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628 금요기도회: 시편 104: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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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도 저희를 금요기도회 자리로 부르시고 함께 기도할 수 있는 은혜를 베푸심에 감사합니다. 하나님. 어느덧 2024년의 절반인 6월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지난 반년 동안 하나님께 지은 죄는 없는지, 하나님을 멀리하진 않았는지 돌아봅니다. 그리하였다면 저희의 연약함을 용서하시고 다시 한번 그리스도께로 돌아가 남은 반년 동안은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하는 저희가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이 시간도 그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 위해 나아왔으니 은혜를 베푸시고 저희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시옵소서. 이 시간도 함께 하실 줄 믿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함께 읽을 하나님의 말씀은 시편 104:10-23 입니다. 제가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샘을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시고 산 사이에 흐르게 하사
각종 들짐승에게 마시게 하시니 들나귀들도 해갈하며
공중의 새들도 그 가에서 깃들이며 나뭇가지 사이에서 지저귀는도다
그가 그의 누각에서부터 산에 물을 부어 주시니 주께서 하시는 일의 결실이 땅을 만족시켜 주는도다
그가 가축을 위한 풀과 사람을 위한 채소를 자라게 하시며 땅에서 먹을 것이 나게 하셔서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얼굴을 윤택하게 하는 기름과 사람의 마음을 힘있게 하는 양식을 주셨도다
여호와의 나무에는 물이 흡족함이여 곧 그가 심으신 레바논 백향목들이로다
새들이 그 속에 깃들임이여 학은 잣나무로 집을 삼는도다
높은 산들은 산양을 위함이여 바위는 너구리의 피난처로다
여호와께서 달로 절기를 정하심이여 해는 그 지는 때를 알도다
주께서 흑암을 지어 밤이 되게 하시니 삼림의 모든 짐승이 기어나오나이다
젊은 사자들은 그들의 먹이를 쫓아 부르짖으며 그들의 먹이를 하나님께 구하다가
해가 돋으면 물러가서 그들의 굴 속에 눕고
사람은 나와서 일하며 저녁까지 수고하는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금요기도회에 나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어느덧 6월이 다 지나가고 있습니다. 2024년도 절반이 지나가고 있는데요. 모든 사람에게 시간은 똑같이 흘러가지만, 하나님과 함께 한다면 그 시간은 결코 헛되지 않고 오히려 복된 시간이 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은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과 만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로 오늘도 기도회 이렇게 우리가 함께 모인 것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복입니다. 이 시간도 그 복을 누리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오늘도 함께 말씀으로 기도제목을 삼으면 좋겠는데요. 오늘의 말씀은 시편 104편으로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입니다. 새벽기도 때는 1-9절을 살펴보면서 태초에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살펴봤다면, 이번 시간은 그 창조하신 세상에서 각종 피조물들은 만족과 유익을 누리고, 또한 만드신 이 세상을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질서를 통해 아름답게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시편기자는 그 하나님을 어떻게 찬양하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10절부터 보시면 하나님께서 샘을 골짜기에 만드시고, 산 사이에 흐르게 하셨다고 합니다. 요즘 같이 더운 날에 계곡 같은 곳에 가면 더위가 한풀 꺾이는 것 같이 아주 시원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계곡물을 마시면 갈증도 해소되고 더위를 잠시 피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모습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만든 샘을 통하여 11절에서 각종 짐승들은 갈증을 해결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샘을 통해 목마름이 만족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짐승들만 하나님께서 만드신 샘에서 유익을 얻는 것이 아니라 12절을 보니까 새들도 그 샘의 가의 나뭇가지 사이에서 보금자리를 만들고 지저귀면서 유익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시편기자는 13절에서 “그가 그의 누각에서부터 산에 물을 부어 주시니 주께서 하시는 일의 결실이 땅을 만족시켜 주는도다”라고 찬양합니다. “만족하다”는 것은 잔치 후에 배부르거나 충족한 상태를 뜻합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은 땅과 그 땅에 사는 모든 피조물이 배부르고 충족하게 만들어주는 만족시켜 주는 곳이라는 겁니다.
이스라엘 이웃 나라들의 신화 속에서 이 세상은 신들끼리 서로 싸우고 전쟁하는 과정 속에서 생긴 세상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신을 만족시키기 위해 평생동안 노동해야 하는 것이 이방 종교에서 가르치는 창조관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은 자신의 만족을 위해 피조물을 노예로 삼은 것이 아니라 피조물들에게 기쁨과 만족을 주기 위해 창조하셨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에서 기독교만의 독특성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누리고 계신 기쁨과 만족을 피조물들과도 나누고 싶으시기 때문에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을 잘 알고 있던 시편기자는 샘을 통하여 만족하는 피조물들을 보면서 만족시켜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것을 찬양하는데요.
