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621 금요기도회: 시편 8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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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무더위 가운데서도 오늘도 저희를 금요기도회 자리로 인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인생을 살아가기가 참 벅찬 저희의 삶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시니 벅차더라도 기쁨이 있습니다. 오늘도 저희의 무거운 짐 다 아시는 그리스도께로 나아갑니다. 저희의 기도를 들으시고 위로와 소망을 주시옵소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저희의 기도를 들으심을 믿습니다. 이 시간도 하나님과 함께하는 은혜를 누리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함께 읽을 하나님의 말씀은 시편 84편입니다. 제가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시편 84 NKRV
고라 자손의 시, 인도자를 따라 깃딧에 맞춘 노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 보옵소서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금요기도회에 나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무더위 가운데서도 더위를 뚫고 함께 기도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모릅니다. 오늘도 이 복을 누리기 위해 함께 말씀을 같이 듣고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시편 85편을 함께 살펴볼텐데요. 이 85편은 고라 자손의 시편으로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하는 것을 한탄해하며 어서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고 싶어하는 마음이 담긴 시편입니다. 함께 이 85편을 살펴보면서 이 시편 기자의 마음이 곧 우리의 마음이 되면 좋겠습니다.
먼저 1절에서 시편 기자는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라고 시작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장막이라는 건물이 아름답고 예뻐서라기 보다는 장막에서 하는 행위, 즉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곳이 바로 장막이기 때문에 이 장막이 사랑스럽다는 뜻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군대를 움직이시고 통치하시는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어디에서든지 계실 수 있으시지만, 특별히 자신의 백성과 함께 하시기 위해 임재하시는 장소로 이 장막을 택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시편 기자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이 장막이 너무 좋은 겁니다. 이곳에 머물길 원하며 이곳을 영원히 사모하길 원합니다.
그러나 이 시편 기자에게는 그것이 허락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2절을 보면 이 시편 기자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라고 합니다. 지금 시편 기자의 상황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장소인 장막 또는 성전, 그리고 2절의 표현에 의하면 여호와의 궁정에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그곳이 너무나 좋은 곳인 걸 알지만, 지금 갈 수가 없습니다.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지만, 사모할 수만 있는 상황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해야 힘도 얻고 기운도 나는데, 그러질 못하니 영혼이 쇠약해집니다.
우리 인간은 너무나 좋은 것이 있다면 그것을 경험했거나, 또 그 좋은 것을 사모하면 할수록 그것이 나에게 없을 때에는 그만큼 마음 속이 공허해지고 쇠약해집니다. 우리가 삶 속에서 비슷한 경험을 하지 않습니까? 내가 무엇인가를 할 때 기뻐하거나 즐거워하던 것이 사라지거나 그것을 하지 못하게 될 때 일이 손에 안 잡히기도 하고 계속 그것만 우리 머리 속에서 생각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마음이 약해지고, 몸도 마음 따라서 약해지게 됩니다. 시편 기자는 자신에게 완전한 만족과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으니 그만큼 쇠약해지는 것을 지금 경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부르짖습니다. 시편 기자의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시편 기자의 마음과 육체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성전을 너무나 갈급해 하기 때문에 그것이 필요하다며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 부르짖는 내용이 3절부터 시작됩니다.
시편 기자는 먼저 자신의 상황과 대조되는 성전에 있는 자들을 부러워합니다.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 자리를 얻었나이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갑자기 참새와 제비를 언급하는데요. 핵심은 “주의 제단에서”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처소인 성전에 참새도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를 둘 수 있는 보금자리를 얻습니다. 바로 비천한 존재인 참새와 제비조차도 시편 기자의 “왕,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이신 분의 집에 자신의 보금자리를 얻었는데, 지금 자신의 처지는 그곳에 가지 못한다는 것을 한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뒤 4절에서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습니다.”라고 이어서 말하는데요.
이것은 비천한 새들도 주의 집에서 머무는데,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얼마나 복이 있겠냐는 뜻입니다. 이것을 시편 기자의 마음을 녹여서 표현하자면 “비천한 새들조차 성전에 머무는 특권이 있는데, 하물며 거기는 머무는 자들은 얼마나 복이 있으랴!”입니다. 성전에 가지 못하는 이 시편 기자는 주의 집에 살며 거주하는 이들이 얼마나 복 있겠냐면서 부러워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복을 누리고 있는 주의 집에 거주하는 자들은 항상 주를 찬송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집에 거하며, 거기서 주님을 찬양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안전과 복이 있는 이 성전을 즐기고 있는 비천한 새들부터 시작해서, 사는 사람들까지 부러워하는 이 시편 기자는 언제나 이 성전에 있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 기자의 간절한 이러한 바람은 성전에 사는 자들이 받는 복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말하는 것에서도 나타납니다. 5-7절이 그 복에 대한 내용인데요. 이것은 이 하나님의 집을 향한 여정 속에서 받는 복입니다. 우선 5절에서 시편 기자는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시온의 대로가 있다”는 것에서 “시온”은 예루살렘에 있는 산의 이름으로서 예루살렘을 대신해서 쓰는 말입니다. 예루살렘에 무엇이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이 임재하신 성전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시온의 대로가 마음에 있다.”는 것은 마음 속에 하나님이 계신 성전에 가는 길이 마음에 있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 하나님의 집을 가는 여정 속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힘을 얻고 그 마음에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기대와 사모함이 있는 자는 복이 있다는 겁니다.
