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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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성경은 이 세상에 두 나라만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하나의 나라는 제국이고, 또다른 나라는 천국입니다.
다른 표현으로는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입니다.
구약에 수많은 나라들이 바로 제국들입니다.
그러한 제국들 사이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나라가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실패하였고, 그로 인해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제국에 통치당하면 천국을 누리지 못하고, 천국에 통치당하면 제국이 힘을 쓰지 못합니다.
그 나라에 속한 사람은 그 나라의 통치 원리를 따르게 됩니다.
제국의 통치 원리는 돈과 힘 그리고 억압과 착취입니다.
반면 하나님 나라의 통치 원리는 사랑과 정의 그리고 섬김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보십시오.
어떤 원리가 지배하고 있습니까?
뉴스를 보십시오.
맨날 등장하는 뉴스가 전쟁, 불법과 범죄이야기 입니다.
또는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는 돈과 힘에 관한 이야기들 뿐입니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예수님이 가져오신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자라날수 있을까요?
과연 자라나고 있는 것은 맞을까요?
[본론]
오늘 본문의 배경을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지난주 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마치자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그가 예루살렘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유대인들은 바울을 붙잡아 죽이려 합니다.
그때 큰 소동이 일어난 것을 알고 로마군인 천부장이 나타나 바울을 체포해 갑니다.
그곳에서 바울은 천부장의 허락으로 자신을 죽이려고 몰려온 유대인들에게 자신의 간증을 선포합니다.
그러자 더욱 거세게 유대인들은 바울을 죽이려고 암살음모까지 꾸밉니다.
그 음모를 알게 된 천부장은 바울을 호위하여 로마 총독 벨릭스가 있는 가이사랴로 이송합니다.
그곳에서 바울은 로마 총독 벨릭스의 재판을 받게 됩니다.
이 사진을 보십시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변호인을 내세웠고, 바울은 스스로 변론하며 자신의 무죄함을 입증합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이 이어집니다.
24절입니다.
벨릭스는 자신의 유대인 아내인 드루실라의 부탁으로 바울을 불러 복음을 듣습니다.
유대인 역사학자 요세푸스에 의하면 드루실라는 헤롯대왕의 증손녀입니다.
사진에 나온 가계도를 보십시오.
드루실라가 헤롯대왕의 증손녀임을 알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2장에서 연설하다가 벌레에 물려 죽은 왕이 드루실라의 아버지 헤롯 아그립바 1세입니다.
그녀의 남편 벨릭스 총독은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원래 그리스 출신의 황실노예였는데 해방되어 로마 총독까지 올라간 인물입니다.
그가 얼마나 황제에게 아부했으면 노예가 로마제국의 총독이 되었겠습니까?
그는 높이 올라가기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드루실라를 얻은 것도 그것을 보여줍니다.
그녀는 그의 세번째 아내입니다.
드루실라는 미모가 매우 뛰어났는데 벨릭스는 그녀를 어떻게든 얻으려 합니다.
그래서 그 당시 사람을 잘 속이던 마술사를 고용합니다.
그녀는 마술사의 꾀임에 빠졌고, 첫번째 남편과 이혼하고 벨릭스와 재혼하게 됩니다.
그래서 유대인 드루실라에게 벨릭스는 두번째 남편입니다.
이 말은 그녀가 유대인의 율법을 어긴 여자라는 의미입니다.
드루실라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분명 당시 핫이슈였던 바울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남편 벨릭스 총독을 설득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무엇인지 더 알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이 부부 앞에 서게 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바울은 분명 그들이 어떤 이야기를 가진 사람들인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전하며 정의와 절제 그리고 장차 올 심판에 대해서도 이야기 합니다.
탐욕과 욕망에 빠져있던 벨릭스와 드루실라에게 하나님의 정의를 알려줍니다.
절제가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그리고 여기서 돌아서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25절입니다.
벨릭스와 드루실라는 바울을 통해 뭔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길 기대했지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의 양심을 콕콕 찌르는 이야기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의 말을 듣고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회개하지 않습니다.
바울을 멀리합니다.
자신들이 가진 삶의 가치관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붙잡고 있는 것을 놔야 복음을 소유할텐데 놓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제국의 통치원리에 지배당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두려움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금새 그는 오히려 바울을 더 자주 부릅니다.
왜 일까요?
바울에게서 돈을 뜯어내려는 것입니다.
그는 바울이 무죄한 사람인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석방시켜주지 않고 시간을 질질 끌면서 그에게 뇌물을 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자기가 정작 들어야할 하나님 나라 복음이야기는 피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듣고 싶어하는 제국의 이야기, 돈 이야기는 듣고 싶어 바울을 부르는 것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할 헌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탄의 통치아래 살아가는 제국 시민의 모습입니다.
그들에게 진리나 진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실제 관심도 없습니다.
관심있는 척 할 뿐입니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은 자신이 어떤 이득을 얻을지 입니다.
우리나라의 정치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정의나 인권에 대해서 별로 관심없습니다.
그냥 관심있는 척할 뿐입니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은 이런 것들을 이용한 자신들의 정치적 이득일 뿐입니다.
약자의 약함을 자신이 이익을 얻을 기회로 삼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도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바로 벨릭스같은 제국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 제국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과연 바울은 벨릭스가 자꾸 자신을 부르는 이유를 몰랐을까요?
바울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의 은밀한 욕망을 잘 알기에 이를 이용해서 그의 환심을 살수도 있습니다.
그냥 벨릭스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줄수 있습니다.
몰래 뇌물 좀 쥐어주고 석방될수도 있습니다.
누가 볼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27절입니다.
