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옳게 사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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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9

Notes
Transcript

서론

세 가지 질문은
사람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추운 겨울날 지상으로 알몸을 한체 던져진 미하엘을 거둬 주고 정성껏 보살펴 준 구두수선공 시몬과 그의 아내 마트료를 보며 첫 번째 질문의 답을 찾습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이 담겨 있구나
아주 무례한 귀족 신사가 선금을 주면서 좋은 구두를 만들어 달라고 하고 잘 만들지 않으면 혼줄이 날거라고 으름짱을 주고 떠나자 미하엘은 구두 대신 가죽 슬리퍼를 만든다. 알고보니, 그 귀족신사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차 사고로 죽게 되고 구두 대신 망자가 신게 될 슬리퍼가 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을 통해 미하엘은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는 것은 삶과 죽음을 결정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세번째로 옆집에 사는 부부가 남편은 아기들이 태어나기 전에 죽고 아내는 아기를 낳다 죽어서 쌍둥이 아기를 입양해서 기르게 된 방아간 여주인을 만나고 미하엘은 그때, 자신이 대리고 가지 않았던 그 아기 엄마의 두 쌍둥이 아기였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미하엘은 ‘부모 없이 아기들은 불행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생각이 부끄러워 졌다.
마지막 질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 미하엘은 이 세가지 질문의 답을 얻고 천국으로 올라게 됩니다.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사랑으로 산다.
여러분의 사랑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살아갈 이유가 되어주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 사랑 때문에 외롭고 그 사랑때문에 괴롭고 결핍되어 살고 있습니까?
오늘 사울이 회심 하는 사건을 살펴보려 합니다.
입니다.
인간이 가장 필요로 하면서 가장 결핍된 것,
수많은 과학의 난제들과 불치병을 점령하고 있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난제 중에 난제로 남은 것
그것은 사랑 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충만했던 사울이 주님을 만나 진정한 사랑의 삶을 찾는 오늘의 이야기는 아마도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이야기 일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 사람은 어떤 내적 변화가 일어날까?
나는 오늘 하나님을 옳게 사랑 하고 있는가?
오늘 말씀을 통해 살펴 보시고
오늘 나 또한 진정한 사랑을 깨닫기를 소망 하시기 바랍니다.

