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믿는 믿음

주일설교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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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현재의 믿음
본문 : 히11:1, 6
(히11:1) 이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Now faith is the substance of things hoped for, the evidence of things not seen.
(히11:6) 그러나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하나니 그분께 가는 자는 반드시 그분께서 계시는 것과 또 그분께서 부지런히 자신을 찾는 자들에게 보상해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하느니라.
한국 교회의 뜨거웠던 부흥시대를 거치고,
지금은 차가운 지성만이 남아서
더이상 그 옛날 뜨거웠던 신앙을 찾아 보기 힘듭니다.
한국교회의 기복주의 신앙에 피로감을 느끼고
이제 더이상 맥락없이 복을 빌어주는 신앙이 사라지고 있는 것은
좋은 현상이기는 하지만
요즘 근본주의 신앙진영에서는 지나치게 지적이려는 현상으로
믿음을 지식으로 이해하다보니 더이상 실천하는 믿음은 찾아보기 힘들고
지식으로 공부하는 신앙만 남아가려는 현상이 보입니다.
과거에는 열심히 교회도 다니고 성경도 열심히 봤다는 사람들이
지금은 교회에 다니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타임캡슐에 집어넣고,
예수님이 다시 오실때나 그 믿음을 꺼내보려고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제 믿음”
1년 전에는 믿음이 좋았습니다.
어제도 믿음이 좋았습니다.
지금은 어떠신가요?
지금 이순간 그 믿음이 유지되고 있으신가요?
우리 모두는 나름대로의 여러가지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삶이 나아질 거라는 믿음도 있고,
언젠가 우리 자녀들이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을 얻을 믿음이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언젠가 하늘나라에 갈 것을 믿고 있기도합니다.
미래에 일어날 어떤 일에 대한 기대를 믿음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어제의 믿음으로 오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지금 현재의 믿음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아직 구원을 받지 않은 사람에게 무엇이 필요할까요?
지금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금 믿어야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여러분에게 무슨 일인가 일어났을 것이고,
오늘 오후에 무슨 일인가 일어날것이고,
어제밤에 어떤일이 일어 났을 것입니다.
매일 다양한 문제와 일들이 주변에서 우리를 향해 일어납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상처주는 말을 해서
지금 여러분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힘들게 했다면,
어제의 믿음으로는 이 문제를 이길 수 없습니다.
구원도 현재의 믿음이 되어야 이루어집니다.
오늘 갖고 있는 그 믿음이 여러분을 구원하게 된 것이고
그 믿음으로 하늘나라에 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믿음을 굳건하게 하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믿음이 우리에게 드러나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왜 라는 질문
여러분이 학교에서 기사를 작성하는 원리를 배웠을 것입니다.
누가,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어떻게, 왜
육하 원칙이라고 배웠을 것입니다.
성경도 똑같은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흥미로운 부분이 보입니다.
why it , where, what if he, when, how realy in doubt
의문을 제가하는 것
한번 보겠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왜”라는 질문을 하나님께 던지기 시작합니다.
왜 이런 문제가 있는지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하박국이 얻은 답은 이 모든 문제의 주관자가
하나님이라는 것만을 알게 됩니다.
(합2:13) 보라, 그 백성이 바로 그 불 속에서 수고하며 그 백성이 바로 그 헛된 것으로 인하여 지치게 되리니 그것이 만군의 주에게서 나오지 아니하였느냐?
(합1:2) 오 주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들으려 하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내가 폭력으로 말미암아 주께 외쳐도 주께서는 구원하려 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합1:3) 어찌하여 주께서 내게 불법을 보이시며 나로 하여금 학대를 보게 하시나이까? 노략과 폭력이 내 앞에 있사오니 곧 불화와 다툼을 일으키는 것이 있나이다.
(합1:4) 그러므로 율법이 해이해지고 판단의 공의가 전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나니 사악한 자가 의로운 자를 에워싸므로 부당한 판단이 나아가나이다.
3절에서 "어찌하여"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1장에 답이 없습니다.
2장에도 답이 없습니다.
그는 폭력을 보았고 논쟁을 보았고 불법을 보았고 약탈을 보았습니다.
그는 부패한 심판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지를 묻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답을 얻지 못합니다.
왜 냐고 묻는다고 이해되고 믿어지는 해답을 얻지 못합니다.
