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열 개 우물

주일설교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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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구약의 열 개 우물
본문 : 사 12:3
(사12:3) 그러므로 너희가 기뻐하며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Therefore with joy shall ye draw water out of the wells of salvation.
흥미로운 구절입니다.
구원과 우물이 서로 연결되어서
어떤 메세지를 전달하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구약성경에서 우물이 여러번 등장합니다.
물을 마시기 위한 우물 이상의 의미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구약에 나오는 10개의 우물을 찾아 보면서
각각의 우물이 어떤 내용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고자 하는지
그 의미를 찾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 16장으로 가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전에 나름 큰 실수를 저지들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의 여종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갖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주관적으로 해석해서 적용하는 것은
하나님이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아브라함과 여종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아랍 사람들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지금 중동지역의 상황을 보면 아브라함의 실수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는 하나님만 아실 것입니다.
여전히 그들은 서로 싸우고 죽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마침내 이삭이라는 아들을 기적적으로 얻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사라는 자신의 몸종과
그녀에게서 태어난 아이가 자신과 함께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여종과 그녀의 아들을 쫓아 냅니다.
첫 번째 우물
(창16:6) 그러나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보라, 당신의 하녀는 당신의 손 안에 있으니 당신이 기뻐하는 대로 그녀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그녀를 학대하니 하갈이 그녀의 얼굴을 피해 도망하니라.
(창16:7) ¶ 주의 천사가 광야의 물 샘 옆에서 곧 수르로 가는 길에 있는 샘 옆에서 그녀를 찾아내어 (by a fountain of water)
(창16:8) 이르되, 사래의 하녀 하갈아, 네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하니 그녀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의 얼굴을 피해 도망하나이다, 하매
(창16:9) 주의 천사가 그녀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 돌아가 그녀의 손 밑에서 복종하라, 하고
(창16:10) 주의 천사가 또 그녀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게 하여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하니라.
(창16:11) 주의 천사가 또 그녀에게 이르되, 보라, 네가 아이를 가졌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주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느니라.
(창16:12) 그는 들사람이 될 것이요,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대적하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대적할 것이며 그가 자기의 모든 형제들 앞에 거하리라, 하니라.
이 사건은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기 약 1900년 전의 이야기 입니다.
그가 들의 사람이 될 것이고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대적하게 된다는 것은
그의 후손들을 통해 여전히 지금도 진리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창16:13) 그녀가 자기에게 말씀하신 주의 이름을 나를 보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그녀가 이르기를, 나도 여기에서 나를 보시는 그분을 뵈었는가? 하였기 때문이더라.
(창16:14) 그러므로 그 샘(the well)을 브엘라해로이라 하였더라. 보라, 그 샘은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느니라.
(창16:15) ¶ 하갈이 아브람에게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이 낳은 자기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창16:16)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은 팔십육 세더라.
지금 언급하고 있는 7절의 샘물(fountain of water)은
14절에서 우물(well)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지금 천사는 쫓겨난 불상한 사람을 찾아왔습니다.
추방된 여인은 지금 들판에 있습니다.
집에서 쫓겨난 여종은 친구도 없고 가족도 없고 갈곳도 없습니다.
추방자는 광야 한 가운데서 슬픔과 고난의 한 가운데 처해 있는 것입니다.
그런 그녀 옆에 우물이 있습니다.
그녀가 막막한 상황에 놓여있는 있을 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그녀를 보고 계신 것입니다.
이 여인은 잃어버린 자입니다.
혼자가 되어서 소망도 없이 세상에 던져져 있는 것입니다.
그녀에게는 미래도 없습니다.
우리의 과거
죄 많은 삶을 살고 있었고 부끄러운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고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때
우리에게 우물을 제시하셨습니다.
여러분이 구원받았을 때 모습을 한 번 뒤를 돌아 보십시오.
