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름부음받은 다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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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기름부음받은 다윗
본문 : 삼상16:7
(삼상16:7) 주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나 키의 크기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주는 사람이 보는 것처럼 보지 아니하나니 사람은 겉모습을 보나 주는 마음을 보느니라.
오늘은 사무엘 16장을 통해서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는 장면을 살펴보겠습니다.
다윗의 이름이 등장한 처음 시점
사무엘서에서 등장
다윗의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사무엘서에서
이 곳에서 다윗의 이름이 역사적으로 첫 번째로 등장하는 장면이지만
구약에서 다윗의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한 곳은 아닙니다.
룻기에서 등장
구약에서 이미 다윗의 이름이 두 번이나 룻기에서 등장한 적이 있습니다.
다윗의 출현이 보아스와 룻의 결혼을 통해서 태어나는 배경을 설명해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하게 되는 족보의 일부로 기록된 것입니다.
신약에서 등장
다윗은 신약에서도 중요한 왕으로 등장합니다.(총 100본 신약 50번)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을 제외하면 다윗의 이름이
신약의 처음과 마지막 부분에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마내복음 1:1에서 예수님과 연관되어서 처음 등장합니다.
(마1:1) 아브라함의 자손이시요,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세대에 대한 책이라.
The book of the generation of Jesus Christ, the son of David, the son of Abraham.
그리고 계시록 22:16절에서
예수님께서 자신과 관련해서 다윗의 이름을 언급하십니다.
(계22:16) 나 예수는 내 천사를 보내어 교회들 안에서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후손이요 빛나는 새벽별이라, 하시더라.
성경에서 이렇게 다윗은 특별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개인적으로 매력적인 삶을 삶
또한 다윗의 개인적인 삶도 확실히 매력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는 왕이었고
다윗 자신 또한 하나님의 백성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의 삶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의 결점을 어떻게 다루시는지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충족하는 삶을 살려고 했던 사람이지만
그도 완전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게 반면교사가 됨
그도 우리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필요한 보통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다윗의 삶을 보면서 죄가 어떻게
다윗을 공격하고 무너뜨리려고 하는지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반면 교사가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다윗은 또한 위대한 시편의 작가이기도 합니다.
다윗에게 이런 다양한 경험과 통찰력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처럼 많은 시편을 가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윗이 기록한 이런 시편이 없었다면
우리 삶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낙담하고 어려운 시기를 만나면
어떻게 상황을 이겨나가야 할지 알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때 다윗의 시편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받았고 축복을 받았습니다.
다윗을 통해 예수님을 드러내심
우리가 다윗에 대해서 살펴보는 이유는
다윗을 통해 다윗보다 더 위대하신 분이 계시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들레헴에 오실 분
사무엘상 16장에서
베들레헴에 있는 이새의 아들이
하나님의 백성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보내고자 하는 구원자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고 의로 통치하실 분이시라는 것을
일관되게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되어서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게 될것이라는 것도 보여주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에서 뭐라고 언급하셨나요?
(롬1:3)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에 관한 것이라. 그분께서는 육체로는 다윗의 씨에서 나셨고
(롬1:4) 거룩함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로 권능 있게 밝히 드러나셨느니라.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예수님의 이야기로 가득차 있습니다.
사무엘서의 모든 이야기도 예수님의 이야기로 가득차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역사적이 등장부터 시작
사무엘 상에서 다윗의 역사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는 부분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사무엘은 새로운 왕에게 기름을 붓기 위해서 베들레헴으로 보내졌습니다.
그리고 16장에는 세 명의 주요 인물이 등장합니다.
대언자 사무엘과, 양치는 다윗과 사울왕이 있습니다.
이들 모두는 사무엘과 함께 시작되는 인물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연결된 인물들 입니다.
하나님과 손발이 맞지않는 사무엘
16장에서 사무엘의 모습을 보면
하나님과 살짝 살짝 손발이 맞지 않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음 왕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사무엘이 잘못된 판단을 해서 하나님이 개입하게 만드는 모습이 나옵니다.
사무엘은 위대한 대언자이고 하나님의 신실한 종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입니다. 어머니 한나의 기도를 통해서 태어나게 된 인물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딴 두 권의 성경책을 가진 인물입니다.