우리가 “왜”냐고 묻는다고 해서 믿음의 비결이 얻어지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은 무엇인지 알려고 노력하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는 일들이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하고,
하늘을 쳐다보고
하나님께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고 물어보고,
왜 이런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시는지 물어본다고해서
그 어떤 상황도 여러분이 원하는대로 고쳐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무릎에 힘만 풀리고
머리 속은 어수선해지가만 하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9장 20절
(롬9:20) 아니라, 오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하나님께 대꾸하느냐? 지어진 것이 자기를 지은 이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만들었소, 하겠느냐?
(롬9:21) 토기장이가 같은 덩어리의 진흙으로 한 그릇을 만들어 존귀에 이르게 하고 다른 하나를 만들어 수치에 이르게 할 권한이 없겠느냐?
이해할 수 없는 일들
오늘날 일어나는 일로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한 사람이 심각한 코로나 전염병이 걸려 있는데
바로 그 옆에서 같이 잠을 자는 아내는 전염병에 걸리지 않고
같은 사무실을 사용했는데로 아무렇지 않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이런 경우를 보면 이상하지 않던가요?
어떤 젊은 사람은 담배도 안피웠는데 어린 나이에 암에 걸려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30년 40년 담배를 피우고 살았는데
암에 걸리지 않습니다.
심지어 100세가 넘게 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영양가 없는 음식만을 먹어서 영양실조에 걸려야 하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장수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에 대한 “왜”냐는 질문에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이 처한 상황과 다른 사람의 상황을 비교하면서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를 물어본다면
왜 저렇게 좋은 사람은 죽고 저렇게 사악한 사람은 죽지도 않는지 묻는다면
왜 저사람의 자녀는 잘 되는데 내 자녀는 그렇지 못한지,
이런 질문으로 여러분이 얻을 수 있는 것은 믿음의 손실 뿐입니다.
이런 질문에 빠져 있으면 자신의 믿음이 약해질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일일히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의해서 판단받으시는 분이아니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사람에게 일일이 설명하셔야 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네가 언제부터 나를 시험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느냐?”
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문제가 없고 하나님에게 문제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왜 이런 상황에 놓으셨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화를 내고 쓴뿌리를 갖기도 합니다.
하나님에게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이 무죄하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려움이 생기면 첫 번째로 드는 생각이
내가 주님을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데
그리고 주님을 올바로 섬기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주님이 왜 나에게 이런일을 만드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다가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그입 다물라”
주님이 우리를 지옥에 보낸다해도
우리에게 빚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조차 모두가 주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이 유지되는 것도 주님의 은혜입니다.
나에게 불행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것은 교만
나같이 좋은 사람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자세는 교만한 자세입니다.
그런 마음이 든다면 조심하셔야 합니다.
아마도 이 생애 동안은 그 해답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심판석에 서서 예수님에게
왜 내 아들에게 그런일이 일어나게 하셨는지 따지실 것인가요?
왜 그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나요?
왜 그때 나를 슬프게 했나요?
왜 그때 직장에서 짤리게 하셨나요?
그런 일을 물어보려고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심판석에서 따져 물으실 건가요?
여러분이 예수님을 만나면
예수님에게 내가 이런 대접을 받는 이유가 뭔지
반드시 입을 열게 만들겠다는 마음으로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 왜 나를 이렇게 부당하게 대했는지 이유를 들어야
하나님이 나를 하늘나라에 집어 넣을 수 있게
허락해 주겠다는 자세를 취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입니다.
그분 앞에 서면 내가 지금 얼마나 미친 짓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될 것이고,
여러분은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 그분을 경배해야 할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서 양손에 못이 박혀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여러분을 부당하게 대한 것이 있다고 느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오히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에 대해서
부당하게 주님을 대하고 있는 것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순종
(히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아 훗날 상속 재산으로 받게 될 곳으로 나가면서 순종하였고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 채 나갔으며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고 신뢰했고 그분과 동행한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하라고 말하는데로 그대로 행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가 길을 가면서도
자신이 제대로 가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목적지에 얼마나 가까이 왔는지도 모르고 갔습니다.
지름길로 가고 있는지 돌아가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히11:10) 이는 그가 기초들이 있는 한 도시를 바랐기 때문이라. 그것의 건축자와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시니라.
