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623 청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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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3:1–12 (NKRV)
1 유다의 여호사밧 왕 열여덟째 해에 아합의 아들 여호람이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을 열두 해 동안 다스리니라
2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그의 부모와 같이 하지는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그의 아버지가 만든 바알의 주상을 없이하였음이라
3 그러나 그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를 따라 행하고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4 모압 왕 메사는 양을 치는 자라 새끼 양 십만 마리의 털과 숫양 십만 마리의 털을 이스라엘 왕에게 바치더니
5 아합이 죽은 후에 모압 왕이 이스라엘 왕을 배반한지라
6 그 때에 여호람 왕이 사마리아에서 나가 온 이스라엘을 둘러보고
7 또 가서 유다의 왕 여호사밧에게 사신을 보내 이르되 모압 왕이 나를 배반하였으니 당신은 나와 함께 가서 모압을 치시겠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올라가리이다 나는 당신과 같고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같고 내 말들도 당신의 말들과 같으니이다 하는지라
8 여호람이 이르되 우리가 어느 길로 올라가리이까 하니 그가 대답하되 에돔 광야 길로니이다 하니라
9 이스라엘 왕과 유다 왕과 에돔 왕이 가더니 길을 둘러 간 지 칠 일에 군사와 따라가는 가축을 먹일 물이 없는지라
10 이스라엘 왕이 이르되 슬프다 여호와께서 이 세 왕을 불러 모아 모압의 손에 넘기려 하시는도다 하니
11 여호사밧이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물을 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없느냐 하는지라 이스라엘 왕의 신하들 중의 한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전에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 사밧의 아들 엘리사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12 여호사밧이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있도다 하는지라 이에 이스라엘 왕과 여호사밧과 에돔 왕이 그에게로 내려가니라
2% 부조할 때 라는 이름의 음료수가 있다. 몸에 수분이 2% 부족할 때 갈증을 해소하는 음료하는 의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조금 아쉬움이 느껴질 때 2% 부족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합의 뒤를 이어 북 이스라엘의 왕이 된 여호람에게 딱 맞는 말이다.
여호람은 우리가 잘 아는 아합의 아들이다. 그의 부모인 아합과 이세벨은 바알을 섬기는데 있어 최선을 다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흔히 여호람도 바알을 섬기는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을 할 수 있는데 오늘 본문을 보면 그렇지 않다.
하지만 성경이 기억하는 것은 그의 부모만큼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여호람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을 행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악이 부모의 악과는 달랐다는 것이다. 여호람의 부모인 아합과 이세벨은 단순한 우상 숭배 차원을 넘어 북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에 우상과 신당을 세움으로써 다른 어떤 왕들보다 더 큰 여호와의 노를 촉발시켰다. 또한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대량 학살하고 그 대표자라고 할 수 있는 엘리야까지 죽이려고 했으며, 거짓 어용선지자들을 고용하여 자기의 정책의 도구로 이용하고 여기에 반하는 참 선지자들의 예언을 대적하며 그들을 끝까지 핍박했다.
이러한 사실들과 비교할 때, 아합과 이세벨의 아들인 여호람은 오히려 부왕이 만든 우상을 제거했으며 선지자들에게 적어도 적대적이지는 않았다. 아울러 그는 종종 선지자 엘리사를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신탁을 듣고 이에 따라 행동을 취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그의 부모 아합과는 다른 행동의 면모를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성경이 분명히 이야기 하는 것은, 그럼에도 여호람은 과거 여로보암이 했던 죄를 그대로 따라 행했다는 것이다. 여로보암이 했던 죄된 행동은 여러가지가 있는데 일반인을 마음대로 제사장에 임명한 것, 제사의 절기를 임의로 바꾼 것, 백성의 종교심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금송아지 다시말해 우상 정책을 쓴 것이다.
금송아지 다시말해 우상 정책이 무엇인가하면, 당시 이스라엘 민족이라고 하면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전체의 사람들은 일년에 3번씩 절기마다 한곳에 모여 예배 드렸어야 했다. 그곳이 바로 예루살렘이다. 그런데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갈라지고 나서도 계속해서 절기가 되면 북이스라엘 사람들이 남유다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모습이 당시 북이스라엘 왕인 여로보암눈에 보기 좋았겠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이 사람들이 남유다로 내려가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듣고 올지 모르는 일 아닌가? 남유다가 살기 좋으니 남유다로 내려와 살자! 라든가 북이스라엘 왕을 죽이려는 음모를 모의 할 수 도 있는거 아닌가?
