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1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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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요한계시록 11:1-13 찬송가 516장 ‘옳은 길 따르라 의의 길을’ 오늘 본문은 여섯 번째 나팔과 일곱 번째 나팔 사이에 등장하는 내용으로 10장의 내용에 이어서 11장 중반까지 이어지며 마치 시상식에서 마지막 대상수상자 발표를 앞두고 잠시 시간을 가지는 것처럼 11장 후반부에 일곱째 나팔을 통해 선포되는 그리스도의 나라와 그 왕권을 기대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특히 10장에서 요한은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게 되는데 이는 입에는 꿀 같이 달고 배에서는 쓴 두루마리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삶은 말씀을 받을 때에 큰 기쁨이 있지만 그 말씀을 증거하며 성취되는 과정에 증인이 겪게 되는 많은 어려움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 맥락에서 오늘 11장의 말씀은 요한에게 주어진 말씀의 증거를 받은 교회도 동일하게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배에는 쓴 증인의 삶을 걸어가게 될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함께 본문을 보며 교회가 증인으로 부르심 받아 걸어가야 하는 길이 어떤 길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전 측량(1-2절) (1-2)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 성전 바깥 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먹은 요한에게 이번에는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었습니다. 지팡이 같은 갈대란 ‘측량 도구’였습니다. 속이 비고 가벼운 갈대는 긴 것이 길이가 3미터가 되기도 했으며 이를 가지고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측량하는 성전은 무엇입니까? 이미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어 있는 상황이었고 새 예루살렘이라고 하기 에는 이방인에게 짓밟힌다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는 바로 성령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참 성전 된 우리들 곧 교회를 의미합니다. 특히 초림과 재림 사이를 살아가고 있는 말세의 교회를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교회를 측량하시는 것입니까? 성경 속에 측량은 두 가지 목적으로 시행됩니다. 아모스 7장에서는 그 백성을 징계하시기 위해 다림줄로 측량하셨고 에스겔 40장에서 42장에는 성전을 자신의 소유로 확정하시고 보호하시기 위해 측량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측량은 무엇을 위해 측량하시는 것입니까? 바로 ‘소유와 보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세의 시대 증인의 삶을 살아가는 그 백성들을 친히 계수하시고 그들을 소유로 삼고 지켜 주십니다. 그런데 그 뒤에 ‘성전 바깥 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솔로몬 성전은 안마당, 바깥마당으로 두 개의 마당으로 나뉘어 있었고 헤롯 성전은 이를 세 개의 마당으로 나누어 놓았습니다. 이에 따라 제사장과 유대인 남자와 여자와 이방인들이 각 각 나아갈 수 있는 한계가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 백성이 따로 있고, 세상에 속한 이방인들에게 짓밟히도록 내버려 두시는 자들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전투하는 교회’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 성전은 완성될 새 예루살렘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지상교회는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 있지만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그 약속을 붙들고 승리할 수 있도록 우리의 믿음을 붙들어주시는 것이지 우리가 고난과 고통 없는 삶을 살아갈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땅의 교회는 전투 중 부상을 당하기도 하고 죽기도 하며 불신자들에게 짓밟히는 듯한 모욕과 수치를 겪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빼앗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측량하신 자들에게 베푸시는 견고한 은혜인 것입니다. 그리고 전투하는 교회는 승리할 그 날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 새 예루살렘에서 더 이상 세상이 짓밟을 수 없는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와 보호 가운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질문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서 왜 내 삶에 이런 고통이 찾아오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은 그 질문에 답을 줍니다. ‘아직 우리는 전투중이란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세상의 공격이 거세게 몰아쳐도 하나님께서 측량하게 하신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그 백성의 믿음을 빼앗을 수 없음을 기억하며 승리의 그 날까지 묵묵히 주어진 증인의 삶을 살아가십시다. 두 증인(3-13절) 이어서 3절부터 13절 까지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두 증인에 대한 말씀이 이어집니다. (3-4)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그들은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여기서 두 증인이란 누구를 의미하는 것입니까? 