그때 일어났던 그 일, 그때 만났던 사람, 그때 갔던 그 장소,
그때 약속했던 그 만남,
그 모든 일에 주님이 계셨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 수 없었고, 볼 수 없었지만,
그 일로 인해서 주님에 대해서 듣게 되었고,
그때 그 만난 사람을 통해서 주님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때 그 일을 통해서 주님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우물
창세기 21장에서 사라가 아이를 갖게 되었고
그 후에 사라와 여종사이는 점점 나빠져 가고 충돌과 갈등이 점점 깊어집니다.
사라가 여인은 내보내라고 아브라함에게 요청합니다.
(창21:12) ¶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 아이나 네 노예 여자로 인하여 그 일을 네 눈앞에 근심거리로 두지 말고 사라가 네게 말한 모든 것에서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이는 이삭 안에서 네 씨가 부름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라.
(창21:13) 그 노예 여자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에게서 한 민족을 만들리라, 하시니라.
(창21:14)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 빵과 물 한 부대를 취하여 하갈에게 주되 그녀의 어깨에 그것을 메워 주고 또 그 아이를 주며 그녀를 내보내매 그녀가 떠나서 브엘세바의 광야에서 방황하더라.
(창21:15) 부대의 물이 떨어지매 그녀가 그 아이를 떨기나무 중 하나의 밑에 두고
(창21:16) 화살이 미치는 거리만큼 떨어진 곳에 가서 그를 마주보며 앉았으니 이는 그녀가 이르기를, 아이가 죽는 것을 내가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였기 때문이더라. 그녀가 그를 마주보며 앉아서 목소리를 높여 우니
자신의 아이가 죽는 것을 지켜보게되는 상황까지 마주하게 된 것은
참으로 끔찍한 일입니다.
이 아이가 한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을 성경을 통해 알고 있지만,
지금 이순간에는 이 여인과 아이는 참으로 불쌍한 처지에 놓인 것입니다.
자신의 아이가 목이 말라서 죽어가고 있고
그녀는 어머니로써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상황입니다.
목마름으로 죽어가는 자신의 아이를 보면서
큰 슬픔에 빠지게 자신의 아이를 마주보고 소리높여 웁니다.
(창21:17) 하나님께서 그 아이의 음성을 들으시니라. 하나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하갈을 불러 그녀에게 이르시되, 하갈아, 무엇이 너를 괴롭게 하느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그 아이가 있는 곳에서 그의 음성을 들으셨느니라.
(창21:18)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내가 그를 큰 민족으로 만들리라, 하시니라.
(창21:19) 하나님께서 그녀의 눈을 열어 주시매 그녀가 우물을 보고 가서 부대에 물을 채워 아이에게 마시게 하니라.
지금 쫓겨난 여인은 지금 거의 죽음의 무턱에 놓여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처럼
그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소진했습니다.
그녀는 돌아갈 곳도 없었습니다.
자신을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께서 그녀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눈을 열어 무언가를 볼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녀는 지금 같은 자리에 계속 앉아있었고,
거기에 우물이 있는 것입니다.
그녀는 아이를 떨기나무 아래에 놓았습니다.
목이 말라서 죽어가고 있었고 자신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물이 었는데
그녀는 바로 옆에 있는 우물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뭔가 새로운 것을 보여주신 것이 아닙니다.
원래 그자리에 있던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도
2000년간 항상 그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방송을 통해서, 크리스마스 캐롤을 들으면서,
부모님과 함께 교회에 가서, 여름 성경학교에서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분이 나의 생명이 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러다 어느날 여러분에게 죽음과 지옥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여러분의 자녀에게 죽음과 지옥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이 상황을 벗어날 아무런 힘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때,
비로소 여러분이 주님을 향해 울부짖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 옆에 우물이 있는 것을 보았느냐?
내가 우물을 네 옆에 두었는데 그것을 알고 있느냐?
네가 마실 수 있는 가까운 곳에 그 우물이 있는 것을 아느냐?