1. 사랑의 기술

여기 계신 거의 모든 성도님들은 회심을 경험 하셨을 것입니다.
보통 회심, conversion 은 죄악 된 옛 생활에서 떠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는 방향전환을 뜻입니다.
사랑의 관점으로 보면, 세상 사랑하던 사람이 또는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모르던 사람이 예수를 만나고 참 사랑에 사로 잡혀 진정한 사랑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사울은 같은 동족의 눈에는 전도유망한 청년 이었습니다.
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 눈에는 하나님을 열심으로 섬기는 젊은이 였습니다.
그는 길리기아지역에 있는 다소, 지금의 튀르키에의 타르수스 출신의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 당대의 유대교 명문인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신분상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고 텐트 메이커 라는 돈벌이도 꽤 잘하는 뭐 하나 빠질 것이 없는 사람 이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을 순수하게 열정적으로 사랑했습니다.
한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사울의 그 열정은 종교적 우월감과 편견으로 변질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7:57–58 NKRV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스데반의 순교 현장에 사울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수행 한것으로 보입니다.
사도행전 8:3 NKRV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그 이후에도 예루살렘 교회를 박해 하는 일에 앞장 섭니다.
사울은 스데반이 죽어 마땅한 신성 모독자라고 생각 했습니다.
살기가 등등한 사울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흩어진 교인들을 추적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기 위해 제사장에게 공문을 받아냅니다.
사도행전 9:1–2 NKRV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예루살렘- 다마스쿠스 다메섹 240 km 1주일 길
사도행전 9:3–5 NKRV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밝은 빛이 하늘로부터 둘러 비추는 초 자연적인 현상을 경험 합니다.
추후에 바울은 26장에서는 이 빛을 태양 보다 더 밝은 빛이라고 회상 합니다.
사도행전 26:13 NKRV
왕이여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그리고 하늘로 부터 음성이 들려 옵니다.
사울 자신도 살면서 처음 겪는 신성한 경험 이었습니다.
분명 사울은 하나님의 임재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울은 놀라움 마음으로 “누구시니이까?” 하고 질문 합니다.
사울의 기대와는 아주 다른 대답이 옵니다.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아! 이게 무슨 말인가?
“나는 예수가 요망한 마술사나, 백성을 선동하는 사람이고 신성모독하는 자들의 수장으로 생각했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저 하늘에서 비추는 놀라운 광채는 성경에의하면, 분명 하나님의 모습인데,
저 음성은 분명 하나님 이신데,
그 광채와 빛이 예수의 것이라니!!
에스겔 1:28 NKRV
그 사방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엎드려 말씀하시는 이의 음성을 들으니라
이순간은 사울의 사랑의 기술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이었습니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은 조절 할 수 없는 감정이나 우연히 찾아 오는 행운 정도로 생각하면 안된다고 말합니다. 사랑의 의미를 모르고 외형적 매력이나 성적 끌림이나 자신을 사랑해줄 상대를 찾는데 시간을 보내다가 많은 사랑의 실패를 경험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의 실패, 관계의 실패를 겪으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의 사랑하는 방식에 대한 의구심을 품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사랑에도 기술이 필요하고 그 기술을 얻기 위해 배우고 훈련 해야 한다고 조언 합니다.
사울이 생각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은
편견과 자기 신념에 지배 받는 폭력적인 방법으로 나타나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행8:3에서 사울이 교회를 ‘잔멸하는’ 것에 대해 말할 때 단지 한 번만 나오는 단어인 ‘뤼마이노마이’(lymainomai)는 시편 80:13(칠십인역)에서는 포도원을 황폐하게 만드는 야생 수퇘지, ‘특히 이를테면 사자와 같은 야수들에 의해 갈기갈기 찢기는 것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
나의 신념과 믿음에 반하는 상대를 무자비하게 찍어 누르는 방식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가 변질 되면 종종 나타나는 현상이 있는데, 바로 신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범죄들 입니다.
그중에서 신대륙을 발견하고 보니, 신대륙인줄만 알았더니, 원래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콜롬보스는 처음에 인도를 찾아 떠났었고 그는 죽는날 까지 남미가 인도의 한 지역인줄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신대륙의 원주민을 인디안 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가보니, 야만인 같아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처구니 없이 이들이 사람인가 동물인가 하는 논쟁이 붙게 됩니다. 그 논쟁이 바로 바야 돌리드 논쟁 입니다.
