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로 와 쉼을 얻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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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배경
텍스트는 콘텍스트 안에서 읽어야 바르게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말이 표현되어지는 상황과 배경을 모르면, 그 말을 오해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입니다. 가령 저와 사이가 좋은 분들께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면 좋은 의미의 인사이지만, 사이가 나쁜 사람에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면 좋은 의미로 들리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억양으로 그 의미가 달라지기도 하기 때문에, 말을 잘 이해하려면 주변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맥락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전해주는 말만 듣고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말 한마디로 판단하지 않고, 신중하게 맥락을 이해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그 때에라는 말로 시작하므로, 바로 앞의 내용을 배경으로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권능을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자신을 믿지 않음을 책망하십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은 그들이 이미 가지고 있던 종교관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켜야 자격을 얻는다는 종교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스스로 자기의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종교관입니다.
이러한 종교관은 사람들의 세계관을 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은 자기의 힘으로 삶을 살아야 하는 운명에 처해진 것입니다.
이러한 종교관은 유대교만의 독특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종교관이라고 말씀을 드렸지만, 인간중심적 세계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게 된다면, 결국 남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 내는 종교, 가치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계관에서는 안에 들어가는 것과 안에 머무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최대한 경계를 긋고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안에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누리기 위해서는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제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쇼핑몰이나 식당 등에 안전과 쾌적함을 위해서는 입장인원을 제한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쇼핑몰과 식당에서는 돈이 없어보이는 사람들은 절대로 안으로 들어오게 해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종교관 세계관에서는 항상 의심의 눈초리로 보기만 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자기를 증명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어떤 면에서든지 더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고 추구해야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보다 가버나움이 더 나쁘다는 것은 그들이 보여주는 행위들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 가짐이 문제임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교회가 이렇게 다른 사람들을 받아주지 못하고, 우리만의 공동체로 변질된다면, 복음이 주인이 되지 않은 모임일 뿐입니다. 그것은 반기독교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모르고 복음도 모르는 태도입니다.
사람들의 겉모습을 보고, 또 그들이 보여주는 행위들을 보고 사람을 받아줄지 아닐지를 결정하는 조직, 다른 사람의 허물을 과감히 덮어주고 연약함을 섬김의 기회로 삼기보다는 뒤에서 헐뜯기 위한 기회로 삼는 조직, 다른 사람의 약점과 부족함을 교제를 위한 신선한 재료로 삼는 조직은 바로 인간중심적 세계관이 장악한 조직입니다. 거기에는 복음이 없습니다. 교회다움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신기한 것은 이런 것을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깨닫지 못합니다.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여기기 때문에 인간중심적 세계관 속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겸손하여 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린 아이들은 스스로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은 그저 은혜를 바랄 뿐입니다. 그러므로, 누구와도 친구가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어린 아이일 때에 친구들과 어떻게 친구가 되었습니까? 돈이 많아서 친구를 사귀었습니까? 잘생기고 예뻐서입니까? 아닙니다. 그냥 옆에 있으니까 친구가 된 것입니다. 그 존재 그 자체를 받아들인 것이지요. 그런 친구가 진짜 친구가 됩니다.
예수님은 그런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자기를 증명하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애쓰며 스트레스 받고 시달리는 세계관 속에 있는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너희를 너희의 행위로 판단하지 않는다. 나는 너희의 친구가 되어줄 것이다. 무슨 유익을 구하기 위해서 이익을 따져서 친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너의 옆에 함께 있어 줄 것이다. 가장 힘들 때 너의 곁을 지키는 친구가 될 것이다. 가장 기쁠 때에 함께 기쁨을 나눌 것이다.
이렇게 누구든지 받아주시는 예수님의 특징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것입니다.
반대로, 세상은 거칠고 교만합니다.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줄 마음이 없습니다. 스스로 교양이 있다고 생각하고 도덕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사실은 사람을 가려서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내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이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조롱하며 했던 말이 생각이 납니다. “자기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할 수 없는 나약한 사람들만이 종교의 힘을 의지한다.”
어쩌면 그것이 맞는 말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나약함때문에 우리는 주께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착각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나약함을 깨닫지 못하거나, 깨달아도 인정하지 못하는 것, 아니면, 그러한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그냥 살아가는 것이 옳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팬인가 제자인가”를 썼던 카일 아이들먼 목사님의 새로운 책 “나의 끝, 예수의 시작”의 서문에서 이런 일화를 소개합니다.
브라이언이라는 교회 성도에게 메시지가 왔습니다. 전화를 부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얼마전 그 18개월 된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전화를 걸면서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몰랐습니다. 그래도 전화를 걸었습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브라이언이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그 아이를 치었습니다. 후진하다가 그만”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먼 목사님은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제가 특별히 할 말이 있으신가요?” 그러자, 브라이언이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고 합니다.
“모든 걸 잃은 것 같은 이 수간, 난생처음으로 예수님의 실재를 경험했습니다. 이게 이상한 일인가요?”
그렇습니다. 저도 설교를 준비하면서 어떤 때는 자신감으로 충만할 때가 있습니다. 설교를 완벽하게 준비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저 스스로 완변하게 준비한 설교인데, 성도님들의 반응이 별로인 경우가 있고, 스스로도 설교에 대해서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제가 계속 생각하고 준비하고 하다가도 설교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데도 설교준비가 완벽히 되지 않았을 때가 있습니다. 사실 거의 매번 그렇긴 합니다만, 그 때에는 정말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다만,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성령님께서 도와달라고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그럴 때에 설교에 대한 기쁨과 감격이 더 큰 경우들이 많았습니다.
잘하려고 하는 부담감을 덜어내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맡길 때에 마음에 평안이 있고, 또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계속 되어가는 과정입니다. 나의 능력을 의지하고 내가 누구인지 증명하려고 발버둥치며 살아가는 것으로부터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고 그 안에서 쉼과 평안을 얻는 것은 지속적인 싸움이 됩니다.
예수님은 그 분께 맡긴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멍에를 함께 지라고 하셨습니다. 노력과 애씀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제 자기를 증명하기 위하여 억눌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유하라는 것입니다.
그 분의 멍에는 쉽지 않고 가볍지 않습니다. 그 길은 고난의 길입니다.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길이기까지 합니다. 그 길이 쉽고 가볍다는 것은 그 분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순교를 당해도 예수님과 동행하는 성도의 고백은 이 길이 쉽고 가볍다라는 것입니다.
오늘 2부 예배 후에는 교회를 섬길 종을 뽑는 임직 투표를 하게 됩니다. 많은 분들이 직분을 받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깁니다. 고난의 길이기도 하고, 불편한 길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초대하고 있습니다. 나와 같이 멍에를 매고 걸어가자. 나와 함께라면 그 길을 잘 지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 세워지는 분들뿐만 아니라, 이미 받으신 분들, 그리고, 앞으로 직분자로 세워져야 하시는 분들께서 이 예수님의 복된 초대에 응답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