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소망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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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240705 금요기도회 [데살로니가전서 4:13-18]

제목: 우리의 소망에 관하여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4:13-18

믿음과 소망과 사랑

오늘도 함께 예배하는 모든 분들께 우리 선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하시길 축복합니다.
성도 여러분,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제일은 무엇일까요? (사랑) 그렇습니까? 그럼 왜 그런 것일까요? 우리가 그럼 사랑만 있으면, 믿음과 소망은 조금 적거나 모자라도, 아니면 극단적으로, 없더라도 상관이 없을까요?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전하면서 사랑을 무척 강조하지요. “내가 사람의 방언, 천사의 말을 하더라도 사랑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 여기서 바울은 믿음과 사랑을 비교하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사랑이 참 중요합니다. 이렇게 읽어보면 사랑이 제일이라는 생각이 들지요. 그런데 우리는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조금 다른 이야기도 듣게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3절입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혹시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와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순서가 다르지요. 고린도교회에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이야기한 반면에,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그리고 소망의 인내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순서가 다르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혹시 어떤 의미가 담겨있진 않을까요? 바울의 편지를 읽다 보면 단서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1-3장을 읽는 동안 우리는 데살로니가의 교우들의 위기를 짐작해보았습니다. 박해와 환난이 그들에게 있었고, 바울은 그들을 위로하고 그 믿음을 붙잡아주고자 디모데를 보내었지요. 데살로니가에 갔다가 바울에게 돌아온 디모데는 그곳의 교우들이 믿음을 굳건하게 지키며, 사도에게 배운 것처럼 서로 사랑하며 곁을 지켜주고 있다, 이 소식을 듣고 안도합니다. 그 소식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는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지요. ‘이제 내가 살겠다.’
이 이야기가 3장에 나오는데, 바울은 디모데에게서 전해들은 데살로니가 교우들의 소식을 3장 6절에 이렇게 씁니다.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너희의 믿음, 그리고 사랑의 기쁜 소식. 그런데 1장 3절을 떠올려보면 한 가지가 빠져있음을 알게 되지요. 바로 ‘소망’에 관한 소식입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데살로니가 교우들에게 ‘소망’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바울이 13절에 이렇게 쓴 것 아닐까요?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 말을 거꾸로 읽어보면,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 너희가 알지 못하는구나, 너희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고 있구나.”

