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하게 보이지만 어리석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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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비유
예수님의 비유
누가복음 12장 13~21절
탐심은 다른 사람의 소유에 대한 욕심을 의미합니다. 헬라어로는 ‘더 움켜쥔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탐심은 모든 인간이 가진 보편적인 죄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도 탐심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부자도,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아무리 나쁜 사람도, 아무리 선한 사람도, 다 탐심이 있습니다. 감추고 있을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탐심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예수님은 이 탐심의 문제에 관하여 가르쳐주시기 위해 한 가지 비유를 드시는데, 이 비유를 소위 ‘어리석은 부자 비유’라고 합니다. 이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도 다 있는 탐심의 문제를 우리가 함께 살펴보며 해결책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탐심의 정체 (13~15절)
이 말씀을 하시던 당시 예수님은 엄청난 인기를 끌고 계셨는데, 12장 1절에 보면 “그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다고 되어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 무리 중에서 한 사람이 예수님 앞으로 나와 한 가지를 요청합니다. 그 수많은 무리를 뚫고 나왔으니 대단한 사람입니다.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13절)
이 사람에게는 형이 있는데, 그들의 부모님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자기에게 돌아갈 유산까지 형이 다 가로채서 화가 난 동생은 이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바라면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구약의 모세 율법에 따르면, 재산을 분배할 때 장남은 항상 다른 형제들의 두 배를 받습니다. 그러니까 형제가 아홉 명이면 재산을 10등분 해서, 장남이 두 몫을 가지고 나머지 여덟 명은 한몫씩 받는 것입니다. 본문처럼 형제가 둘이라면 형이 2/3를 받고, 동생이 1/3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형이 자기 몫까지 전부 다 가로채서 화가 난 것입니다. 재산이 조금이었으면 예수님에게까지 나오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재산이 꽤 많은 집안이었던 것으로 보이고, 그래서 이 사람은 형에게 빼앗긴 것이 분해서 예수님에게 이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나온 것입니다. 그것도 예수님께 와서 유산을 제대로 나누도록 형에게 명령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이때 예수님은 약간 의외의 대답을 하십니다.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14절)
이 말씀을 그냥 보면 예수님은 이 사람의 문제에 관심이 없으신 것으로 보이고, 오히려 그를 나무라시는 것이나 짜증내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지금 재산을 나누는 문제가 핵심이 아니라, 그보다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돈 문제를 해결하고 끝날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돈 문제, 유산 문제만 해결해주면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느냐고 하시는 겁니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하십니다. 우리에게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문제가 있고, 그것을 해결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15절)
예수님은 재산을 가로챈 형을 고발하는 동생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것을 보십니다. 형이 물론 잘못했지만, 동생에게도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십니다. 그러니까 동생의 몫을 가로챈 그의 형에게는 ‘탐심’이라는 죄가 있는데, 빼앗겨서 억울해하는 동생의 마음속에도 그에 못지않은 탐심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동생이 자기에게 돌아올 유산의 몫까지 형에게 빼앗겼다는 말은 형이 굉장히 치밀하게 작업을 해서 동생에게 돌아갈 것까지 다 가로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동생도 형과 유산을 놓고 싸우는 중에 자기의 작전이 밀려서 패배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동생에게도 탐심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탐심은 돈이 많은 부자들에게나 있는 죄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부자를 비판하고 정죄하는 가난한 사람의 마음에도 탐심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이어서 뭐라고 하십니까? “사람의 생명의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재산이 차고 넘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재산에 달린 게 아니다.”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돈으로 생명을 살 수가 있습니까? 물론 돈이 많은 사람은 어떻게든 남들보다 더 좋은 의료 혜택을 받으면서 생명을 연장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을 영원히 살게 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생명’이라는 말은 단순히 살아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질적인 삶’, 즉 의미 있고 보람 있고 기쁨으로 가득한 삶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예수님이 지적하시는 것은 사람에게 돈이 많다고 해서 그 사람의 삶이 질적으로 행복한 삶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핵심이 무엇입니까? 행복한 인생이란 단순히 소유가 많은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이 설명을 하시기 위해서 한 가지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는데, 바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입니다. 이것은 점점 더 물질만능주의가 되어 가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만 이러한 시대에 제대로 살 수 있습니다.