심지어 그 복은 이 여정 속에서 어려움과 고난이 있더라도 마찬가지라고 시편 기자는 말합니다. 6절을 보시면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 순탄하지 않고,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눈물 골짜기를 지나갈 수가 있습니다. 마냥 기쁨만 있고, 포장이 잘 되어 있는 길만 갈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여정 중에 정녕 그런 순간이 있더라도 복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여정 속에서 하나님께서 채워주시고 보호하시는 것을 경험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6절을 다시 보시면 “눈물 골짜기”라고 하는데, 원어로는 “바카 골짜기”입니다. 이곳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같은 단어가 등장하는 사무엘하 5:24에 보면 뽕나무라고 되어 있지만, 원래는 “발삼나무”로 이 나무가 자라는 계곡은 모래가 많고 메마른 곳이라고 합니다. 바로 이 눈물 골짜기는 “메마른 골짜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메마른 골짜기이니 어떻겠습니까? 물을 마시기가 힘들고 요즘처럼 뜨거운 햇빛이 장렬하게 내리쬐는 곳입니다. 이런 곳에서 시편 기자는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준다고 말합니다. 바로 주님을 만나러 가는 여정 속에 이런 어려움을 만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많은 샘을 주시고 비를 내리게 하셔서 어려움을 면하게 하는 복을 주시는 다는 겁니다. 메마른 골짜기이지만 그곳에 하나님께서 은혜와 복을 베푸시니 그곳은 더이상 어려움과 역경의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복된 장소가 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은혜를 여정 중에 경험한 자들은 7절에서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게 됩니다. 여정이 비록 순탄하지만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통해 복을 누리게 되니 더더욱 힘을 얻고, 성전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까지 하나님이 얼마나 좋은 분이신지를 더욱 확신하며 여정을 이어 나갑니다.
이것이 시편 기자가 누리고 싶은 복입니다. 성전에 자신도 거하고 싶고, 성전까지 가는 길에서 받는 복도 누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비천한 새들도 할 수 있는 그것을 시편 기자는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 기자의 바람이 너무나 잘 느껴지지 않습니까? 지금 시편 기자는 머리 속에서 상상하고 있습니다.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하나님과 함께하고 있는 행복한 상상과 성전으로 가는 길에서 하나님께서 채워주시고 보호하시는 은혜를 받는 복을 누리는 행복한 상상을 지금 하고 있습니다. 생각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합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 현실이 참담하기만 합니다.
그러니 시편 기자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8-9절입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 보옵소서” 시편 기자는 모든 군대를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을 간절하게 바라며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 보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구약에서 기름을 붓는 것은 직분자를 의미합니다. 구약에서 직분자는 제사장, 선지자, 왕이 있지만,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직분자는 왕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시편 2편에서도 기름 부음 받은 자가 등장하는데, 2편에서도 그 직분자가 왕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얼굴을 살펴본다는 것은 은혜를 베푼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왕의 얼굴을 살펴 봐달라는 뜻은 왕을 통해서 은혜를 베풀어 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세우신 직분자를 통하여 은혜를 베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바로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항상 직분자를 세우시고, 그 직분자를 통하여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왕을 말하고 있으니 대표적으로 다윗을 예시로 들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왕이었던 다윗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많은 복을 누렸습니다. 나라가 아주 잘 살게 되었고 평화의 나라가 다윗의 나라였습니다. 다윗이 어떤 뛰어난 지도력을 가지고 하였기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왕인 다윗이 하나님을 믿고 잘 섬겼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겁니다. 바로 이처럼 하나님은 직분자를 통하여 자신의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렇기에 이것을 알고 있는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을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길 소원합니다.
그리고 그 소원을 10절에서 말하는데요.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말합니다.