우리의 소망에 관하여: 지식이 없음이 우리의 소망을 빼앗아간다

바울이 생각하기에 믿음과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그리스도인에게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었습니다. 마치 탁자가 제대로 서기 위해서는 세 다리가 중심을 잘 잡아야 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쓰며 ‘사랑’을 제일이라고 강조한 까닭은 그들에게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은사를 받았지만 사랑이 없어서 분열하는 교회, 그래서 제대로 서지 못하는 교회였기 때문이지요. 사랑이 없어서 삶이 어그러진 교회에 바울은 ‘ 사랑’이 제일이라 강조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디모데에게서 데살로니가 교회가 ‘소망을 잃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이제 바울이 해야 할 일은 그들의 소망을 다시 일깨워주는 것, 소망을 심어주는 것, 그래서 데살로니가 교회와 성도들이 온전히 서게 하는 것이지요. 그들에게는 소망이 제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습니까?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 가지에 우리는 흠이 없고 흔들림 없이 잘 세워져 나가고 있습니까? 우리 교회가, 성도님들의 삶이 믿음과 사랑과 소망, 이 세 가지가 온전하여 든든히 서나가실 수 있길 축복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소망’에 관해서는 잘 이야기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말은 자주 하지만 성경이 소망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잘 살펴볼 기회는 드물지요. 바울은 소망을 잃은 교회에게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을까요?
우선, 오늘 편지를 읽어보면 소망은 우리가 지닌 ‘지식’과 어느정도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이 소망의 근거가 되고, 반면에 우리가 오해하거나 잘못 아는 것이 우리 소망을 빼앗아 가기도 한다는 것이지요. 13절을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교우들의 소망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서 ‘죽은 자들에 관하여 가르치고’ 있지요. “죽은 자들에 관해서 여러분이 알기를 바랍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여러분은 소망없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말이지요.
그렇다면 데살로니가 교우들은 죽은 자들을 두고 어떻게 생각을 했을까, 그들은 바울은 그들이 아는 것에 무엇을 더하거나 교정하려고 했을까요? 14-15절에 바울은 말합니다.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실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으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지금 살아남은 우리도 자는 자들보다 결코 앞서지 못할 것입니다.” 바울과 데살로니가 교우들이 편지를 주고받던 시기에는 아직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귀로 그 가르침을 받았던 사람들이 살아있었습니다. 교회는 ‘올라간 그대로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을 들었던 사람들의 증언을 직접 전해들을 수 있었지요.
그렇다 보니 사람들은 내가 살아있을 적에 예수님이 다시 오시리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예수님이 더디오시는 것이지요.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먼저 무덤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같이 신앙 생활하던 이들이 먼저 눕게되는 것을 보며 ‘불안’이 싹틉니다. 15절에서 “지금 살아남은 우리도 자는 자들보다 결코 앞서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이 말을 거꾸로 돌려보면 데살로니가 교우들이 죽은 자들에 대해서 생각한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보다 앞서서 먼저 죽은 교우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보지 못하고 죽은 이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우리가 다시 오실 예수님과 얻을 영광을 그들은 얻지 못하는 것 아닐까요?’ 이것이 불안의 씨앗을 심고 그들의 소망을 앗아간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곧 오시리라.’ 금방이라도 주님 오실 것처럼 하늘을 바라보며 긴박함과 임박함 중에 살아가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 그런데 정작 주님 다시 오시는 것 보지 못하고 죽은 이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살아서 주님을 맞이하는 성도들과 다르게 주님 영광에 함께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다 나도, 주님 오시기 전에 먼저 무덤에 들어가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런 두려움이 그들을 마치 소망없는 사람들처럼 슬픔에 잠기게 했던 것이지요. 이것은 데살로니가 교우들이 죽은 자에 관한 지식에서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죽은 자들과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소망은 ‘배움’에 뒷받침된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이 삶에서 ‘참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배움’을 통해서입니다. 우리가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소망으로 이 땅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또한 ‘배움’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참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는 다 알 수 없습니다. 이를테면 우리는 하나님이 선하심을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고통이 어떻게 우리에게 선한 것인지 다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공의로우시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오늘도 여전히 곳곳에서 목격하는 악과 불의가 어떻게 하나님의 공의와 함께할 수 있는지 다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믿는 분은 완전하시지만, 우리의 앎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믿고 아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 좋은 믿음이라고 여길 때가 많지 않습니까?
세상에서 무서운 사람은 책 한 권 안 읽은 사람 아니라, 책 한 권만 읽은 사람이라고 하지요. 남들보다 강하게 확신하지만, 그 지식이 잘못된 경우를 우리는 흔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자신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로 들려 올려질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1992년 10월 28일이 바로 그 날이라고 알고 믿었지요. 그래서 가진 것 다 팔고 직장도 그만두고 그들은 모여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지요.
그래서 우리는 내가 알고 믿는 것이 참된 것인지 따져 물어야 합니다. 내가 읽고 이해하는 성경의 말씀이 과연 그러한 것인가, 하고 따져 물어야하지요. 뜨겁게 기도할 때 내면에서 울려퍼진 소리와 감정과 생각이 과연 하나님의 뜻인가, 하고 따져 물어야 합니다. 기도하시는 분들은 반드시 말씀을 깊이 연구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말씀을 함께 읽고 나누고, 우리가 알고 믿는 것, 경험하는 것을 서로 나누고 고민할 공동체, 서로에게 배움이 되는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교우 여러분들께서 이 공동체 안에서의 나눔과 배움을 통하여 온전한 믿음 위에 서는 은혜가 함께하시길 축복합니다.
바울은 그 일을 데살로니가 교우들과 함께 나눕니다. 그들을 가르치고, 그 아는 것을 교정하고 있지요. 다시 돌아가보면, 데살로니가 교우들은 그들이 생각하고 아는 지식으로 인해 소망을 잃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에 있을 일에 대하여 그들이 알던 것이, 스스로 불안과 두려움에 넘어지게 한 것이지요.

