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지어져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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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을 이루시는 성령

에베소서 2:11–22 NKRV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사랑합니다! 드림인 예배에 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문제를 내겠다. 빨간색과 노란색이 섞이면 무슨 색이 되는가? 그렇다. 주황색이 된다. 빨간색과 파란색이 섞이면 무슨 색이 되는가? 보라색이 된다. 노란색과 파란색이 섞이면 어떻게 되는가? 초록색이 된다. 검은색과 파란색이 섞이면 무슨 색이 되는가? 남색이 된다. 그렇다면 빨강, 노랑, 파란색이 섞이면? 검은색이 된다. 그렇다면 빛의 3원색은 무엇인가? 그렇다. 빨강, 녹색, 파란색이다. 그래서 영어로 RGB라고 표현한다. 이 세가지 색이 합치면 어떻게 되는가? 그렇다. 하얀색이 나타난다. 여러분이 보는 컴퓨터 모니터와 텔레비전이 3원색으로 모든 색을 표현할 수 있다. 그러니 새로운 색을 내려면, 예쁜 색을 내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섞이지 않고서는 절대로 다채로운 색을 낼 수가 없다.
오늘 말씀을 보게 되면 바울이 “너희”로 부르면서 시작한다. 여기서 “너희”는 지금 이방인이다. 이방인은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할례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표이다. 반대로 할례를 받지 않았다는 것은 유대인이 아니며 하나님의 언약과도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이방인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기 때문에 유대인과 인종적, 민족적인 연관성이 없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과 맺은 구약의 옛 언약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따라서 이방인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
에베소서 2:13–14 NKRV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여기서 “이제는”은 시대가 변했음을 말하고 있다. 이방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가까이 올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방인을 가까이 올 수 있게 하는 통로이다.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막힌 담”이 있었다. 두 그룹을 원수 사이가 되게 만든 담이다. 이 담은 여기서 아주 적대적으로 보여진다. 이것은 또 하나의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예루살렘 성전에 가보게 되면, 성전 안에 뜰과 이방인의 뜰을 분리하는 담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는 예루살렘 성전 내부에 있는 담을 생각하며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두 그룹을 하나로 만드신다. 적대감을 제거하신 방법은 14절에 “자기 육체를 허시고”이다. 이것은 십자가의 죽음을 뜻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평화를 가져왔다. 그러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적대감을 가지게 만든 것이 무엇인가?
에베소서 2:15 NKRV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적대감을 가지게 만든 것은 바로 ‘율법’이다. 율법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갈라놓는 상징이라는 것이다. 율법에는 유대인들이 지켜야하는 계명이 있다. 먼저 할례를 들 수 있다. 할례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상징이다. 유대인들은 또한 음식법과 안식일 법을 지킴으로 스스로를 이방인들과 구별했다. 이러한 계명들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를 분리해놓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율법을 완성시켰다. 그러면서 율법을 무효화시킨 것이다. 율법의 국가적이고 의식적이고 제도적인 법들이 무효화되었다. 유대인 신분을 표시하는 계명들도 더이상 지킬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율법이 완성됨으로 인해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이 없어지고 둘 사이에 있던 적대감, 불화, 서로 시기하고 미워하거나 원수된 것이 사라지고 평화가 오게 되었다. 그러면서 예수 안에 하나가 되어 새로운 사람이 되게 창조된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은 “먼 데 있는 너희”라고 부르는 이방인과 “가까운 데 있는 자들”이라고 부르는 유대인에게 평화를 가져왔다.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는 이방인과 유대인을 하나님과도 평화를 이루게 하셨다.
에베소서 2:16 NKRV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렇게 하셔서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
에베소서 2:18 NKRV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는 이방인과 유대인을 서로 화평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하나님과도 화목하게 만드셨다. 그리하여 이방인의 신분도 바뀌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더 이상 바깥에 있는 사람, 모르는 사람, 나그네, 외국인이 아니라 유대인과 동일한 시민, 동료 시민, 그리고 하나님의 권속 즉,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신분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전에 가졌던 이방인의 신분이 완전히 변하게 된 것이다. 누구 때문인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말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자들이 이제 하나님의 식구가 되었다. 더 나아가 이방인은 이제 선지자와 사도들과도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 되었다.
