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18:1-9 자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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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자기도: 우리 주 하나님, 오늘도 주님의 은혜의 보좌앞으로 나아갑니다. 오후찬양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뜻과 심정을 마음에 새기게 하시고 우리의 삶을 새롭게 빚어 가시는 은혜의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앞에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 영광 받아주시고, 우리에게 주님 주신 소망과 비전을 얻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사무엘상 18장 1절부터 9절까지에 있는 말씀입니다.(구약성경 439쪽에 있습니다.) 이제 봉독 합니다. ( 봉독 후 )
*오늘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은 다윗과 요나단, 사울왕과 다윗의 관계를 표현하는 구절입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는 어떠했고, 사울이 다윗을 만나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가, 인간관계의 중요한 점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는 나보다 더 큰 그릇처럼 보여지는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나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리고, 나보다 그릇이 작은 사람이다 하는 생각이 드는 사람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이것이 사람을 차별하거나, 내 속에 우월감을 갖게도 하고, 때로는 내 속에 열등감을 갖게 하는 모습으로 나타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여러분 나보다 더 공부를 많이 하고, 나보다 잘 생기고, 나보다 더 많은 것을 갖고 있고, 나보다 지혜롭고 그런 사람을 만나면 여러분의 마음 속에 어떤 생각이 듭니까?(@)
처음에는 아 저런 사람을 곁에 두니 참 좋다, 그러다가 .. 왜 저 사람은 있고 왜 나는 없을까? 내가 가져야할 것을, 왜 저 사람만 가졌을까, 왜 저 사람은 금주저인가? 이런 마음이 들면서 왠지 모르는 불편함이 생기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예외 없이 똑같습니다.
오빠와 동생일 때는 조금 다르고, 누나와 동생일 때는 다른데, 특히 남자 형제들이 더 강한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형제들임에도 불구하고 형이 나보다 낫다, 아니 동생이 나보다 낫다, 이것이 사실 형제간에 그렇게 견디기가 어려운 것이 관계성입니다.
여러분 가인이 아벨에 대해서 사랑하는 동생이었지만, 시기하고 질투했을 때 아벨을 무너뜨리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이 야곱의 열두 아들이 있었는데, 막내에서 그 전에 낳은, 열한번 때 낳은 요셉을 아버지가 특별히 사랑하고 때때옷도 입히고 뭔가 편애하는 것을 보면서 형들이 그렇게 분노하면서 자기의 동생인데도 불구하고 애굽으로 가는 상인에게 그냥 팔아 넘긴 것을 우리가 보지 않았습니까?
여기 사울 왕도 나이로 보면 다윗의 아버지 벌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다윗을 보면서 일종의 열등감을 느꼈습니다. 더 나아가 시기와 질투를 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을 어떻게 하든지 없애야 겠다는 마음의 결심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세월이 10년 이상 지나가게 됩니다. 도망자로서 살아가는 다윗에게 이 시기는 광야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분노와 시기를 품고 있는 사울은 자기가 가진 지위를 누리지 못하고 끊임없이 분노와 불안의 삶 있었습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다윗을 추적하게 되는 장면이 계속해서 사무엘상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간관계에서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용납하는게 쉽지가 않은데, 성경에서 보면 세례요한 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자기보다 나은 예수님을 받아들였습니다. 뭐 당연하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가만히 보면 참 놀라운 일입니다. 여러분, 사실 세례요한이 형이었습니다. 그리고 세례요한이 하나님 나라 운동을 이 땅에서 먼저 시작한 선배였습니다. 그리고 수 많은 사람들이 이미 세례요한에게 모여 들면서 아 이 분이 진짜 선지자다 하면서, 세상 말로 표현하면 인기가 절정에 도달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예수님이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가졌습니까? 이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저분을 보라 나는 저분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다. 이러면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고 예수님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복음이 놀랍게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세례요한이라고 생각해보십시요. 나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나보다 후배고 나보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 운동을 늦게 시작한 후발 주자인 예수님에게로 사람들이 막 몰리고 있습니다. 그 때에, 아 저분이 참 귀한 분이다 하고 칭찬할 수 있는 사람이 도대체 몇명이나 되겠습니까? 겉으로는 그렇게 이쁘게 말할 순 있겠지요. 하지만 속은 아닐 것입니다.
사실, 우리 삶에 남이 잘 되는 것을 봐주기가 어렵습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그냥 가만히 있어도 배가 아픈 우리의 이 속담은, 우리를 둘러싼 인간관계가 쉽지 않다는 걸 말합니다. 그래서 이 속담은 원래부터 우리는 나보다 잘 난 사람은 끌어내리기 원하고, 나보다 못난 사람은 억압하고 멸시하기를 원하는 우리의 인간적인 본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세례 요한은 성경 안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 중에서도 탁월한 그런 모습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례요한을 보면서 뭐라 평가했나요? 여인이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 만한 사람이 없다라고 그렇게 최고로 칭찬했습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은 그런 세례요한을 받아들인 이 멋진 인간관계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1-5절은 사무엘상에서 다윗과 요나단과의 관계을 볼 때마다 신약에서 세례요한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생각나게 합니다.
