 물을 달라고 하시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 사람과 상종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라.
Then saith the woman of Samaria unto him, How is it that thou, being a Jew, askest drink of me, which am a woman of Samaria? for the Jews have no dealings with the Samaritans.
시회적 장벽이 예수님의 사역을 제한 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사회는 예수님께서 이 여인과 대화 하기 어렵게 하는 장벽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여자였고, 그녀는 사마리아 사람이었고
예수님은 남자였고, 예수님은 유대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장벽은 전혀 관여치 않고 대화를 시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문화적 장벽을 무너뜨리고 대화를 시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분 안에 있는 지혜와 긍휼과 사랑이
사람들이 만든 장벽으로 인해서 방해받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당시의 사람들이 만들낸 생각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종이 되어 일을 하는데 자주 방해가 되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규칙을
지키지 않았다고 자주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정해놓은 규칙에 신경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아버지께서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관심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의 문을 열고 있고
이 상황을 마주한 여인은 그 상황에 놀라고 있습니다.
(요4:10)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을 알고 또 네게, 마실 물을 내게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네게 생수를 주었으리라, 하시니
Jesus answered and said unto her, If thou knewest the gift of God, and who it is that saith to thee, Give me to drink; thou wouldest have asked of him, and he would have given thee living water.
육신 적이 대화 후에 영적인 주제로 옮겨가심
예수님께서 우물에서 물을 마시는 육체적인 주제를 가지고 대화를 시작해서
곧바로 영적인 문제로 대화를 옮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이런 대화에 은사가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일상적인 대화로 친화력을 높이다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어지고
그러다 혼을 구하는 좋은 결과를 얻기도 합니다.
이런 재능은 놀라운 축복이지만 재능의 문제로만 보아서는 안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런 일을 위해서 반드시 힘써 노력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언급하는 3 가지
10절에서 주님이 이 여인에게 제공한 것이 무엇인지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누구인지에 알았더라면.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분은 메시아 이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고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죽음에서 다시 일어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선물에 대해서 언급하십니다.
선물이라는 것은 값없이 얻을 수 있다는 것이고,
그것을 얻기 위해 수고나 댓가를 치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구해야 한다고 말하고 계십니다.
그분이 누구신지 알고 그분이 어떤 선물을 주실 수 있는지를 알았다면,
구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도 손을 내밀어 그것을 받으면 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한 명의 종교적인 여인을 상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거리에서, 직장에서 복음을 전해 보면
사람들은 죄를 용서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아무 댓가도 치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뭔가 요구하기 위해서 선물을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선물이라고 하면 그것은 그냥 선물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네가 내가 누구인지 알았다면,
그리고 내가 지금 너에게 주려는 선물이 무엇인지 알았다면,
네가 해야 할 일이라고는 구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가 네게 생수를 주었으리라”
선물을 받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그저 겸손한 마음뿐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내가 이 몸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지 자신을 낮추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주시는 선물을 받겠다고 하면 됩니다
(요4:11) 여자가 그분께 이르되, 선생님이여, 선생님께는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선생님이 어디에서 그 생수를 얻겠나이까?
The woman saith unto him, Sir, thou hast nothing to draw with, and the well is deep: from whence then hast thou that living water?
(요4: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그와 그의 아이들과 그의 가축들이 마셨는데 선생님이 그보다 더 크시니이까? 하매
Art thou greater than our father Jacob, which gave us the well, and drank thereof himself, and his children, and his cattle?
종교는 이 땅을 위해서만 유익이 있습니다.
이 여인이 언급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신의 출신과 혈통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나의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종교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조상들로부터 내려온 우물과 그 물을 얻는 방법이 있었고,
이 우물로 인해서 우리 자녀들과 가축들이 혜택을 받아왔다는 것입니다.
종교는 이들의 삶에 나름 유익을 준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종교는 그저 이 땅의 삶을 위해서만 유익이 있을 뿐입니다.
다음 세상을 위해서는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주님이 말씀하고 싶었던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생명수에 대한 것입니다.
종교는 생명수를 얻는데는 유익하지 않습니다.
(요4:13)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구든지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 목마르려니와
Jesus answered and said unto her, Whosoever drinketh of this water shall thirst again:
종교가 주는 물은 다시 목마르다.
여러분이 종교의 우물에서 물을 마시면 만족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수고의 우물에서 물을 마시게 되면,
다시 찾아오는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물을 마셔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수고를 통해서 구원을 얻으려고 하게 된다면,
구원을 유지하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수고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교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라는 겁니다.