지금 돈 자체가 잘못이라는 얘기가 아니라, 그 돈을 더 가지고 싶어 하는 탐심과 탐욕이 문제라는 겁니다. 그것이 이 시대에 가장 큰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주님의 뜻대로 해결하지 못하면, 우리의 삶이 갑자기 무너질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성공해도 갑자기 무너질 수가 있습니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탐심의 문제를 정확히 가르쳐주시고, 더 나아가 어떻게 하면 우리가 탐심으로부터 해방되어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지도 보여주십니다.
2. 탐심의 특징 (16~19절)
탐심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1) 탐심은 이기심을 키우는 죄악이다
이 부자는 스스로 자기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1세기 이스라엘 고대사회에서 이런 문제를 혼자 생각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벌써 이 사람이 불행한 사람인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내용을 보면 특히 그가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기보다는 의도적으로 자기 혼자 이렇게 생각했다는 암시를 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여기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말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바로 ‘나’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이 부자가 하는 말마다 ‘나’라는 말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이 부자는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입니다.
사실 사람이 자기를 위해서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누구나 그렇게 살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람이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은 잘못이 아니지만, ‘자기만’ 위하는 삶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그렇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만 위하는 삶을 삽니다. 자기와 자기 가족밖에 모릅니다. 그런데 갈등으로 나가면 가족끼리도 싸우고 심지어 살인도 납니다. 자기만 위하는 삶이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자기밖에 모른다면 이것은 아주 잘못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에 왜 이렇게 문제가 많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만’ 위해서 살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부자는 오직 자기만을 위해 인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기만을 위해 살면 이익이 되고 좋을 것 같지만, 사실은 자기 인생을 망치게 됩니다. 자기만 위해 살면 탐심의 늪에 빠져서 탐심의 지배를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는 그것을 모릅니다.
탐심의 지배를 받게 되면 치유되기 힘들 정도로 병적인 이기주의자가 되고 맙니다. 병적인 이기주의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차를 운전할 때 언덕을 내려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언덕을 내려가는 차의 브레이크가 고장 났습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그런 자동차와 병적인 이기주의자가 아주 흡사합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났으니까 멈출 수가 없습니다. 언덕길인데 멈출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브레이크를 밟아도 멈추지 않습니다. 미친 듯한 속도로 언덕 아래쪽을 향해 계속 달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가 쾅 부딪쳐서 크게 사고가 나고, 그래서 크게 다치거나 죽게 됩니다. 자기 혼자 부딪치면 모르겠지만 다른 차나 사람이나 건물을 부딪치면 자기만 해를 입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큰 해를 끼치게 됩니다. 이것이 병적인 이기주의자의 삶입니다.
탐심의 지배를 받아 자기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은 그렇게 위험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병적 이기주의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부자입니다.
2) 탐심은 이웃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죄악이다
본문에 나오는 부자의 언어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의 말에 조금이라도 이웃을 언급하는 것이 있습니까? ‘내가 이렇게 많은 소출을 얻었으니 우리 동네 사람들과 같이 나눠야지.’라는 마음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내 것, 내 것, 내 것, 나, 내가’밖에 없습니다. 철저히 자기만의 세계, 이웃이 없는 혼자만의 삶, 자기밖에 모르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사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사회적 존재 아닙니까?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관계의 존재입니다. 사실 이 부자가 성공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주변 사람의 도움이 있었겠습니까? 솔직히 혼자만 잘나서 성공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고대사회는 사회가 단순하니까 어느 정도는 그게 가능했지만, 산업사회 이후에 자수성가한 사람 중에서 자기 혼자 힘으로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사실은 많은 도움의 손길이 있었기에 성공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혼자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이 부자는 자신의 성공이 온전히 자기만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야, 엄청난 소출을 거두었다. 이제 나와 내 가족만 잘 살면 그만이다. 이웃이 굶든지 병들든지, 내가 알 바 아니다. 자기들이 제대로 못 살아서 그런 거지.’
