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심과 구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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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부르심과 구별
본문 : 롬 1:1
(롬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구별되었는데
이 한 구절에 등장한 표현 중에 세 가지 단어에 초점을 두어서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 세 가지 단어는 종(servent)이라는 말과 부르심(called)을 받았다는 말과 구별(separated)되었다는 말입니다.
1-7절까지 제가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롬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구별되었는데
(롬1:2) (이 복음은 그분께서 자신의 대언자들을 통하여 거룩한 성경 기록들에 미리 약속하신 것으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성경 기록에 미리 약속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성경은 구약성경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바울이 새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이미 구약에 다 약속되어 있던것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롬1:3)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에 관한 것이라. 그분께서는 육체로는 다윗의 씨에서 나셨고
예수님은 죽기위해 인간의 몸으로 오셔야 했고, 주님은 왕으로 오셔야 했기 때문에 다윗의 씨에서 오시게 된 것입니다.
(롬1:4) 거룩함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로 권능 있게 밝히 드러나셨느니라.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거룩하신 분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사망이 예수님을 붙잡을 수 없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롬1:5) 그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직을 받아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믿음에 순종하게 하였나니
“우리가” 열 두 사도를 말하는 것이고 이들은 모두 유대인입니다.
모든 민족들 : 유대인을 제외한 모든 민족을 말합니다.
바울만 이방인을 위한 사도였다는 것은 올바른 구분이 아닙니다.
(롬1:6) 너희도 그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너희도” : 로마서 서신을 받고 있는 수신자 즉 로마지역 성도들
“부르심을” : 이들도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롬1:7) 바울은, 로마에서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에게 편지하노니”
모든 구원받은 사람들
1절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사도의 의미
사도는 초대 교회가 세워지기까지 한시적으로 부여된 임무입니다.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부터 묻히심과 부활하심을 목격한 사람입니다.
특별한 권능이 부여된 사람입니다. 마가복음 16장
오늘날에는 사도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다마스쿠스에서 개종을 하게 된 후에
하나님의 사역에서 아주 높은 직무를 맡는 일에
즉각적으로 결심을 하고 순종으로 임하게 됩니다.
세 곳을 찾아서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갈1:1) (사람들에게서 나지도 아니하고 사람으로 말미암지도 아니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죽은 자들로부터 그분을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가 된 바울은
바울이 사도직을 맡게 된 이유는
사람의 일을 하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위임받은 직책을 부여 받은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신 일과 관련된 일을 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복음의 일입니다.
(딛1:1)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의 믿음에 따라, 하나님의 성품을 따르는 진리를 인정함에 따라
(딛1:2) 영원한 생명의 소망 안에서 사도가 되었는데 이 생명은 거짓말하실 수 없는 하나님께서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약속하셨으나
(딛1:3) 자신의 말씀은 하나님 곧 우리의 구원자의 명령에 따라 내게 맡겨진 복음 선포를 통하여 정하신 때에 드러내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사도 바울은 하나님에 의해서 사도직을 부여받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원해서 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복음 선포의 일이 바울에게 맡겨진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자의 명령에 따라”
예수님께서 복음을 들고 바울에게 주면서
네가 이것을 전하라고 맡기신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에 의해서 표적과 함께 사도직이 부여되고
복음을 전파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이런 표적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사도였던 바울에게 이런 표적과 이적이 따르게 하면서
복음을 세상에 전하는 일을 하게하신 것입니다.
바울이 이런 임무를 맡게 된 것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받기 이전부터
그가 하나님께 헌신 되었던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십계명을 주신 이후에
어느 누구보다도 그 율법을 지키는 일에서는
최고의 노력과 열심을 보였던 사람중에 하나입니다.
바울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신실했던 사람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복음사역의 일이 맡겨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딤전1: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를 드림은 그분께서 나를 신실한 자로 여기사 내게 사역을 맡기셨기 때문이라.