종교라는 것은 잠시 갈증이 가시는듯 하다가도
다시 목이 마르게 되고 갈증의 해결을 끝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제시하는 방법은 모든 것이 완성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모든 일을 마치셨고
완전히 완성된 것을 우리에게 주신 분이십니다.
주님이 주시는 생명수는
받는 순간에 그 생명은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영원히 유지되는 것입니다.
처음에 받기만 하면 그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요4:14) 누구든지 내가 줄 물을 마시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줄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솟아나는 우물이 되어 영존하는 생명에 이르게 하리라, 하시니라.
But whosoever drinketh of the water that I shall give him shall never thirst; but the water that I shall give him shall be in him a well of water springing up into everlasting life.
예수님이 주는 생명수 만이 갈증을 해소해 줍니다.
여러분도 다 목이 말라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격렬한 운동을 하거나 더운 날씨에 땀으로 수분을 많이 빼게 되면
몸은 강렬하게 물을 마시고 싶어합니다.
그때 시원한 물 한잔이 얼마나 우리의 몸을 행복하게 해주는지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사이다 마시고 콜라 마시고 쥬스마시면
처음에는 시원하지만 금방 또 다시 갈증을 느끼게 됩니다.
종교적인 사람이 그리스도께 와서 주님이 주시는 생명수를 마시게 된다면,
비로서 혼의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시원함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많은 종교들이 영생을 이야기 하면서 제공하는 것은 선물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믿는 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믿는 경우도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만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만족시켜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여러분은 테레사 수녀라는 인물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녀는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가장 위대한 성인 중에 하나로 추앙받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남겨진 서신서에서
자신의 혼이 어둠가운데 있었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열심히 살았지만
그녀는 주님이 주시는 물을 마시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선행에 자부심을 가지고
주님이 거져주시는 선물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수고해서 자신의 종교적 집단에게 인정받으려 했고,
그들에게 충성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해왔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로 오는 것이 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요4:15) 여자가 그분께 이르되, 선생님이여, 이 물을 내게 주사 내가 목마르지 않게 하시고 또 여기로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하매
The woman saith unto him, Sir, give me this water, that I thirst not, neither come hither to draw.
(요4:16)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부르고 여기로 오라, 하시니
Jesus saith unto her, Go, call thy husband, and come hither.
(요4:17) 여자가 응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하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이르시되, 네가,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하고 잘 말하였도다.
The woman answered and said, I have no husband. Jesus said unto her, Thou hast well said, I have no husband:
(요4:18) 네게 다섯 남편이 있었고 지금 네게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그 점에서 네 말이 참되도다, 하시니라.
For thou hast had five husbands; and he whom thou now hast is not thy husband: in that saidst thou truly.
여인의 죄를 지적하시는 예수님
오늘날 현대 교회가 잘 다루지 않는 구절입니다.
예수께서 구원을 제시하시고 영생을 제안 하시고
그녀에게 마실 수 있는 물을 제시하신 후 다음으로 하신 일이 무엇일까요?
주님은 지금 그녀의 죄를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그녀의 삶에 손가락질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 교회에서 언급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에 복음은 죄를 지적하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보여준 방식대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이 필요한 이유는
그들에게 죄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놓쳐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이유는 우리의 죄때문인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지적하는 일에 망설이지 않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의 문제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범법자이고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죄인이 아니라면 우리에게 구원자가 필요할 이유가 없습니다.
구원은 여러분을 죄로부터 구원해준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자란 여러분을 죄로부터 구원해 줄 분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요4:19) 여자가 그분께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보니 선생님은 대언자로소이다.
The woman saith unto him, Sir, I perceive that thou art a prophet.
이 여인은 예수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의 기본 성정이 지금과는 매우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죄를 지적하면 그들은 화를 내거나 불쾌해 하거나
뭔가 집어 던지면서 싸우자고 덤비는 자세를 취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여인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죄를 언급하자
오히려 매우 합당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겸손해져야만 합니다.
이것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취해야 할 마땅한 자세일 것입니다.
(요4: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경배하였는데 당신들은 이르기를, 사람들이 마땅히 경배해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나이다, 하매
Our fathers worshipped in this mountain; and ye say, that in Jerusalem is the place where men ought to worship.
(요4:21)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너희가 이 산에서도 아버지께 경배하지 아니하고 예루살렘에서도 경배하지 아니할 때가 이르느니라.
Jesus saith unto her, Woman, believe me, the hour cometh, when ye shall neither in this mountain, nor yet at Jerusalem, worship the Father.
(요4:22) 너희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에게 경배하고 우리는 우리가 경배하는 것을 아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기 때문이라.