앞에서 우리는 시편 기자가 하나님과 함께하는 성전에 머물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그 간절함이 하나님께 간구할 때 이렇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대구법을 사용하여 성전에 거하기를 간절히 소원하는데요. 얼마나 간절한지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낫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다른 곳에서 백 날 천 날을 보낼 바에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단 하루가 훨씬 낫다고 말합니다. 해가 뜨고 지며, 다른 어떠한 것을 하더라도 하나님이 없다면 안된다는 겁니다. 또한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악인의 장막은 하나님 없이 누리는 다양한 것들을 의미합니다. 바로 부귀, 쾌락, 권력 등등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이런 것들만을 추구하는 곳이 악인의 장막입니다. 이곳에서 산다면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열망하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시편 기자는 그곳에 사는 것보다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훨씬 좋다고 말합니다. 더 정확하게는 성전 문지방에 서 있는 게 더 낫다는 뜻입니다. 성전 문지기로 말한다면 자칫 성전 문지기가 별로 좋지 않거나 낮은 위치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어로도 문지방이 더 정확하며 더 중요한 것은 성전 문지기를 맡았던 고라 자손은 성전에 들어오려는 사람이 성전에 들어가도 되는지 꼼꼼히 확인해야 하는 아주 중요한 지위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시편 기자는 성전 문지방에 있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하는 것이며 비록 성전 문지방에 있더라도 악인의 장막에서 사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성전에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가 이러한 선택을 하는 이유는 단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으로만으로도 충분하지만, 더 자세하게 11절에서 말합니다. 11절은 한글 성경에는 나와있진 않지만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하는데요. 그가 성전 문지방에 있는 것이 더 좋은 이유는 바로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시편 기자가 단 하루 성전 문지방에라도 있기를 원하는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든 좋은 것들을 아끼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분을 따르는 자에게는 결코 좋은 것을 아끼지 않으시기에 단 하루 성전 문지방에라도 있기를 시편 기자는 간절히 원합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성전에 있기를 간절히 원하는 이 시편 기자의 바람은 결국 이렇게 찬송하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오늘 85편에서 시편 기자는 성전에 가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성전에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복이 얼마나 큰 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바람은 단 하루 성전 문지방에 있고 싶을 정도로 너무나 간절했습니다. 하나님은 좋은 것을 결코 아끼지 않으시는 너무나 좋은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함께하길 간절히 바랐습니다. 오늘 시편 말씀을 한번 우리 마음에 비춰보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정녕 이 시편 기자처럼 하나님과 함께 하길 간절히 바라고 있을까요? 이 시편 기자의 마음이 곧 우리의 마음일까요?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그 공간과 시간을 이토록 사모하고 있을까요? “단 하루 성전 문지방에라도 있는 것이 좋다.”는 것이 우리의 고백이 될까요?
우리의 마음이 이러한 사모함으로 가득 차야함에도 우리의 삶은 이 고백을 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어쩌면 악인의 장막을 더 사모하고 있진 않은가 모르겠습니다. 세상이 주는 만족, 세상이 주는 기쁨, 돈과 쾌락과 권력과 명예 등 하나님 없이 누리고 있는 악인의 장막에 거하거나 이 악인의 장막에 거하고 싶다는 마음이 우리의 마음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비록 악인의 장막을 사모할지라도 이것을 뛰어넘어 하나님이 계신 성전을 더 사모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9절에서 시편 기자가 말하는 왕을 통해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통하여 복을 주고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 가운데서 항상 하나님을 예배하길 원하셨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을 사모하셨습니다. 그분의 삶은 언제나 하나님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을 사모하지 않는 우리를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바꾸셨습니다. 악인의 장막에 있던 우리를 성전 문지방 정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같이 왕 같은 제사장으로 만들어주심으로 하나님을 바로 만날 수 있는 장소인 지성소에까지 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이렇게 은혜로 우리를 인도하신 그리스도를 기억한다면,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사모함이 없어질 수가 없습니다. 사모함이 사라졌다가도 그리스도를 생각하면 사모함이 불타기 시작합니다. 오늘 시편 기자의 마음처럼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는 간절함이 생깁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영혼이 쇠약해지기에 부르짖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모함으로 인해 찬송가 85장처럼 “구주를 생각만 해도 이렇게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라는 찬송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를 따라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모릅니다. 특별히 매주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찬송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큰 복입니다. 오늘 시편 기자는 이것을 너무나도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것이 매주 허락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눈물 골짜기를 지나더라도 그리스도를 따라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을 사모하는 것이 큰 복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날마다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라며 찬송하게 되는 우리 새순교회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말씀을 두고 같이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계신 성전을 사모하였습니다. 그가 사모한 이유는 하나님과 함께함이 너무 좋기 때문이고 그것이 복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악인의 장막을 즐겨하던 우릴 성전의 문지방이 아닌 지성소로 데려가신 이 은혜에 감사하는 기도를 합시다. 그래서 날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을 사모하며 매주 예배가 기다려지는 우리가 되게 해달라고 이 시간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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