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새벽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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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9:19–27 NKRV
1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26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고린도 교회에는 언변이 좋고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고전1:5). 하지만 교회가 안고 있는 다양한 문제에 대한 분석과 대처가 상당히 미흡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두고 고린도 교회가 영적으로 미성숙한 아이와 같은 교회, 신령하지 않은 교회라고 말했습니다. 교회 내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교훈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8장부터 11장 1절까지 다루고 있는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의 취식 문제에 대한 바울의 교훈 중 ‘스스로 종이 된 이유’와 ‘미래에 받을 상급을 위한 현재 절제의 삶’에 관한 내용입니다.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19-23절)] [1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사도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로서 자유인이었습니다. 로마법을 어겨 거주의 제한을 받지도 않았습니다. 바울은 죄에 대해 구속받지 않는 자유인, 주님 안에서 진정한 자유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신분적으로 노예가 아니었지만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이라고 말한 이유는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주님의 길을 따라 죄악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하여 그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막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만왕의 왕이신 주님께서 사람을 섬기며 죄인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셨기 때문에 굳이 바울이 자기 목숨을 모든 사람을 위해 줄 이유가 없었습니다. 바울이 자기 목숨을 바친다고 한들 그 목숨이 예수님의 보혈처럼 대속적 죽음은 될 수 없지 않겠습니까? 바울이 할 수 있는 일은 주님의 본을 따라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 사람을 섬김으로 죄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그 대상자를 세 부류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20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첫째 부류는 유대인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방의 빛으로(행13:47) 이방인 전도를 주로 담당하였지만 죄 아래 있는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하는데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유대인 역시 주님의 은총을 받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을 구원하고자 유대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되었다는 말이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킨다거나 율법주의를 지향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들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주님께로 인도하고자, 율법을 지켜야 할 때 적절히 지켰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2차 전도 여행 중 고린도를 방문하기 전, 오늘날 터키 지역인 ‘루스드라’의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이러한 행함이 율법 아래 있는 자가 된 예입니다. 바울은 어머니가 유대인인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함으로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파할 때 그들과 무할례에 대한 논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조치를 취했습니다.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바울이 모든 사람을 섬기는 대상으로 언급한 둘째는 이방인입니다. 첫째 대상이 율법 있는 자 유대인이었다면 둘째 대상은 율법 없는 자 이방인이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통해 이방인을 구원하고자 이방인들에게 부담이 될 수 있는 율법 준수, 예를 들자면 할례를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어떤 경우에는 율법 아래 있다고 말하다가 어떤 경우에는 율법 아래에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상황에 따라 율법을 취하거나 버린다는 말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율법의 근본정신을 잘 지켰다는 말입니다. 돌에 새겨진 의문의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랑의 율법으로 바뀌었습니다.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는 것보다 율법의 정신을 제대로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율법을 행위로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유대인들에게는 그들의 뜻을 존중함으로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였고, 율법을 행위로 지키는 것을 부담으로 여기는 이방인들에게도 역시 그들의 뜻을 존중함으로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였습니다. [22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바울이 모든 사람을 섬기는 대상으로 언급한 셋째는 약한 자들입니다. 약한 자들이란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약한 자들은 믿음이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 있기에 소위 믿음이 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 따라 쉽게 상처를 받거나 실족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자신이 모든 사람을 얻기 위해 섬기는 대상자 중 강조하는 부류는 8장부터 이어지는 문맥상 셋째 부류의 사람에 있습니다. 약한 자들은 8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을 보고 넘어지는 사람들입니다. 음식 자체는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지만, 믿음이 좋다고 하는 사람이 우상의 제물의 고기를 먹음으로 믿음이 약한 자를 실족하게 한다면 믿음이 좋은 사람은 그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함으로 고린도 교인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않음으로 연약한 사람을 섬기라’ 입니다. 