—
(행9:10) ¶ 다마스쿠스에 아나니야라 하는 어떤 제자가 있더라. 주께서 환상 중에 그에게 이르시되, 아나니야야, 하시거늘 그가 이르되, 보소서,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행9:11) 주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곧은 거리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사울이라 하는 다소 사람을 찾으라. 보라, 그가 기도하고 있느니라.
여러분도 구원을 받으면 곧바로 곧은 거리로 가야 합니다.
(행9:12) 그가 환상 중에 아나니야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 자기에게 안수하여 시력을 받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하나님께서 아나니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미 바울에게 네가 가서 기도해 줄 것이라고
환상 중에 말해주었다는 것입니다.
종이 먼저
바울은 먼저 자신이 종의 신분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다음으로 사도의 신분을 갖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니니야에게 사울을 찾아가서 기도해주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아나니아에게
바울의 확정된 의견을 듣지도 않고
그가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해 줍니다.
그리고 바울에게는 아나니아가 가겠다고 말하기도 전에
아아니아가 너에게 가서 손을 내밀고 너에게 기도를 해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냥 그들은 내가 하라고 하면 할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종으로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주님의 종으로서의 모습을 먼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행9:13) 이에 아나니야가 응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해 내가 많은 사람에게 들었는데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들에게 많은 악을 행하였다 하더이다.
(행9:14) 여기서도 그가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수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니라.
(행9:15) 그러나 주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길로 가라. 그는 이방인들과 왕들과 이스라엘 자손 앞에 내 이름을 전하기 위해 내가 택한 그릇이니라.
“이방인” “이방 왕들” “이스라엘 자손”
(행9:16) 그가 내 이름으로 인하여 얼마나 큰일들로 반드시 고난을 겪어야 하는지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반드시 고난을 겪어야”
바울이 사도의 신분을 갖게 된것은 누구보다 큰 고난을 겪게 되어야하는 길을
선택하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
많은 사람들이 바울은 이방인들을 위해서 부름을 받았고
베드로는 유대인을 위해서 부름을 받았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지금 사도행전의 본문을 보면
바울은 이방인과 왕들과 이스라엘의 자손앞에
내 이름을 전할 그릇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15절)
분명히 이스라엘 자손을 포함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베드로를 유대인에게 바울을 이방인에게 사역이 주어졌다는 방식의 구분은
성경을 기초로 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 기록을 보면 이방인의 집에가서 처음으로 복음을 전한 사람은
베드로 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바울에게도 이스라엘에가서 복음을 전하도록 명령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서점에서 읽은 책의 내용이나 어느 목사의 이야기가
성경과 다르다면
여러분은 성경의 이야기를 붙드셔야 합니다.
종과 사도
바울이 종이라는 것은 예수님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용어이고
바울이 자신을 사도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이 세상과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종으로 세상을 향해 교회를 위한 사역을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자세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세상으로 나가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결혼을 금하거나,
산속이나 사람이 없는 곳에 숨어서 기도만하거나
고행을 하거나 노래만 부르거나
컴퓨터 모니터에 앉아서 설교만 드는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일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회피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12제자를 사도로 세운 것은 어디 숨을 수 있는 곳에가서
다른 사람이들이 찾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속으로 가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6절과 7절의 두 가지 부르심을 보겠습니다.
(롬1:6) 너희도 그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롬1:7) 바울은, 로마에서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에게 편지하노니…
첫 번째 부르심은 성도로의 부르심 입니다. 7절
구원받은 모든 사람은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저마다의 재능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동일한 능력과 재능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나름대로의 능력과 재능이 있습니다. (고전12장, 엡4장)
우리 구원받은 모든 성도는
주님으로부터 무언가를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부르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입니다. 6절
이 부르심은 7절에서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결과입니다.
주님은 성도가 된 여러분을 어떤 일에 사용하기 위해서 부르십니다.
그런데 주님이 뭘좀 시킬려고 부르면 이핑계 저핑계 대면서,
교회도 안나오고 일을 맡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부르시면 여러분은 종의 자세로 순종하셔야 할 것입니다.