(히11:13) 이들은 다 믿음 안에서 죽었으며 약속하신 것들을 받지 못하였으되 멀리서 그것들을 보고 확신하며 끌어안았고 또 땅에서는 자기들이 나그네요 순례자라고 고백하였으니
아브라함은 그의 모든 삶을 살면서 무엇인가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곳이 어디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주님이 가라는 곳이 어디인지 모르지만
주님께서 가라면 그냥 가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죽으면서도 자신이 목적지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디론가 가라고 하신 말씀 만을 믿고 떠났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이상 하나님은 분명히 그분이 약속한 곳으로
자신을 인도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곳이 이땅에 없다면 이 땅을 떠나서라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곳에 있게 할 것이라는 믿음 안에서 죽은 것입니다.
저에게 성경이 있다는 것이 너무도 감사한 일입니다.
(요13:6) 그때에 그분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다가가시니 베드로가 그분께 말하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하매
(요13:7)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하시니
예수님과 베드로가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왜 내 발을 씻기십니까?
예수님은 너는 지금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물을 떠와서 발을 씻기려 하시자.
베드로가 궁금해서 왜 이런 일을 하시냐고 물었는데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해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네가 왜 이런 일을 하는지 모른다고만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사복음서를 읽어보면,
지금 교회에서 설교를 듣는 모습처럼,
예수님이 앞에서 계시고 제자들이 앞에 앉아서 듣고 있는 상황에서
예수님이 여러가지를 말씀하십니다.
내가 예루살렘에 갈 것이다.
나는 배신을 당할 것이다.
나는 십자가에 못박힐 것이다.
나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것이이다.
이런 이야기를 할때 마다, 제자들이 그의 말에 토를 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루살렘에 가시면 위험합니다.
십자가로 가면 안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는 일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앞에 예수님이 나타난다면
만약에 어느 일요일에 여러분이 계신 교회에 나타나셨다고 해보죠.
그러면 여러분들은 주님께 궁금했던 것을 물어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앞에 예수님이 오셔서
앞으로 3시간 동안 너희들을 질문을 받겠다.
3시간이 지나면 나는 다음 교회로 갈 것이다.
여러분이 3시간 동안 질문을 하고
주님이 답변을 해 주시면 여러분의 모든 궁금증이 해소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어떻게 주님이 하시는 일을 모두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불가능한 일 입니다.
주님이 설명해 주신다고해도 우리가 이해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열심히 공부해서 설교를 준비하거나 강의를 준비합니다.
여러분이 이제 잘 연구를 해서 이렇게 가르치면 사람들이 잘 이해 할 것이라고
확신을 가지고 가르칩니다.
여러분은 잘 가르쳤다고 생각했는데 몇사람이 강의가 끝나고
물어보면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길어야 80년 정도를 살게 됩니다.
이 세상의 시작이시고 마지막이신 분께서 하시는 일을
여러분에게 설명해 주고 여러분이 그것을 들으면
다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은 말이 안되는 일인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왜 그런 일을 하시는지 다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충분히 알아야 할 것들을 성경에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그저 성경을 읽어서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에게도 하지 않은 말씀을
당신에게만 해야할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 내 생각을 더하시면 안됩니다.
성경에서 내마음대로 말씀을 제거해서도 안됩니다.
주어진 성경을 가감없이 충실히 읽으시면 되는 것입니다.
(시119:105) (눈)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서
모든 것이 밝게 드러나길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 발에 등불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등불의 밝기가 얼마나 되는지 아시나요?
그냥 여러분이 한 두 걸음 걸어 갈 수 있을 정도의 거리만
밝힐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 달에 걸을 지점, 내년에 지나갈 자리는 비춰주지 못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끝나는 지점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저 다음 걸을을 위한 충분한 만큼만을 성경에 주셨습니다.
말씀은 등불입니다.
말씀으로 우리 삶의 모든 여정을 다 알수 있게 해주지 않으십니다.
말씀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내 디딜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여러분이 서울에서 부산까지 자동차를 몰고 가는데
자동차의 전조등이 서울서 부산까지 다 비춰주는 불빛이라면,
여러분은 눈이 멀어서 나머지 인생을 장님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동차의 해드라이트는 여러분이 운전해서 갈 수 있는 만큼만
비춰주는 것이 감사한 일인 것입니다.
(요6:2) 큰 무리가 그분을 따르니 이는 그분께서 병든 자들에게 행하신 기적들 즉 그분의 기적들을 그들이 보았기 때문이더라.
(요6:5) ¶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빵을 사서 이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요6:6) 그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친히 행하실 것을 아셨으므로 그를 시험하고자 하심이더라.