14-15절에서 시편기자는 피조물들에게 다양한 양식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14절에서는 하나님께서 가축을 위하여 풀을 주셨고, 사람을 위해 채소를 자라게 하셔서 먹을 것을 주셨다고 하고, 15절에서는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얼굴을 윤택하게 하는 기름과 마음을 힘있게 하는 양식을 주셨음을 찬양합니다. 땅에서 나는 모든 풀과 채소와 같은 소산물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입니다. 이것을 가축과 사람의 먹을거리가 되게 하심으로 마음을 기쁘게 만드시고, 삐쩍 말라 기운이 없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얼굴을 윤택하게 만드시고 마음에 힘을 주십니다. 우리 교회에서 권사님께서 뒷뜰에 텃밭을 일구시는데요. 권사님께서 일구신 텃밭에서 나는 상추는 권사님께서 열심히 해주신 덕분에 우리가 맛있게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상추는 권사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상추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만드시고, 만족을 주시기 위해 자라게 하셔서 주신 상추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가 마트에서 사거나 열심히 노동하여 얻어낸 모든 양식들은 우리가 돈을 주고 노동을 통해 얻어낸 것들이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입니다. 땅의 모든 소산물들을 우리의 먹거리로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만드시고, 윤택하고 힘있게 만드시기 위해서 입니다. 너무나 참 아름답고 감사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식사 전에 기도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준비한 식사이지만, 이 식사는 하나님께서 주시고 허락하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양식을 주셔서 감사하다는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윤택하고, 힘있게 만드시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알 때 시편기자처럼 찬양이 터져나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피조물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시편기자는 계속해서 노래합니다. 16절에서 시편기자는 여호와의 나무에는 물이 흡족하다고 말합니다. “여호와의 나무”는 최상급의 표현으로 가장 큰 나무들이라는 뜻이며,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심으신 레바논 백향목들이라고 말합니다. 레바논 백향목은 여러분도 잘 아실 겁니다. 성경에서 등장하는 아주 최상급의 나무가 레바논의 백향목입니다. 솔로몬이 성전과 왕궁을 건축할 때 썼던 나무도 바로 레바논 백향목입니다.
그 백향목에서 17절은 새들이 그 속에 깃들이고, 학은 잣나무로 집을 삼고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18절에서는 높은 산은 산양을 위한 집이 되고, 바위는 너구리의 피난처가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지으신 나무와 산, 그리고 바위를 통해 피조물들이 안전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피조물들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들로 자신의 생명을 보존할 집으로 삼고 있습니다.
10-18절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에서 각종 피조물들은 어떤 유익들을 누리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시편기자는 샘과 양식, 그리고 산과 나무를 하나님께서 제공하심으로 이 가운데서 피조물들이 활발한 생명의 활동을 묘사함으로써 창조 세계가 그저 가만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정적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힘차게 활동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 세상은 활력이 있고,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들에게 창조하신 세상을 던져주시면서 “너희 알아서 해”가 아니라 창조하신 후에도 피조물들에게 각종 유익과 만족을 주시기 위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이 아름다운 모습을 이 시편기자는 시적 묘사를 통하여 그려내면서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시편기자가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에서 피조물들이 만족하며 유익을 얻는 모습을 노래했다면, 이제는 때를 정하심으로 피조물들에게 만족을 주시는 분임을 노래합니다. 그 내용이 바로 19-23절입니다.
19절에서 시편기자는 “여호와께서 달로 절기를 정하심이여 해는 그 지는 때를 알도다”라고 말하면서 한 해의 주기를 하나님께서 정하셨음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달로 절기를 정하”셨다고 말하는데, 지금은 우리가 태양력을 쓰지만 이전의 우리나라와 같이 이스라엘은 음력, 즉 달로 주기를 나타내는 월력을 사용하였습니다. 이 음력으로 각종 절기를 알 수가 있었던 것이죠. 우리나라 절기를 예를 들면 우리는 설날이 되면 한 해가 무사히 지나가고 새로운 해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압니다. 또한 추석을 통하여 열심히 가꾼 각종 곡식들을 추수함으로 풍족함을 누릴 때가 되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달로, 지금은 해로 하나님께서 절기를 정하셔서 각각 때가 있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달로 절기를 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해 또한 그때를 따라 빛을 발하도록 창조하셔서, 이 모든 것이 날과 해와 절기를 따라 조화롭게 운행되도록 만드셨음을 시편기자는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께서 조화롭게 운행하시는 해와 달을 보면서 시편기자는 문뜩 하나의 생각이 떠오릅니다. 바로 밤에 찾아오는 어둠에 대하여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우리에게 어둠이라는 이미지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위험하고 두려운 환경입니다. 하지만 시편기자는 어둠이 단지 그런 환경이 아니라 밤을 동물들의 활동으로 가득 찬 시간으로 묘사합니다. 20-21절이 바로 그 내용입니다. 20-21절입니다. “주께서 흑암을 지어 밤이 되게 하시니 사림의 모든 짐승이 기어나오나이다 젊은 사자들은 그들의 먹이를 쫓아 부르짖으며 그들의 먹이를 하나님께 구하다가”
바로 낮에는 활동하지 않고 있다가 밤이 찾아오자 활동하기 시작하고, 젊은 사자들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의 질서를 따라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먹이를 찾으려고 부르짖는 시간이 밤입니다. 그러다가 밤이 지나고 동이 트고 낮이 되면 밤에 사냥감을 찾던 이 사냥꾼들은 굴속에 눕는다고 22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위험하고 두려운 환경인 것만 같은 밤조차도 하나님께서 운행하고 계시는 때가 밤이라는 것을 시편기자는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치 교대 근무를 하는 것처럼 밤에 활동하던 짐승들은 낮이 되자 굴속에 숨고, 23절에서는 그 낮에는 사람이 나와서 일하며 저녁까지 수고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낮에는 사람이, 밤에는 젊은 사자가 번갈아가면서 활발하게 활동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태초에 낮과 밤을 구분하신 그 모든 시간과 배경에는 끊임없는 활동이 있습니다. 즉 식물과 동물, 그리고 사람은 모두 그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의지하여 산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때에 따라 피조물들을 먹이시고 필요를 계속해서 채워주고 계십니다. 또한 그분의 계획에 따라 각자의 거주지에 머무는 다양한 생물을 위해 생명의 주기를 주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시간 안에서도 이 세상을 운행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앞에서 시편기자가 하나님의 창조 세계 안에서, 즉 하나님께서 만드신 공간 안에서 피조물들이 다양한 것들을 공급받으며 만족하면서 유익을 누린 것을 노래하였다면, 뒤에서 시편기자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절기, 그리고 낮과 밤이라는 시간 안에서 피조물들이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으며 만족하면서 유익을 누리고 있는 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공간과 시간 모두 하나님의 창조 세계이며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며 공급하시는 곳입니다.