소망: 현실을 살아가는 힘

소망을 잃고 넘어진 이들을 돕는 바울은 16절에 이어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리고 교우들이 아는 것을 교정하려는 듯이 덧붙이지요. 17절입니다. ‘그 후에’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바울의 말을 미루어보면 데살로니가 교우들은 살아서 주님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영광에 참여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먼저 죽은 자들’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러다 그런 일들을 겪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가르친 것이지요. ‘먼저 잠든 자들도 일어나 주님과 함께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주님과 함께할 것이다.’
잘못 알던 것을 교정했으니 다 해결이 되었을까요? 이제 그리스도인의 ‘소망’에 관해서 이야기할 차례이지요. 바울이 회복시키는 데살로니가 교우들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이다. 그가 오실 때 우리도, 잠 자는 자들도 온전히 주님의 영광 중에 거하게 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우리의 소망이 될 수 있습니까? 특별히 바울이 이 말을 하고도 2000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오지 않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우리에게, 도무지 응답되지 않을 것 같은 이 ‘다시 오실 것’에 대한 약속이 어떻게 우리의 소망이 될 수 있을까요? 먼저 죽은 이들이나, 살아있는 이들이나 모두 주 안에서 오시는 예수님의 영광에 참여한다, 그러니 잘못 오해한 것을 바로잡아 그들의 두려움을 위로하는 것이지요.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앞서 잠깐 언급했던 것처럼 이 이야기가 그동안 ‘종말’을 오해했던 수많은 사람들과 관련이 있지요. 1992년의 사건처럼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신다’는 이 말은 잘못된 지식과 그릇된 믿음에 오염된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 세속적인 이미지와 다르게 이 말의 의미를 더 잘 보여주는 성경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이지요.
십자가 죽음을 예고하신 주님은, 이제 때가 되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지요. 유월절이 가까웠을 때, 주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들어가십니다. 복음서의 기자들은 이를 두고 ‘그가 겸손하여서 나귀, 곧 어린 나귀’를 타셨다고 씁니다. 어린 나귀를 타고 들어오시는 주님의 모습 속에서 그들은 오실 메시아를 예언했던 스가랴서의 말씀을 떠올린 것입니다.
그것은 복음서 기자들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스가랴서의 예언을 떠올린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나사렛 예수를 왕으로 맞이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께서 오시는 길에 미리 마중을 나와서 자신의 옷을 그 길 위에 깔고, 길가에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찬송하지요.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며 말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맞이합니다. 복음서의 기자들 역시 하나님의 메시아,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왕의 오심으로 이야기를 묘사하지요. 왕이 오시는 길의 마중, 이것이 17절에 쓰인 ‘영접하다’라는 단어, ‘ἀπάντησις’의 쓰임입니다.
이 ἀπάντησις라는 말이 신약성경에 세 차례 사용되는데 한 구절이 마태복음 25장 6절입니다. 종말에 관해 예수님이 하신 비유를 모아둔 마태복음 25장의 한 비유인 열처녀의 비유에서 ‘신랑이 오는 것을 맞으러 가는 일’이 바로 ‘ἀπάντησις’입니다. 마태복음 25장 6절에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할 때 ‘맞으러’라 ‘영접하다’라는 말이지요.
이 단어는 사도행전 28장 15절에도 쓰입니다. 여기서는 로마 황제에게 재판을 받으려 로마로 향하는 바울을 ‘형제들이 맞으러 나오는’, ‘마중하러 나오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마태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이 ‘영접하다’는 말이 보여주는 ‘움직임’이 있지요. 그것은 맞으러 나간 사람, 마중하러 간 사람들이 오신 분, 신랑과 바울을 데리고서 함께 자기 마을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종려나무를 흔들며, 길 위에 옷을 펼쳐 왕을 맞이한 예루살렘 사람들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다시 들어간 것처럼 말이지요.
데살로니가전서 4장 17절에서 공중에 끌어올려져서 주를 영접하는 것은 이렇게 이해해야 합니다. 공중에 끌어올려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끌어올려집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마중할 수 있는 사람들, 영접할 수 있는 사람들이지요. 우리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을 영접하고 나면 그들은 어디로 갑니까? 하늘입니까? 아니지요, 데살로니가 교우들의 삶으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여전히 자신들을 향한 의심의 눈초리와, 소외와 배제가 늘상 이루어지는 곳, 일상처럼 박해가 이루어지는 곳, 궁핍과 환난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가 되어주어야 믿음을 지켜나갈 수 있는 곳, 그 데살로니가 도시에서 이루어지는 그들 자신의 삶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소망은 무엇입니까? 지금 우리가 겪는 이 무거운 현실이 전부가 아니라는데서 찾아오는 것이지요. 여기에는 끝이 있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하나님의 은혜로 그분을 영접하게 되는 날에는 모든 것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들을 둘러싼 의심과 소외와 배제, 핍박과 박해, 궁핍과 환난은 그 모습 그대로 남아있지 않을 것입니다.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삶으로 들어오셔서 고치실 것입니다. 예언자들은 메시아가 오시는 날 완전하게 이루어질 하나님의 통치를 노래했습니다. 이사야는 ‘그 날’을 이렇게 외쳤지요.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이리와 어린 양이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사 65:1, 25)
요한은 그 날이 이미 성취되었다 고백하면서 동시에 찬양하며 기다립니다. ‘마라나타,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그 요한은 환상 중에 다시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을 봅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계 21:1-5)
이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주님이 오셔서 모든 것을 회복하실 것입니다. 주님이 오셔서 모든 것을 완성시키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성취될지 다 알지 못하지만, 분명하고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한 가지입니다. 약속하신대로 이 땅에 오셨던 것처럼, 약속하신대로 분명히 오실 것을, 그리하여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슬픔과, 우리가 마주하는 어려움과, 상실과, 패배와, 아픔과, 눈물과, 절망과, 고통과, 두려움이 이것이 우리의 마침, 우리의 최종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의 삶은 여전히 녹록치 않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우들이 겪는 박해와 환난은 아니라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 삶의 자리는 어렵습니다. 경제는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정치인들에게서는 희망을 찾을 수 없습니다. 내일이 보이지 않아서 사랑을 포기하는 세대는 캄캄한 미래를 맞이하는 것이 두렵습니다. 전쟁은 여전히 그치지 않고, 이미 손 쓸 수 없이 되어버린 기후위기는 방관되는 듯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이것이 끝이 아니라고, 이것이 우리의 마침이 아니라고, 이것이, 죽음이 최종적인 승리가 아니라고.
바울이 드러내어 이야기하고 있지 않지만 분명히 이 믿음이 그에게 있었을 것입니다. 온 세대 헌신예배를 통해 우리가 함께 나눈 찬양의 가사처럼, 이미 왔지만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나라, 이미와 아직, 그 사이에서 성령께서 일하고 계시다는 것 말이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 구약의 예언과,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계시록의 찬양, 그 사이에서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바라보면서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말이지요. 그래서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전해진 소망은 ‘인내’입니다. 1장 3절 말씀입니다.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 교회는, 우리는 예수께서 다시 오셔서 온전하게 하실, 완전하게 하실 그 세계로 인하여 이 땅의 소망을 가지고, 가벼운 걸음으로 인내의 여정을 걸어가는 것이지요. 여전히 악이 잔존하는 세상 속에서, 여전히 불의하고 불합리한 세상에 죽음이 생명을 영원히 이긴 것 처럼 보여도, 부활, 생명이 주님의 약속 아래 이미 승리하였음을 알고 믿으며, 그 승리에 소망을 얻어 바로 이곳에서 생명의 씨앗을 심는 것, 그것이 우리의, 그리스도인의 소망으로 인내하는 삶입니다.
이 소망이 우리와 함께하기를 축복합니다. 이 소망이 우리에게 슬픔과 아픔이 많고, 불합리하고 여전히 불의한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그 주님의 기도를 이어갈 수 있는 힘이 됩니다. 소망으로 인내할 수 있는 힘을 얻어,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성령과 더불어 그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시는 복된 삶이 되시길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제목

