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2:4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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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쳐 이르시는 예수님!

12장은 유월절 엿새 전에 라는 시간 정보를 통해 예수께서 3년의 공생애 마지막을 그리고 십자가 죽음을 엿새 앞두고 있는 시점임을 알려줍니다. 예수의 죽음을 마리아가 예수께 부은 순전한 나드 한 근의 의미에서 저자 요한은 죽음의 길을 알립니다. 그럼에도 가룟 유다는 하나님의 사랑이 아닌 심판의 대상이 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요한복음 3:18 “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렇게 시작된 죽음의 길은 12절 부터 ‘왕께서 입성’하시는 장면으로 시작하고 예수를 맞이하는 사람들은 소동하기 시작했고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에 대한 의미를 1. 영광을 얻을 때 그리고 2.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며 예수를 따르는 본질은 ‘영생하도록 보전’하시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십자가를 지는 비참한 죽음이었고 이런 과정에서 예수께서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라는 깊은 통찰의 기도는 그저 상황을 모면하려는 연약한 우리의 모습과 달리 어긋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속에 그려진 ‘괴로움’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예수는 그렇게 십자가를 통해 들리셔야 했습니다. 죄를 대신하는 십자가의 죽으심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무는 일이지만 이 땅의 지배를 가진 사탄의 세력인 세상 임금을 진멸하는 것이 중요함을 알려 줍니다.
요한복음에 심판이라는 단어가 3.5.7.9.12 장에서 20번이나 사용됨으로 예수께서 누구신가를 아는데 있어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함께 중요한 부분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는 것이죠. 31절에서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는 것은 어둠이 지배하는 세상에 대한 심판의 시작을 알리는 것입니다. 지난 주 살펴보았던 세상 임금이 어떻게 세상을 운영하고 있는지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세상은 결국 생명을 죽이는 것입니다. 땅은 엉겅퀴를 내고 여전히 저와 여러분을 땅에서 먹고 사는 인생으로 만들고 그렇게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삶 속에 빛으로 오신 예수께서 이런 삶이 우리의 삶이 아닌 ‘하나님 나라’가 있음을 알려 주시는 것이죠.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시대에 머물러 있기를 좋아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며칠 전 화성에서 엄청난 화재로 인해 많은 생명을 잃게된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밝혀지는 것은 회사는 쉽게 고용한 사람들을 자르기 위해 문서상 회사를 만들어 필요에 따라 여기저기서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했고 그래서 노동자들은 업무의 숙련도 그리고 화재시 대피로에 대한 숙지 등이 원할하게 이루어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미 몇 개월전 소방 점검에서 이런 부분이 지적되고 개선해야 할 컨설팅까지 받았다는 것입니다. 경고를 무시한 결과는 많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참사로 이어집니다. 이제 심판을 받 강력한 처벌을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40절에서 이사야의 글을 인용합니다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며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한 말씀이 성취된 것이라고 기록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 그렇게 하셨다’는 식으로 오해할 수 있는데 우리는 주변에서 ‘너 그렇게 하면 안된다, 그러다 큰 일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앞서 소방관의 경고를 무시한 업체가 소방관의 책임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엉겅퀴를 내는 땅에서 생명을 붙잡지 않고 다른 것을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붙잡혀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돈, 명예, 권력에 붙잡혀 있고 그렇기 때문에 보지 못합니다. 눈으로 본 것을 깨달아야 하지만 눈으로 본 것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다시 화재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화재가 시작되자 직원들은 초기 진압을 위해 쌓였던 배터리를 치우거나 소화기를 가져다가 뿌리는 등 각자의 생명보다 먼저 알고 있는 초기 진화를 위해 움직이는 장면이 오히려 더 가슴 아프게 합니다.