요한계시록을 보면, 최후의 심판 장면이 나옵니다. 18장에서 종말을 이야기하며 특별히 바벨론이 무너진다고 하는데, 왜 역사상 존재했던 수많은 강대국 중 하필 바벨론이라고 합니까? 물론 그것이 직접적으로는 당시 로마제국을 가리키는 상징적 표현이지만, 더 나아가 바벨론이란 물질주의에 물든 이 세상을 상징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돈이 핵심 가치가 되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물질주의와 쾌락주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물질주의와 쾌락주의가 세상에 가득한 것을 우리는 보고 있지 않습니까? 한마디로 돈이 가장 최고의 가치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전부 ‘어떻게 하면 돈을 잘 벌까? 어떻게 하면 인생을 즐길까?’라는 것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물질주의 세상, 쾌락주의 세상이 요한계시록에는 바벨론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8장에서 바벨론의 부유한 사람들은 고운 모시와 자주 옷감과 비단과 붉은 옷감으로 된 당시 최고급 명품 옷을 걸치고 금과 보석과 진주 등의 최고급 보물로 자기를 치장했는데, 그런 부가 한순간에 다 없어지고 망하는 모습을 요한계시록이 보여줍니다.
요한계시록은 물질주의와 쾌락주의로 물든 이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을 견디지 못하고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바벨론 성의 마지막을 경고하기에 앞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저런 세상의 흐름에 휩쓸리면 안 된다.’ 하고 경고하며 명령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를 보면 어떻습니까? 점점 더 자기밖에 모르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지금 세계 인구가 80억이 넘었습니다. 약 80억 인구 중에서 10억 정도 되는 사람들이 매일 밤 굶주린 채 잠자리에 들고 있다고 합니다. 세상에 태어나는 아이들 10명 중 4명이 영양실조로 장애아가 됩니다. 세계에서 8억 명이 기아에 시달리며, 매일 2만 5천 명이 먹을 게 없어 죽는다고 합니다. 매일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렇습니다. 그런데도 나만 잘 먹고 잘살며 내 가족만 편안하게 지내면 하나님이 ‘괜찮아.’라고 하시겠습니까? 만일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만을 위해서 산다면,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서는 날 뭐라고 할 말이 있겠습니까?
나중에 우리가 모두 다 하나님 앞에 설 텐데, 그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구약시대부터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바로 그런 탐욕을 물리치는 방법으로서 헌금과 십일조의 원리를 가르쳐준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십일조도 하나가 아니라 여러 종류가 있었습니다. 회식의 십일조가 있었는데, 다 같이 돈을 내고 다 같이 먹는 겁니다. 왜 다 같이 돈 내고 다 같이 먹으라는 겁니까? 거기서 같이 사랑을 나누라는 겁니다. 혼자만 따로 떨어져서 본문의 부자처럼 혼자 살지 말고, 같이 공동체로 사랑을 나누며 살라는 겁니다.
그리고 십일조 중 중요한 게 구제의 십일조였습니다. 이것은 3년에 한 번씩 드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고통받는 이웃을 위한 나눔의 의무를 강조하는 명령입니다. 그러니까 십일조라는 것은 안 내면 하나님이 벌 주시니까 내야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의 표현일 뿐 아니라 이웃을 향한 사랑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탐심은 이웃을 향한 마음의 문을 닫고 자기밖에 모르는 삶을 살게 만듭니다.