어떤 학자들은 이것을 말세에 임할 실제 인물로 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맥락에서 많은 이단의 교주들은 이 말씀을 들어 자신이 바로 그 두 증인 중 한 사람이라고 주장하며 많은 이들을 미혹하였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의 전체 내용과 다른 성경 말씀들의 내용들을 종합해보면 이 두 증인을 ‘교회’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요한계시록 1장 20절 마지막에 보시면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라고 정확히 표현해놓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두 촛대’라는 이 표현은 ‘교회’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두 감람나무’는 무엇입니까? 스가랴 4장 11절에서 14절에 보면 ‘두 감람나무’를 기름 부음 받은 자 둘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두 사람 곧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를 의미합니다. 스룹바벨은 1차 포로귀환 때 유대총독이었고 여호수아는 대제사장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 땅의 교회를 ‘두 감람나무’라고 부르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보시면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씀합니다. 곧 스룹바벨과 여호수아가 그 땅에 왕 같은 통치와 제사장으로서의 책무를 감당한 것처럼 신약시대의 교회가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두 촛대, 두 감람나무입니까? 숫자 둘은 증인으로서의 최소단위를 의미합니다. 곧 이 땅의 교회가 그리스도의 증인된 사명을 가지고 있음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굵은 베옷을 입은 것은 이 땅에 임할 재앙을 슬퍼하며 선포하는 선지자의 사명처럼 교회가 천이백육십 일 곧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까지 증인의 사명을 감당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두 증인은 특정한 어떤 능력을 받은 말세에 나타날 증인으로 보기보다 증인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이 땅의 지상교회를 의미하는 것으로 봄이 더 적절해 보입니다. (5-6) 만일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의 원수를 삼켜 버릴 것이요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반드시 그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그들이 권능을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가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능을 가지고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5절에서 6절에는 그 증인된 교회가 어떠한 교회인지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누군가 교회를 해하고자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 원수를 삼켜 버릴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불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예레미야 23장 29절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교회를 통해 전해지는 말씀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원수들에게 사망선고와 같은 경고의 말씀이 될 것임을 의미합니다. 또한 하늘을 닫아 비가 오지 못하게 한다는 표현은 ‘엘리야’ 선지자의 사역을 떠올리게 하며 물을 피로 변하게 한다는 표현은 ‘모세’를 통해 애굽 땅에 재앙을 내리신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는 엘리야를 통해 전해진 말씀을 무시하고 아내 이세벨의 말에 귀 기울이며 범죄 했던 아합과 그 가문의 최후, 또한 모세를 통해 전해졌던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던 바로와 애굽처럼 교회를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세상이 맞게 될 심판을 경고하시는 것이며 엘리야와 모세에게 전해진 재앙의 말씀이 성취된 것처럼 교회에게 전해주신 말씀이 일점일획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증인의 길을 걷는 교회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엘리야와 모세와 함께 하셨던 것처럼 우리와도 함께 하실 것을 보여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런 교회에도 박해와 어려움에 처할 때가 찾아올 것입니다. (7-10) 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터인즉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보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이 두 선지자가 땅에 사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사는 자들이 그들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두 증인이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하고 이겨 두 증인을 죽인다고 말씀합니다. 이는 이 땅에서 교회가 악한 마귀가 통치하는 세상의 권세에 핍박과 박해를 받을 때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시체는 큰 성에 있는데 이 성은 영적으로는 소돔, 애굽, 또한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세 곳은 전혀 다른 곳인데 어떤 공통점이 있습니까? 소돔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 죄악이 가득한 도시였고 애굽은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이 헛된 우상숭배와 하나님 없는 문명으로 채워진 세상나라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은 이 땅에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을 내쫒아 못 박아버린 예루살렘을 의미합니다. 이 세 곳의 공통점은 모두 하나님을 경외함 없이 악을 행하고 하나님의 원수로 행한 장소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
신들이 왕이 되어 재판석에 앉고 하나님을 피고석에 두어 정죄하는 곳입니다. 그곳에 던져진 시체들은 사흘 반 동안 무덤에 장사하지도 못하고 길에 버려져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며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낸다고 합니다. 버려진 시체는 이 땅에서 교회가 당하게 될 핍박과 고난 특히 교회를 천대하는 세상의 공격을 의미합니다.