에베소서 2:20 NKRV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이제 믿는 이방인들은 함께 집으로 세워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다고 한다. 모퉁잇돌은 건물을 짓는 초석이다. [사진] 사진을 보면 이렇다. 건물의 귀퉁이에 놓는 사각형의 돌이다. 모퉁잇돌은 건물의 기초 지을 때 처음 놓아야 하는 돌이다. 건물의 모서리, 귀퉁이에 놓는 사각형의 돌이다. 그러면서 두 벽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만약에 건물을 다 짓고 난 후에 모퉁잇돌만 빼버리게 된다면 건물이 무너질만큼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면서 이 건물은 건축이 진행 중에 있다는 것이다. 그럼 어떤 건물을 짓고 있다는 것인가?
에베소서 2:21 NKRV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무엇을 짓고 있는가? 성전이다. 완공된 성전이 아니라 그것도 지어져 가는 성전이다. 성전은 구약에서 솔로몬이 지었다. 성막을 대체하는 건물로서 하나님의 언약궤를 위하여 지은 집이다. 하나님은 언약궤 위에 임재하셔서 죄를 용서하시며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곳이며 하나님의 거처이다. 그런데 바울은 이 성전이 지어져 간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방인들도 이 성전 건물의 일부가 되고 있다.
에베소서 2:22 NKRV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믿는 이방인들을 성전의 일부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거처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 성전은 눈에 보이는 건물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성전이면서 마지막 때를 준비하는 성전이다. 사도바울은 구약의 성막과 성전의 개념을 더 점점 발전시키고 있다. 이제는 여기 있는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전된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첫 번째로 교회 공동체에 있는 사람들을 ‘수용’할 줄 알아야 한다. 수용이라는 단어는 어떠한 것을 받아들인다는 사전적인 뜻이 있다. 우리는 대단히 착각하는 것이 있다. 죽어도 우리는 사람을 바꿀 수 있는가? 내 앞에서는 바뀐 것처럼 보일 수는 있으나 뒤에서는 어떤 모습일지 아무도 모른다. 오직 하나님만 아신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람을 내가 원하는대로 컨트롤하거나 바꿀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정해야 한다. 자꾸 사람을 바꾸려고 안간 힘을 쓰다가 마음이 점점 어려워지면서 시험에 들고 관계를 가까이 하지 않거나 교회를 떠나는 안타까운 모습들을 보게 된다. 그래서 있는 모습 그대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이 친구는 이런 캐릭터구나~’라고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도 우리를 조건을 보며 주님 마음에 잘 맞아서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있는 모습 그대로 바라보시고 사랑하시며 우리가 그 사랑을 누리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작정 참는 것이 옳다는 것인가? 아니다. 나의 감정을 진솔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자꾸 험한 말을 하는 친구가 있다면, “친구야, 너가 그렇게 말하면 나는 너무 마음이 아프다.”라고 말해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험한 말을 한다면 마음이 많이 아픈 친구라고 생각하며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진솔하게 기도하는 것이다. 이 친구 때문에 마음이 너무 아프다고, 힘들다고 도와달라고 기도하는 자에게 성령님이 오셔서 여러분의 슬프고 괴로운 마음을 기쁨과 평안으로 바꾸어 가실 것을 기대하며 살아가길 소망한다. 전도사님도 만약 수용의 마음이 없었다면 여러분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 보일 때마다 군기를 잡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나를 먼저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해주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내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 아이들을 군기잡을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 교회 안에서 가정 안에서 학교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주님의 마음을 닮아 수용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두 번째로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신앙이 좋은 친구들도 있고, 신앙생활하는게 어색하면서 어려운 친구들이 있다. 그만큼 이 공동체에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같이 신앙 생활을 하다보면 교회에서 열심히 하고 찬양도 앞에 나와서 열심히 춤추고 기도도 잘하고 봉사도 잘하는 친구를 보면 너무나 귀하고 사랑스럽다. 그러나 그런 친구들이 간혹 신앙 생활을 잘 못하거나 대충하는 친구들을 보고 답답해하며 화가날 수도 있다. 우리는 이 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사람들마다 각자 성장하는 때와 꽃을 피우는 시기가 각각 다르다.
