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자, 모르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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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지혜와 용기,
능력과 믿음의 담대함을 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 나오며,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과
주실 은혜를 사모하는 심령으로 귀한 예물 드리는 손길들 있습니다.
감사헌금, 일천번제, 00헌금, 00헌금을 올리오니
받으시고, 만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드릴 것이 차고 넘치게 부어 주시옵소서.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성령의 지혜로 깨닫게하시고,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는 능력과 믿음도 부어주소서.
부족한 종이 말씀을 대언할 때, 나의 연약함은 감추시고
하나님의 지혜만 나타나게 하옵소서.
말씀을 사모하여 주 앞에 나온 우리 영혼을 불쌍히 여기사
성령으로 기름부어 주시고, 내일을 살아갈 새 힘 허락하여 주옵소서.
그렇게 일하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 모든 말씀 오늘도 살아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말씀
전도서 8장 1~8절 말씀입니다.
전도서 8:1–8 NKRV
1 누가 지혜자와 같으며 누가 사물의 이치를 아는 자이냐 사람의 지혜는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의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 2 내가 권하노라 왕의 명령을 지키라 이미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였음이니라 3 왕 앞에서 물러가기를 급하게 하지 말며 악한 것을 일삼지 말라 왕은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을 다 행함이니라 4 왕의 말은 권능이 있나니 누가 그에게 이르기를 왕께서 무엇을 하시나이까 할 수 있으랴 5 명령을 지키는 자는 불행을 알지 못하리라 지혜자의 마음은 때와 판단을 분변하나니 6 무슨 일에든지 때와 판단이 있으므로 사람에게 임하는 화가 심함이니라 7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 8 바람을 주장하여 바람을 움직이게 할 사람도 없고 죽는 날을 주장할 사람도 없으며 전쟁할 때를 모면할 사람도 없으니 악이 그의 주민들을 건져낼 수는 없느니라
할렐루야.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성전에 모인
성도님들을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우리 앞뒤 옆사람과 인사하겠습니다.
왕의 말을 잘 듣고 삽시다.
오늘은 전도서 8장 1~8절 말씀을 통해
“아는 자, 모르는 자”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아는 자입니까? 모르는 자입니까?
내가 스스로 잘 아는 것 같기도 하고, 모르는 것 같기도 하고.
세상을 오래 살았으니 지혜롭다고 할 수도 있는데.
세상 사는 것이 항상 내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다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잘 모르지만 감사함으로 자족하며 사는게
지혜롭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이야기가 지난 주 전도서 4장의 메시지였습니다.
아니면 남들보다 공부를 좀 더 많이 했으면
많이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성경은 또 겸손해야 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스스로 안다고 말하는 것이 정말 지혜로운 것인가.
스스로 내가 아는 자인지, 모르는 자인지 판단하는 것이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왜 우리가 아는 것을
쉽게 안다고 말할 수 없는지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왜 아는 것을 안다고 말할 수 없는지에 대해서
3가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사물의 모든 이치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세상 권력자들의 마음을 다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셋째, 자연의 때와 기한을 다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지혜를 구하고, 지혜롭게 행동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곧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삶에는 질서가 있고, 이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늘 일정하지 않습니다.
더욱 복잡한 것은 인간 스스로 만든 질서입니다.
왜냐하면, 죄악된 인간이 제 뜻대로 하려는 권력자의 비위에 맞춰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 전반적인 부분에서 악의 논리에 의해
흘러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혼돈스럽고 무질서한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지혜일까요?
말씀을 살펴보며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귀한 시간 되기를 소망합니다.
전도서 8:1 NKRV
1 누가 지혜자와 같으며 누가 사물의 이치를 아는 자이냐 사람의 지혜는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의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
1절에서 솔로몬은 지혜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2가지 현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내면의 변화이고, 또 다른 하나는 외모의 변화입니다.
내면의 변화는 사물의 이치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8장 1절의 바로 전에
7장 29절에서 솔로몬은 이렇게 말합니다.