(요6:7) 빌립이 그분께 대답하되, 그들이 각각 조금씩 받을지라도 이백 데나리온 어치의 빵이 그들에게 충분치 아니하리이다, 하매
1데나리온은 하루 일당입니다.
이백 데나리온 이라고 하면
일주일에 5일씩 일해서 한달에 20 데나리온,
10달치 일당입니다. 굉장히 큰 돈입니다.
(요6:8) 그분의 제자들 중의 하나이며 시몬 베드로의 형제인 안드레가 그분께 아뢰되,
(요6:9) 여기 한 소년이 있는데 그가 보리 빵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이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되겠나이까? 하니
안드레가 지금 동원할 수 있는 식량은
빵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 뿐입니다.
제자들은 이걸로 뭘 어떻게 할 수 있는지 궁금한 상태입니다.
제자들은 혼란 스럽고 걱정이 되고 긴장도 되고 합니다.
그 이유는 제자들이 뭘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는지 알고 계십니다. (6절)
제자들은 무슨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아시는 것입니다.
먹을 것을 가져온 한 소년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소년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음식을 주님께 내어 놓은 것입니다.
이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이 소년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음식이 있었고 그것을 내어놓은 것입니다.
(요6:10)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그 사람들을 앉게 하라, 하시매 이제 그곳에 잔디가 많으므로 이에 그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쯤 되더라.
그리고 예수님이 모두 앉으라고 하자 모든 사람이 그냥 앉았습니다.
이들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무슨 일을 하시도록
요구하고 있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저 예수님이 하라고 하는데로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일이 있은 후 지금까지 아무도 이일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24:3) ¶ 그분께서 올리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은밀히 그분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에게 말씀해 주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들이 있으리이까? 또 주께서 오시는 때의 표적과 세상 끝의 표적이 무엇이리이까? 하니
만일 여러분이 지금 예수님께 질문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여러분도 이 질문을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성경에는 아무도 알 수 없다고 하셨는데, 혹시 지금은 알려 주실 수 없을까요?
그런 질문을 하는것은 그들은 정말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성경에 기록된 것과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마24:36) ¶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각은 결코 아무도 알지 못하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알지 못하고 오직 내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 시각은 나도 모른다.
정말 모른다.
내가 모른다고 하는데 왜 자꾸 물어보느냐?
내가 모른다고 했는데 너희는 왜 자꾸
"나는 언제 주님이 오시는시 안다"고 말하는 사람을 쫓아다니고
그런 책을 돈을 줘가면서 사고 있느냐?
내 말을 마음으로부터 진심으로 믿고 있는 것이 맞느냐?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고 했고,
이 땅에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으며 나도 알지못한다는 말을
너희는 정말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이냐?
모든 것이 잘 될때는 / 갈등과 문제가 생길때는
교회가 잘되고 교회 인원이 꽉차고 교회 모임도 잘되고 하면
할렐루야 외치고 무슨 일이든지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갈등이 생기고 폭풍이 일고 파도가 치면,
갑자기 우울해지고 모든 일이 끝날것 같고
이일이 언제 끝날지 하나님께 묻게 됩니다.
이 슬픔과 아픔이 언제나 끝나게 해주실지 묻게 됩니다.
문제가 끝나고 평안을 얻을 수 있는 방법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언제 이 일이 끝나고 평안을 얻을 수 있을지 알려주겠다.
지금 이 순간 네 안에 내가 있다는 것을 믿어라.
지금 이 순간 내가 주는 평안을 누려라.
지금이 그 믿음을 드러낼 때이다.
너에게 있는 그 믿음이 너에게 평안이 되어 줄 것이다.
바로 지금이다.
육개월 뒤에는 상황이 좋아 질것이라고 믿지 마라.
지금 이순간이 너에게 모든것이 풍요로운 순간이라고 믿어라!
육개월 뒤에 사람이 다시 차고 갈등이 봉합되는 그때 주님이 나에게
해 주실 일이 있을 것이라고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지금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것이 내가 해결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음이 필요한 순간
사실 우리가 아프지 않거나 문제가 없다면 믿음이 필요 없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늘어나서 앉을 자리가 없을때는 믿음이 필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행복하고 찬양하고 감사가 넘칠때는
믿음이 요구될 일이 없습니다.