그 우물은 항상 네 옆에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서 그 우물을 보게 해 주신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녀가 한 것은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지 않은 것
그녀가 한 일은 무엇인가요?
주님께서 네 눈을 들어 그곳에 우물이 있는 것을 보라고 하셨을때
그때 그녀가 주님의 말을 무시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녀는 좋은 의견 고맙지만,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주님이 자신이 죽음의 순간에 길을 열어주시고
눈을 열어주셔서 감사하다고 한 것입니다.
세 번째 우물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사이에 우물 문제로 갈등이 생깁니다.
(창21:27) 아브라함이 양들과 소들을 취하여 아비멜렉에게 주고 그 두 사람이 언약을 맺으니라.
(창21:29)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가 따로 떼어 놓은 이 어린 암양 일곱 마리는 무엇을 뜻하느냐? 하매
(창21:30) 그가 이르되, 네가 내 손에서 이 어린 암양 일곱 마리를 받을 것이요, 이로써 그것들이 내가 이 우물을 판 것에 대하여 내게 증거가 되리라, 하고
(창21:31) 그 두 사람이 거기서 서로 맹세하였으므로 그런 까닭에 그가 그곳을 브엘세바라 하였더라.
(창21:32) 그들이 이와 같이 브엘세바에서 언약을 맺으매 아비멜렉과 그의 군대의 총대장 비골이 일어나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돌아가니라.
첫 번째 우물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보시는 우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에서 일하십니다.
두번째 우물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공급을 보게 되는 우물입니다.
여러분을 죽음으로부터 구하고 생명을 주시는 우물입니다.
세 번째 우물은 영원한 언약이 만들어지는 우물입니다.
아무도 그곳에서 일어났던 일을 부정할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명수 되시는 예수그리스도안에 믿음을 둔 것과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언약을 맺어주신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믿는자는 멸망치 않은 것이고
영원한 생명을 갖게 될 것이라고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요3:15)
(히7:20) 또한 그분께서는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히7:21) (그 제사장들은 맹세 없이 되었으나 이분은 자기에게 말씀하신 분을 힘입어 맹세로 되셨느니라. 곧, 주께서 맹세하셨고 또 뜻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계통에 따른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히7:22) 그런 것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는 더 나은 상속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우리는 하나님 같이 약속을 하거나 맹세를 해서 지킬 능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약속을 우리쪽에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머리카락 하나도 하얗게 하거나 검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두고 맹세하는 것은 보장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있으시고 오류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거짓말 하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런 분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지금 약속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세 번째 우물은 그 날로부터 약속을 해주시는 하나님을 말해줍니다.
세 번째 우물 이후에는 믿는자와 믿지 않는 자가 나뉘게 됩니다.
첫 번째 우물은 믿지 않는자에 대한 것입니다.
두 번째 우물도 믿지 않는자에 대한 모습입니다.
세 번째 우물에서도 믿지 않는자가 다가온 것입니다.
이제 세 번째 우물에 도착한 이상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언약을 맺어주십니다.
여러분이 이 약속 안에 들어왔다면,
여기서 부터는 더이상 믿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네 번째 우물 : 구원자의 첫 번째 우물
(창24:10) ¶ 그 종이 자기 주인의 낙타들 중에서 열 마리를 데리고 떠나니라. 그의 주인의 모든 좋은 것이 그의 손에 있었더라. 그가 일어나 메소포타미아로 가서 나홀의 도시에 이르러
(창24:11) 저녁때에 곧 여인들이 물을 길러 나오는 때에 자기 낙타들을 도시 밖 우물곁에서 무릎을 꿇고 앉게 하니라.
(창24:12) 그가 이르되, 오 주 곧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여, 원하오니 이 날 내게 일이 잘되게 하사 나의 주인 아브라함에게 친절을 베푸시옵소서.
(창24:13) 보소서, 내가 여기 우물곁에 섰다가 이 도시 사람들의 딸들이 물을 길러 나오면
네 번째 우물은
첫 번째 우물이 믿는자의 편에서 일어나는 모습입니다.