요나단은 사울의 아들로서 사울 왕국에서 서열상 2인자입니다. 다윗은 비공식적으로 이스라엘의 차기 왕으로 기름부음받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역사의 전면에 부각되지 않았는데 요나단이 다윗을 굉장히 아끼고 사랑합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3-4절 보면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해서 언약을 맺고 자기가 가진 겉옷과 군복과 칼과 활과 띠를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비교의식이나 시기심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1절에 보니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
그런데 인간은 누구나 다 약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를 보면 다윗과 요나단과의 관계보다는 다윗과 사울과의 관계가 그 모습이 더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5절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다윗은 사울이 보내는 곳마다 가서 지혜롭게 행하매 사울이 그를 군대의 장으로 삼았더니 온 백성이 합당히 여겼고 사울의 신하들도 합당히 여겼더라
14절에는 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그의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
여기도 다윗의 특성이 지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고 있다는 말이 반복되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어서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다윗이 갖고 있는 최고의 덕목이 지혜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서 그는 지혜가 흘러나왔다는 것입니다. 말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는데 있어서 신적인 통찰력으로 말하고 행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다윗을 군대장으로 세워줬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변해지기 시작했습니다.
15절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사울은 다윗이 크게 지혜롭게 행함을 보고 그를 두려워하였으나
여기보면, 지혜로와서 다윗을 택했는데, 다윗이 계속 지혜로우니까 다윗을 거절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가 참 아이러니 하지 않습니까? 그 사람이 지혜로와서 야 너 이 일을 맡아라 했다가, 그런데 계속 지혜롭게 하니까, 너 이거는 문제다, 내 주위에서 떠나라 하는 표현인 것입니다.
여러분, 지식이 많아질 수록 교만하지기 쉽습니다. 그런데 지혜는 자신의 한계성을 경험하면서 지혜를 받기 때문에 지혜를 가질 수록 겸손해집니다. 남이 연약하면 도와줄려고 하고, 남이 잘났으면 배우려고 하는 것이 지혜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모든 것들을 한 마디로 표현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런데 다윗을 보다 더 시기심 속으로 몰아가게 된 사건을 발견하게 됩니다. 6절의 말씀입니다. 무리가 돌아올 때 곧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읍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며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하는데
다윗은 거인이고 이스라엘의 대적이었던 골리앗을 물맷돌 하나로 쓰러트리고, 그의 칼을 배어 그의 목을 베었습니다. 이때 온 이스라엘은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용기를 내어서 블레셋 군대를 쳐서 모두 다 시체로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길 수 없는 전쟁에서 승리해서 돌아오니까 온 이스라엘 백성이 다 거리고 나와 군인들을 영접했습니다. 다윗을 나이도 어린 데다가 뛰어난 용기를 가지고 최고의 적을 쓰러트렸기 때문에 인기가 있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표현을 가지고 다윗을 환영했습니까? 7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여러분이 사울 왕입니다. 그런데 다윗이라고 한 친구와 전쟁에서 함께 기쁨으로 돌아오는데, 백성들이 소리치는 것입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 여러분이 만약 사울이라면 어떠시겠습니까? 기분이 좋으시겠습니까? 기분이 나쁘겠습니까? 이 여인들이 한 가지만 말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 뭐 그냥 많이 죽었으니까, 넘어 갈텐데, 또 반대로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로다 고것만 했어도 문제가 없는데, 두 가지를 동시에 해버렸습니다. 이게 뭐가 됩니까? 일종의 비교가 되기 시작합니다. 당신은 천 짜리고, 이 사람은 만짜리요. 이렇게 비교가 된 것입니다. 그럴 때 사울 왕에게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시기심이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나보다 잘 난 사람을 만났을 때 갖게 되는 시기심은 우리 속에 똑같이 들어와 있습니다. 형제 간에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의 삶에 모든 삶의 자리는 도토기 키재기처럼 끊임없이 재고 있지 않습니까? 저 사람이 나보다 뭐가 나은가? 나이가 많은가 적은가? 기수가 높은 낮은가? 나보다 더 가졌는가 못가졌는가? 저 사람이 타는 차는 뭔가 내가 타는 차가 뭔가? 여러분 우리 삶에 무의식까지 깊이 들어와 있는 것 중에 하나가 이 비교의식입니다. 대부분 우리가 많은 부분에서 행복하다고 했을 때 이 비교의식에서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사울 왕은 이 비교 속에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비교라는 덫에 스스로가 걸려버렸습니다. 여러분 나의 나 됨에 대한 좋은 점, 나의 나됨 에 대한 소중한 점, 고유한 점, 내가 왕이라고 하는 최고의 권력의 자리에 있다는 것을 순식간에 잊어버렸습니다.