사무엘 3장
(삼상3:18) 사무엘이 모든 것을 그에게 말하고 아무것도 그에게 숨기지 아니하매 그가 이르되, 그분은 주시니 그분께서 선하게 여기는 것을 행하실 것이니라, 하니라.
(삼상3:19) ¶ 사무엘이 자라매 주께서 그와 함께하셔서 그의 말들 중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게 하시니라.
(삼상3:20)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주의 대언자로 세워진 줄을 알았더라.
사무엘은 참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도 결정적인 순간에 망설이는 모습을 보입니다.
지금 16장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읽지 못하고
믿음이 부족한 상태에 놓인 모습을 보입니다.
이유가 뭘까요? 그 이유를 찾아 보겠습니다.
이방인들을 따라가고 싶어하는 백성
이스라엘은 참 하나님을 왕으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이방 국가들이 왕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자기들도 눈에 보이는 왕을 갖고 싶어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갖게 되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주변 사람들이 갖고 있는 것을 갖고 싶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길을 따라 가고 싶어하게 됩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그들에게서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볼 수 있는 왕이 자신들을 통치하고 전쟁에서 이끌어 주길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는 백성들
그들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백성이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인 왕을 세우게 되면 자신들이 강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마도 "너희들이 지금 제정신이 맞냐? 미친거 아니냐?”
라고 말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백성의 죄를 스스로 수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그런 모습을 보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왕을 갖게 되면 어떤 일이 있게 될지
백성들에게 경고도 해 주셨습니다.
그들에게 주신 경고가 무엇인지 기억하시나요?
(삼상8:10) ¶ 사무엘이 자기에게 왕을 요구한 백성에게 주의 모든 말씀을 고하여
(삼상8:11) 이르되, 너희를 통치할 왕에 관한 규범이 이러하리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취하여 그들을 자기와 자기의 병거들을 위해 지정하고 또 자기의 기병으로 삼으리니 몇 사람은 그의 병거들 앞에서 달려가리라.
(삼상8:13) 또 그가 너희 딸들을 취하여 과자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빵 굽는 자로 삼으리라.
이 경고가 주어졌을때 백성들이 이해하고
그럼 더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말했어야 했습니다.
(삼상8:16) 또 너희 남종과 여종과 가장 아름다운 청년과 나귀들을 취하여 자기 일을 하게 하며
(삼상8:17) 너희 양의 십분의 일을 취하리니 너희가 그의 종이 되리라.
(삼상8:18) 그 날에 너희가 너희를 위해 택할 너희 왕으로 인하여 너희가 부르짖을 터이나 주께서 그 날에 너희 말을 듣지 아니하시리라, 하니라.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셔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충분히 경고를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시고 사무엘을 통해 왕을 세워주십니다.
오늘날도 경고해 주시는 하나님
오늘날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그분의 말씀으로 알려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분의 말씀을 무시한 댓가를 크게 치르게 될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울왕을 세우심
하나님은 그래서 그들에게 사울을 왕으로 주셨습니다.
(삼상10:1) 그때에 사무엘이 기름 한 병을 취하여 그의 머리에 붓고 그에게 입을 맞추며 이르되, 그것은 주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자신의 상속 백성을 다스릴 대장으로 삼으셨기 때문이 아니냐?
(삼상12:13) 그러므로 이제 너희가 택하고 너희가 바라던 왕을 보라! 보라, 주께서 너희를 다스릴 왕을 세우셨느니라.
안타까운 상황이지만 왕이 세워졌고 백성들은 그를 따랐지만
상황은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사울의 통치기간(40년)은 안좋은 일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좋았던 일은 얼마 없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 보다는 백성들의 음성에 더 많은 귀를 기울였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이 실수에 실수를 거듭하는 모습만을 보았습니다.
결국 사울을 버리심
그래서 하나님은 사울을 왕의 자리에서 거부하게 되었습니다.
사무엘상 15장에서 사무엘을 통해 사울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셨습니다.
(삼상15:11) 내가 사울을 왕으로 삼은 것으로 인해 슬퍼하노니 그가 나를 따르는 것에서 돌이켜 내 명령을 수행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라. 그것으로 인해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밤을 주께 부르짖으니라.
사무엘은 사울에게 그 사실을 통보합니다.
(삼상15:23) 거역하는 것은 마술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불법과 우상 숭배와 같나이다. 왕이 주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그분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더라.
(삼상15:28) 사무엘이 그에게 이르되, 주께서 이 날에 이스라엘 왕국을 왕에게서 찢어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
더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겠다고 하십니다.
