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와 다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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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고백함으로 용서를 구하는 유다

Notes
Transcript

회개와 속죄

그후에(1-11)

‘그 후에’는 요셉의 일이 있고 난 이후를 이야기합니다.
1 유다의 잘못은 형제들을 떠나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할 친구를 가까이 두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말 속담에 “친구 따라 강남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강남에 가야 할 사람은 그 친구를 만난 것이 행운이지만 강남에 가지 말아야 할 사람이 그 친구를 만난 것은 불행의 시작입니다.
유다는 히라와 가까이 하면서 2절 ‘거기서’ 수아의 딸을 보고 동침을 합니다. 결혼 전에 관계를 먼저 갖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올바른 방법으로 결혼하지 않은 것이지요.
유다와 수아의 딸은 세 아들을 낳게 됩니다.
첫째 ‘엘’의 이름을 보았을 때 역시 그래도 유다가 자식의 이름을 ‘하나님’이라고 지었구나, 신앙이 있는 사람이었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원어성경을 살펴보니 이것은 ‘에르’라고 발음하는 전혀 다른 단어였습니다. 유다의 마음이 얼마나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는지 알 수가 있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장성하여 결혼 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시간이 어느 덧 20년정도 흘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다는 첫째 ‘엘’을 위하여 ‘다말’이라는 아내를 데려왔습니다.
그런데 엘이 자녀를 낳기도 전에 하나님께 그를 보시기에 악하므로 죽이셨습니다. 그가 어떤 악행을 저질러서 즉시 그를 죽였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 큰 악행을 저질렀기에 그런 일을 당했다고 생각됩니다.
유다는 전통에 따라 둘째 오난에게 다말과 결혼하여 자녀를 낳으라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은 우리와 비슷하게 대를 잇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첫째가 자녀가 없이 죽으면 그의 아내를 동생이 취하고, 그를 통해 낳은 아들을 형의 자손으로 등록?하게 됩니다. 그리고 형의 유산을 모두 그 자녀에게
상속해 주는 것입니다.
오난 자기의 자녀가 형의 자녀가 되는 것이 싫었는지 아니면 형의 자녀가 생기므로 자기가 받을 유산이 적어지는 것이 싫었는지 다말과 관계할 때에 땅에 설정하여
아이가 생기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신 하나님께서 그도 죽이셨습니다.
세 아들 중에 두 아들이 죽게 되자 유다에게 걱정이 임하였습니다. 전통에 따르면 이제 하나 남은 아들 셀라도 다말과 결혼해야 하는데 다말과 결혼한 자녀마다
다 죽었으니 유다는 셀라를 다말에게 주기 싫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자신과 집안의 체면이 있기 때문에 며느리가 다른 집으로 시집가는 것도 허락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래서 유다는 아직 어린 셀라가 자라기까지 재혼을 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다말에게 명령했습니다.

얼마 후에(12-23)

얼마 후에란 셀라가 성장하여 결혼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된 시기를 이야기합니다.
다말은 이 날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는데 시아버지인 유다는 다말을 까맣게 잊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참 공교롭게도 이 시기에 유다의 아내가 죽게됩니다. 유다는 세번째 가족의 죽음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한편 다말은 셀라가 장성하여 자신과 결혼할 때가 지났음에도 아무런 소식이 없자. 가만히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양털을 깎기 위해 딤나로 시아버지가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위험천만한 계획을 실행합니다.
그녀는 지금까지 입고 있던 과부의 의복을 벗고 마치 몸을 파는 여자와 같은 행색으로 유다가 지나갈 길가에 있었습니다.
마침 그곳을 지나던 유다는 양털을 깎아서 돈도 생기고 아마 술도 마셨을 것입니다. 아내도 없이 외롭게 지냈던 터라
길가에 창녀를 보고 지나치지 못하고 그녀와 관계를 갖습니다.
염소 새끼를 주겠다고 여인에게 약속했지만 여인은 염소 새끼를 받기까지 담보물을 요구했고, 마음이 급했던 유다는
무엇이든 줄 기세로 물었습니다.
여인은 도장과 지팡이를 달라고 했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유다는 바로 그것들을 주고 여인에게 들어갔습니다.
각자 자리로 돌아간 이후 유다는 친구를 통하여 여인에게 약속한 염소 새끼를 주고 자신의 물건을 받아와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히라는 여인을 찾지 못했고, 근처 사람들에게 물었을 때 여기에는 창녀가 없다는 엉뚱한 말을 듣게 됩니다.
유다는 자기할 도리를 다 했다고 여기며 사건은 마무리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며느리와의 약속은 하찮게 여기고 잊어버렸으면서 처음 본 창녀와의 약속은 잘 지키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씁쓸한 여운을 남깁니다.

석 달쯤 후에

세 달이 지나고 유다에게 황당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다말이 행음함으로 인해 임신을 했다는 소식입니다.
자신과 가문의 체면을 중요시하는 유다에게는 하늘이 무너질만큼 화가 날 소식이었습니다.
그는 즉시 다말을 끌어내어 불사르라고 명령합니다.
사실 간음한 여인들은 돌로 쳐 죽이는 것이 일반적이나 유다는 가장 끔찍한 고통과 죽음을 주기 위해
불에 태우라고 명령한 것 같습니다.
유다의 사람들은 곧장 다말에게로 가서 그 여인을 잡아 불에 사르려했습니다.
이때 다말은 필사적으로 시아버지를 향해 외쳤습니다.
“청하건대 보소서…!!”
유다가 며느리의 손에 들린 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며느리와 행음한 사람이 다름아닌 자기 자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며느리의 뱃속의 아이가 자기의 아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유다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유다는 며느리의 말을 거짓으로 덮어버리거나 무시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며느리가 그렇게 잘못된 행동을 한 것도 자기 자신의 잘못때문이라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이 유다의 회개가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설교작업

회개를 사랑할 수 있을까? 회개 때문에 죄를 용서받는 게 아니라면?