네 번째 우물은 기도의 장소입니다.
한 남자가 이 우물에 서있고 그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내가 선한 종이 되도록 도와 달라고 기도하고 있고
그리고 자신이 보냄받은 목적을 성취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실 것을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우물이 믿는자의 편에서 보여지고 있습니다.
누군가 그 우물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돈이나 부나 건강이나 보물을 간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을 위해 해야할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바로 이자리에서 이렇게 시작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께 이것 저것 달라는 데서 시작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올바른 시작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구원을 받고 10년 20년 30년이 되고 나서
이미 죄로부터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보장 받았습니다.
지옥에는 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미 모든 것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기도해야하는 자리에서
여전히 달라고만 기도하고 뭐좀 해달라고만 기도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주님께 당신을 위해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합니다.
주님을 섬기는 일에 그리고 주님이 나에게 완수하라고 주신 일에
성공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구해야합니다.
다섯 번째 우물 : 구원자의 두 번째 우물
(창29:1) 그 뒤에 야곱이 계속해서 이동하여 동쪽 사람들의 땅에 이르러
(창29:2) 바라보니, 보라, 들에 우물이 있고 또, 보라, 그 곁에 양 떼 세 무리가 누워 있더라. 그들이 그 우물에서 양 떼에게 물을 먹였더라. 큰 돌이 우물 아귀 위에 있었는데
(창29:3) 모든 떼가 거기로 모이면 그들이 우물 아귀에서 그 돌을 옮기고 양들에게 물을 먹인 뒤 그 돌을 우물 아귀의 제자리에 다시 올려놓았더라.
두 번째 우물에서는
누군가 홀로 광야에서 목마름으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이 우물에서는 양들이 모이는 장소라는 것을 믿게 됩니다.
목동이 양들을 이끌고 우물에 모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목동이 양들을 그 우물에서 재충전할 수 있게 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구원받으신 분들은 광야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푸른 초장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구원받은 상태라면
여러분은 굶주린 상태로 쫓겨난 추방자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더이상 광야에서 목마름으로 죽어가는 상황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양들의 무리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해야할 일은 그 목자를 따라다니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쁘지 않으십니까?
여러분이 광야에서 홀로 목마름으로 죽어가는 것 보다
양무리에 섞여서 함께 있다는 것에 감사하지 않으신가요?
선한 목자가 우물의 뚜껑을 열고
여러분에게 물을 먹여주는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다른 양들과 어울려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목자가 이끄는데로 가기만 하면 됩니다.
목자가 가는곳이 여러분이 가는 곳입니다.
여섯 번째 우물 : 구원자의 세 번째 우물
(출2:15) 이제 파라오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려고 찾았으나 모세는 파라오의 얼굴을 피해 도망하여 미디안 땅에 거하며 우물 옆에 앉았더라.
(출2:16) 이제 미디안의 제사장에게 딸 일곱이 있더라. 그들이 와서 물을 긷고 구유에 채워 자기들의 아버지의 양 떼에게 먹이려 하는데
(출2:17) 목자들이 와서 그들을 쫓아내니라. 그러나 모세가 일어나서 그들을 도와 그들의 양 떼에게 물을 먹이니라.
지금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집트는 성경에서는 항상 나쁜 장소로 언급됩니다.
성경에서 항상 나쁜 일이 일어나는 장소입니다.
이집트의 왕 파라오가 모세를 죽이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사용해서 이집트에서 속박당하고 있는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려고하자
파라오가 즉 마귀가 그를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아기였을때 보호해 주셨습니다.
지금은 모세가 성년이 되어 파라오를 피해 도망가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도망해서 도착한 곳이 우물이었습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사람을 노리고 접근합니다.
그때 여러분은 우물로 도망가셔야 합니다.
세상이 여러분을 못살게 굴고, 유혹하고, 실족하게 하면
여러분은 우물로 가셔야 합니다.