성도(saint)의 추대
어떤 종교는 성도(성자)라는 것이 그 종교 단체에서 인정할 정도의
헌신을 한 사람들을 뽑아서 성자로 추대를 합니다.
그들이 성자로 추대를 해 주어야 성자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교회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성도라는 표현은 특별한 수준의 그리스도인을 일컷는 말이 아닙니다.
성도는 구원받은 사람을 위해서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자신들이 성도라고 말할때
그 표현이 합당할 수 있도록 자신의 모습에 주의해야 합니다.
성도라는 표현이 세속적인 표현이 되거나
조롱받는 표현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빌3:13) 형제들아, 나는 내가 이미 붙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다만 이 한 가지 일을 행하나니 곧 뒤에 있는 그것들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그것들에 도달하려고 나아가
(빌3:14)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높은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푯대를 향해 밀고 나아가노라.
“높은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바울은 8절에서 … 9절에서…
(빌3:8) 참으로 확실히 모든 것을 손실로 여김은 그리스도 예수 내 주를 아는 지식이 뛰어나기 때문이라. 내가 그분을 위하여 모든 것의 손실을 입고 그것들을 단지 배설물로 여김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빌3:9) 율법에서 난 내 자신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한 의 곧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에게서 난 의를 소유한 채 그분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
(빌3:10) 이것은 내가 그분의 죽으심과 일치하게 되어 그분과 그분의 부활의 권능과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알고자 함이요,
(빌3:11) 어찌하든지 내가 죽은 자들의 부활에 도달하려 함이라.
바울의 이야기를 다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바울은 이미 구원을 받았고 의을 얻었고 예수님의 지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활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아는 지식에도 뛰어납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이 그냥 이전처럼 산다면 어떨까요?
바울은 매일의 삶에서 예수그리스의 삶과 같아 지기 위해서
노력하고 싸우며 사는 삶을 선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냥 내가 주님의 생명 안에 들어와 있다고 말을 하기 보다
그분처럼 살기 원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에게 새로운 생명이 주어졌다고 말만 할게 아니라
이제 이전과 다른 삶을 살고 싶어하고 있고 그러기 위해서
싸우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성도가 되었다고 말만하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성도로써의 삶을 보여주며 살 수는 없을까요?
우리가 구원받았다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성도가 됩니다.
이것은 정확한 교리입니다.
그러나 실제의 삶에서 성도처럼 살아 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정상적인 그리고 합당한 목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예수그리스도와 같아지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롬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구별되었는데
“Separated” 구별되었는데
여기서 구별을 어디로부터 구별되었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에게로 구별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은 과거의 나쁜 습관이나 잘못된 교제나 모임으로부터
구별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단계의 구별은 아주 기초적인 단계의 구별입니다.
아주 단순한 접근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잘못된 습관으로 구별이 되었지만
그 후에 당신이 추구해야할 대상이 없다면
여러분은 자신이 박차고 떠나온 곳으로 되돌아가기 쉽습니다.
잘못된 곳에서 떠나와서 주님과 새로운 삶을 시작하지 못한다면 헛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과 올바른 교제가 시작되고
주님을 알아가는 기쁨을 알게 된다면
여러분은 떠나온 그 진흙탕으로 되돌아 가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고치거나 떠나거나 끊어야 할 목록만 수두룩하게 적어 놓는다면
여러분은 아마도 곧 지치게 될 것이고
마귀는 여러분을 다시 진흙탕 속으로 죄의 쾌락 속으로 끌어 들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오셨습니다.
이것은 구별되는 과정의 절반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데리고 나와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그것이 구별의 완성입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거인들이 있어서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면
이들은 약속의 땅이 어떤 곳이지도 모르고 광야에서 맴돌다가
이집트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투덜대기만 하게 될 것입니다.