그래서 여로보암이 머리를 써서 한게 뭐냐면 북이스라엘 가장 끝인 단과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곳인 벧엘에다 성소를 세우고 그곳에다 금송아지를 놓고 이것이 하나님이다! 라고 말하면서 앞으로 남유다에 있는 에루살렘이 아닌 단과 벧엘에 가서 예배 하면 된다고 한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정책을 여호람이 그대로 따랐다는 것이다. 그런데 ‘따라 행하다’로 번역된 원어의 뜻은 집착하다, 고수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여호람이 여로보암의 정책을 그냥 아무생각 없이 전에도 했으니깐 그냥 하는거지~ 이런 마음이 아니라 그것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고수하는 마음으로 강직하게 지켜 나갔다는 말이다.
그리고 여호람은 그대로 주~욱 영원히 떠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니깐 여호람은 겉으로 볼 때는 그의 부모의 잘못을 잘못으로 인정하고 부모의 길을 따라가지 않는 것 처럼 보이지만, 그래서 죄를 청상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 마음 중심은 계속해서 죄를 고수하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소위 은혜 받았을 때, 평안을 누릴 때는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위기가 찾아오면 그때서나 나의 진짜 모습이 나오는 것이다. 극한의 상황속에서 그 사람의 진짜 성격이 나오는 것 처럼,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다. 좋을 때는 모른다. 자기 자신도 속는다.
진짜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예상하지 못한 상황과 환경을 만났을 그때 나오는 것이다.
복음서에 나오는 부자 청년이야기를 다들 알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부자 청년은 도대채 얼마나 많은 부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을까? 그리고 그것도 청년이다. 부자 아저씨, 부자 할아버지가 아니라 부자 청년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20대 성공한 사업가 뭐 이런 것이다. 그런데 돈만 많은 것이 아니라 종교생활도 훌륭하게 하였다.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겠냐고 예수님께 물었다. 그런데 정말 몰라서 예수님께 나와 물은 것이 아니다. 당시 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무리들 앞에 나와 이야기 할 정도면 그의 종교생활을 흠 잡을 때가 없는 것이다. 자신의 의를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고 또 예수님께 드러내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의 질문에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그 답을 해주셨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십계명의 말씀이다. 거기에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그 말을 들은 부자 청년의 답이 무엇인가? 예수님 그것은 이미 지금 다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그말을 들은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는가? 그래 잘하고 있다. 그러면 계명도 잘 지키고 이웃도 사랑하고 있으면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나와 함께 다니자. 그랬더니 부자청년은 근심하며 돌아갔다.
우리의 믿음은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아니 상상하기 싫은 그 순간에 우리의 진짜 믿음이 나오는 것이다.
여러분의 믿음은 안녕합니까?
우리는 어떠한 상황일지라도 거룩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포기하지 말고 한번 실패해도 두번실패해도 다시 일어나 주님을 붙잡길 바란다.
피조물인 우리 인간은 창조자이자 절대자이신 하나님께 온전히 우리의 삶을 의지해야 한다. 여러분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지킬 수 없다. 내 의지와 내 결단으로 나의 신앙을 지킬 수 없다. 우리는 늘 무너진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을 의지해야 한다.
그런데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의지하는 것은 요구한다는 것이 아니다. 필요할 때만 찾고, 내 필요만을 채우려하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태도는, 나의 판단을 내려놓고 주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모압의 반란은 여호람에게 위기였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 상황에서 성도는 한나미의 인도하심을 바라며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호람은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그 어려움을 헤쳐 나아가려 했다. 그래서 남유다와 에돔과 연합해 정치력과 군사력으로 위기를 극복하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능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어려움이 더욱더 쌓이게 된다.
이대 남 유다 왕 여호사밧이 그제서야 선지자를 찾는다. 일을 시작할 때는 하나님을 잊고 있다가,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문제가 나타나자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하나님은 도깨비 방망이가 아니다. 알라딘의 요술램프의 지니가 아니다. 우리의 필요만을 채워주시기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온전한 신앙생활을 우리의 필요를 채우는 행위가 아니다. 그런데 은혜는 무엇인지 아는가? 그러한 기도도 하나님은 들어주신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은 다 아시면서도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신다. 왜그런간?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수없이 계속해서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온전한 신앙생활은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고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만을 구하는 신앙이 아니다. 자신에게 무언가 필요한 것이 생겼을 때 그것만을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신앙도 아니다. 우리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먼저 묻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내 마음에 합한지의 여부와 상관없이 주님의 음성을 청종하는 태도이며 그러한 삶이 내게 가장 귀함을 고백하며 살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