전도서 7:29 NKRV
29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
솔로몬이 말하는 지혜, 사물의 이치를 깨달은 것은
본래 하나님께서 정직하게 지었는데
사람이 많은 꾀를 내어 세상이 무질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물의 이치, 본질을 안다는 것은
본래 세상의 모든 질서가 정직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영역에서 정직함, 곧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능력
그것이 바로 참 지혜입니다.
우리가 그 진리를 깨달을 때,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곧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외면적으로 우리 얼굴에서 광채가 나게 됩니다.
그래서 얼굴이라는 단어의 뜻을 살펴보면
얼은 영혼을 의미하고, 굴을 통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영혼을 보여주는 통로가 곧 얼굴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얼빠졌다고 하면,
영혼이 빠져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영혼이 맑고 총명하면 얼굴에서 빛이 납니다.
이러한 사실을 반증해주는 일화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그림에는
잘 알려지지 않는 일화가 숨겨져 있습니다.
1491년, 로마 교황청은 새로 지어진 수도원의 벽화를 그릴
유명한 화가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이탈리에서 명성이 높았던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불러
예수의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했던 광경을 그려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부탁을 받은 다빈치는 그때부터
그림의 모델로 쓰일 사람을 찾아다녔습니다.
오랜 엄선 끝에 1492년 예수의 모습을 상징할 수 있는
깨끗하고 선하게 생긴 19세의 젊은이를 찾았습니다.
그 후 6년 동안 나머지 예수님의 제자 11명을 찾아
그림을 모두 다 완성했습니다.
다빈치는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팔아넘긴 배반자
가룟 유다의 모델을 찾아다녔습니다.
다빈치가 가룟 유다의 모델을 찾는다는 소식을 듣게 된 로마의 시장은
“로마의 지하감옥 속에 사형을 기다리고 있는
수백명의 죄수들이 있으니, 그곳에서 한번 모델을 찾아보라”
제안하였습니다.
그의 제안을 승락한 다빈치는 로마에서 가장 잔인하고 악랄한
살인을 저지른 사형수 감옥을 방문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사형을 기다리고 있던 한 죄수를 선택하였습니다.
다빈치는 몇 달에 걸친 작업을 통해 유다의 모습을 완성한 뒤
“모델은 이제 감옥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통보하였습니다.
그런데 감옥으로 연행하려는 중에 갑자기 그 죄수가
결박을 풀고 다빈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었습니다.
다빈치 앞에 무릎을 꿇은 살인범은 다빈치에게
계속해서 자신을 모르겠냐고 질문하였습니다.
“당신 같은 사람을 내 인생에서 만난 적이 없소”
다빈치는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그 살인범은 다빈치가 완성한 최후의 만찬을 가리키며
“저기 저 그림 속에 그려진 예수의 모델이
바로 6년 전의 나였소.” 라고 토로하였습니다.
여러분, 이 일화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이겠습니까?
사람은 그 내면이 어떠하느냐에 따라 그 얼굴도 달라집니다.
성령이 충만할 때는 예수님의 얼굴을 닮았다가도
마음 속에 죄악이 가득차 있으면 예수님을 팔아넘긴
가룟 유다의 얼굴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속담 가운데
‘사람은 평생 얼굴이 10번 변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살며 어떤 것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얼굴은 광채가 날 수도 있고, 어둠이 드리워질 수도 있습니다.
만일 내가 거룩하고 고귀한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며
신령한 지혜를 마음 속에 품고 있다면
아무리 못생긴 얼굴이라 할지라도 남들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엄과 진실함이 얼굴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온갖 탐욕과 집착, 이기심과 고집으로 가득하다면
아무리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아름답고 잘생긴 외모라 할지라도
그 얼굴은 점점 어둡고 추한 모습으로 변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 옆사람을 바라볼까요? 옆사람 얼굴이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얼굴입니까? 유다의 얼굴입니까?
제가 볼때는 이렇게 불금에도 세상의 쾌락을 쫓아가지 않고
성령의 불을 사모하여 모인 여러분을 보니
모두 예수님의 얼굴을 닮은 것 같습니다.