약속의 땅으로 가고 싶지는 않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약속의 땅이 어떤 곳인지도 잘 알지도 못한체
이집트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질 뿐일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여러분들이 하던 잘못된 일들을 멈추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삶의 공간을 만드는 것
성경이 말하는 구별의 목적은 하지 말아야 하는 잘못된 일을 멈추고
우리가 마땅히 해야할 새로운 일을 할 수 있는 삶의 공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세상을 등지고 돌아서서
새롭게 사랑해야 할 대상을 찾지 못한다면 사랑이 없는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을 더이상 사랑하지 않기 위해서는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해오던 어떤 일을 완전히 멈추려면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 됩니다.
세상의 정욕을 더이상 바라보지 않으려면
여러분이 바라보아야 할 다른 무언가가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규칙
사람들이 교회에서 하나님에게 화를 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만든 규칙들 때문일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복을 받고 이런 일을 하면 복을 못받는 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행위로 옥죄기 시작하면
그들은 교회 안에서 전혀 기쁨을 누리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옛 것을 대체할 새로운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40년간 보내면서 불평만 하다가
많은 사람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게 된 것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려면 여러분은
스스로 정복해야 할 대상과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그들이 두려워했던 가나안 정복의 시작은 아주 쉬운 것부터 였습니다.
여리고성 주변을 돌기만 해서 무너뜨리고 들어가게 됩니다.
이들이 막상 말씀대로 해보니
승리가 너무도 쉽게 주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들은 이제 순종을 통해서 얻게 되는 승리의 기쁨을 통해서
점점 높은 수준의 순종을 이어가게 됩니다.
어둠을 대체할 빛
하나님은 여러분을 죄와 어둠에서 데리고 나온 것이 전부가 아니라
놀라운 빛의 세계로 옯겨 놓으셨습니다.
여러분을 죽음에서 건져내시기만 하신게 아니라
새로운 생명으로 옮겨 주셨습니다.
여러분을 죄에서 건져내기만 하신게 아니가
여러분에게 의로움을 주셨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하지 말아야 할 목록만 가득하다면
더이상의 즐거움을 누리기 힘들게 됩니다.
예수님의 측면에서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실때는 죄로부터 구별되어 계셨습니다.
하늘과 땅은 완전히 분리될 수 밖에 없는 거리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아버지의 우편에 계셨습니다.
이 땅에는 죄가 가득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가득한 이 땅에 내려 오셨지만,
이 세상에서 그분은 여전히 죄로부터 구별되셨습니다.
그분은 동굴이나 산속에 숨어살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죄인과 함께 지내셨고 죄인과 함께 이야기 하셨고
죄인과 함께 앉아 계셨고 죄인과 함께 식사를 하셨고
그분은 죄인이었던 제자들로 그룹을 만드셨고 그들과 교제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항상 죄로부터 구별되셨습니다.
그분은 아버지께서 인정하지 않는 일은 하나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항상 겸손했고 실수 투성이의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만약 여러분의 모습이 주변의 사람들이 너무도 불결해서
같이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이 아니고 고립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거룩하고 해가 없으시며 더러움이 없으시고
죄인들로부터 분리 되셨습니다. (히7:26)
그러면서 그들과 매일 함께 하셨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께로 구별되었다고 말하고 있으면서,
그는 고린도에 찾아갔고, 아테네로 찾아 갔고,
로마에도 가고자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곳에 가기전에고 구별되어 있었고,
그곳에서 나왔을때도 구별되어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구별된다는 것 죄에서 분리된다는 것은
속세를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구별된 삶은 가족들과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구별된 삶을 산다는 것은
더이상 담배를 피지 않고,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것은 당연히 여러분이 멈추어야 할 일을 멈추고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어울리셨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과 맘몬을 같이 섬길 수 없다고 말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세상사람들과 교제를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은 세상사람들의 언어나 옷차림이나 모두 거룩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과 교제를 거부합니다.
직장에서는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직장에서 이런 사람들과 하루를 같이 보내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생계와 돈을 위해서는 이들과 같이 하면서
복음 사역을 위해서는 이들과 섞이지 않겠다고 합니다.
