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과 나 ② (롬 7:1-12)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5 viewsNotes
Transcript
율법과 나 ② (롬 7:1-12)
<서론>
<image 거울> 거울은 정직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우리를 불편하게 합니다.
이 거울에게 이렇게 물어 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거울은 정직하게 대답합니다. ‘당연히 백설공주 죠’ 동화, 백설공주의 비극은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사실, 있는 그대로를 비춰주는 거울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 사실을 기반으로 자신을 어떻게 만들어 가는가는, 그 거울을 보고 있는 당사자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율법은 우리의 추악하고 연악한 인생의 실체를 비추는 거울이다. 율법 자체는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다만 율법이 비추어 알게 한, 나의 추악하고 연약함을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품안에 있게 해야 한다.」
롬 7:1-6의 본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은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서도 죽임을 당했다」, 그래서「나는 율법으로부터 해방 되었다」
그런데 죄가, 이미 법적효력을 잃은 죄에 대하여, 집요하게 율법을 빌미로, 예수 믿는 우리를 여전히 죄에 얽어 매려하기에, 이를 믿음으로 뿌리치고 율법조문이 아닌 「영의 새로운 것; 성령에 이끌리는 자유인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내용을 살폈습니다.
이어지는 롬 6:7-12은, 이렇게 율법과 나의 법적관계를 믿음으로 수납한 우리에게 「율법이 죄란 말인가?」하는 질문을 던져서, 「하나님 앞에서 율법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라는 내용을 살피겠습니다.
<본론>
1.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 주는 거울입니다(7).
“율법이 죄냐?”고 질문을 제기합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거듭나지 않아 율법의 지배 아래 있을 때, 율법이 우리를 옭아매어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으니, 율법이 잘못된 것아닌가?
전에 우리가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지 않기 했지만, 어쨌든 율법이 우리의 죄와 허물에 대하여 비판하고 판단하고 정죄했으니 율법에 문제가 있다는 말인가?
이에 대한 바울의 답은 “그럴 수 없느니라”입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다”(7中)고 말합니다.
율법이 무엇입니까? 율법은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 구원 받은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아 살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법입니다.
율법은 일차적으로는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구약의 계명, 법령, 규례, 교훈, 명령이지만, 포괄적으로 신·구약에 나타난 성도의 생활과 행위에 관한 하나님의 명령 전체입니다.
율법은 구원 받은 성도라면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기준」으로, 하나님은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마 22:37-40)을 알려 주셨습니다.
기준은 정확한 위치와 상태를 지정합니다. 율법이 성도의 삶의 기준인 것은,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분별해 주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십계명 중에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는 열 번째 계명을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7下)
율법이 “탐내지 말라”고 했기에, 「우리가‘탐심은 죄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탐심 때문에, 사람 사이에 죄를 짓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탐심 때문에 우리는 무척 많이 싸웁니다. 어릴 때는 사소한 물건이나 먹을 것 때문에 싸우다가, 성년이 되어서는 탐심에 이끌려 싸우는 것 자체를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예수 믿고 나서 제일먼저 회개한 것이, 탐심에 의한 싸움이었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코피가 나고 머리가 깨졌어도 싸워서 이긴 것이 너무나 당연하고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나니, 세상 부끄러운 것이 내가 그렇게 싸운 것이었습니다. 우리교회 한주완 처럼 덩치가 크지 못하고, 중학교를 졸업하기 까지 몸무게 40kg대로 키 작고 외소 했기에 더 그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율법;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명령들은 구원 받은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할 지를 가르키는 기준입니다.
그래서 율법; 하나님의 명령들은 거울처럼, 나의 잘못된 것과 연약한 것, 우리의 추악한 것과 부족한 것들을 하나님 앞에서 드러내어, 「성도라면 성경대로 살아야 한다!」 가르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 성경은 우리를 혼내시고 골탕 먹이려는 하나님의 올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받은 자녀가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로 살도록 하며, 하나님께 복 받은 백성이 하나님께 복 받은 백성으로 제대로 살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안내도(map)라는 사실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자신을 매일 매일 율법; 하나님의 명령들 앞에 세움으로, 부끄럽지만 죄송하지만 더욱 하나님의 은혜에 기대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히 세워 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죄는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를 왜곡하여 유혹합니다(8-12).
그러나 죄는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를 왜곡하여 유혹합니다.
죄는 집요합니다. 성도가 예수를 믿음으로 이미 법적 효력이 없는 율법으로, 성도를 지적 질하고 정죄하여 흔들어 대다가, 한 술 더 떠 율법을 이용하여 죄를 왜곡시키고 성도로 하여금 죄 짓게 합니다.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8)
“기회를 타서”는 「기회 되는대로」입니다.
“계명으로 말미암아”는, 「계명을 도구로 삼아」입니다.