여러분, 어떤 마음과 소망을 가지고 살고 계십니까?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하나님의 성품을
여러분 심령에 품고 살아감으로 얼굴의 광채가 나는
예수님의 향기로운 제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 세상 만물의 모든 이치를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면
우리의 영혼에 밝은 빛이 임한다고 전도서는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세상의 질서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지도자, 권력자, 왕에 의해서 다스려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전도서 8:2–4 NKRV
2 내가 권하노라 왕의 명령을 지키라 이미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였음이니라 3 왕 앞에서 물러가기를 급하게 하지 말며 악한 것을 일삼지 말라 왕은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을 다 행함이니라 4 왕의 말은 권능이 있나니 누가 그에게 이르기를 왕께서 무엇을 하시나이까 할 수 있으랴
2절의 ‘왕의 명령’이라고 하는 것은
왕, 절대자가 내린 직접적인 명령이나
강제성을 지닌 지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왕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을 의미합니다.
왕의 생각, 왕의 행동, 목적, 방향성 모든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이치를 아는 지혜를 말하면서
제일 먼저 언급한 것이 왕의 말에 순복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왕의 권세는 하나님께서 부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3:1 NKRV
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런데 오늘날 소위 지혜있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어떻습니까?
권위나 권세를 무시하고 그것을 허물어뜨리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과연 이 사람이 나라를 온전히 이끌 만한 능력있는 사람인가?”
이런 질문을 던지며 권세를 폄하하는 것입니다.
사실 저도 우리나라 정치인, 지도자들에 대해서
그닥 신뢰하거나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세워주고 인정해야되는 이유는
아무리 무능한 지도자라 할지라도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부당한 권력을 향해서
맹목적으로 복종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의 부당함을 알면서도 타협하거나 아부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특별히 잘못된 불의의 명령이나
하나님의 뜻에 위배된 행동이 아니라면
그 권위를 인정하고 순복하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에 등장하는 여러 믿음의 선배들이
그 삶으로 실천했던 일이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권세자들의 악함과 잘못된 행동으로 인해
자신이 고난을 당하기까지 했지만 그 권세를 끝까지 부정하지 않고
존중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그를 인정하여 다시금 그 자리에 앉게 하셨습니다.
그 인물이 바로 다윗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다윗은 사울이라는 악한 왕으로 인해
억울하게 박해를 당하며 도망자 신세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도망다니면서도 사울을 죽일 기회가
2번이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어떻게 했습니까?
결코 사울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이 세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울을 왕으로 세운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자신에게는 사울을 심판할 권리가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도망자 신세를 계속 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삶을 살고 계십니까?
세워진 권위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어떤 지도자는 지나친 권위주의로 그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쁜 지도자입니다. 백성을 생각하지 않는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잘못된 권위주의, 악한 지도자보다 더 나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권위를 무시하고 허무는 것입니다.
권위와 질서가 올바로 세워질 때, 공동체의 질서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때로는 그 권위와 질서를 끝까지 지키려다가
희생과 고통이 따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대가는 값진 것이며,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한 것이기 때문에
그 위에 하나님의 역사가 새롭게 쓰여질 것입니다.
한번 무너진 권위와 질서는 언제든지 또다시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무너뜨리는 것은 한순간이지만 지키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리고
어려운 일이며, 모든 사람이 함께 이루어 가야할 목표입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봅시다.
나는 권위를 세우는 자입니까?
내 뜻과 판단에 맞지 않으면
권위를 허물어뜨리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나의 삶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와 질서가
나의 삶을 온전히 다스리고 있습니까?
세상의 권세를 온전히 인정하며 공동체를 위해
권위를 세우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권위자를 세워야 할까요?
3절에 보면 어떻게 지도자를 세워야 할지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나는 어느쪽에 속하는가 생각해 봅시다.
전도서 8:3 NKRV
3 왕 앞에서 물러가기를 급하게 하지 말며 악한 것을 일삼지 말라 왕은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을 다 행함이니라
“왕 앞에 물러가기를 급하게 하지 말라”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요?
왕의 정책이나 자신의 처우에 대한 불만으로
불쾌함을 드러내거나, 자신이 맡은 직무를 포기하면서
왕에 대한 충성을 게을리 하는 것입니다.
중국의 위촉오 시대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위나라에 신하였던 증종자는 칼을 잘 감정하기로 유명했습니다.