여러분 내가 갖고 있는 그 자리에서 나의 나됨에 대한 것을 분명히 갖고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가장인 아버지가 가정에서 열등감이 있다, 회사에서는 사장인데 부사장보다 못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거나, 집에 와서는 늘 나는 아내보다 못하다, 그러면 그 회사는 그 가정은 건강하지 않습니다. 또 내가 내 자식을 보니까 나는 아비가 되서 내 아들보다 내 딸보다 못하다.. 그렇게 생각하면 도움이 전혀 안됩니다.
아버지는 그냥 그대로가 좋은 것입니다. 남편은 남편 그대로가 좋은 것입니다. 그것을 놓치게 되면 이게 사울왕과 다윗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삶의 이야기로 넘어오게 됩니다. 내가 나로서의 역할 내가 갖고 있는 직함으로서의 역할을 소중히 여기면서 거기서 그 다음으로 한 걸음 나가면, 잠깐 동안의 시기심과 잠깐 동안의 비교의식은 그냥 사라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 비교의식과 특별히 열등감이 만나면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내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것이 의심스럽습니다. 모든 것이 나를 적대하는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나를 무시하는 것 같습니다. 작은 것에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고 오해하게 됩니다. 비교의식과 열등감이 만나면서 사울은 일종의 우울증에 빠지게 됩니다. 8절에 보니 사울이 뭐라고 반응합니까?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하고
이게 내 자리를 탐하는 구나, 이 놈이 권력을 탐하는 구나라고 잘못 여기게 되었습니다. 피해망상적 사고라고 말해도 될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은 권력을 탐한다는 이야기를 해본적이 없고, 백성들이 그냥 그렇게 과장해서 노래한 것 뿐입니다.
그러면 사울이 그냥 지나가면, 조금 그냥 놔두면, 모든 것들은 그냥 다시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은 ‘아 사울 왕이 귀한 왕이구나, 사울 왕을 통해 다윗이 축복을 받고 있구나, 사울 왕이 저런 신하를 두고 있구나, 멋진 신하를 둘 수 있는 왕이구나, 이러면서 사울왕이 칭찬을 받고 존경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비교의식속에 가장 큰 권력을 지닌 지도자가 무너지기 시작하니까, 모든 것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여기 9절에 이렇게 나왔습니다.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여기서 사용된 주목하다는 말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시거나 병자들을 고치실 때 바라보는 사랑 어린 시선이 일컫는 말이 아닙니다. 불신의 눈초리로 눈여겨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의심의 눈초리로 일종의 심리적 거리를 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악령이 다시 이 사울의 마음을 붙잡게 되니까 고통스러운 자리로 넘어들어가게 됩니다. 10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이튿날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힘 있게 내리매 그가 집 안에서 정신 없이 떠들어대므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그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그래서 그 창으로 다윗을 향해 던지게 되지만, 다윗이 그의 앞에서 피하게 되는 장면이 이어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저는 설교의 제목을 자존감이라고 지었습니다. 비교의식의 반대말은 자존감일 것입니다. 우리가 자존감을 잃어버리면 어떤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자존감은 능력과 소유에서 나오지만, 우리가 말하는 자존감이란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 하는 것입니다. 성탄절 마다 늘 우리가 확인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세상에 우리를 향해 천천이다 만만이다 칭찬하기도 하고, 애이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누가 뭐래도 오시는 하나님, 예수님에 근거한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존귀하고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세상 속에서 비교와 열등감의 덫에 걸리지 말고, 예수님으로부터 내 존재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의 삶과 지금의 나를 비교해서 더 거룩한 삶을 살거나, 나다운 삶 나로서의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살면서 잠깐 비교하는 것 그렇게 나쁜 것아닙니다. 비교하고 좀 시기하고 비교하고 좀 분노하는 것 괜찮습니다. 비교나 열등감이 스스로를 자극해서 더 분발하게 한다면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것을 계속해서 가슴이 품는 것, 하루 이틀 저녁에 품다가 자고 나면 싹 없어져야 하는데, 일주일 동안이나 잘 때마다 품고 있는 것 아침에도 생각나는 것, 그래서 마치 사울이 창을 들고 예민하게 비교의 대상을 주목하며 미워하는 삶을 계속해서 살아가는 것은 우리가 가진 에너지를 갉아 먹습니다. 우리의 귀한 삶을 소진시킵니다.
여러분, 주님께서는 우리가 육체의 몸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주목하지 못하고 늘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주목하며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여러분, 나는 나대로 소중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2021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우리가 인간관계 속에서 훌훌 털어내버려야 할 것을 털어낼 때,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소중한 믿음의 사람들로 사용하실 수가 있습니다. 이 축복을 오늘도 우리가 간직하며 나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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