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희망고문이 아닙니다

예레미야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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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희망고문이 아닙니다
[서론]
설교라고 다 같은 설교가 아닙니다.
저는 설교를 잘하고 못하고를 따지는게 아닙니다.
무엇이 진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인가를 따지려고 합니다.
설교에서 위로와 평안을 이야기한다고해서 모두 하나님의 뜻인 것은 아닙니다.
설교를 듣고 내가 은혜받았다고해서 모두 하나님의 뜻인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내 귀에 달콤한 이야기가 계속 된다면 더 경계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허구헌날 성도들을 잡도리하는 설교가 하나님의 뜻인 것도 아닙니다.
목회자도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아니라 강단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할수 있습니다.
특히 성경본문과 상관없는 이야기를 자주하는 목회자가 그럴 위험성이 높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뒷받침하기 위해 말씀을 도구로 삼을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설교자가 주인이 되고 말씀이 종이 되고 맙니다.
그럴때 설교는 더이상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목회자는 성도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전할수도 있습니다.
청중의 욕망에 부합하는 설교 역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둔갑할수 있습니다.
평안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위로와 격려를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번영과 성공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과연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게 설교자일까요?
아니면 성도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하는게 설교자일까요?
설교자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성도들의 영적 상태를 잘 분별하여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입니다.
국가의 존립이 위태로운 시기에 이스라엘이 겪는 어려움도 바로 이것입니다.
우후죽순으로 예언자들이 등장합니다.
거기에는 거짓 예언자도 있고, 참 예언자도 있습니다.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하는가?
이스라엘은 이 문제와 계속해서 씨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역시 메시지 과잉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유튜브에 얼마나 많은 말씀들이 올라와 있습니까?
그러나 무슨 말씀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분별하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과연 어떻게 하면 우리는 거짓에 속지 않고 진리를 붙들수 있을까요?
[본론]
먼저 오늘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다의 마지막 왕들 이름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진을 보시죠.
나열하자면 요시야-여호아하스-여호야김-여호야긴-시드기야 입니다.
요시야의 자녀들이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시드기야입니다.
여호야긴은 여호야김의 아들입니다.
그러니까 망하기 직전 왕인 여호야긴과 시드기야는 조카와 삼촌사이 입니다.
바벨론은 한번 침략해서 예루살렘을 멸망시킨게 아닙니다.
3차에 걸쳐 예루살렘을 침공했는데요.
1차 침공이 605년경 여호야김때입니다.
이때 우리가 잘아는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2차 침공때가 여호야긴 때입니다.
이때 여호야긴 왕과 귀족들, 제사장들, 장인들, 대장장이들이 끌려 갔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 때입니다.
시드기야왕때 예레미야는 바빌로니아로 끌려간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그들에게 전달한 것입니다.
그게 29장 1-14절에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충격적입니다.
바빌로니아 포로민들에게 빨리 고향으로 돌아올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잘 정착해 살 생각이나 하라는 것입니다.
바빌로니아에도 끌려갔던 예언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레미야와 다른 예언을 합니다.
우리가 곧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것이라며 소망을 불어넣습니다.
포로로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이런 소망의 예언은 어쩌면 당연한 말일지 모릅니다.
그들에 대해 예레미야는 뭐라고 할까요?
예레미야는 그들이 거짓 예언자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말에 속지 말라고 말합니다.
위로와 격려 소망을 전하는 예언자들을 거짓 예언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70년동안 바빌로니아에 있게 될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그곳에서 잘 정착해 살 생각이나 하라는 것입니다.
70년이면 3세대에 가깝습니다.
1 세대는 거의 죽고 손주 세대가 활동할때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헛된 소망을 품지말고 가정을 이루고, 농사짓고, 장가보내고, 시집보내고, 아들, 딸 낳고 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신들을 잡아간 바빌로니아가 잘되도록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그냥 평범한 바빌로니아 시민의 삶을 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소망을 아에 품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때가 되어 그들이 주님을 찾으면 다시 만나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때에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수 있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지금은 평범한 시민으로 충실하게 주어진 삶을 살라는 의미입니다.
포로민들 입장에서 예레미야의 이 말씀은 굉장히 절망적인 메시지입니다.
힘 쭉 빠지는 말입니다.
“살아있을때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 죽고나면 무슨 소용있나?”
“예레미야는 왜 우리의 소망조차 끊어놓는가?”
“그럼 하나님은 왜 바빌로니아에도 예언자들을 보내주셨는가?”
“혹시 예루살렘에 아직 남은 소망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그럼 하나님은 왜 불쌍한 포로민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그들의 믿음은 진짜 소망이 아니라 헛된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희망고문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헛된 소망에 빠져 희망고문을 당하면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합니다.