그는 위나라 왕이 오나라 왕에 대해서
원한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이렇게 제안했습니다.
“오나라 왕은 검을 참 좋아합니다.
그러니 제가 오나라에 가서 칼을 감정해주는 척하다가
칼을 뽑아 오나라 왕을 찔러 죽이겠습니다.”
그러자 위나라 왕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네가 그렇게 하려는 것은 너의 이익을 위해서일 것이다.
오나라는 강국이고 부유하지만 위나라는 약하고 가난하다.
그러므로 이익때문이라면 차라리 오나라로 건너가
오나라 왕을 섬기는 편이 나을 것이다.
네가 만약 오나라로 간다면, 이번에는 같은 방법으로
오나라 왕을 위해 나를 찔러 죽이려고 하겠지.”
위나라 왕은 증종자의 제안을 즉시 거절하고
그를 위나라에서 추방했습니다.
약속, 믿음, 우정보다 자신의 이익에 민감한 사람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면 언제든지 배신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실수를 통해서 성장합니다.
그러나 실수와 진리를 훼손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우리가 속해있는 공동체의 왕에게 충성하는 것은
때론 우리의 이익보다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서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배신자처럼 왕 앞에서 너무 빨리 물러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교회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교회의 중직자 중에도 자기 이권과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지도자를 비방하고 성도들을 이간질하는 자들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우리교회는 절대 그런일이 없겠지만,
주변에서 교회가 갈라지고, 무너지고, 흩어지는 것을 보면
남일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뜻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은
그 뜻이 관철되지 않으면 2가지 외에는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몰아내던지, 자기가 제발로 교회를 떠나던지.
타협도, 대화도, 협력도, 배려도 없이
자기의 입장, 자기의 생각, 자기의 계획만을 내세웁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악한 것을 일삼지 말라.
왕은 자기가 하고자 하는것을 다 행함이니라.
왕의 말은 권능이 있나니 누가 그에게 이르기를
왕께서 무엇을 하시나이까 할 수 있으랴.
정말 참된 지혜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이 모든 것을 인정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고
끝까지 악을 행하지 않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왕이 늘 지혜로운 것도 아니고 정의로운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도 어리석은 절대 권력자 앞에서는
진퇴양난의 어려움에 빠지기도 합니다.
지혜롭기 때문에 왕의 말이 옳고 그름을 더 잘 알것입니다.
그래서 더 괴로울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때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권력이니
권위를 존중하고, 맡겨진 일을 주어진 상황에서 해내는 것이
정말로 참된 지혜인 것입니다.
때로는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고, 틀린 것을 거절하는 것보다
언제, 어떻게 그것을 할 것인지가 더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 인생의 명언 중에 하나가 있습니다.
안혼날 생각하지 말고, 덜 혼날 생각을 하자.
때로는 잘못된 것을 말해야 될 때,
싫은 소리를 듣기 싫어서 외면하다가 타이밍을 놓쳐
일을 크게만들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덜 혼날 생각을 하며 타이밍을 봅니다.
여러분도 회사생활 하다보면 이 부분을 많이 느끼실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사안이지만, 상사에게 대표에게
언제 보고하는 것이 좋을지 타이밍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리더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으면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해야 하지만, 그 말을 무턱대로
많은 사람들이 있을 때, 또는 리더가 그 일에 심취해 있을때
초를 치는 분위기로 말을 꺼내면 안됩니다.
그 일이 잘못되었음을 인지할 때,
무언가 중요한 결정을 하려고 할 때, 신중하게 검토할 때,
먼저 물어보거나 기분이 좋아서 들을 준비가 되어있을 때
리더의 타이밍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큰 회사의 CEO는
개인 비서아주 센스있고 유능한 사람을 채용합니다.
비서는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그 말을 다 전하지 않습니다.
꼭 필요한 내용만, 리더가 옳은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하는
내용과 타이밍을 잘 보고 말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잘못된 길을 갈 때에도 끝까지 믿어주고 함께 하는 것이
그에게 옳은 길이라고 한다면 그 길까지 따라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지혜란 사물의 이치를 다 안다고 해서
지혜롭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는 것을 실천하는 순수한 용기가 다 지혜는 아닙니다.