3) 탐심은 하나님이 자기 삶의 주인이심을 잊어버리게 하는 죄악이다
그렇다고 성경이 물질의 필요를 부정하는 게 결코 아닙니다. 성경은 돈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돈이 일만 악의 뿌리다.’라고 하지 않고 “돈을 사랑함(탐욕)이 일만 악의 뿌리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또한 이런 헌금, 저런 헌금, 십일조 헌금 등 무조건 바치라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1-33)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십니다. 다만 우선권을 분명히 하며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서 경고하는 것은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사는 것입니다. 성경적 재물관의 출발점이 여기 있습니다. 내 물질의 주인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의 주인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대로 물질을 관리하는 삶을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탐심의 노예가 되는 순간 참 주인을 잊어버린다는 점입니다. 탐심에 눈이 어두워지면 하나님이 안 보입니다. 하나님이 안 보이니까 어떻게 됩니까? 자기가 주인인 줄 알고 자기가 주인 노릇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삶이 복잡해지고, 평생 염려의 문제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평생 염려, 불안, 두려움, 조급함 가운데 살아가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주인을 할 자격이 안 되는데 주인 노릇을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살펴보십시오. 얼마나 불완전합니까? 아무리 유능한 사람도 완전한 사람이 없습니다. 아니, 완전과는 거리가 멉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그 배우자에게 물어보십시오. 약점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자기 주인이 되어서 그 삶을 이끌어 가니 얼마나 문제가 많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골 3:5)
탐심의 지배를 받으면 내가 원하는 그것이 내 삶의 주인이 되는데, 바로 그게 우상 숭배라는 겁니다. 우상숭배를 하게 되면 우상숭배자의 인생이 망가집니다. 그래서 성경은 탐심을 멀리하라고 가르칩니다. 탐심은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망각하게 만드는 죄이고, 우리 인생을 망가뜨립니다.
3. 탐심을 제거하는 길 (20~21절)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탐심의 죄악에서 해방되어 우리가 참 기쁨과 자유를 누릴 수 있겠습니까?
1) 물질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날마다 확인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내가 가진 것은 모두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다.’라는 사실을 매일 확인하며 살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의 어리석은 부자 비유의 절정 부분에서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0절)
부자는 어떤 말을 강조했습니까? ‘내 곳간, 내 곡식, 내 물건, 내 영혼’이라고 하면서 자기 생명도 자기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생각해 보십시오. 남들은 이 정도가 안 되는데 이 사람은 엄청난 소출을 거두었다면 뭔가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까? 굉장히 스마트하고 남들보다 보는 눈이 있는 사람입니다.
게다가 곡식을 쌓아 놓기 위해서 지금 헌 곳간을 헐고 세 곳간을 크게 짓겠다며 투자하니 얼마나 좋습니까? 이런 게 뭐가 나쁩니까? 그렇게 열심히 계획을 세우고 일하며 그 결과로 자기가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겠다는데, 얼마나 좋은 계획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똑똑해 보이는 이 부자를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우리가 볼 때는 똑똑한 사람인데 하나님 보시기에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계속 말씀하십니다. “네가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네 영혼을 오늘 밤 내가 찾을 텐데, 그러면 네가 준비한 이 모든 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지금 자기 인생은 자기 것이라고 했는데, 자기 생명은 자기 것이라고 했는데, 사실은 그 주인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내 것을 내가 찾겠다.’ 하시는 겁니다.
