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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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천국

오늘 본문의 시작은 ‘천국은 마치’라고 시작합니다. 마태복음 역시 예수께서 누구이신가를 다루고 보다 분명하게 예수께서 왕이심을 드러내는 복음서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의 저자가 유대인들을 독자로 하여 기록함으로 보다 선명하게 구약과 연결하고 특히 하나님의 왕이심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왕의 신분을 갖는 분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때문이죠. 그래서 1장의 족보로 시작하여 이방의 박사들이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고 시작을 할 때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마태복음 2:2 “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마태복음을 계속해서 읽어가면 ‘유대인의 왕’이신 예수에 대한 부분도 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왕이신 그분이 오셨다면 백성인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는가?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산상수훈이 바로 그것이죠. 5-7장까지의 산상수훈과 이어지는 두 곳에서의 예수님의 말씀은 ‘너희가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것이 구약의 메시지라면 지금 너희에게 왕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세례 요한이 선포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하나님의 백성인 너희는 이렇게 통치를 받아야 한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를 마태를 기록한 저자는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펴야 할 본문 앞에서 어느 부자 청년이 와서 나는 이렇게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켰다 이제 내가 무엇을 더 해야 하는가라라고 질문합니다. 마태복음 19:20 “20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그러자 예수님은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니까 그 청년은 재물이 많았기 때문에 근심하고 갔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9:24 “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이어가신 것이죠. 이런 방식이라면 ‘구원’을 받을수 없다는 것이 제자들의 반응이었고 베드로는 나는 다 버리고 따랐으니까 어떤 보상을 얻겠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한다고 하십니다.
어쩌면 베드로가 듣고 싶었던 보상은 이런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보상인 ‘심판’하는 자리에 함께 하는 것은 판사가 재판봉을 두드리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심판은 예수께서 하십니다. 이미 지난주에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다는 것을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주는 매우 중요한 의미라는 것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때 예수를 따른 사람들의 삶, 즉 하나님의 나라에 통치를 따라 산 사람들이 살아낸 삶은 예수 심판의 결과가 되는 것이죠. 자세한 설명을 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본문이 ‘천국은 마치’라는 것입니다. 읽은 내용이 크게 어려운 이해는 아닙니다. 쉽게 비유를 들어주신 예수님의 표현 때문이죠. 포도원에 일꾼이 필요했고 그래서 하루 한 데나리온을 품삯으로 약속을 했습니다. 1 데나리온은 4인 가족이 하루를 먹는 일당의 기준입니다. 먼저 ‘이른 아침’ 그리고 제삼시 아침 9시에 일꾼을 뽑았고 이어서 12시, 3시에 포도원으로 불렀던 것입니다. 그리고 제십일시라는 표현은 앞서 구시 12시 즉 오후 6시라고 해야 하는데 11시는 5시가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일이 끝나기전 1시간 남았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을 향한 포도원 주인의 말은 ‘너희가 어지하여 종일토록 놀고’입니다. 일이 없으니 할 수 있는 것은 빈둥되고 그 자리에 있는 것 밖에 할 것이 없죠. 그러나 이른 아침이라고 했으니 이들은 ‘이른 아침’에 있지 않았던 것은 분영합니다. 아침 9시에도 ‘놀고’라는 표현은 당시가 ‘이른 아침’에 사람을 대부분 부른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부지런한 사람들입니다. 그 이후부터 ‘놀고’라는 것은 포도원 주인이 어떤 사람인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15절에 ‘내가 선하므로’라고 하는 선은 ‘이른 아침’에 일꾼을 불러가는 다른 주인들과 달리 9시에도 12시에도 3시에도 그리고 5시에도 ‘기회’를 준다는 의도를 읽으셔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8절에서 일어납니다. 그들 모두가 다 한 데나리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맨 나중에 온 자부터 한 데나리온을 줬기 때문에 10절에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11절 ‘집 주인을 원망’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고 있는 왜냐하면 각자가 인정하는 범위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죠. 종일 수고한 사람들의 말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한 데나리온을 주겠다는 말보다 그들의 말이 더 마음에 와닿지 않습니까? 대부분 우리가 남의 일을 할 때 그렇다고 말합니다. 하는 것도 없이 한 시간 알바비를 받는 사람을 보면 얄밉죠. 그러면서도 그런 꿀 알바를 찾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의 답은 오늘 우리가 만나는 세상의 주인처럼 말합니다.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다.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말이 같다고 내용과 질이 같은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본문의 설교가 매우 어렵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전제는 ‘천국은 마치’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에 근거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고 각자의 노력이나 일한 만큼의 보상의 개념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임금이 통치하는 곳은 어떠한가요? 어쩌면 ‘종일 수고, 더위를 견딘’ 노력에 대한 보상을 약속 이상으로도 요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당연히 그렇죠. 여기에 당연함이 세상을 움직이는 원동력입니다. 지금도 노동자의 노동 시간에 대해 말이 많은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일한만큼 더 주겠다. 아니다 지금도 많이 일한더 더 쉬어야 한다. 그래야 노동의 질이 높아지고 가치 창출이 높은 일일수록 쉼을 통해서 가능하다. 그래서 대통령이 ‘최저임금보다 낮은 조건에서 일할 사람이 많다’는 말을 자연스럽게 하는 것이고 이런 생각이 엘리트 의식을 가진 사람들 저변에 깔려 있습니다.