Valladolid debate 바야돌리드 논쟁
인도언들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다 라는 결론을 내리고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인디언 대신 사람이 아닌 흑인을 노예로 쓰자 하여 그때 부터 노예무역이 활성화 됩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노예무역을 허용시킨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울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을 돌로 쳐서 죽이고 잡아와 가두는 일을 서슴없이 행했습니다.
예수의 도를 전하는 자들은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불의와 범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그런 사울에게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요지는 왜 나를 핍박하느냐 였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을 위해 그들을 핍박한 것 이었는데, 하늘에서 눈부신 광채로 또한 신의 음성으로 나타난 존재가 예수였던 것입니다.
아! 잘못되어도 한 참 잘못되었다는 것을 감지 합니다.
정당하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이제 아주 잘못된 일로 판명이 나고만 것입니다.
사울은 졸지에 살인자요. 압제자가 되었습니다.
사울은 그저 하나님을 순수하게 사랑했고 어려서 부터 배운대로 열심을 다해 신앙생활을 했을 뿐입니다. 어디서 부터 잘못된 것일까요? 사울은 하나님의 사랑을 정확히 이해하고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 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살리는 사랑 입니다.
“한 생명을 구한 자는 전 세계를 구한 것과 같고 , 한 생명을 파괴하는 자는 전 세계를 파괴하는 것과 같다” -유대인들의 탈무드 -
칸트가 인간이 타인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한 것 같이
하나님의 사랑은 결국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재를 소중히 여기는 대서 시작 된다.
유대교의 정수를 배운 자가 유대교의 정신 즉 하나님의 사랑의 정신을 문자적으로만 배웠을때 이런 비극적인 일이 벌어지고 마는 것이다.
종교적 미사어구와 예식과 율법과 원칙에 심취한 자가 그 안에 진정한 사랑을 잃었을때 사람들을 정죄하고 괴롭게 하는 무서운 괴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교사가 제자들을 사랑하지 않는 때, 경찰이 사명감이 없는 때, 목회자가 돈과 명예를 쫓을 때, 정치인이 정의롭지 못할때, 비극은 시작 됩니다.
국부론의 첫 페이지의 빵가게 주인은 절대 동네 사람들의 행복한 아침을 위해 빵을 굽지 않는다는 말처럼 세상이 돌아간다면,
그 세상은 더 이상 희망이 없습니다. 빡빡한 경제에도 여전히 배곪는 아이들을 위해 무료로 빵을 나눠주는 그 한 사람의 빵집 주인이 이 세상에 온기를 유지 해줍니다.
사울은 하나님을 사랑했지만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사랑 없이 하나님을 사랑 한 것입니다.
그의 하나님 사랑은 사람을 죽이고 사람을 억압하는 차가운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많은 부분에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비틀고 오해했습니다.
십계명의 예를 들면, 유대인들은 십계명을 인간이 의로워 지기 위해 지켜야 할 법이나 규칙으로 발전 시켜 율법이 되었다면 원래 십계명의 본질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결국 이웃 사랑으로 흐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다가 하나님을 발견 하는 경우가 있는 해도, 극히 드뭅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기 때문 입니다.
하나님 잘 믿는 다고 하는 사람이 주변 사람에게는 관심도 없고 누가 어려움 당한다고 하여도 신경도 안쓴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을 회심 시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해주는가에만 촉각을 세우고 그것에만 관심 있고 자존심 세우던 사람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순간, 내 이웃을 도울 일이 없나? 내가 해줄 일이 없나? 기도해줄 일이 없나? 관심 갖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용서이고 희생입니다.
나를 반대하는 사람을 원수 처럼 여기던 사람도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면 섣불리 미워하거나 원수맺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번 더 용납하려 노력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 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우리는 얼마나 그 사랑을 압니까?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옳바른 기술을 갖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다고 하면서 우리는 얼마나 그 사랑을 이웃에게 전하고 있습니까?
믿기 전과 믿은 후의 삶이 변화가 없다면 이것은 큰 문제 입니다.
더 나아가 믿고 나서도 여전히 원수 짓고 나의 감정만 중요하고 나에대한 대우만 중요한 삶을 살고 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나 때문에 교회를 나오고 싶어야지
나 때문에 교회를 안나오는 사람이 있다면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그 기술을 익히는 것이 신앙 생활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 사랑의 용기