마귀가 여러분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도록 공격하고 있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의 삶을 위해서 강력히 추천하고 계시는 일은
우물로 도망가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은 구원받을때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매 순간 여러분이 마귀의 시험으로 힘들때
삶의 고통으로 자신과의 싸움에 힘들어 할때,
우리는 매번 우물로 달려가야만 합니다.
파라오는 왕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우물로 도망쳐야 했습니다.
파라오는 왕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우물로 도망쳐야 했습니다.
(히11:26) 또 그리스도의 치욕을 이집트의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그가 주께서 보상으로 보답해 주시는 일에 관심을 두었기 때문이니라.
파라오는 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부를 버리고 우물로 도망쳤습니다.
모세가 우물에 도착했을때 거기서 갈등이 생깁니다.
그곳에서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몇명의 거짓 목자가 우물에 다가가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들로 많이 채워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라는 것을 항상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때
그분을 거룩하신 분(Holy one)이라고 언급하십니다.
(눅4:34) 이르되, 나사렛 예수님이여, 우리를 홀로 두소서.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오셨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신 줄 아노니 곧 하나님의 거룩한 이시니이다, 하매
성경의 저자이시고 여러분안에 거하시는 분은
성령님 즉 거룩한 영(holy spirit)이신 분이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이 성경은 거룩한 책 즉 성경(holy bible)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사람을 사용해서 기록하셨습니다.
만약 교회에서 여러분이 예배를 마치고
그 후의 삶이 어떻든 상관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는 목사가 있다면
그저 하나님은 사랑이라고만 가르치는 목사가 있다면
그 목사는 거짓목사입니다.
여러분은 우물과 양들 사이에 서서 양들이 우물로 가는 길을 막는
타락한 무리에 속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자신을 경배하게 만들고 찬양하게 만들고 자신에게 굴복하게 만들고
예수님이 받아야 할 것을 자신에게 바치게 만듭니다.
그들은 성도들과 하나님 사이에 서서 목마른 성도들의 필요를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한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그런 악한 목자를 쫓아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우물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제공되도록
길을 내어주도록 한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에게
첫 번째 우물은 기도하는 장소였습니다.
두 번째 우물은 교제가 있는 곳입니다.
다른 양들과 우물주변에서 교제를 하는 곳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에게 세 번째 우물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마귀로부터 도망쳐서 마귀가 우리를 잡아두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목자라고 주장하면서 사람들이 우물에 가지 못하게 막아서는 자들과
싸워서 그들을 내쫓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타락한 목자들과 싸워서 물리쳐야 합니다.
그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지 않고
그들을 이용해서 자신의 주머니를 채우려고 하는 사람들을
용납해서는 안됩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가지 않습니까?
그들이 교회에 가도 그곳에서 예수님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 세상사람들이 교회를 비난할까요?
그들이 하는 일에 예수그리스도의 인품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점점 시민의 권리를 이야기하고
정부를 비판하는 이야기를 하고 정치적 선동을 하고,
어려운 사람에게 밥을 주고, 사회운동을 합니다.
정신승리하는 법을 가르치고 긍정적 사고로 사는 법을 가르치고
공부 잘하는 법을 가르치는 동안에,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못박혀 죽으시고 묻히시고
다시 사신 이유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교회는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교회에서 사회이슈를 다뤄주기를 원합니다.
교회에서 장수의 비결을 이야기 합니다.
모세가 오래산 것은 모세가 광야에서 오래 걸었기 때문에
많이 걸으면 건강해진다고 가르칩니다.
모세가 광야생활 40년을 한 것이 건강비법으로 기록하신 걸까요?
그런 사람들을 물리치고 세상의 이야기를 집워치우고
사람들이 우물에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목회자가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교회가 인기를 끌려고 하면 안됩니다.