악은 칼을 들고 협박하듯 일을 시키는 것이라고 오해합니다. 하지만 성취한 자에게 더 준다는 보상의 원리를 적용해 마땅히 해야할 다른 것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일하지 않는 가난한 사람에게 국가가 돈을 주는 것을 반대합니다. 많이 벌었으니 많은 세금을 내야 한다는 법에 반대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민주주의의 핵심인 자유보다 복지국가의 부의 분배가 더 높은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틀린 말이 아닌 것 이죠. 내가 종일 수고하여 더위를 견뎌 벌은 돈을 왜 더 내야 하는가? 그렇게 벌어서 산 좋은 아파트인데 높은 세금을 왜 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열심히 공부해서 변호사, 판사, 의사가 되어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은 내 능력으로 번 것인데 왜 우리가 세금을 내야하고 그리고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 어려운 사람에게 줘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지난주 세상 임금에 대한 심판을 다루며 세상 임금이 통치하는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이것입니다.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천국이라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통치 방식을 완전히 오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뜬구름 잡듯 상상으로만 생각하고 있기에 현실성이 없는 것이죠.
아주 오래전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의 이집트인 애굽이라는 곳으로 이주를 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흉년 때문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이곳에서 70여명의 야곱 가족이 430년간 2-3백만명이라는 엄청난 인구로 성장하도록 하는 기회를 만드셨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이런 인구의 증가는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고대 문명들이 성장하고 패망하면서 인류 역시 발전을 했던 것이죠.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면 문명 시스템을 하나님께서도 허락하셔서 그곳에서 인구가 번성하고 하나님의 백성은 그런 가운데 수적으로나 물질적으로도 잘 살도록 하신다는 것은 틀린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창조의 섭리가 드러나는 것이기 대문입니다. 창세기 1:27–28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에 대한 설명에서도 창세기 2:10 “10 강이 에덴에서 흘러 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즉 산과 물이 있어 번성하기에 가장 좋은 상태를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4대 문명의 발원지가 거대한 강을 끼고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미지)영화에서도 이런 장면을 자주 보죠. 아바타와 같은 영화를 생각해 보십시오. 늘 먼저 보여주는 놀랍도록 풍요로운 자연환경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반면 영화 듄이나, 매드맥스 같이 멸망한 세계는 사막과 같이 척박한 자연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도 우리의 이해를 돕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조의 시작은 풍요로운 자연을 인간을 위해 주시고 잘 관리하고 다스리라고 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범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죄’가 번지게 되었고 이러한 영향은 바로 ‘땅’이 영향을 받는 상태가 그 시작이 되었다는 것은 창세기 3:18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우리는 노동의 시작으로만 해석하지만 땅의 제 기능이 상실되고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기 시작했다는 것을 함께 기억해야 합니다. / 의인이 돌아오면 땅이 회복된다. 역대하 7:14 “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죄’가 관영한 즉 하나님을 모르는 상태에서 인간의 번영은 하나님의 지혜를 받은 존재로 문명을 세웁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바벨탑’이 대표적인 인간의 능력을 잘 나타내는 건축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1:3 “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하지만 건축물의 목적은 창세기 11:4 “4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이었죠. 그런 도전을 하나님께서는 언어를 다르게 하심으로 지면에서 인간을 흩었고 흩어진 인간사는 시대에 따라 문명을 세우기도 하고 망하기도 하면서 인류 역사가 지금에 이른 것입니다.