또한 시체를 보고 즐거워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교회의 고통을 즐거워하고 조롱할 세상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도 이 땅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국가, 도시, 성읍에서 그리스도를 따른 다는 이유로 길가에 버려진 시체와 같은 취급을 당하며 생명의 위기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에 이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우리도 이런 위기에 처할 수 있음을 기억하며 지금 내 삶의 자리에서 짊어져야 하는 나의 십자가를 굳게 붙잡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11-13)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그들이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그 때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11절에 ‘삼 일 반 후에’라는 표현은 교회를 핍박한 이 세상 나라들의 즐거움이 오래되지 않을 것임을 알려주시는 말씀입니다. 삼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두 증인에게 들어가 발로 일어서자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한다는 것은 교회가 핍박과 환난을 당하여 없어지는 듯하나 그 고난의 때를 지나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생기 곧 생명력을 얻어 회복될 교회의 모습을 의미합니다. 실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역사가운데 수없이 많은 핍박과 고통을 당했으나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그 생명을 유지하였습니다. 그리고 최후 승리의 그날 하나님께서 ‘이리로 올라오라’ 말씀하셔서 영광중에 부활과 영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나라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반대로 ‘큰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멸망과 심판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소돔이 그러했고, 애굽이 그러했고, 로마가 그러했고 최후의 그 날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이 땅의 모든 세상 나라와 그 민족이 다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진으로 인하여 죽은 칠천 명을 제외하고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후 지진과 여러 가지 사건들이 생기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며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한 백부장과 그 함께 한 자들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증인된 삶을 계속해서 걸어가야 하는 이유입니다. 두 증인의 삶과 같이 교회의 증인된 삶은 고난과 죽음과 비천에 처하는 고통스러운 것이나 그 삶을 통해 누군가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오는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증인된 교회는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그대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이 땅의 교회는 주님처럼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씀을 증거 하지만 세상에서는 버림을 받고 천대를 받아 귀하게 여김을 받지 못하며 고난과 핍박을 당하고 죽음에 내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교회에게 회복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며 최후 승리의 그 날 부활과 영생의 자리로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를 고난 가운데 두신 이유는 이 땅에 회개할 자들에게 ‘기회’를 주시기 위하여 ‘증인’의 삶을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기회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입니다. 증인의 삶은 절대 녹록하지 않지만 이 길의 끝이 부활과 영생이기에 또한 우리의 증인된 삶을 통해 누군가 생명을 얻고 회개할 기회가 주어질 수 있기에 우리를 증인으로 부르신 주님 앞에 나의 삶을 드려 각 자가 서있는 자리에서 신실한 주님의 증인으로 살아가십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이 땅의 교회는 피할 수 없는 인생의 고난, 아픔 외에도 주님의 증인으로 살아가며 겪는 온갖 수모와 희생과 천대와 박해가 있을 것이라는 말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히려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삶을 포기하고 주님께서 가신 길을 역주행하며 오히려 소돔과 애굽과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원수의 길로 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이 시간 최후 승리의 그 날을 고대하며 주어진 전투의 길에서 뒤로 물러서지 않게 하시고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그리스도의 증인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은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증인된 삶을 통해 세상에 주님을 떠나 거역하는 많은 이들이 회개하고 주께 돌아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놀라운 회복의 역사들이 일어나게 하시고 먼 훗날 우리를 향하여 ‘이리로 올라오라’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 듣는 복된 하나님의 백성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의 참 의미를 본문 안에서 묵상해봅시다. 2. 두 증인이 놀라운 하늘 권세로 말씀을 증언하였으나 짐승에게 죽임을 당한 사실은 이 땅의 교회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묵상해봅시다. 3. 죽음 이후 두 증인의 시체가 장사되지 못하고 큰 성 길에 버려져 조롱거리가 된 것을 보며 증인된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세상가운데 겪을 고난이 무엇인지 묵상해봅시다. 4. 언젠가 하늘로부터 큰 음성으로 ‘이리로 올라오라’는 말씀을 듣게 될 때 우리의 마음은 어떠할 지 묵상해봅시다. (작성: 강요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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