사울과는 이제 모든 것이 끝난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16장 1절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삼상16:1) 주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을 통치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어느 때까지 그를 위하여 애곡하려느냐?
슬퍼한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이 사울을 위해서 슬퍼하고 있는 것을 보고 꾸짖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사울에게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는 이유가 뭘까요?
사무엘이 사울에게 슬픔을 느끼는 것이 잘못일까요?
사울이 처한 상황에 대해 사무엘이 슬퍼하는 것이 잘못은 아닐 겁니다
15장 34절을 보겠습니다. 너무 길게 슬퍼함
(삼상15:34) ¶ 그때에 사무엘은 라마로 가고 사울은 사울의 기브아에 있던 자기 집으로 올라가니라.
(삼상15:35) 사무엘이 자기가 죽는 날까지 사울을 보려고 다시는 가지 아니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을 위하여 애곡하였더라. 주께서는 자신이 사울을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으로 삼으신 것으로 인해 슬퍼하셨더라.
사무엘이 사울로 인해 슬퍼하는 모습에 대해서
주께서 뭐라고 지적하신 바가 없습니다.
16장에서 처럼 사울에게 뭐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15장 마지막 35절에서 16장 1절까지는 약 16년의 시간이 흐른 시점입니다.
그런데 약 16년이 지난시점에도 사무엘은 계속 슬퍼하고 있었습니다.
다음 단계로 진행하지 못하는 사무엘
문제는 사무엘이 슬픔에 젖어서 다음 단계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다음 왕이 될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계속 울고만 있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과거의 왕에 대한 생각으로 슬퍼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일으켜 세워서 다음 일을 할 수 있게 해주어야 했습니다.
(삼상16:1) ...기름을 네 뿔에 채우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내가 나를 위해 그의 아들들 가운데서 한 왕을 예비하였느니라, 하시니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재촉까지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주춤거립니다.
(삼상16:2) 사무엘이 이르되, 내가 어찌 갈 수 있으리이까? 사울이 그것을 들으면 나를 죽이리이다, 하매 주께서 이르시되,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말하기를, 내가 주께 희생물을 드리러 왔다, 하고
"사울이 그것을 들으면 나를 죽이리이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일까요?
하나님에대한 믿음이 어디로 간 걸까요?
믿음이 있다면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무엘을 위로하고 그에게 확신을 주고 있습니다.
(삼상16:3) 이새를 희생물 드리는 일에 부르라. 네가 행할 일을 내가 네게 보여 주리니 너는 내가 네게 지명하는 자에게 나를 위해 기름을 부을지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희생물을 드리러 왔다고 하면 괜찮을 것이라고 말해 줍니다.
때로는 사무엘과 같이 훌륭한 대언자도
머뭇거리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행동해야 할때에 슬퍼만 하고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내가 사울은 이미 버렸다
그러니 기름부을 준비를 하고 이새의 집으로 가라
그러면 내가 누가 다음 왕이 될찌 너에게 보여줄 것이다.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이새의 집으로 갑니다.
그리고 거기서 또 다른 일이 일어 납니다.
서두르는 사무엘
사무엘은 또 여기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하나님보다 앞서려고 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삼상16:4) 사무엘이 주께서 말씀하신 바를 행하여 베들레헴에 이르매 그 고을의 장로들이 그가 오는 것을 보고 떨며 이르되, 당신이 평화롭게 오시나이까? 하니
(삼상16:5) 그가 이르되, 평화롭게 오느니라. 내가 주께 희생물을 드리러 왔은즉 너희 자신을 거룩히 구별하고 나와 함께 희생물을 드리러 가자, 하고는 그가 이새와 그의 아들들을 거룩히 구별하고 그들을 희생물 드리는 일에 부르니라.
(삼상16:6) ¶ 그들이 오매 그가 엘리압을 보고 이르기를, 주의 기름 부음 받을 자가 참으로 그분 앞에 있도다, 하였으나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새의 집에서 다음 왕이 될 사람을
찾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새의 큰 아들인 엘리압이을 사무엘 앞에 불려왔습니다.
사무엘이 그를 보고 뭔가 느낌을 받았습니다.