바울은 2년 동안이나 감옥에서 석방되지 못한채 또다른 총독을 맞이하게 됩니다.
2년이면 얼마나 긴 세월입니까?
잘못한게 아무것도 없는데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자꾸 꼬시는 벨릭스에게 돈을 주고 싶은 유혹의 순간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2년이라는 긴 세월을 인내합니다.
왜 바울은 벨릭스를 만족시키지 않았을까요?
바울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제국 안에 살지만 제국 백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벨릭스처럼 자신의 유익을 위해 진리를 타협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아도 아무도 모르더라도 신앙양심을 속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다 보고 계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또한 만약 바울이 뇌물을 주고 석방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 자체가 바울이 무죄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꼴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바울이 벨릭스와 타협하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모든 상황들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손에 자신의 운명을 맡긴 것입니다.
하나님의 완벽한 계획과 완벽한 타이밍을 신뢰한 것입니다.
자신이 석방되지 못하면 또 그럴만한 하나님만의 이유가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그럼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사탄의 통치 아래 있는 제국 백성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하나님 나라 백성입니까?
세상은 원래 다 그래, 살아남으려면 어쩔수 없어 변명하면서 타협한 적은 없습니까?
저 또한 궁지에 몰리니까 세상 방법 쓰더라구요.
제가 대학교 4학년 2학기때 취업준비한다고 리포트 베껴서 냈다가 얼마나 큰 곤욕을 당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제국의 원리를 따라 살아가면 죽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믿음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이제 벨릭스가 떠나자 베스도가 총독이 됩니다.
그는 3일후 곧바로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종교 지도자들에게 부임 인사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종교지도자들은 그를 보자마자 또다시 바울을 고발합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불러달라고 끊임없이 보챕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오면 기회를 봐서 그를 죽이려는 것입니다.
베스도가 새로 부임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자신들 비위를 맞춰줄거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참 놀라운 점은 바울을 죽이려는 그들의 광기입니다.
바울이 2년동안 감옥에 갇혀있었으면 잊을만도 한데 말입니다.
바울은 가둘수 있어도 복음만큼은 그 무엇으로도 가둘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감옥에 있지만 복음은 계속해서 힘을 발휘하고 퍼져나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베스도는 그들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유대인들과의 관계를 좋게 유지하려면 첫번째 요청은 들어주는게 좋을텐데 말입니다.
대신 그는 대표로 몇명이 가이사랴로 와서 바울을 직접 고발하라고 말합니다.
베스도는 어쩌면 벨릭스보다는 원칙주의자 였을지 모릅니다.
아니면 베스도 역시 바울을 암살하려는 그들의 음모를 미리 알았을수도 있습니다.
베스도는 유대인들 대표로 몇 사람이 자신과 함께 가이사랴로 가서 바울을 고발하라고 요청합니다.
그래서 베스도는 곧 가이사랴로 그들과 함께 내려가 바울의 재판을 시작합니다.
유대인들은 분명 바울에게 여러가지 죄목을 씌워 고발했을 것입니다.
그 고발중 하나는 바울이 로마 정부에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8절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결코 황제에 대해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항변합니다.
유대인들은 로마 정부의 힘을 빌려 바울을 처형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을 정치범으로 뒤집어 씌우려 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뜻은 이뤄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증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율법과 성전을 모독했다는데 그것에 대한 증거도 없습니다.
그리고 로마황제에 대한 반역의 증거도 없습니다.
그럼 베스도의 판단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분명 바울에게 무죄판결을 내려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울을 예루살렘 산헤드린 공의회 재판정으로 보내려 합니다.
9절입니다.
성경은 베스도가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다시 보내려는 이유를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려 했다고 말합니다.
베스도 역시 유대인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수가 없습니다.
총독으로서 그의 역할이 유대지역의 치안을 유지하는 것이라서 유대인들의 도움이 중요합니다.
그러니 바울을 그냥 예루살렘으로 보내 문제거리를 없애려 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어떻게 대답합니까?
11절입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황제의 재판을 받겠다고 상소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잘못한 것이 있다면 죽는 것까지 각오하겠다고 말합니다.
베스도 역시 벨릭스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는 분명 유대인들이 증거도 없이 바울을 모함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바울이 결코 로마법을 어긴게 없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비겁하게 바울에게 무죄를 선고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의 눈치를 보며 그의 권력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분명 그는 바울에게 뇌물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는 바울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불이익을 걱정한 비겁한 방관자입니다.
영화중에 ‘목격자’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아파트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을 목격한 사람들이 몇명 있는데 아무도 증언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사건에 말려 들어가거나 보복당할까봐 걱정되서 입니다.
이런 이유라면 좀 나은데 다른 사람들은 살인사건이 소문나면 집값 떨어질까봐 협조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비겁한 방관자였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비겁함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더 많은 사람들이 살해를 당하게 됩니다.
베스도는 분명 벨릭스보다는 나은 총독이었지만 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비겁한 방관자입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정의를 무시합니다.
그 역시 제국의 백성일 뿐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떤 백성입니까?
벨릭스와 베스도 도찐 개찐입니다.
그들은 제국의 통치 원리에 길들여진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정의를 왜곡하고 무시하고 방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바울을 보십시오.
바울은 제국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는 2년의 세월을 견뎌내고 자신의 억울함을 스스로 변론합니다.
바울의 믿음과 인내가 제국 속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계획과 타이밍을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예언대로 결국 로마 황제 앞에 서게 됩니다.
로마 황제 앞에서 복음을 선포할수 있게 된 것은 그가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상황과 자신의 감정보다 더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저와 우리 다카포 식구들도 바울처럼 제국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을 포기하지 않으시길 축복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