신중한 기다림과 인내가 꼭 필요한 순간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전도자는 우리에게 지혜롭다 말하는 자가
다 지혜롭지 못하다고 교훈합니다.
전도서 8:5 NKRV
5 명령을 지키는 자는 불행을 알지 못하리라 지혜자의 마음은 때와 판단을 분변하나니
여기서 말하는 명령은 세상 지도자인 왕의 명령이기보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면 불행을 알지 못합니다.
불행한 일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참 복된 말이지요.
왜냐하면,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지켜 행하는
지혜로운 자는 때와 판단을 분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혜롭지 못할 때 경험하게 되는
불행한 때와 판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본문 5~8절입니다.
전도서 8:5–8 NKRV
5 명령을 지키는 자는 불행을 알지 못하리라 지혜자의 마음은 때와 판단을 분변하나니 6 무슨 일에든지 때와 판단이 있으므로 사람에게 임하는 화가 심함이니라 7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 8 바람을 주장하여 바람을 움직이게 할 사람도 없고 죽는 날을 주장할 사람도 없으며 전쟁할 때를 모면할 사람도 없으니 악이 그의 주민들을 건져낼 수는 없느니라
성경에서는 지혜롭지 못하면 격게되는 불행에 대해서
5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장래의 일입니다.
우리가 장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아무리 지혜롭다고 해도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사람을 초조하고 근심하게 만듭니다.
둘째, 자연입니다.
자연을 다스릴 능력을 가진 사람을 없습니다.
사람은 바람을 불게 할 수도, 바람을 붙잡을 수도 없습니다.
자연이 반응을 보이고 순종하는 경우는,
오진 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명령하실 때 뿐입니다.
셋째, 생명입니다.
어느 누구도 자기의 생명과 죽음을 정할 수 없습니다.
생명은 온전히 하나님께부터 나와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생명의 시작, 지속, 끝은 모두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넷째, 전쟁과 재앙입니다.
전쟁과 재앙같은 위기를 몰고오는 환경을 미리 알수도 없고
대피할 수도 없습니다.
다섯째, 자신의 실수나 죄입니다.
우리는 나의 과오나 악에서 스스로 건질 수 없습니다.
실수나 죄의 결과는 그것을 행한자를 절대 떠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의 사슬에 묶여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그 죄에서 자유하게 되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이보다 더 지혜로운 선택이 어디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전도서 8장은 계속해서
어떤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인가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의 그 지혜의 한계 또한 말합니다.
세상의 이치를 아는 자가 지혜로운 자이다.
그러나 이 세상이 무질서 하여 그 지혜 또한 온전치 못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세운 세상의 권력자들이 지혜롭지 못하여
악을 행할 때에, 세상의 이치를 알수록 그 어리석음이 보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자들이 괴롭습니다.
괴롭기만 한 것은 지혜롭지 못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인가.
하나님이 세운 지도자이기 때문에 끝까지 인내하며
악법도 법이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세우기 위해
나를 헌신하는 삶이 지혜로운 삶이다.
이시간 “예수 우리 왕이여” 라는 찬양을 같이 고백하기 원합니다.
누가 지혜자 입니까?
누가 사물의 이치를 아는 사람입니까?
진정한 지혜는 창조주 하나님께 모든 때를 정할 권한이 있고,
인간은 그 때를 모르는 무지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무지가 우리를 무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우리에게 더 큰 자유를 줄 것입니다.
누가 아는 자이고 누가 모르는 자입니까?
우리가 모른다는 것을 아는 자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하나님 없이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것이
연약한 우리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참 지혜자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모든 삶, 세상의 모든 이치 가운데
만왕의 왕이 되심을 인정하기 원합니다.
이시간 우리의 왕으로 좌정하여 주시옵소서.
<찬양 - 예수 우리 왕이여>
기도
우리의 한계를 알고 겸손한 마음으로 공동체를 섬기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명령에 알맞은 때와 방법으로 일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7월부터 시작되는 교회학교 여름사역을 통하여서 하나님을 아는 다음세대가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몸과 마음이 연약한 자들을 치유하여 주시옵소서
각자의 기도제목을 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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