우리는 회개 때문에 죄를 용서받는 게 아닙니다. 충격적인 말일지 모르겠지만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어떤 사람이 연쇄살인을 저질러서 법정에 섰습니다. 그 사람은 재판을 받는 동안 자신이 얼마나 큰 죄를 범했는지 아주 깊이 깨달았고, 판사 앞에서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죄를 고백하고 잘못을 빌었습니다. 그 고백이 얼마나 진실하고 절절했던지 판사는 그만 감동하여 무죄를 선언해 버렸습니다.

이 판사는 어떤 판사입니까? 불의한 판사입니다! 피고가 자기 죄를 깨닫고 용서를 구하면, 그것이 약간의 감형 사유는 될는지 몰라도 무죄 선고를 내릴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피고는 이미 법이 정한 대로 죗값을 치러야 합니다. 대한민국 형법은 범한 죄에 따라 죗값을 치르도록 형기를 명시하고 있고, 판사는 당연히 그 기간만큼 재량에 따라 최고형과 최저형 사이의 판결을 내려야 합니다. 판사가 이를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무죄 선언을 한다면 법을 어기는 것이고, 따라서 그는 불의한 판사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당신을 거절하고 평생 당신의 뜻대로 살아가지 않은 죄인에게 사형이라는 판결을 내리셨습니다(롬 1:32). 그래서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범한 죄는 참으로 악독하고,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습니다(롬 3:19). 회개한다고 해서 심판을 피할 길은 없습니다.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성경에서 말하지 않았나요?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행 2:38)는 말씀은 뭔가요?”

네. 맞습니다. 성경은 회개하는 누구나 죄를 용서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용서받는 것은 회개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를 용서받는 것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속죄 덕분입니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용서받는 것입니다. 앞의 예를 다시 들자면, 누군가 그 연쇄살인범의 죄를 대신 지고 감옥에서 30–40년 동안 형을 살았다고 합시다. 또는 사형을 언도받고 대신 죽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그 죄수에게 형을 다시 집행하는 것은 오히려 부당한 일이 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며 이루신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모든 자기 백성들의 죄를 지시고 지옥의 형벌을 대신 당하셨습니다. 그렇게 죗값을 치른 덕분에 우리에게 회개하면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따라서 죄 용서는 속죄라는 토대 위에서 회개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회개한다고 모든 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회개함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닮아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변화의 시작이 회개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다면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기 때문에 반드시 그에 대한 대가나 벌을 받게 하십니다. 죄에 대한 결과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내용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똑같이 벌을 받더라도 한사람이 받는 벌은 심판에 의한 형벌이며, 다른 한사람의 벌은 사랑에 의한 징계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보면 창세기의 중요한 주제이며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일은 아브라함으로 시작된 믿음의 가문을 이어가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가문을 통해 나라를 이루실 계획을 차근차근 진행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야곱 다음에 대를 이을 자녀를 누구로 할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첫째 르우벤은 아버지의 아내를 취함으로써 자격을 박탈당했고, 시므온과 레위는 살인으로 인해 자격을 박탈당하였기 때문에 이제 넷째인 유다의 차례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38장은 어떻게 유다가 야곱의 대를 이을 수 있게 되었는지 설명해주는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보았듯이 유다는 다른 형들에 비해 나을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가족 중에서 일탈하였고, 이방 여인과 혼인했으며, 며느리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고, 길 가의 창녀와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렇게 행동하고도 자신의 며느리는 행음했다는 이유로 불에 살라 죽이려했던 유다였습니다.
그런데 유다가 자기 형들과 다른 결정적인 한가지는 바로 회개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며느리로 인하여 자기의 죄가 공개되었을 때 그것을 회피하거나 힘으로 덮어버릴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였습니다.
아마도 하나님은 미리 예정하신대로 유다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시려고 유다에게 이 말을 듣게 하셨다고 생각됩니다.
“청하건대 보소서!!”
이 말을 듣고 며느리에 손에 들린 도장과 지팡이를 보는 순간
아주 오래 전 동생 요셉을 팔아버리고 자기 아버지 앞에 가서
피뭍은 채색옷을 들고 자기가 했던 말이 생각났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소서...”
그때에 자기의 죄를 덮기위해 아버지에게 보라고 했던 그 말을 통해
며느리가 자기의 죄를 들추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유다가 모든 것이 자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그는 나보다 옳도다”하며 회개하는 순간 이후부터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유다는 이전의 유다가 아닌 새로운 유다가 되었습니다.
믿는 자의 삶은 전체가 회개하는 삶이어야 한다 - 마르틴 루터의 말과 같이 진정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유다와 같은 회개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
회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그리고 죄책감으로 인한 고백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기인한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용서를 구하는 과정이고 다시는 똑같은 잘못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선포는 내가 변화됨으로 인해 경험되어지는 삶의 변화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유다의 행동과 같이 매우 역설적으로 자기의 죄를 숨기지 않을 때에만 온전히 자기 죄를 숨길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함께 나눈 저와 여러분이 진정 회개함으로 인해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고 내 자아가 변화되는 은혜의 경험을 하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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