모세가 지금 우물을 막아서 목자들을 물리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건전한 교리를 가지고
원수들과 세상과 마귀와 거짓교리와 싸워야 합니다.
건전한 교리가 싫다면 왜 성경대로 가르치는 교회에 나와서
시간을 낭비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대형교회에 가서 즐기시는게 더 입맛에 맞을 것입니다.
신나는 음악, 멋진 조명, 감동적인 음향
그런 것이 여러분의 육신을 감동시키는데 더 맞을 것입니다.
일곱번째 우물 : 구원자의 네 번째 우물
(민21:12) ¶ 그들이 거기서 움직여 사렛 골짜기에 진을 쳤고
(민21:13) 또 거기서 움직여 아모리 족속의 지경에서 나오는 광야에 있는 아르논의 다른 쪽에 진을 쳤으니 이는 아르논이 모압과 아모리 족속 사이에서 모압의 경계이기 때문이라.
(민21:14) 그러므로 주의 전쟁의 책에 일렀으되, 그가 홍해와 아르논의 시내에서 행하였고
(민21:15) 아르의 거처로 내려가는 시내들의 개울에서와 모압의 경계에 놓인 곳에서 행하였도다, 하였더라.
성경을 읽다보면 참으로 읽기 힘들어지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여기 민수기에서도 그렇습니다.
이들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왜 여기서 밤을 보냈는지,
왜 여기에다 진을 치는지,
이야기에 깊히 빠져들기 어려운 이야기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이야기에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알수 있다는 것입니다.
(민21:16) 그들이 거기서 브엘로 갔는데 그것은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백성을 함께 모으라. 내가 그들에게 물을 주리라, 하시던 우물이니라.
(민21:17) ¶ 그때에 이스라엘이 이 노래를 부르되, 오 우물아, 솟아나라. 너희는 우물에게 노래하라.
일곱 번째 우물은 그들이 그 우물에서 무엇을 얻기 위해서 가지 않았습니다.
가서 감사와 찬양을 드리러 간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오는 것이 여러분의 필요를 구하러 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와서
주님을 알게 된 것에 감사하고 주님이 우리를 돌보신 것에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이 그 근본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기분이 좋으면 콧노래를 흥얼거립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러 교회오는 것이 기쁘면 교회에 와서
노래로 찬양하는 것이 저절로되야 하는 것입니다.
여덟번째 우물
압살롬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압살롭은 다윗의 얼굴을 마주보고 이야기 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항상 백성의 생각에 관심이 있었고
그리고 그는 백성이 다윗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백성들을 다윗으로부터 등을 돌리도록 회유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 행동은 악한 행동이고 마귀의 행동입니다.
사람들은 직접이야기 하지않고 뒤에서 사람들만 선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행동은 마귀에 속한 행동입니다.
뒤에서 속삭이고 갈등을 부추기는 일은 하나님께서 싫어하는 일입니다.
갈등은 화합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면 저거보다 잘할 수 있다고 사람들을 부추겨서
자기편을 만드는 것은 옳지 못한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을 입증해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결점을 들추어서 그를 무너뜨리고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수법은 올바른 방법이 아닙니다.
다윗은 압살롬때문에 도망치게 되었습니다.
후세가 이 사실은 다윗에게 전달해서 피하게 하려고 합니다.
(삼하17:17) 이제 요나단과 아히마아스는 도시로 들어가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엔로겔 옆에 머물렀으므로 어떤 하녀가 가서 그들에게 고하고 그들은 가서 다윗 왕에게 고하니라.
(삼하17:18)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아이가 그들을 보고 압살롬에게 고하였으나 그 두 사람이 빨리 도망하여 바후림에 있던 어떤 사람의 집으로 들어가 그의 뜰에 있던 우물 속으로 내려가니
(삼하17:19) 여인이 뚜껑을 가져다가 우물 아귀를 덮고 찧은 곡식을 그 위에 펴 놓으매 그 일이 알려지지 아니하니라.