지금 내 상태가 어떤지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일상생활의 균형과 질서가 무너집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고향에 곧 돌아갈거라는 소망때문에 지금 있는 자리에 정을 둘수 있겠습니까?
엉덩이가 들썩여서 지금하고 있는 일이 손에 잡힐까요?
모두 시시하고 무의미하게 보일 뿐입니다.
이런 일은 보통 이단, 사이비에서 많이 일어납니다.
신천지 보십시오.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14만 4천명에 들어가려다보니 일상생활이 망가져 버렸습니다.
가정도 버리고, 직장도 버리고 완전히 그것에만 몰입합니다.
다 시시하고 무의미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이단, 사이비에서만 일어나는게 아닙니다.
제가 예전에 담당하던 친구들중에 회사때문에 힘들어하는 친구들이 꽤 있었습니다.
그 친구들은 맨날 다른 회사에 옮길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취업사이트 들어가서 맨날 더 좋은 조건의 회사를 찾았습니다.
핑계는 항상 있습니다.
지금 회사가 신앙생활하기에 조건이 안 좋다는 것입니다.
그럼 회사를 옮긴다고 무조건 해결될수 있는 문제일까요?
무엇이 본질일까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현재 회사에 충실할수 있을까요?
그런데 문제는 이뿐만이 아닙니다.
이런 친구들의 고민을 상담해주는 목회자도 문제입니다.
그 목회자는 너가 더 열심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훨씬 더 좋은 회사로 옮겨주실거야라고 말해줍니다.
이 말을 들으면 그 친구는 좋아하겠지만 과연 하나님의 뜻 일까요?
그 목회자가 바로 저입니다.
그때 그 친구들을 잘못 인도한 것에 대해 회개합니다.
이런 일은 다른 신앙생활에서도 자주 일어납니다.
헌금이 그렇습니다.
어떤 목회자는 헌금을 잘 하면 하나님이 몇 배로 갚아주신다고 강조합니다.
그것은 금전적인 보상이나 성공 이런 것입니다.
특히, 건축헌금이 그렇습니다.
예배당 건축할때 헌금 많이 걷으려고 그때가 되면 등장하는 설교가 있습니다.
복받는 설교입니다.
헌금의 분량, 믿음의 분량 이야기를 하며 성도들의 헌신과 충성을 자극합니다.
그러면 성도들이 무리해서 헌금을 하게 됩니다.
다른 곳에 써야할 돈도 무리해서 교회에 헌금하고 심지어 빚도 집니다.
헌금은 성공의 도구가 아니라 신앙고백의 도구입니다.
또한 기도도 그렇습니다.
병에 걸리는 것과 같은 삶의 문제가 터졌을때 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아직 기도나 믿음이 부족해서 해결되지 않았으니 더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그럴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만병통치약이 아닙니다.
그것에만 의지할때 그 사람의 일상은 무너지고 문제는 더욱 악화됩니다.
현재 상황을 제대로 볼수 없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제 지도교수님 동생분도 암 초기 진단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때 병원에서 잘 치료했으면 나았을텐데 동생이 그렇게 하지 않았답니다.
기도원에서 이건 기도로 해결해야한다고 어떤 목사가 한 말을 듣고 병원을 더이상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돌아가셨습니다.
극단적인 예지만 우리 주변에서 종종 일어나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분명 믿음이 아닌 희망고문이자 가스라이팅일 뿐입니다.
이처럼 헛된 소망을 품으면 현재 나의 자리와 역할에 충실하지 못합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당장 이뤄질 일이 아닌데 자꾸 희망고문을 합니다.
희망고문은 가스라이팅이며 거짓말일 뿐입니다.
믿음과 신앙의 이름으로 우리의 일상을 무너뜨리는 것은 희망고문일 뿐입니다.
거짓말일 뿐입니다.
일상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뜻은 존재할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거짓에 속지 않기 위한 첫번째 조건입니다.
예레미야는 바빌로니아에 있는 포로민들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 남겨진 사람들의 운명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전달합니다.
왜냐하면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소망을 갖는 이유가 고향에 남겨진 사람들 때문입니다.
바빌로니아 포로민들은 예루살렘에 남겨진 사람들이 그들의 소망의 씨앗으로 보았습니다.
그들에게 소망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곧 회복시켜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포로로 끌려간 사람보다 죄를 덜 져서 남은게 아닙니다.
그들이 무슨 소망이나 가능성이 있어서 하나님이 남겨두신게 아닙니다.
17절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남아있는 시드기야 왕과 백성들을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아무도 먹을수 없는 썩은 무화과처럼 만들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 그들에게 내릴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잘나서 더 나아서 남겨둔게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잠시 그들의 심판이 늦추어졌을 뿐입니다.