분명 소방관은 취급하는 물질이 일반 화재와는 달라 대처도 달라야 하고, 더 큰 소화기가 필요하다고 했지만 관리자들은 이를 무시했습니다. 그래서 일반 화재였다면 분명 초기 진압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름에 물을 붓듯 더 빠르고, 큰 화재로 이어졌습니다. 회사가 경고 받은 대로 더 큰 소화기를 준비하고 위험물을 다룬다는 인식을 직원들에게 전파하고 비상시 탈출할 수 있도록 교육을 했어야 함에도 그들 눈에는 ‘돈, 이익’만 보인 것입니다. 이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성경은 43절에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했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보고 우리의 마음은 너무나 빨리 반응합니다. 이대로 둔다면 많은 사람은 구원의 길이 아닌 패망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들은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의 생명을 버려 또 다른 생명을 구원하시는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분명히 마지막 심판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시작하면서 예수님의 행동을 표현한 ‘외쳤다’는 단어는 멸망의 길을 걷는 우리를 버려두지 않고 기회가 있는 지금 외쳤다입니다. 예수께서 외치는 행동을 표현한 경우가 매우 드물기 때문입니다. 외치는 동사의 사용 예가 귀신이 들려서 ‘외친다’, 또는 병자가 예수를 향해 고쳐달라고 외치는 것이죠. 지금 예수님께서는 ‘최종 호소’를 하고 계십니다. 앞서 36절 주님은 ‘떠나가서 숨으셨’다고 했고 저자는 해설자처럼 등장해 예수를 믿지 않는 배경을 말씀 드린 것처럼 선지자의 예언을 이룬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42절에 관리 중에서 믿는 자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당시의 엄중한 상황인 즉 출교를 당하는 현실 때문에 드러내지 못했던 정황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시국에 예수께서 다시 등장해 마지막으로 ‘외치는’ 것입니다. 그만큼 시급성을 다투는 문제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 나를 보는 것은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나를 보내신 이’에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여러차례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를 신성모독으로 또는 믿으려는 이들은 ‘메시아’인가에 집중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지난 2년 동안 베푸신 말씀과 기적을 통해 하나님을 바라 봐야 했지만 그렇게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최종 호소에 다시 한 번 너희가 그렇게 학수고대 하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시며 그것을 너희가 믿는 하나님의 일과 비교해 보라는 것입니다. ‘믿는다’라는 직접적인 화법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이’이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사람들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 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 하려 함이로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주님은 마치 음주 운전을 막아서는 것 같고, 빨간 불에 횡단을 하려는 시민을 막는 것이지 사고가 나도록 술을 먹이고 운전을 유도하고 빨간 불에 건너라고 조장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렇게 세상 임금 즉 세상 영광에 빠져 살면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심판 받아 멸망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것을 막아서 건져 내시는 구원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경고를 무시한 결과 생명을 잃는 것이 심판일 뿐만 아니라 경고를 듣지 않은 범죄한 자들에 대한 심판입니다.
누가 여러분에게 길을 지도하시고 여러분이 가는 길을 보호 하십니까? 여러분이 성장해 부모의 조언도 필요없이 세상을 다닐 때 누가 위험을 말하며 여러분의 안위를 걱정하며 여러분의 선택에 올바른 길과 가야할 길을 알게 하겠습니까? 우리는 예배를 시작하며 읽는 하나님의 말씀 ‘잠언’의 내용을 한 줄이라도 기억하고 있습니까? 오히려 60초 짜리 쇼츠가 주는 영상을 더 기억하지 않습니까? 지적이 없는 세상을 살면서 거스리는 말을 하면 ‘감정이 상했다’고 말함으로 누구의 지도도 따르지 않는 세상에 여전히 주님의 ‘외침’은 최종 호소와 같이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로마서 8:23–26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생명을 구원받는 것은 나 혼자 해결해보겠다는 문제가 아닙니다. 