(삼하17:20) 압살롬의 종들이 여인에게로, 그 집으로 와서 이르되,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이 어디 있느냐? 하니 여인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들이 물 있는 시내를 건너고 있느니라, 하매 그들이 찾아도 그들을 만나지 못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니라.
여덥번째 우물은 숨을 곳과 쉴 곳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적은 세상이고 육신이고 마귀입니다.
이 세 가지 원수들은 우리를 지금도 쓰러뜨리려고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지금도 교회를 무너뜨리고 파괴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일이 알려지지 아니하니라."
세상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위치를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이 아직 드러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왕의 아들인데 왕의 아들이 지나가도 여러분을 알아보고
사진 한 장 같이 찍자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로 드러나겠지만
지금은 예수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나쁜 사람들이 쫓아올때 우리가 안전하게 숨을 수 있는
최고의 장소는 예수그리스도 안입니다.
아홉 번째 우물
(삼하23:13) 또 서른 명의 우두머리 중에서 세 사람이 내려가 수확하는 때에 아둘람 굴에 이르러 다윗에게로 갔는데 블레셋 사람들의 떼가 르바임 골짜기에 진을 쳤더라.
(삼하23:14) 다윗은 그때에 요새에 있었고 블레셋 사람들의 수비대는 그때에 베들레헴에 있었더라.
(삼하23:15) 다윗이 애타게 바라며 이르되, 오 누가 베들레헴 성문 옆에 있는 우물의 물을 내게 주어 마시게 할까! 하매
(삼하23:16) 그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뚫고 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옆에 있던 우물의 물을 긷고 그것을 취해 다윗에게 가져왔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것을 마시려 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주께 부어 드리며
(삼하23:17) 이르되, 오 주여, 내가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것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갔던 사람들의 피가 아니니이까? 하고 그런 까닭에 그가 그것을 마시려 하지 아니하니라. 이 세 용사가 이런 일들을 행하였더라.
17절은 요한복음 6장의 관련구절입니다.
(요6:54) 누구든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나니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일으키리라.
(요6:55) 내 살은 참으로 양식이요 내 피는 참으로 음료이니
(요6: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느니라.
피의 상징적 표현
사람들은 다윗에게 그들의 피를 가져왔나요 아니면 우물의 물을 가져왔나요?
다윗은 이것은 사람들의 피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지금 피라는 것이
상징적이기도하고 문자적이기도한 두 가지경우로 다 사용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을 위해 죽어야 얻을 수 있는
피에 관한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한 것이 무엇인가요?
그들이 자신의 생명을 다윗과 함께 뜻을 같이하기 위해서 내어놓은 것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저들의 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은 요한복은 6장과 일치하는 내용입니다.
실제 문자적 피를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홉 번째 우물입니다.
다윗은 우물을 갈망했습니다.
다윗은 궁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사울이 자신을 쫓아오는 것을 멈추게하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우물에서 물을 마시길 갈망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막 구원받은 초신자가 아니라면
다윗과 같이 우물에서 공급되는 그 물을 갈망해야합니다.
여러분은 교회에 가서 말씀을 듣는일에, 지체를 만나는 일에
얼마나 설레이고 기다려지는 마음으로 가고싶으신가요?
아직도 여러분은 교회에 나오는데 망설이게하고 있는 것이 있나요?
그들은 우물의 물을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아직도 목숨을 아끼지 않고 지켜야 하는
자신의 교회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누군가 광야에서 만난 우물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보고 있습니다. 누군가 우물에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열어주십니다. 그리고 우물에서 물을 마시고 생명을 구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게 됩니다. 하나님께 승리를 간구하는 기도를 하는 장소입니다. 양떼가 모이는 장소입니다. 푸른 초장에서 선한목자가 양들을 모으고 이끄는 곳입니다. 누군가 마귀로부터 도망쳐서 우물로 숨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거짓 목자들과 싸워서 양떼를 지킵니다. 사람들에게 찬양을 이끌어내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숨어서 보호받는 곳입니다. 누군가 우물을 갈망하는 곳입니다.