엘리압을 보고 사무엘은 이 아이가 하나님이 준비하신 사람인가 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무엘은 판단을 너무 서두르고 있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이 사람에대한 평가를 신중하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은 단지 그의 외모만을 보고 급하게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의 판단에 개입하시는 하나님
주님께서 7절에 사무엘에게 개입하십니다.
(삼상16:7) 주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나 키의 크기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주는 사람이 보는 것처럼 보지 아니하나니 사람은 겉모습을 보나 주는 마음을 보느니라.
지금 주님이 왜 하나님이신지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주님의 지혜가 우리보다 위에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겉모습을 보는 것과 마음을 보는 것이 다른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을 보아야 한다고 알려주고 계십니다.
주님의 이런 가르침은 여러 영역에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왕을 선택할때, 목사를 선택할때, 모든 면에서 적용할 수 있습니다.
남자친구를 만들때, 여자친구를 만들때, 모두 적용가능합니다.
이런 면에서 하나님의 대언자조차 잘못된 접근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가르쳐야만 했던 것입니다.
"사무엘아 너에게 기름부으라고 준비한 사람은 네 눈으로 판단해서는 안된다.
내 눈으로 판단되어져야 한다.
그가 아주 매력적이고 훌륭해 보일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강한 인상을 받을 정도로 멋질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를 선망할지 모르지만,
네가 판단하는 기준은 뭔가 잘못된 기준이다
그런 것으로 내가 왕이 될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사울을 선택할때도 같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사울은 매우 인상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외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이 주님께 합당하지 않아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같은 실수를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삼상9:2) (삼상10:23)
하나님은 사람들 보다 더 깊은 것들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이새의 첫 번째 아들 엘리압은 하나님으로부터 거부되었습니다.
엘리압의 흠결을 미리 아신 하나님
우리는 흥미롭게 그에게서 약간의 교만과 마음의 분노을 보게 됩니다.
(삼상17:28) ¶ 그가 그 사람들에게 말할 때에 그의 맏형 엘리압이 들었으므로 엘리압의 분노가 다윗을 향해 타오르매 그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광야에 있는 몇 안 되는 그 양들을 네가 누구에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무례함을 아나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려고 내려왔도다, 하매
하나님은 엘리압의 성품을 이미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사무엘이 나머지 아들을 다 보았으니 아니었습니다.
(삼상16:8-10)
이들 모두는 하나님이 준비해 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찾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무엘은 어려운 수업을 받고 있습니다.
때로는 슬픔에 잠겨 제자리 걸음을 하고
때로는 조급하게 마음이 앞서기도하고
때로는 잘못된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기도 하고
고민이 깊어갑니다.
무턱대고 아무에게나 기름을 부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제 다윗의 순서가 옵니다.
다윗은 처음에 이새의 아들을 불러 모았을때 오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사람들의 눈에 띄는데 있지 않았습니다.
(삼상16:11) 또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이들이 다 여기 있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보소서, 그가 양들을 지키나이다, 하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에 오기 전까지 우리가 앉지 아니하리라, 하니
사무엘이 이제 점점 올바른 방향으로 그의 생각이 미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해 두셨다면 반드시 거기에 그 답이 있다는
믿음이 들어온 것입니다.
분명히 어딘가에 그가 있을 것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을 갖고 생각을 열기시작한 것입니다.
"네 아이들이 다 여기 있느냐?”
그래서 이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이새에게는 한 명이 아들이 더 있다고 답변했습니다.
이새에게는 하나님께서 찾는 아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찾고있던 마음을 가지고 있던 사람을 찾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새의 아들들의 마음을 보신 것입니다.
자녀들이 합당한 마음을 갖게 하는 것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을 위해서 우리에게 특별한 부담을 갖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의 마음이 하나님께 향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주님을 알기 원하고 사랑하길 원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주님을 섬기길 원합니다.
자녀들 앞에서의 우리의 삶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증인이 되는 삶을 보여주는 중요한 순간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과 언행은 자녀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운동선수가 운동장에 와서 훈련을 받아야 하는 것처럼
자녀들도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련받을 수 있도록
부모들이 지도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것이 부모님들이 자녀들을 위해서 해야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왜 매주 교회에 가야하는지 그 이유를 잘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부모가 하는 모든 행동은 어느 방향으로든, 좋은 방향이든 나쁜방향이든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공부보다 주님이 먼저 마음에 있도록
자녀들의 마음에 주님이 먼저가 되도록 하는 것이
공부를 잘하게 하는 문제나 운동을 잘하게 하는 문제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자녀들을 가르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그러나 그들을 위한 기도를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통치할 다음 왕을 선택하실때
그의 마음을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원했던 곳에 있었던 다윗
지금 다윗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은 상태에 있습니다.
