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얻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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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배경
지난 화요일은 한국전쟁 74주년이었습니다. 한국전쟁은 북한 괴뢰정권의 탐욕으로 인하여 발발하였고, 한반도에 깊은 상처를 남긴 전쟁이었지요. 대한민국의 국군과 미군을 포함한 16개국이 대한민국의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목숨바쳐 희생한 전쟁이었습니다. 얼마나 숭고한 정신입니까? 알지도 못하는 나라, 보잘 것 없는 대한민국의 자유를 위하여 젊은 군인들이 희생을 하였습니다. 그들의 희생으로 지금까지 대한민국은 자유를 누리며 살아오고 있습니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워싱턴 DC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비에 새겨져 있는 글귀입니다. “Freedom is not free”
우리들에게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 줄 알게 하여 주는 글귀입니다. 타인의 자유를 위하여 나의 목숨까지 바칠정도로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에 나의 자유로 나만을 위하여 산다는 것은 배은망덕한 태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더 깊은 의미의 자유에 대해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성전에서 사람들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이지요.
진리와 자유에 관해서 말씀하십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맞습니까?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까? 진리와 자유가 어떻게 연결이 됩니까? 직관적으로 둘이 연결이 잘 되지 않습니다. 진리는 진리이고 자유는 자유입니다. 만약에 진리가 자유의 조건이라고 직관적으로 생각한다면, 가장 자유로운 사람이 누구입니까? 진리를 가장 많이 아는 사람 아니겠습니까?
초대교회 시절에 영지주의자들이 이런 주장을 펼쳤습니다. 우리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신비로운 지식이 있다. ㅣ그러므로, 우리는 너희보다 자유롭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맞습니까?
진리와 자유가 직관적으로 잘 연결이 되지 않는 이유는 사실 진리와 자유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본 뜻에서 이해하기 보다는 사람들의 생각으로 이해하려고 하다보니 본 뜻이 달라져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짧은 시간이지만 진리와 자유에 대한 예수님의 본 뜻을 살펴볼 것입니다. 먼저 3가지 착각 혹은 오해를 생각해볼 것입니다. 그러면, 결론에서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될 것이고, 우리에게 복된 소식인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먼저 자유에 관한 오해입니다. 우리는 진리와 마찬가지로 자유에 대해서도 세속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유의 세속적인 이해는 프랑스 시민혁명(1789)을 통해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중세 봉건제도와 왕정을 벗어나고 근대 민주주의, 근대 국가로서 전환을 이루어낸 의의를 가진 프랑스 시민혁명의 3대 가치는 “자유, 평등, 박애(인류애)”입니다. 여기에서 자유는 이렇게 정의될 수 있습니다. “타자로부터의 구속이나 속박없이 인간 주체로서의 자유를 향유할 권리입니다.”
이 문장에서 우리가 주의해서 보아야 하는 것은 무엇으로부터 자유라는 것입니다. 그 앞에 아무런 말이 없이 그냥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로부터 구속이나 속박없이라는 말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프랑스 시민혁명으로부터 시작된 인간의 자유에 대한 오늘 날의 개념은 타자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타자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지만, 다른 것들로의 속박을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근대 시민국가의 시작과 근대 자본주의의 시작과 함께 사람들은 이제 왕에 의한 속박이 아니라 돈에 의한 속박을 받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앞에 무엇이 없이 그냥 절대적인 자유를 추구하는 것은 환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따라서, 인류의 역사를 볼 때에도 우리는 무엇로부터 자유로와진다는 것은 다른 것을 향하여 자유로와 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유는 우리에게 본질적인 자유를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일시적인 자유와 해방과 즐거움과 기쁨을 줄 수 있지만, 결국에는 다시 우리로 하여금 실망하게 하고 다시 억눌리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자유는 어떻게 보면 우리의 본질에 닿아 있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고, 우리의 삶으로 경험하는 세계에 속한 것을 너머서 보다 본질적인 것에서 우리는 자유로와 질 때에 진정으로 자유로와 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본질적인 자유는 결국 너희의 본성에 있는 죄로부터의 자유라고 말하시는 것입니다.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라.
죄책으로부터 자유
자기 중심성에서 자유
두려움에서 자유
다음으로 우리가 착각하고 있는 것은 우리는 종의 된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이 된 적이 없다는 유대인들의 주장(정신승리) 오늘 날 우리들도 이와 같은 착각 속에 살아가고 있다.
예수님은 너희는 죄의 종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부터 자유로와져야 한다.
먼저, 첫 번째로는 진리에 대한 오해입니다.
한국의 유명 대학교의 슬로건 중에 하나는 오늘 본문을 인용한 것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좀 있어 보이게 라틴어로 표현하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Veritas Vos liberabit (웨리타스 워스 리베라빗)
제가 다니던 학교의 슬로건은 진리에 순종하라 Obedire Veritati
흔히 대학교에서 이런 슬로건들을 사용합니다. 우리 대학교는 진리를 추구하는 곳이다라고 말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 때의 진리라는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본질적인 의미의 진리가 아닙니다. 학교들이 말하는 진리는 인간의 이성과 오감을 통해 연구하고 찾아낸 결과물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본다면, 진리는 상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진리는 외부의 것을 나의 오감과 이성으로 추구하고 나의 언어로서 표현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오감과 이성을 넘어서는 대상에 대해서는 우리는 인지할 수도 없고 표현할 수도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인간에게는 진리라고 표현될 수 있으나, 사실은 좀 부족한 진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리고, 자신의 오감과 이성에게 달려있으므로, 사람마다 오감과 이성의 사용방식이 다르다면, 다르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만약에 색을 보는 우리들의 눈이 다른 사람과 다르다면, 파란색을 어떤 사람들은 빨간색으로 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진리는 본질적인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단지 인간의 오감과 이성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을 넘어선 것입니다. 결국에는 인간으로서는 알아차릴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영적인 세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기독교에서는 영적인 세계와 물질적인 세계가 독립적으로 따로 존재하지 않고 맞물려있다라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세계를 알지 못한채 물질적인 세계만을 아는 것은 반쪽짜리 진리일 뿐이고, 참된 진리가 아니라는 믿음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시며 하나님과 예수님 자신이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말씀을 전하고 있으니, 이 진리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리를 알고 싶으십니까? 참 진리되시는 예수님께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통해서 들려주시는 진리를 알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수많은 학문의 전당인 유명한 학교들이 진리를 추구한다고 하면서, 반쪽짜리 진리에 몰두해 있지만, 예수 믿는 우리들은 참다운 진리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