열번째 우물
(잠5:1) 내 아들아, 내 지혜에 주의를 기울이며 내 명철에 네 귀를 기울이라.
그리고 낯선 여자를 조심하라는 내용의 말씀이 서술되고 있습니다.
이 훈계를 듣지 않으면 12-13절의 말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잠5:12) 말하기를, 내가 어찌 훈계를 미워하고 내 마음이 책망을 멸시하여
(잠5:13) 내 선생들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아니하고 나를 훈계하던 이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던가!
(잠5:14)…
(잠5:15) ¶ 네 물 저장고에서 물을 마시며 네 우물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라.
(잠5:16) 네 샘들이 널리 퍼지며 거리들에서 물 많은 강들이 되게 하되
(잠5:17) 그것들이 오직 네 것이 되게 하며 너와 함께하는 낯선 자들의 것이 되지 못하게 하라.
(잠5:18) 네 샘이 복되게 하며 또 네가 젊을 때 취한 아내와 더불어 기뻐하라.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새겨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선하고 깨끗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여자를 찾아서
그 여인과 결혼해서 그여인과 인생을 함께하는 것은
마치 그녀가 물을 공급하는 우물과 같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에서
(엡5:32) 이것은 큰 신비니라.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우리가 성경에서 완벽한 남편을 언급할때,
그리고 복되고 현숙한 아내를 이야기할때
그런 인간의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모형으로 언급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마지막으로 언급한 우물이 무엇인지를 보면
참으로 감사한 말씀입니다.
여러분을 안전하고 쉴수 있고 먹을 것이 있고 보호받을 수 있고
숨을 수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가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하나님께서 다시는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남자와 여자가 하나되게하는 곳으로 데려다 놓으신 것입니다.
그곳이 교회이고 예수그리스도 안입니다.
그것은 신랑과 신부의 관계입니다.
그 둘이 영원히 함께 거하는 관계입니다.
이런 내용이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10개의 우물을 살펴봤습니다.
요한복음 4장을 읽어 보십시오.
수가라하는 사마리아 땅에서 여인을 만나십니다.
그 장소가 우물이 있는 곳입니다.
네가 영원히 목마르고 싶지 않으면 그 우물에서 물을 마시지 말고
나에게서 나오는 물을 마시라고 하십니다.
요한복음 7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성전에 서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7:37) 마지막 날 곧 명절의 그 큰 날에 예수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우리에게 생수의 우물이 되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처음 예배를 드렸던 곳이 르호봇이라는 우물이었습니다.
르호봇 우물에서 시작했습니다.
(창26:19) 이삭의 종들이 골짜기를 파서 거기서 솟아나는 우물을 얻었는데
(창26:20) 그랄의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들과 다투며 이르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니라. 그들이 그와 다투었으므로 그가 그 우물의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더라.
(창26:21) 그들이 또 다른 우물을 파고 또 그것으로 인하여 다투었으므로 그가 그 우물의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
(창26:22) 그가 거기서 옮겨가서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그것으로 인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가 그 우물의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고 이르되, 이제 주께서 우리를 위해 자리를 만들어 주셨은즉 그 땅에서 우리가 다산하리라, 하였더라.
주님은 당신이 시작하신을 결코 무의미하게 끝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이 낮은마음침례교회를 통해서 계획하신 일이 이루어지도로
우리가 준비되어야 합니다.
그 기간이 얼마나 걸릴지 우리가 자신의 완고함을 부수고 내려놓는 일에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르지만, 우리는 지금 서로의 부족을 보고 있지만 자신의 부족은 보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물앞에서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우리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한 기도를 하고 있는지,
우물에 모여서 무리지어있지 못하고 혼자 맴돌고 있는것은 아닌지,
우물을 주신것에 감사하지 못하고 있는건 아닌지,
우물을 갈망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깊게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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