이 부자는 기존의 창고로는 안 될 만큼 소출이 많아서 새 창고를 짓고 거기 쌓으려 합니다. 그런데 농사라는 게 아무리 풍년이라도 예년의 두세 배나 열 배가 나는 게 아닙니다. 고대사회에서는 기껏해야 10~20% 더 많이 나오면 풍년이라고 하며 기뻐했는데, 이 부자에게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자기 힘으로 된 게 아니라 정말 하나님이 이 사람에게 엄청난 소출을 거두도록 부어주신 겁니다. 그런데 그는 뭐라고 말합니까? “내 영혼아, 많이 쌓아 두었으니 얼마든지 먹고 마실 수 있다. 이제 먹고 싶은 대로 먹고, 마시고 싶은 대로 마시면서 즐기자.”라고 스스로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 부자가 창고를 새로 크게 지어야 할 만큼 초자연적인 결과를 내려주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기 혼자만 움켜쥐고 자기 혼자만 즐기겠다고 하니, 하나님 보시기에 이보다 더 큰일 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 생명을 취하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여기 보면 하나님이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라고 하시는데 이것은 가정하시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내가 네 영혼을 오늘 밤 찾는다면 이것이 누구 것이 되겠느냐?’라고 하시는 게 아니라, “나는 네 영혼을 오늘 밤 데려갈 것이다.”라고 아예 선포하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이 죽어야 다른 사람들이 혜택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혼자 많이 움켜쥐는 탐욕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가를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조금 과장법을 더하셔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물론 부자가 되면 무조건 하나님이 생명을 가져가신다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실 정도로 탐욕이라는 것은 무시무시한 죄라는 것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두 이런 부자가 되는 것이 인생의 꿈입니다. 왜 좋은 대학에 가려고 하고, 좋은 학과에 들어가려고 애쓰고, 좋은 직장을 잡으려고 애씁니까?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되어 그것으로 자기만을 위해 쓰려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날 밤에 ‘당장’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니 조심해야 합니다. 이처럼 탐욕을 따라 사는 것은 정말 위험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아무 때이고 우리에게 “너 이제 거기서 그만 살고 이리 와.”라고 하시면 다 놓고 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 생명을 찾으시는 순간, 내 소유가 내 것이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습니다. 내 소유는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것입니다. 소유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내 인생도 내 것이 아니라, 내가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보십시오. 내 몸을 내가 맘대로 할 수 있습니까? 분명히 내 몸인데 머리가 하얘지고 빠지는 것을 내가 원하지 않지만 그렇게 됩니다. 내가 그렇게 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그런데도 자꾸 빠지고 하얘집니다. 이것은 내 몸조차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게 아니겠습니까?
모든 헌금이 다 그렇지만, 특히 십일조라는 것이 무슨 율법의 계명이거나 부담이거나 강요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십일조라는 것은 ‘내 모든 소유, 심지어 내 생명도 하나님 것입니다.’ 하고 확인하는 작업입니다. 우리가 규칙적으로 예배드리고 헌금하고 특히 십일조를 할 때마다 이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전부 다 하나님 것이지만 그중에서 1/10을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통해 내가 가진 모든 소유가 하나님 것임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헌금은 신앙의 고백이자 사랑의 표현입니다. 특히 십일조가 그렇습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믿음으로, 규칙적으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이것이 결국 나의 유익을 위한 것임을 반드시 기억해야겠습니다. 내가 탐심의 노예가 되어 인생을 망치지 않도록 지켜 주는 것이 십일조와 헌금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다 기억하고 기록해 놓으십니다. ‘얘가 이런 마음으로,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했다.’라고 기록해 놓으시고, 지금 천국에 내 집을 지을 재료로 그것을 사용해 주십니다.
여러분, 저 천국에 가서 어마어마한 큰 집에 살 자신이 있으십니까? 그것을 미리 보내 놓는 겁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인색하게 굴면 전혀 영원한 천국을 위한 투자를 안 하는 게 됩니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그래서 “어리석은 자여”라고 하시는 겁니다.
2) (탐심에서 해방되어 참 기쁨을 누리려면) 하나님께 대해 부요한 삶을 살아야 한다
어리석은 부자에 대해 성경은 결론적으로 무엇이라고 표현합니까?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21절)
진정으로 부요한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은혜와 사랑과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게 됩니다. 진정한 부자는 다른 것을 원하지 않고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돈만 많았던 게 아니라 진짜 부자였습니다. 마음의 부자였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탐심에서 벗어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예수님으로 계속 채우면 됩니다. 그것이 성령 충만한 삶입니다. 그리스도로 가득 차서 그리스도가 내 모든 것이 되시면, 이 세상에서 조금 부족한 것이 있어도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조금 불편할 뿐이지 별 지장이 없습니다.
탐심으로부터의 자유와 참된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주인이 되신 삶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매 순간 내 삶의 주인이 되시는 삶을 살아 최고의 행복을 누리며 주님께 인정받는 우리 모두의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