우리가 죄인이라고 판단하는 사람과 같이 있지 못하는 것은 구별이 아니라
고립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구별이라는 것은 그들과 함께 하지만
여러분의 마음이 그들의 죄에 동참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죄를 짓는 사람 투성이인데 그들과 같이 있기 싫다고 한다면,
어떻게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릴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죄를 짓는 사람들로부터 구별되기 보다는
죄를 짓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구별되도록 해야 합니다.
구별된다는 것이 죄를 짓는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말씀의 사역자가 죄가 가득한 도시 속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지역 교회는 구원받은 사람들만 있는 곳이 아닙니다.
죄를 짓는 사람들과는 같은 자리에 있고 싶지 않다면
어떻게 교회에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구원받게 할 수 있을까요?
죄를 짓는 사람과 같이 있을 수 없다면,
여러분 자신부터 목숨을 끊고 하늘나라로 가야할 것입니다.
그런것은 성경적인 구별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죄인들과 같이 밥을 먹는것 가지고 비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는 죄인들을 향한 사랑이 없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말하는 구별은 교만이고 자만이고 자기 의일 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너무도 거룩하게 구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교회에 못된 사람들이 많아서 가기 싫다고 합니다.
그리고 집에 앉아서 자기만 거룩하게 동영상 예배를 드립니다.
그들에게는 형제 자매를 향한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구별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구별이 아닌 것입니다.
(골2:18) 아무도 꾸며 낸 겸손과 천사 숭배로 너희를 속여 너희 보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그런 사람은 자기가 보지 아니한 그것들 속으로 들어가 자기의 육신적 생각으로 말미암아 헛되이 우쭐대며
만약 누군가가 여러분을 설득해서 무슨 일을 하게 만들고,
그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겸손한지를 보여주고 꾸미는 행동을 하게 만든다면,
여러분이 한 일에 대한 보상은 다 잃어버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명령에 순종한 것이 되게 때문입니다.
(골2:19) 머리(Head)를 붙들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이 머리로부터 온 몸이 마디와 힘줄에 의해 영양을 공급받고 서로 결합하여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시는 대로 자라느니라.
머리(Head 대문자) : 예수님을 나타냅니다.
성경에서 명확하게 제시하고있지 않은 교리를 제시하면서
서로 가르치려 한다면 그 교리가 성경에 있는지 보여달라고 해야 합니다.
담배를 피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루에 설탕을 한 컵씩 먹는 것보다
하루에 담배를 한 개피 피는 것이 더 나쁜지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머리를 얼마나 짧게 깍아야 하는지
치마는 어떻게 입어야 하는지 등 자신들의 전통과 견해로
교회의 교리를 만든다면 그 교회의 머리는 예수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수 많은 사람들의 의견과 규칙에 복종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 자신의 교리를 이야기 한다면
그 교리를 성경에서 보여달라고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은
다른 교회의 규칙들을 복종하도록 가르치고 있다면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를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교회의 머리가 되고 싶어하는
어떤 사람의 교회를 만들어가고 있는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머리인 교회가 아닙니다.
홈스쿨
어떤 사람은 홈스쿨이 성경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홈스쿨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제 아내가 저를 돕는 베필로서 해야 할 일을 포기하고
아이들 가르치는 일로 집에서 해야할 다른 일들을 포기하고 있다면
그것이 과연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성경적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자녀들을
자신의 울타리 안에서 키운다면
그들이 사회속에서의 교제할 수 있는 역량을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요?
세상 학문을 배우면 안된다고 홈스쿨링을 해야 한다면,
모세 오경을 기록한 모세는 이집트 왕실을 학문을 배운 것은
어떻게 봐야 할까요?
그가 당대에 왕실 학문을 배우지 않았다면,
백성을 이끄는 지도력은 어디에서 배울 수 있었을까요?
성경을 기록할 학문적 지식은 어디에서 배울 수 있었을까요?
신약의 서신서를 기록한 바울은
당대에 모든 학문에 최고를 달리던 사람입니다.
언어도 4개국어를 할 수 있었고,
철학이라는 학문에 있어서도 뛰어난 수준이었습니다.