말씀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더욱 알기 원합니다.
겸손하게 주님을 배우는 믿음을 주옵소서.
주님을 알고 배울 때 우리 안에 소망이 더 커지는 은혜 주옵소서.
우리의 상황과 환경에, 주어진 사건에 매몰되지 않고 주님께 소망을 둠으로써 넉넉히 이기는 믿음되게 하소서.
교회를 위하여
우리 교회가 주님을 배우는 교회되게 하소서. 말씀의 갈급함이 있는 교회되게 하시고, 예배와 소그룹을 통해 주님을 풍성하게 나누어가는 교회되게 하소서.
소망을 가지고 움직이는 교회되게 하소서. 보이는 것, 세상의 질서와 논리에 휩쓸리지 않고, 우리가 듣고 배운 것에 확실하게 거하여 선을 행하는 교회, 서로 사랑하는 교회,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교회,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 있음을 알고 나누는 교회되게 하소서.
새가족 환영식(내일, 6일 토)을 위해
교회를 위하여
교육부서 여름 사역을 위해 유치부, 아동부, 청소년부, 청년부 믿음의 기초가 다져지게 하옵소서. 그 위에 든든히 서게 하옵소서. 믿음 위에서 길을 찾아 달려가는 이들 되게 하소서.
교역자(담임목사, 부교역자), 당회원, 재직들을 위해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한 몸되는 은혜를 주옵소서. 서로 다른 생각과 마음들이 머리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는 은혜 주소서.
다음 주 어르신 섬김을 위하여 섬기는 권사님들에게 섬김이 기쁨되게 하시고, 섬김을 통해 주님이 드러나는 것을 기뻐하는 시간되게 하소서. 섬김을 통해 주님의 사랑으로 어르신들 채워지는 은혜 주소서.
환우들과, 그 가족들을 위하여 김정은, 박정규, 박연희, 김범식, 박미연(유혜원 집사 조카), 김애선(친정 모친)
세계 선교와 이웃을 위하여
아동센터를 위하여
안전한 나라를 위하여 자동차 사고, 계속된 화재, 그리고 여름 장마와 폭풍이 다가오는 가운데
7월 9일, 계양구 기독교 연합회와 구청장의 만남 교회가 지역을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함께 협력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지혜를 얻는 시간되게 하시고 또 행정 기관은 교회를 통해 참되고 옳은 것을 알고 힘쓸 수 있는 시간이 되게 하소서.
북한을 위하여 고립되어가는 북한이 변화되어서 그 문이 열릴 수 있도록 특히 가난하고 궁핍한 어린 아이들을 위하여 회복이 이루어지도록 우리 교회가 함께 북한을 위하여 기도하며 그 사역을 준비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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