다윗은 그의 아버지가 나중에 불러오기 전까지
다윗은 하나님이 원했던 곳에 있었습니다.
11절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삼상16:11) ...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보소서, 그가 양들을 지키나이다,…
다윗은 밖에서 양들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양을 지키도록 정해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막내가 했어야 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막내가 형들을 돌보도록 정해진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다윗은 양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바로 다윗이 하나님이 찾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방법으로 사람을 찾고 있지 않으신 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주의깊게 살피지 않는 방법으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것이 다윗이 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하는 한가지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찾지 않는 먼 곳에서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삼상16:12) 그가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왔는데 이제 그는 혈색이 좋으며 아름다운 용모를 지녔고 보기에 잘생겼더라. 주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이 그니 일어나 그에게 기름을 부으라, 하시니라.
이 아이가 하나님이 찾으신 분이십니다.
사람들이 관심갖지 않는 먼 곳에 있던 이 아이가
하나님이 흡족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아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데려오도록 하신 것입니다.
1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삼상16:1) ... 내가 나를 위해 그의 아들들 가운데서 한 왕을 예비하였느니라, 하시니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서 왕을 준비하셨습니다.
이 구절을 보고 떠오르는 생각이 있으신가요?
창세기 22장입니다.
(창22:8) ... 번제 헌물로 쓸 어린양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예비하시리라, ...
이 어린양도 하나님이 선택하고 준비하신 것입니다.
이 어린양은 점도 흠도 없는 양입니다.
사람 중에는 이 어린양이 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달려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위한 왕으로 선택된 것입니다.
이 선택에 인간이 개입될 여지는 전혀 없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이 선택하고 준비하신 것입니다.
이 사람은 사람들에 의해서
무시되었고 간과되었던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되고 준비된 인물입니다.
다윗이 사무엘 앞에 불려왔습니다.
다른 형제들은 다윗보다 나이가 많았습니다.
그들은 다윗보다 덩치도 크고 힘도 셌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에게 하나님이 찾는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과 열정이 그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삼상16:13) 이에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의 형제들 가운데서 그에게 기름을 부으니 그 날 이후로 주의 영께서 다윗에게 임하시니라. 이에 사무엘이 일어나서 라마로 가니라.
다윗의 모든 형제들 앞에서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에게 너희의 왕이 바로 여기 있다고 알려주신 것입니다.
사람이 선택한 왕이 사라지고 하나님이 선택한 왕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기름 뿔”
사울에게는 "기름 한 병"을 취하였다고 했다는 부분과 비교하면 그렇습니다.
(삼상10:1) 그때에 사무엘이 기름 한 병을 취하여 그의 머리에 붓고 그에게 입을 맞추며 이르되, 그것은 주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자신의 상속 백성을 다스릴 대장으로 삼으셨기 때문이 아니냐?
뿔은 강한 힘을 상징합니다.
병이라는 것은 점토로 만들어진 것이고 깨지기 쉬운 그릇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보신 것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배신했습니다.
그의 왕권은 찢겨 졌습니다.
그에게는 당연히 있어야 할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없었습니다.
다윗의 직업도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양을 친다는 것은 그가 백성을 다수릴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왕은 목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다스리는 왕들에게 기대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위치를 목자의 위치로 보길 원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과 갖고 있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사40:10) 보라, 주 하나님께서 강한 손과 더불어 임하실 것이요, 그분의 팔이 그분을 위하여 다스리리라. 보라, 그분의 보상이 그분께 있고 그분의 일이 그분 앞에 있도다.
(사40:11) 그분께서는 목자같이 자기 양 떼를 먹이시고 어린양들을 자기 팔로 모아 품에 안아 옮기시며 어린것들과 함께하는 어미들을 부드럽게 인도하시리로다.
돌보는 것 이상이 요구되는 목자
목자는 자신의 양을 돌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돌보는 것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목자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 모든 요구가 충족된 목자가 있습니다.
(슥13:7) ¶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오 칼아, 깨어서 내 목자 곧 내 동료인 그 남자를 치라. 목자를 치라. 그리하면 양들이 흩어지리니 내가 내 손을 돌이켜 작은 자들 위에 두리라.