세상과 벽을 쌓고 키워낸 아이들이
부모인 자신들의 기준에는 만족스러울지 모르지만
과연 이런 것이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어울려 살아야 할 올바른 방법일까요?
여러분이 자녀들에서 수학과 영어와 과학을 다 가르칠 수 있을까요?
그러면 여러분들을은 수학 잘 하는 엄마와 영어 잘 하는 엄마를 찾아서
조직을 만들고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럼 그렇게 만들어 낸 교육프로그램을 가정 학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또 다른 형태의 공교육이 만들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성경에는 학교에 대한 말씀이 없습니다.
성경에 없는 것을 만들면서 성경적이라고 꾸며대서는 안됩니다.
(골2:20) 그러므로 너희가 세상의 유치한 원리들로부터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늘 어찌하여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이 규례들에 복종하느냐?
(골2:21) (곧 만지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손을 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골2:22) 이 모든 것은 사용하는 대로 없어질 것이요) 사람들의 명령들과 교리들에 따른 것이라.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규칙이 있다는 것입니다.
만지지 말라 맛보지 말라 하는 것들은 사람이 만든 규례라는 것입니다.
이런 규례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분열시키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라면
그 명령은 그리스도인들을 연합하게 만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구별은 그리스도인들을 연합을 분열시키지 않습니다.
내가 여러분과 분열되어야 하는 구별은 성경적인 구별이 아닙니다.
(골2:23) 이런 것들은 의지대로 경배하고 자기를 낮추며 몸을 경시하는 데는 참으로 지혜가 있는 것 같이 보이나 육체를 만족시키는 데는 아무 가치가 없느니라.
“지혜가 있는 것 같이 보이나”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은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명령이 있습니다.
그것은 금식입니다.
하나님은 금식을 명령으로 주신 적이 없습니다.
금식의 유익을 알려주기는 했지만 명령으로 주신 적은 없습니다.
그리고 금식을 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금식하는 것 처럼
보이지 않도록 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일을 해서는 안됩니다.
사람들의 명령은 주로 보여주는데 있습니다.
사람들이 만들어 낸 규칙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거룩하게 구별된것 처럼 보이려고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절대로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무언가를 하지 말하고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돈을 주고 싶으신가요?
그렇다면 소문을 내면서 하려고 하지 말하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위해서 한 일들에게 아무런 보상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선한 것인지
무엇이 악한 것인지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의 기준은 하나님 만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과 가까이 있기을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둘러 쌓여 있지 않으면
우리를 죄에 둘러쌓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네 자신을 내게 맡기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제하고 사용하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갈1: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나를 구별하시고 자신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태에서 나를 구별하시고”
여기서도 구별이라는 표현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태에서 구별하셨다고 표현한 것에는
구별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이전 상태로
되돌아 갈 수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갈1:16) 자신의 아들을 내 안에 계시하사 내가 그분을 이교도들 가운데 선포하는 것을 기뻐하실 때에 내가 즉시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였고
(갈1:17) 예루살렘으로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자들에게로 올라가지도 아니하였으며 오직 아라비아로 들어갔다가 다시 다마스쿠스로 돌아갔노라.
(행13:2) 그들이 주를 섬기며 금식할 때에 성령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서 시킬 일을 위해 그들을 내게로 구별하라, 하시니
바울은 어머니의 태로부터 구별되었고 다시 태로 돌아갈 일이 없습니다.
바울은 옛 삶에서 구원을 받았고 그 전 상태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서 구별되었고
바울은 복음을 선포하던 그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바울이 어디론가 정확히 구별되었다면
그는 그 전 상태로 돌아갈 필요가 없어 집니다.
여러분이 어디로부터인가 구별되었는데,
그리고 어딘가로 구별되어 지지 않는다면,
여러분이 떠나온 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막아줄 수 있는 방법이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집트를 떠나야 합니다.
그러나 광야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선한 싸움에 참여해서 주님이 주시는 기쁨을 맛보아야 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