Ye worship ye know not what: we know what we worship: for salvation is of the Jews.
(요4:23) 그러나 참되게 경배하는 자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경배할 때가 오나니 곧 지금이라. 이는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그렇게 경배하는 자들을 찾으시기 때문이니라.
But the hour cometh, and now is, when the true worshippers shall worship the Father in spirit and in truth: for the Father seeketh such to worship him.
(요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그분께 경배하는 자들이 반드시 영과 진리로 그분께 경배할지니라, 하시니라.
God is a Spirit: and they that worship him must worship him in spirit and in truth.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것은 바로 우리 각 개인과의 교제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구원을 위해 주님을 찾아 줄 각 개인을 찾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감동이 되어서
자기 죄를 깨닫고 기꺼이 주님을 영접할 자를 찾고 계십니다.
주님은 바로 그 사람과 개별적 관계를 맺고 일을 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증인이나 몰몬교나 가톨릭 교회는
자신의 교회의 일원이 될 것을 요구하고 자신들이 만들어낸
교리를 따를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거리로 나가서 전하는 것은
자신의 지역 교회나 목사님을 알리러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길 원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람들에게 구원자에게 가라고 외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해 나가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과 예수님과 가능한 가까운 관계를 맺고 생활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는 교회를 다니게 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직접 하나님께 경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제사장을 통해서 하나님께 경배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놀라운 축복입니다.
우리는 교회 목사를 통해서 하나님께 우리의 의견을 전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과거 2천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로마 가톨릭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우리는 담대하게 주님의 은혜의 왕좌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요4:25) 여자가 그분께 이르되,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분이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분께서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리이다, 하매
The woman saith unto him, I know that Messias cometh, which is called Christ: when he is come, he will tell us all things.
(요4:26)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이르시되, 네게 말하고 있는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Jesus saith unto her, I that speak unto thee am he.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아라고 밝히고 계십니다.
이 시대의 여성과 사람들이 메시아를 찾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야 올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고
곧 오실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구약은 메시아가 2천년 전에 오실 것을 예표로 알려주셨고
그 시간표대로 메시아가 오셨던 것입니다.
지금 우물가의 한 여인에게 자신이 메시아라고 정체를 드러내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 말씀을 믿은것입니다.
(요4:27) ¶ 이때에 그분의 제자들이 와서 그분께서 그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겼으나 아무도,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녀와 말씀하시나이까? 하고 말하지 아니하더라.
¶ And upon this came his disciples, and marvelled that he talked with the woman: yet no man said, What seekest thou? or, Why talkest thou with her?
현대 기독교 여성들은 이런 여성 차별적인 자세를 반가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성경에 기록된 이런 여성 차별적인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을 비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애를 들여다 보면
예수님은 여성들을 무시하거나 억압적인 자세로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자들을 사회적 편견없이 자유롭게 대하고 계셨습니다.
오늘날 여자들이 누리는 자유의 결과는 어떨까요?
오늘날 여자들은 많은 자유를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여자도 경찰, 군인, 정치인, 그리고 대통령도 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성들이 너무도 자유로워서
더이상 남성의 도움없이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이상 남자들의 사랑과 보호가 필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 결과가 가져온 우리 사회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집안에 어른이 없는 핵가족 사회가 되었고
이제는 아버지 조차 집에서 역할을 할 자리가 없는 사회와 가정이 되었습니다.
각 개인을 위해서는 참 좋은 나라가 되었지만
그것이 정말로 여자들과 아이들에게 좋은 사회가 된 걸까요?
가족을 구성해 나가는데 좋은 결과를 가져온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자들이 좋은 남편이 되길 원하고
좋은 아버지가 되길 원하고 신실한 아버지가 되길 원하십니다.
그러나 오늘의 사회는 남자들이 성경적 기준을 따르지 않아서
여자에게 남자가 필요없는 사회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안하는 성경적 방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수님과 성경은 오늘 날의 사회가 제안하는 것 보다
훨씬 뛰어난 해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남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는 것과 같이
자신의 아내를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건강한 사회를 위한 최고의 해법인 것입니다.
이것은 이 사회에서 남자를 제거하는 것 보다 뛰어난 해법인 것입니다.
세상은 남자가 남자답게 거세고 공격적인 모습을 보이면
사람들은 그것을 나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자가 공격적이고 거친 남성적인 모습을 보이면
그것은 괜찮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것은 성경이 말해주는 모습에게 퇴보된 문화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남편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여자도 예수님과 같은 남성을 싫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남자가 좀더 예수님을 닮아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자에게 큰 축복이 되는 모습일 것입니다.