자신의 양들을 구속해줄 목자가 오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모두 받아내실 목자가 오실 것입니다.
신약에서 바로 그분이 오신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바로 선한 목자이신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자신의 양들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러 오신 목자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도 기꺼이 자신의 백성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 놓을 수 있는 왕이 되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왕으로 선택받았지만 다시 양을 치는 다윗
다시 사무엘 16장으로 오겠습니다.
다윗은 방금전 양을 치는 곳에서 목자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지금 16장에서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아직 이 나라의 왕은 사울입니다.
이직 다윗은 왕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다시 양치는 곳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사무엘하 2장에 가야 다윗은 유다지역의 왕이 되고
5장에 가야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됩니다.
이 기간 사이가 약 15년 정도가 됩니다.
그 기간 동안 왕이되기 위한 준비와 훈련을 거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훈련의 시작은 들에서 양을 키우는 일에서 부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십니다.
작은 일 부터 시작하게 하십니다.
다윗은 광야생활의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잘 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신학원이나 신학대학에서 배워서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배운 것은 무엇일까요?
인내를 배웠을 것입니다.
양들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을 관리하는 일은
많은 인내심이 필요한 일입니다.
마음에 안드는 양이 있다고 그 양을 버리고 다른 양을 데려올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마음에 안든다고 다른 자녀를 데려와서 기를 수 없습니다.
양들을 돌보는 일은 꾸준하고 신뢰할 수 있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고 싶지 않아도 / 비가 와도 / 바람이 불어도 / 몸이 아파도 나가야 합니다.
멈출수가 없습니다.
나가서 모든 양들에게 아무일도 없는지 돌봐야 합니다.
다윗은 그들의 상태를 이해하고 살피는 동정심을 배웠을 것입니다.
야생동물이 공격하면 자신의 양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그들을 돌보고 먹여야 합니다.
그들이 아프고 상처가 생기면 돌봐야 합니다.
그의 마음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을 것입니다.
다윗은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언제 왕이 되는지 보체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주어진 일에 열심을 다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아이가 나중에 큰 일을 감당하게 만들기 위해서
먼저 작은 일들에 성심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작은 일이 하나님에게는 큰 일이 됩니다.
우리 눈에 작은 일들이 하나님께는 매우 큰일로 여겨지는 것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기 원하십니다.
그래야 큰 일이 주어졌을때 그 일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왕이 된다고 기름을 부어놓고 양이나 돌보라고 했다고
자신을 일을 소홀히 했다면, 어떨까요?
그런 사람이 우리의 왕이 된다면 어떨까요?
양을 치는 일을 열심하는 것은
나중에 자신이 통치하게 될 백성들이
바로 양과 같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백성들은 하나님의 양들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의 양 중에 하나라는 것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23편을 기록한 것입니다.
(삼상16:14) ¶ 그러나 주의 영께서 사울을 떠나고 주로부터 온 악한 영이 그를 괴롭게 하므로
하나님을 실망시키기만 했던 사울에게서 하나님의 영이 떠나게 됩니다.
영이 떠나고 난 뒤 그에게 남은 것은 악한 영 뿐입니다.
그는 슬픔과 아픔만이 그를 괴롭히고 있게 되었습니다.
신하들의 조언으로 다윗을 불러와 하프를 켜게 합니다.
(삼상16:23) 하나님으로부터 온 그 악한 영이 사울에게 임할 때에 다윗이 하프를 취하여 손으로 타니 이에 사울이 상쾌하게 되고 나았으며 그 악한 영이 그에게서 떠나니라.
사울에게서 하나님의 영이 떠난 뒤에
그를 위로해 줄 수 있는 기쁨은 다윗의 음악 뿐이었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울
사울은 나라를 다스렸지만 자신의 마음은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버림 받았습니다.
그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다윗의 음악이었고 찬양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난다는 것은 매우 처참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나중에 교회가 들려올라가고
이 땅에 남는 자들은 적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있게 될 것입니다.
악한 영들이 사람들을 괴롭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왕을 따라야 합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왕
다윗을 왕으로 세워서 우리에게 제시해 주셨던 왕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준비해 주신 어린양이 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나중에 영원히 이 땅을 통치하실 왕중에 왕이십니다.
우리는 이분을 영원히 찬송하면서 지내게 될 것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