사울의 회심은 일회적이고 기적적인 사건을 통해 단번에 이뤄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가운데 있었습니다.
저 살기가 등등한 원칙주의자이자 교회를 야수 처럼 물어 뜯는 바리새인 청년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회심 시키기 위해 그에게 세번의 만남을 진행 시키십니다.
첫번째 만남은 스데반 이었습니다.
사울의 스승은 가말리엘 이었지만 진정한 스승은 스데반 이었다고 신학자들은 말합니다.
가말리엘은 성경 지식을 알려 주었다면 스데반은 죽음도 두려워 하지 않는 그리고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그들을 오히려 사랑하는 스데반의 사랑의 용기를 배웠습니다.
두번째 만남은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예수님 이었습니다.
극렬한 반대자이며 예수님을 이단자나 신성 모독자 정도로 치부하고 그를 믿고 따르는 자들의 씨를 말려 잔멸하려 했던 자신을 찾아 오신 주님은 사랑의 주님 이었고 또한 권능의 하나님 이었습니다.
세번째 만남이 바로 아나니아 였습니다.
여시서 아나니아는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인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다메섹의 아나니아 입니다. 본문에서는 그가 제자 라고 소개 합니다.
사도행전 9:10 NKRV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 하지 않습니다.
톰 라이트는 아나니아를 오케스트라의 심벌즈 주자로 설명 합니다.
오케스트라에서 실벌즈나 팀파니는 그 음악의 절정부에서 집중적으로 연주를 합니다. 그래서 지휘자가 각 악기의 연주자들을 소개 할 때, 때론 웃음 소리와 함께 박수를 받는 경우도 많이 있다고 합니다.
심벌즈 주자는 잠시 화장실에 다녀와도 된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 입니다.
드보르자크 신세계 교향곡 정말로 4악장 64마디에 등장해서 66마디 사이에 딱 한 번 울리고 사라진다. 1, 2악장은 내내 쉬어야 하고 그나마 3악장은 좀 몸을 움직이지만 4악장에서는 겨우 한 번 연주하고 오케스트라석에 앉아있기란 여간 고역이 아니다.
스데반의 장엄한 순교, 주님의 광채와 음성에 비하면 아나니아는 그저 수저를 얻는 정도의 역할 일지도 모릅니다.
큰 이권이나 큰 명예가 있는 자리에서 누구도 시시해 보이는 역할을 담당하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더군다나, 사울은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모두 잡아 예루살렘으로 압송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고 그의 살기 등등한 모습에 대해 익히 들었던 상황 이었습니다.
사도행전 9:13–14 NKRV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주님은 이미 눈을 볼 수 없는 사울에게 환상으로 아나니아와의 만남을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사도행전 9:12 NKRV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아나니아는 즉시로 순종하여 임무를 수행 합니다.
톰 라이트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을 알았고, 매우 위험해 보이는 일에도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보내진 곳으로 가서 지시받은 대로 했다. 그것도 사랑과 은혜와 지혜를 가지고 했다. 더 바랄 것이 없었다.”
톰 라이트, 모든 사람을 위한 사도행전, trans. 양혜원, 개정판., vol 1 (서울: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19), 206.
내 역할이 트라이 앵글이든 캐스터 냇츠든 심벌즈이든 마지막 날 오케스트라가 마치는 순간 모두 각자의 역할에 충실했음에 대해 박수와 영광을 동등하게 받게 됩니다.
그저 지휘자의 명령에 따라 가라 하면 가고 치라 하면 치는 충실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가 흉악한 살인자여도 극렬한 반대자에 원리주의 테러리스트 라고 해도 어떤 위험이 있다하여도
아나니아는 명령에 충실하게 순종 할 준비가 되어 있고 지시대로 수행하는 제자 였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아나니아가 소유한 하나님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사랑에는 용기가 필요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 용감히 싸울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 용감히 나아가야 합니다.
사랑 한다고 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비록 계란으로 바위를 칠지언정 사랑한다면 쳐야 합니다.
용기 없는 사랑은 미사어구가 난무하는 시 몇줄과도 같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사랑이 힘을 발휘하는 순간은 용기 있게 싸울 때 입니다.
사랑의 용기는 가장 적대적인 사람, 앞장 서서 나를 반대하고 비난 하는 사람의 마음을 돌릴 수 있습니다.
척진 사람과 화해 하기 위해서는, 먼저 전화하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먼저 사과 할 수 있는 아량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도 용기 입니다.
갈등을 해결하는 첫 걸음은 나의 손해나 자존심을 감수 하는 것에서 시작 됩니다.
나중에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났을때, 주님이 자신에게 해주신 말씀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 합니다.
사도행전 26:14 NKRV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하나님은 이미 사울을 바울로 만드실 계획이 있었는데, 사울이 자꾸만 뜻을 어기고 반항하고 덤비며 가시채를 뒷발로 걷어 찼다는 것입니다.
“가시채를 걷어차는 황소의 습성”을 가진 우리를 주님은 꺼리낌 없이 찾아와서 빛난 광채로 감싸주십니다. 그리고 옳은 길로 예비된 길로 인도 하십니다.
사도행전 9:15 NKRV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바울은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이라는 정확한 대상을 전도하기 위해 택하신 특수 목적의 그릇 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완고하고 고집쎈 우리를 아나니아와 사울을 부르신 계획 만큼이나 중요한 소명으로 우리 각자를 부르신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나니아도 죽음을 무릎 쓰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 였습니다.
아나니아의 소명도 사울의 소명 만큼이나 소중하고 가치 있습니다.
바울의 길은 그에게 보여준 스데반의 길이었습니다. 돌에 맞고 고난을 당하면서도 예수를 따르고 열방을 향해 나아가 복음 전할 주님의 종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디미트리 본 훼퍼는 “주님의 부르심은 어차피 와서 편안히 살라는 것이 아닌 와서 죽으라는 부르심 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결론

“가시채를 걷어차는” 완고한 나의 신념이 아닌
하나님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기술로 하나님을 사랑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가라 하시는 주님의 명령에 사랑의 용기로 순종 하고 있습니까?
옳은 길로 인도 하시는 가시채를 발로 걷어차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우리 주님이 사울을 찾았듯이, 먼저 손 내밀고 먼저 사랑하는 자 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일이 작든 크든 위험하든 사랑의 용기로 아나니아 처럼 순종 하는 자 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이웃을 사랑하고 나아가 용기 있게 복음의 증인 사랑의 실천자로 살기를 다짐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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