생명을 구하는 방식, 영생을 얻는 방식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보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각자의 마음에 믿고 받아 들이는 것이며 그저 세상에서 누구를 만나면 ‘만나서 영광입니다’고 인사 말로 건내는 영광의 부스러기가 아니라 매주 마다 작은 공간이라도 예배하도록 부르시고 비록 함께 하는 사람이 없더라도 말씀을 전해줄 사역자가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 입에 담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어지는 49절의 말씀은 앞선 말씀과 연결된다면 ‘호소하는 분위기’가 입장을 바꾼듯 해석될 수도 있으나 이 또한 구원을 위한 아버지의 요청이라는 것으로 해석되는데 ‘친히’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 예수의 인간적인 부탁을 넘어 하나님께서 ‘기회’ 즉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의 말을 듣고, 보고 한 것으로 구원하신다는 ‘명령’이니 확실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 48절의 심판. 그리고 마지막 날에 심판을 연결한 것이라면 ‘지금’의 기회를 놓친다면 다시는 없다는 ‘구원’에 대한 확실함을 강조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그럼에도 50절에 ‘명령의 이유가 영생인 줄 안다’는 예수의 말씀으로 명령이라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부탁이 아니라 ‘명령’으로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 즉 앞으로 일어날 십자가의 죽으심이 하나님께서 ‘친히’ 명령하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심판에 집중하기 보다 구원을 향한 예수님의 호소에 더 집중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운동 경기 중에 특이하게 야구에는 ‘희생프라이’, ‘희생번트’라는 것이 있습니다. 주자가 있을 때 감독은 타자에게 주자를 진루 시키야 하거나 3루에서 홈으로 들어 올 수 있도록 타자에게 ‘희생’할 것을 명령합니다. 희생시키는 이유는 선수가 밉거나 기록을 나쁘게 할 목적이 아니라 ‘팀’을 승리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함께 승리를 기뻐할 이유인 것이죠
선수는 과감없이 자신을 희생해서 팀이 점수를 얻도록 하는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이신 예수와의 사랑의 관계에서 십자가의 죽으심을 명령하셨고 심판과 함께 움직이지만 이유는 우리를 위한 구원의 결과를 얻어 냅니다. 그러니까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핵심이 이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희생을 찾아 보기 힘든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특히 자기의 목숨까지 버리는 상황은 평생을 살면서 겪기도 힘들고 보기도 쉽지 않은 광경입니다. 물론 2천년전 팔레스타인의 지역에 오신 예수께서 여전히 나와 우리를 위해 그러했다는 것이 말 그대로 믿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 66권은 우리에게 차분하게 읽고 듣고 그러한가 따져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처럼 나를 믿는 것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나는 믿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믿습니다’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는 이미 믿는다고 스스로를 확신하고 있습니까? 교회 안에 있다고 너무 자신을 믿지 마세요. 성경을 읽고 듣고 예수께서 어떠하신 분이신가를 스스로 깊이 경험해야 하고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께 하신 말씀 그대로 문자를 통해 지금도 우리에게 ‘그대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람의 계획은 시대를 따라 변하고 상황에 따라 변합니다. 말로는 자녀를 지킬 수 있다고 하지만 따라 다닐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한다고 지켜 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스스로가 자신을 지킬 수 있다고 말하지만 최근 우리 사회에서 일어난 참사들이 보여주는 허망한 죽음은 인간의 무력함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지 않습니까?
법은 늘 따라 만들지만 여기에는 자기 이익을 극대화 하려는 사람들, 국민의 권력을 부여받았지만 국민의 눈높이보다는 자기와 자기 주변 사람들과 이익을 놓치지 않으려는 이들의 권력 욕심은 아직까지 세상 임금이 주인공인 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세상 임금에 붙잡혀 우리 인생의 시간을 허비해 멸망에 이르러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는 그저 놀고 먹는 편하게 힐링하는 곳이 아니라 지금 우리를 갉아 먹고 있는 생로병사의 삶에서 벗어나고, 올바름이 무엇인지 그로 인해 고통 당하는 고통이 사라지고, 악이 판치게 만들고 이를 이용해 거대한 고통을 만든 무리가 정당한 심판을 받는 광경을 보는 것입니다.
주님이 무리를 향한 지금의 때는 이제 지나 갑니다. 13장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집중하시면 엄청난 비밀을 폭로하십니다. 예수의 관심은 많은 무리가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과 함께 길을 걸어온 제자들, 이제 자신의 십자가 죽음으로 찾아올 인간적인 공허함, 눈에 보이는 예수의 없음으로 인해 힘들어할 제자들에게 집중합니다. 여러분의 복음이 무리들 속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 끝나지 마시고 예수의 제자들에게 주시는 특별한 가르침과 예수의 친근함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예수의 이야기를 할 때 그분의 따듯함과 친철함으로 이끌 수 있는 진정한 예수의 복음을 먼저 경험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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