인류의 기억 속에서 천국은 사라졌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갑니다라는 식으로 말을 하면서도 천국에 대한 올바른 이미지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체화되지 못한 이미지가 일종의 환상을 만들고 현실감을 반영하지 못하는 뜬구름 잡는 허구맹랑한 이야기로 들린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천국이라는 표현 대신에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으로 많이 불려집니다. (이미지) 불과 20여년 전만 해도 예수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전도 문구가 빨강색으로 선명하게 쓰여진 팻말을 들고 전도하는 분들이나 계속해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며 거리를 돌아 다니는 분들을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라고 할때 기억할 것은 1 통치와 2 백성 그리고 3 영역 즉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을 다루고 있는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 ‘통치’라는 것입니다.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나 스스로가 왕이 되어 통치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을 앞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 한 가족 그리고 한 민족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인 모습이 어떠한지를 보여 주셨는데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칭하는 민족이죠. 애굽에서 2-3백만명의 사람들이 탈출을 하게 되고 그들은 시내산이라는 곳에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칭호를 받고 하나님은 그들의 ‘왕’이 되십니다.
그렇게 백성으로 살려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데 그 통치의 내용이 ‘율법’입니다. 우리가 대한민국의 법을 지켜서 대한민국 국민으로 정체성을 갖듯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주신 법인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내용이 잘 정리된 성경이 레위기 그리고 민수기에 나타나는 것이죠.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조차도 교만하여서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지 않았고 왕과 백성으로서 약속은 파기되었지만 하나님의 신실하심 즉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파기자인 인간의 배상인 죽음을 대신하여 독생자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사건은 형벌인 죽음을 대신하는 속죄일 뿐만 아니라 다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는 것이 매우 중요한 내용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다시 하나님과 회복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를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세상으로 대비되는 애굽에서 벗어났지만 그들의 정신은 계속해서 애굽에 붙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떠나온 백성은 힘들면 이렇게 말합니다. 민수기 14:1–3 “1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2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3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그때의 백성뿐만 아니라 오늘도 여전히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한 때는 교회 출석도 잘하다가 바쁘다 , 할 일이 있다 하면서 몇 주 빠지는 것은 비일비재하고 아예 몇 년 또는 젊은 시절을 하나님을 벗어나 사는 것을 아무런 문제도 없이 생각하기도 하는 것이죠. 저나 여러분 모두가 세상이 주는 혜택, 즐거움 등 공급받는 모든 것에 대한 긍정도 부정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버리고 산 속에서 나 혼자 살듯 살아야 한다는 오해를 하시면 안 됩니다. 하지만 세상이 우리의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설화에 선녀가 나무에게 옷을 빼앗겼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잊지 않고 결국은 본향으로 돌아갔고 여차해서 나무꾼도 하늘로 올라갔지만 그에게 정체성은 땅에 있었고 어머니를 잊지 못하고 내려온 나무꾼은 여차저차해 땅에 발을 딛지 말라는 말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땅에 떨어져 이 땅에서 죽었 지금도 닭이 하늘을 처다보면 운다는 교훈처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면서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인지 세상 임금의 백성인지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죠.
본문으로 다시 돌아 오겠습니다. 주인이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라고 묻습니다. 이른 아침의 부지런함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은 그리고도 몇 번이나 나와 놀고 있는 이들을 불러 일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살아가야 할 하루의 품삯을 시간에 따라 합리적으로 나누지 않고 자신의 약속에 따라 모두에게 적용하셨습니다. 그렇다고 부지런한이가 나도 다음부터는 늦게 나올거야라고 말하며 ‘기회’를 악용하려 해서는 안되는 것 아닙니까? 천국은 주시는 자의 선한 의도가 각자의 삶에서 착한 행실로 드러나야 합니다. 여기에 ‘네가 악하게 보느냐’에 방점이 있습니다. 선한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 보기 시작하면 ‘악’하게 되는 것이 세상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그런 방식은 하나님과 대적하는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척점에 서는 방식 즉 세상 임금의 방식이자 심판 받을 방식입니다.
먼저 되었다고 말할 대 우리는 나중 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앞둔 시점 평범할 것 같은 우리의 일상 속에서 당연함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그저 마음 한구석에 신앙의 대상을 모신다는 느낌이나 감정의 변화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의 실재를 다루는 것임을 분명하게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어느 나라에 속한 백성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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