세상에 나가보면 다양한 꽃들이 있는데, 꽃들마다 꽃을 피우는 시기가 각각 다르다. 하물며 꽃보다 더 귀하고 아름다운 여러분이 어떻게 성장하는 시기가 같을 수 있겠는가? 우리 주님도 여러분을 바라볼 때 성장이 더디냐고 혼내시지 않으신다. 오히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니 어떤 친구가 굉장히 느리고 답답해 보이더라도 그 친구가 주님 안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늘 기도하라. 훗날 아름답게 꽃을 피우게 하실 주님을 기대하길 소망한다. 그래서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간다고 현재 진행형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세 번째로 교회 공동체 사람들 안에서 높고 낮음, 급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뭔가 리더쉽의 자리에 있으면, 훈련을 많이 받거나 성경에 대해서 많이 안다고 생각하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면 뭔가 클라스가 있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대단한 착각이다. 신앙 생활을 하면 할수록 저 마음으로 고개가 빳빳해지는 사람은 과연 성경적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스스로 점검해봐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은혜를 깨달아갈수록 내 안에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성경을 읽고 하나님에 대해 말씀에 대해 깨달아갈 때,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이 붙들고 계시지 않으면 큰일나는 존재구나, 나는 죄인 중에 가장 악질이구나라고 고백하게 된다. 왜인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할 때 우리는 의롭다고, 의인이라고 불러주시지만, 여전히 우리의 상태는 무엇인가? 죄인이기에 늘 넘어지고 하나님 뜻대로 살아보려고 결단하지만 그렇게 살지 못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갈 때 날마다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구하게 된다.
그러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보며 내가 누구를 판단하고 왜 인생을 저렇게 살까 생각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 마음으로 공동체에서 살아갈 때 감히 누가 높고 낮음을 비교할 겨를이 없는 것이다.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고3이 높네, 중1이 낮네, 나이도 어린 것이, 나 정도면 교회에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마음을 모두 버리기 소망한다. 그래야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지어져갈 수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드림인 여러분, 우리는 누구의 자녀인가? 그렇다. 하나님의 자녀이면서 빛의 자녀이다. 우리 주님이 빛이시기 때문이다. 다양한 빛들의 색깔이 섞이게 되면 결국 어떤 색이 되는가? 하얗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물감은 여러 색을 섞으면 섞을수록 무슨 색이 되는가? 검은색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 어떠한 좋은 일을 하고 서로 연합하더라도 결국에는 검은색이라는 것이다. 아무 의미가 없다. 반대로 빛의 자녀들이 함께 섞이고 모이면 결국 하얗게 된다. 그러나 요즘의 사람들은 개인주의가 심해져서 자신이 가진 고유의 색을 바꾸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래서 섞이는 것은 부딪쳐야하기 때문에 피곤하고 힘든 일이다. 나의 색을 보여주고 내어줘야하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나의 색을 다른 사람과 섞지 않으면, 모이지 않으면 하얗게 될 수 없다. 우리가 가진 색깔과 모습이 서로 다르더라도 예수님이 나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 마음을 본받아 우리도 서로 끝까지 사랑하기 원한다.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 모인 이곳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 주님의 나라가 되고, 이 땅에서도 천국을 맛보게 될 줄 믿는다. 그렇게 빛의 자녀로 아름답게 서로 함께 세워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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