바울의 관심사는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으로 인도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마치 카멜레온처럼 각양의 사람에게 여러 모습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도 가능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은 복음의 본질이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한 생명이라도 주님께로 인도하고자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세리와 창기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지 않으셨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들과 친구가 되셨다고 해서 죄와 타협하거나 죄를 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역시 한 생명을 주님께로 인도하기 위해서 복음의 본질이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카멜레온처럼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다면 주님께서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바울이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구원을 위함이기도 하지만 또한 자신이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고 말합니다.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바울은 오래전부터 복음을 알았고 복음을 전하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복음이 주는 복, 은혜를 받고자 함입니다. 그 은혜의 대표적인 것이 구원의 완성입니다. 육체적 죽음 이후 누리게 될 영원한 생명과 기쁨입니다. 바울이 주님을 다시 만날 때 누릴 기쁨이란 그가 받을 상급입니다. 복음을 위하여 행하는 모든 것에는 상급이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과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한 수고와 헌신을 하고 있다면 바울처럼 주님께서 주실 상급을 소망해야 합니다. 우리가 현재의 권리를 포기할 수 있는 것도 미래에 주님으로부터 받을 상을 소망하기에 가능합니다. 또한 다양한 사람에게 카멜레온처럼 다양한 모습으로 응대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것도 미래에 주님으로부터 받을 상을 소망하기에 가능합니다.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24-27절)] [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운동장’은 단순한 운동장이 아니라 오늘날 ‘스타디움’을 뜻하는 경기장을 가리킵니다. 당시 헬라 세계에는 올림픽을 포함한 중요한 4개의 국제대회가 있었습니다. 그중에 고린도에서는 매 3년 마다 ‘이스트미안 경기(Isthmian Games)’가 열렸습니다. 여기서 열리는 종목에는 경마, 격투기, 레슬링, 권투가 있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올림픽 경기처럼 큰 국제대회에 참가하는 선수들은 금메달이나 1등 상을 받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합니다. 오늘날은 2등과 3등에게도 시상하지만, 고대 큰 경기에는 오직 1등을 한 사람만 상을 받았습니다. 상을 받기 위해 바울이 강조하는 바는 다름 아닌 절제입니다.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운동 경기 참가자처럼 신앙의 경주를 하는 사람 역시 주님으로부터 상을 받기 위해 절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앙의 경주에는 고대 경기처럼 오직 1등만이 상을 받지 않습니다. 주님이 세상의 경기처럼 우리 모두에게 1등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운동선수처럼 승리를 위하여 절제의 삶이 필요합니다. 운동선수가 승리를 위하여 체력을 길러야 하고 체중을 조절해야 하고 음식을 조절해야 하고 금주와 금욕 등 훈련하고 점검해야 할 항목들이 많이 있습니다. 훈련하면서 절제를 해야 하는 이유는 오직 승리의 면류관을 위함입니다. 오늘날로 보면 금메달을 따기 위함입니다. 당시 승리의 면류관은 솔잎이나 파슬리 잎이나 월계수 잎으로 만들었습니다. 승리의 면류관은 살아있는 식물로 만들었기에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시들고 결국은 썩게 됩니다. 썩게 될 면류관이라도 운동선수들은 그 썩을 면류관을 한 번이라도 쓰고자 피나는 훈련을 하였고 음식과 생활 등 모든 분야에서 절제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앙의 경주를 하는 사람에게는 영원히 썩지 않을 면류관이 기다립니다. 썩지 않을 면류관을 쓰기 위하여 우리는 신앙의 훈련과 절제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 삶을 26절과 27절에서 알려 주고 있습니다. [26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달리기 선수는 목표지점인 결승점을 향해 바르게 달려야 하며, 권투 선수는 상대의 타격점을 보고 제대로 가격해야 합니다. 운동 경기에 목표지점이 있듯이 주님의 부르심의 상을 위해서 목표를 가지고 신앙의 경주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목표를 향하여 달리는 이유는 주님께서 주시는 상을 받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운동선수가 목표를 향해 달리거나 목표 타격점을 가격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자기 통제의 필요성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바울이 권투 경기에서 허공을 치지 않고 상대의 목표 타격점을 가격해야 함을 말하다가 자신의 몸을 쳐 복종하게 한다고 말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자기 통제가 승리를 위한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몸을 쳐’에 해당하는 원문을 각 단어의 뜻을 살려 번역하면 ‘눈 아래 얼굴을 가격하다’입니다. 권투 선수가 상대를 가격해야 하지만 상대가 아닌 자신을 가격한다는 것은, 자기 통제를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자기 통제를 하는 이유는 신앙의 목표를 향하여 잘 가다가 어느 날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절제하지 못하는 삶에 빠지지 않기 위함입니다. 우리 역시 아무리 신앙의 경주를 잘하다가도 자기 통제를 하지 못할 때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고, 한 생명이라도 구원하고자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최종적 구원에 이르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땅에서 사도의 권리를 누리지 않고 값없이 복음을 전한 이유가 이 땅에서 상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미래에 주님께서 주실 상을 받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땅에서 운동선수가 1등을 하여 받는 면류관과 비교할 수 없는 값진 상, 영원히 썩지 않을 면류관을 위하여 버릴 것을 버리고 절제할 것은 절제하며 살아야 하듯이 교회는 연약한 사람이 넘어지지 않도록 자기 통제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자기를 쳐 복종하게 하는 자기 통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하나님께 귀히 쓰임을 받는 그릇이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버릴 것을 버리고 절제할 것을 절제함으로 주님께 귀히 쓰임 받는 사람이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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