남자들이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랐다면
여자들도 남자가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4:28) 그때에 여자가 자기의 물 항아리를 버려두고 자기 길로 가서 도시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말하되,
The woman then left her waterpot, and went her way into the city, and saith to the men,
(요4:29) 와서 지금까지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보라. 이분은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Come, see a man, which told me all things that ever I did: is not this the Christ?
(요4:30) 이에 그들이 도시에서 나와 그분께로 오더라.
Then they went out of the city, and came unto him.
(요4:31) ¶ 그 사이에 그분의 제자들이 그분께 간청하여 이르되, 선생님이여, 잡수소서, 하거늘
¶ In the mean while his disciples prayed him, saying, Master, eat.
(요4:32)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하시니
But he said unto them, I have meat to eat that ye know not of.
(요4:33) 그러므로 제자들이 서로 이르되, 누가 그분께 잡수실 것을 가져다 드렸는가? 하매
Therefore said the disciples one to another, Hath any man brought him ought to eat?
(요4: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끝마치는 것이니라.
Jesus saith unto them, My meat is to do the will of him that sent me, and to finish his work.
(요4:35) 너희가 말하기를, 아직 넉 달이 남아 있고 그 뒤에 수확할 때가 이른다, 하지 아니하느냐?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들을 보라. 그것들이 이미 희게 되어 수확하게 되었도다.
Say not ye, There are yet four months, and then cometh harvest? behold, I say unto you, Lift up your eyes, and look on the fields; for they are white already to harvest.
(요4:36) 거두는 자가 삯을 받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것은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다 함께 기뻐하려 함이라.
And he that reapeth receiveth wages, and gathereth fruit unto life eternal: that both he that soweth and he that reapeth may rejoice together.
(요4:37) 이 점에서,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그 말이 참되도다.
And herein is that saying true, One soweth, and another reapeth.
(요4:38) 내가 너희를 보내어 너희가 수고하지 않은 것을 거두게 하였나니 다른 사람들은 수고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수고에 참여하였느니라, 하시니라.
I sent you to reap that whereon ye bestowed no labour: other men laboured, and ye are entered into their labours.
(요4:39) ¶ 여자의 말이, 지금까지 내가 행한 모든 일을 그분께서 내게 말하였다, 하고 증언하므로 그 도시의 사마리아 사람들 중의 많은 이들이 그분을 믿더라.
¶ And many of the Samaritans of that city believed on him for the saying of the woman, which testified, He told me all that ever I did.
(요4:40) 이에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분께 와서 그분께 간청하여 그분께서 자기들과 함께 머무를 것을 구하니 그분께서 거기에 이틀을 머무르시매
So when the Samaritans were come unto him, they besought him that he would tarry with them: and he abode there two days.
(요4:41) 그분의 말씀으로 인해 더욱 많은 사람이 믿고
And many more believed because of his own word;
(요4:42) 그 여자에게 이르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 때문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직접 그분의 말을 들었고 이분께서 참으로 세상의 구원자 그리스도이신 줄 알기 때문이라, 하였더라.
And said unto the woman, Now we believe, not because of thy saying: for we have heard him ourselves, and know that this is indeed the Christ, the Saviour of the world.
아무도 이런 결과가 생길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아무도 이 작은 여자가 물동이를 들고 우물로 오는 것을 보고
그녀가 그 도시에 부흥을 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에게는 별로 중요하게 보이지 않았던 한 사람의 혼을
예수님께서 겸손으로 돌보심으로 이런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이 여인은 다섯 명의 남편이 있는 여자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회적 장벽을 넘어 만나야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거리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만날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회적 편견으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나야 할 때가 있습니다.
만나서 이야기 해 봐야 별 소득이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예수님께서 사회적 장벽을 넘어 한 여인을 구원하고
그여인을 통해 한 마을에 부흥이 일어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런 결과를 가져온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사회적 약자를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게
소중하게 구원의 대상으로 보시고 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그 여인을 그렇게 겸손하고 친절하고 따듯하게
대하셨는지 아십니까?
그것이 바로 우리가 가져야할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을 대할 때도 다르지 않게 대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보여준 동일한 자세로 사람들을 대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을 똑 같이 대하신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육신의 피곤함 만을 생각하고
대화를 멈추고 그곳에서 휴식만 취하셨다면,
그날 그렇게 많은 혼들이 구원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언제 이런 기회의 문이 열릴지 모릅니다.
우리는 항상 꾸준히 준비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언제든지 말씀의 검을 사용할 수 있도록 훈련되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피곤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도 기회가 주어졌을때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혼을 구하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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