현대 사회는 공간과 시간에서 하나님을 삭제시켜 버렸습니다. 공간과 시간은 인간이 주인이 되었으며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창세기 1장이 가르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중립 지대가 없고, 이 세상의 모든 공간과 시간은 하나님께서 주인이시라는 겁니다.
더 나아가 인간이 주인이 된 공간과 시간에서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대로 살지만, 결코 만족과 유익을 누리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언제나 서로와 투쟁하며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기에 공간과 시간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로 물고 뜯고 싸우면서 서로의 것을 탐하면서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공허해지는 것이 인간이 주인이 된 세상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원래 설계가 된대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분이 이 세상을 지으신 분이심을 깨달을 때 우리에게 만족이 찾아옵니다. 우리를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시기에 우리에게 만족을 주실 수 있으신 분도 오직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이 지금도 이 세상을 운행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갈 때 다양한 것들을 우리가 가지고 얻게 됩니다. 밥도 먹고, 옷을 입고, 집에서 쉬고, 다양한 사람들과 이야기도 하고, 일도 하는 등등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도적으로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시편기자가 알려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러한 공간과 시간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사실입니다.
밭에서 소산물이 나고, 나무에서 열매가 맺히는 것 자연의 질서이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낮에는 해가 뜨고, 밤에는 달이 뜨는 것 매번 우리가 겪는 것이고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는 자연의 질서이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삶 곳곳에서 하나님이 하시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이 세상의 공간과 시간에서 하나님이 없는 여백은 1인치도 없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성부로부터 주권을 받으신 그리스도께서 이 땅을 운행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수요일마다 배우는 요한계시록에서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이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말합니다. 그분이 이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의 주인이시라는 뜻입니다. 만일 주인이 아니라면 심판할 자격과 권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주인이신 그분은 여전히 지금도 주인과 왕으로서 이 세상을 아름답고 충만하게 운행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모든 공간과 시간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시편기자처럼 밥을 먹을 때도 그리스도께서 주신 것이기에 이것을 공급하신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보면서 이것을 만드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고, 낮과 밤이 지나는 것을 보면서 때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고, 각종 동물들과 동물들이 먹이를 먹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이것을 아는 것. 너무나도 큰 복이지 않습니까? 아름답게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여전히 운행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아니깐 말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이 세상이 그저 자연 질서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라고 밖에 생각하지 못하면서 이 세상이 생긴 목적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고 믿는 자들은 이 세상이 선한 목적으로 창조되었으며 지금도 그 선한 목적에 따라 다스리고 운행하시는 분이 계심을 압니다. 이것이 신자에게 허락된 아주 큰 복입니다.
사랑하는 새순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의 시편기자처럼 삶의 모든 공간과 시간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찬양하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모든 공간과 시간 속에서 우리를 공급하시고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아는 큰 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신자에게 허락된 큰 복입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삶의 모든 공간과 시간 속에서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우리 모든 새순교회 성도님들이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말씀을 두고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시편기자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대로 내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신 세상을 운행하시면서 각종 피조물들에게 만족과 유익을 주시는 분이심을 노래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공간과 시간은 하나님께서 운행하고 계십니다. 이 공간과 시간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공급하시고 필요를 채우심으로 우리에게 만족과 유익을 주고 계십니다. 이 시간 같이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시편기자처럼 우리의 삶의 모든 공간과 시간 속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을 찬양하는 우리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하나님을 아는 이 큰 복을 누리면서 일생동안 하나님을 찬양하는 우리가 되게 해달라고 이 시간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