그들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은 똑같습니다.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으며 순종하지 않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의 말을 들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현재 평안하다고해서 아무 문제가 없는게 아닙니다.
평안한 삶이 반드시 축복의 증거는 아닙니다.
거짓 평안에 속을수 있습니다.
거짓 평안은 우리를 영적으로 둔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현재 나의 영적 상태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게 만듭니다.
평안할수록 우리의 신앙을 제대로 점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말씀묵상을 하지 않을수 없는 것입니다.
말씀묵상은 우리 영혼의 썩은 부위를 찾아내서 성령의 칼에 내어드리게 합니다.
예레미야는 바빌로니아에 있는 거짓 예언자들의 운명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21절입니다.
그곳의 예언자 아합과 시드기야가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느부갓네살 손에 화형당하게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바빌로니아 포로민들에게 거짓 예언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거짓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들을 분별하는 두번째 기준을 찾을수 있습니다.
바로 말씀을 전하는 자의 삶입니다.
참 예언을 하는 사람은 삶이 메시지를 증언합니다.
삶을 보면 메시지를 분별할수 있습니다.
메시지와 메신저는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최근에 공용방송에서 어떤 목회자의 범죄 뉴스를 들은적이 있습니다.
천명이 넘는 중대형교회의 담임목사입니다.
놀랍게도 그는 자기 교회다니는 자기 딸의 친구를 성추행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모자라 남의 설교를 계속해서 표절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뉴스를 우리는 얼마나 자주 접하는지 모릅니다.
하루 이틀 일이 아닙니다.
목회자의 삶이 받쳐주지 않으면 그 메시지는 가짜입니다.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제 삶이 훌륭하다고 말할수 없습니다.
저 역시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설교대로 말씀대로 다 살아내지도 못합니다.
참 목사라고 말하는 것이 부끄럽기도 합니다.
바울처럼 나를 닮으라고 말하기도 부끄럽습니다.
그렇지만 제 설교가 거짓이 아니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에 속지 않으려면 마지막 한가지가 더 필요합니다.
바로 듣는 이들의 변화입니다.
놀랍게도 바빌로니아의 예언자들이 다시 예루살렘의 제사장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예레미야가 자신들이 예언한 것과 정반대의 이야기를 담은 편지를 보냈기 때문입니다.
내용은 예레미야가 거짓 예언자이니 그를 붙잡아 죽이라는 것입니다.
분명 몰래 보낸 편지일텐데 제사장중 한명인 스바냐 제사장이 그들이 보낸 편지를 예레미야에게 읽어 줍니다.
예레미야를 돕는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또다른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32절입니다.
스마야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자손을 보지 못합니다.
완전히 하나님 백성에서 대가 끊겨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굉장히 큰 심판입니다.
그럼 왜 그들이 이런 거짓 예언을 했을까요?
그곳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거짓 예언은 거짓 예언자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듣는 이들의 욕망도 문제입니다.
내 안에 참된 회개와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거짓에 속게 됩니다.
날마다 내 욕망을 점검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내 욕망에 기름칠하는 소리가 매력적으로 들립니다.
참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욕망을 변화시킵니다.
세상을 향한 욕망이 아닌 거룩을 향한 욕망이 일어나면 거짓이 들리고 보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즘은 설교 과잉의 시대입니다.
유튜브를 보면 설교 잘하시는 분들이 넘쳐납니다.
이찬수 목사님 설교 들으십시오.
이재철 목사님 설교 들으십시오.
조정민 목사님 설교 들으십시오.
그러나 잊지마십시오.
여러분에게 현재 필요한 말씀은 하나님이 저를 통해 주십니다.
그 분들의 설교는 그 교회 성도들을 위한 메시지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 이 말씀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거짓에 속지 않으려면 우리의 일상을 점검해야 합니다.
일상의 균형이 무너지면 그것은 어떤 감동이 있더라도 거짓말입니다.
빡센 신앙훈련과 믿음을 빙자해 가정과 직장을 무너뜨리는 설교는 거짓말입니다.
희망고문이자 가스라이팅입니다.
또한 메시지를 전하는 메신저의 삶이 무너져있다면 그의 메시지도 거짓말입니다.
그런 자는 피해야 합니다.
거부해야 합니다.
너의 삶이나 먼저 챙기라고 말해줘야 합니다.
세상의 도덕과 윤리를 무너뜨리는 설교는 거짓말입니다.
마지막으로 내 욕망을 매일 점검해야 합니다.
내 욕망이 왜곡되어 있으면 언제든지 우리는 달콤한 말에 속아 넘어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 삼아 날마다 내 욕망을 점검해야 합니다.
참된 회개를 통해 날마다 삶의 변화를 위해 기도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그래야 넘쳐나는 거짓 메시지에 속아 넘어가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거짓에 속지 않고 진리를 붙드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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