“죽은 것임이라”는, 「활동이 없다, 잠자고 있다」는 뜻입니다.
8절을 풀어쓰면, 죄는 기회를 보다가 방심할 때, 율법을 도구로 삼아 죄를 왜곡하여, 탐심으로 죄를 자극하고 활성화시켜 죄 짓게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8下)는, 율법이 말하기 전에는 죄는 활성화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그 실례가 에덴 동산에서 사탄이 하와를 유혹할 때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계명을 주셨습니다.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창 2:16下-17上)
그런데 어느 날, 기회를 보던 사탄이 하와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 3:1下)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창 3:4下-5上)
놀라운 것은, 기가막힌 사탄의 왜곡술(변신술)에 넘어간 하와의 시각입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창 3:6上)
그래서 바울은 9, 10, 11절을 통해, 율법 때문에 자신이 어떤 지경에 있었는지를 고백합니다.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9)
내가 아직 율법을 몰랐을 때는 “내가 살았더니” 죄책감이 없이 즐겁게 살았다. 그러나 율법을 깨닫게 되었을 때, 죄가 살아나서 율법의 정죄를 받아 하나님과 화평이 없는 절망의 상태가 되었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10)
원래 율법은 하나님이 우리를 살게 하기 위해 주셨는데, 오히려 율법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바울은 또 8절의 말씀을 반복적으로 고백합니다. “죄가 기회를 타서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11) 죄가 내가 방심할 때, 율법으로 나를 속여서, 율법으로 심판받아 나를 죽게 하였다.
바울은 죄가 율법을 왜곡하는 시점을 이렇게 말합니다. “기회를 타서”(8), “기회를 타서”(11)
「기회」 (아포르메 ἀφορμή)의 원어적 의미는 ‘원정의 출발점’이나 ‘작전 기지’입니다.
“기회를 타서”는 「죄가 하나님의 율법을 자신의 악한 일을 시작하는 출발점으로 사용 한다」는 의미입니다.
부패하고 타락한 인생은 반항하는 성향을 타고났습니다. 예를 들면 공원에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시오!」, 「꽃을 쩍지 마시오」라는 팻말을 보면, 더 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 말라고? 나는 더 하고 싶은 데 어쩌지?」
이 성향 때문에, 우리는 마치 사춘기의 자녀들처럼, 하나님 말씀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싫어(반항)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부패한 마음을 비출 때, ‘원수를 사랑하라고? 용서하라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지! 나는 절대 손해 볼 수 없어 나는 싫은데?’
그래서 죄(사탄) 율법(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발심을 출발점으로, 율법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본 뜻을 왜곡하여 적극적으로 죄 짓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죄가 기회를 타서” 사탄은 틈만 보이면 달려드는 맹수 같이 우리를 공격합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엄중하게 경고합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근신하라!」술 취하지 말라! 정신을 차리라! 「깨어라!」 지켜봐라! 경계하라
영적으로 깨어 있지 않으면, 기도하지 않으면, 믿음으로 바로 서지 못하면 큰일 난다는 경고입니다.
말씀을 읽을 때마다 내 지혜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이 내 지각을 열어주시도록 성령의 조명을 소망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는 무릎을 펴지 말고, 언제나 ‘말씀 하옵소서! 내가 듣겠나이다!’하며, 하나님의 음성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image 해석자의 집> 『천로역정』에서 존 번연은 「율법이 죄를 일으킨다」는 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크리스찬이 해석자의 집에 갔을 때, 해석자는 손님이 왔다며 응접실이 먼지로 엉망이라며, 열심히 먼지를 비자루로 쓸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온 집안에 먼지가 날려 숨쉬기 어려울 지경이 됩니다.
해석자의 집에서 먼지로 뒤덮인 큰 응접실은 사람의 마음을 상징합니다.
비를 든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상징하는데, 율법이 죄를 깨끗이 해보겠다고 열심히 아주 심하게 쑤석거리자, 사람의 죄를 깨끗이 하는 것은 그만두고, 사람이 숨도 못 쉬게 한다는 내용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율법은 분명히 우리 죄를 불러일으키고 비추는 거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합니다.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12)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바꿀 필요가 없는, 인생과 세상을 구원하기에 오류가 없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하는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거울이 깨끗할수록 나의 흠과 티가 더욱 잘 드러납니다. 그렇다고 거울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옳고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갈수록, 더욱 내 자신의 부족한 모습이 드러나게 되고, 내 자신에 대해 실망하게 된다고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보는 자세는 중요합니다. 율법이라는 거울을 보고, 비극으로 살 것인가? 희극으로 살 것인가는 우리의 반응의 문제입니다.
율법이 드러낸 죄 때문에, 실망 절망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이루지 못하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 값을 십자가에서 치루심으로, 우리의 추한 모습을 다 덮어 주시고 가리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롬 8:1–3). 항상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만 의지하고 소망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