물론 그때도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모든 일이 잘 되어 갈때에는
나에게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어려움이 언제 끝날지 모르고,
왜 일어나는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모를때
바로 그때가 믿음이 필요한 바로 그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일이 잘되서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고 감사한 일이 자꾸 생기고,
직장도 잘 되고, 수입도 좋아지고 할때는
우리가 진정한 믿음으로 살지 못합니다.
교회가 잘되고 돈을 많이 벌고 건강한 삶이 주어지고
모든 일이 잘 될때는 믿음이 있는 삶을 드러낼 기회가 없습니다.
주님이 모든 것을 잘 해주는것 같을때 우리가 갖고 있는 감사의 마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어디로 가야할지 몰랐을때,
하박국이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했을 때,
베드로가 예수님이 왕국을 세우실 줄 알았는데
매 맞고 십자가로 향하는 모습을 보았을때,
제자들이 재림때를 알고 싶어하는데
예수님이 그건 나도 모른다고 이야기 했을때,
이럴때 여러분은 주님을 믿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눅1:30) 그 천사가 그녀에게 이르되, 마리아야,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호의를 입었느니라.
(눅1:31) 보라, 네가 네 태에 수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리라.
(눅1:32) 그가 크게 되고 가장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에게 주시리니
(눅1:33) 그가 영원토록 야곱의 집을 통치하며 그의 왕국이 무궁하리라, 하니라.
마리아의 객관적 평가
로마 가톨릭은 마리아를 성경과는 다르게 과도하게 평가해서
가치를 높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대로 성경대로 믿는 교회는 마리아를 성경이 말하는 것과 다르게
과도하게 가치를 폄하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둘 다 올바른 것이 아닙니다.
왜그런지 말해보겠습니다.
마리아라는 여인의 입장에 한 번 서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신약성경이 없다고 해보죠.
그리고 여러분은 성경대로 가르치는 교회에서 성장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16세 17세 18세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집안일을 하던 어느날 천사가 찾아 옵니다.
여러분은 남자와 뽀뽀도 한 번 안해 본 관계입니다.
그런데 천사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네가 임신을 해서 아기를 낳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너에게 태어날 그 아이는 하나님이시고
그분이 네 몸을 통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나실 것이다.”
라고 말하신다면,
여러분은 "그러죠"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마리아가 방금 들은 이야기는 구약의 대언을 들은 것입니다.
신약을 성취하기 위한 대언을 들은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천사를 통해 직접 메시지를 받은 것이고,
왕좌에 앉으신 하나님으로부터 메신저를 통해서 직접듣고 있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그녀의 삶에 엄청나게 큰 개입이 일어나는 일입니다.
(눅1:34) 이에 마리아가 천사에게 이르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하매
"어찌"
가톨릭에 대한 반감으로 마리아의 이야기에 선입견을 버리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사는 모든 여자중에 한 여인을 선택해서
저 여인 하나는 내가 믿을만 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저 여인은 그녀를 통해 내 아들이 태어나게 하고
저 여인이 내 아들을 기르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인정한 것입니다.
감히 누가 이 여인에게 나쁜 말과 폄하하는 평가를 할 수 있을까요?
여인들 중에 하나님께서 이 여인 만큼 높임을 받은 여인이 있을 수 있을까요?
이 여인을 탐욕이 가득찬 여인도 아니고
클럽에 가서 춤을 추는 여인도 아니고
밖에서 술을 마시는 여인도 아니고,
이 남자 저남자 쫓아다니는 여자도 아닙니다.
노출이 심한 옷을 입으며
다른 남자의 시선을 탐하는 여인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택 기준
요즘 젊은 여자의 눈에는 시대에 뒤떨어지고
자신을 표현할 줄 모르고 답답하고 고리타분한 여인으로 여기겠지만,
하나님은 이 여인을 가장 높이 평가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무슨 옷을 입던 어떤 남자를 만나던 상관하지 말라고 하겠지만,
하나님은 여러분이 어떤 옷차림을 하는지에
상관하신다고 말씀하신 것을 잊지마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넘치는 축복을 받고 싶으신가요?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시기 바랍니다.
진리의 말씀에서 튕겨져 나가서 다른 곳으로 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리아는 천사의 입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여인입니다.
천사가 마라아의 집에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천사라고 다 좋은 천사가 아닙니다.
마리아가 어떻게 자신 앞에 나타난 천사가
진짜 주의 천사인지 알았는지 알 수 없지만,
진짜 주의 천사가 그녀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여러분은 저와 같은 사람이 말하는 것 보다
천사가 나타나서 말하는 것을 더 잘 믿게 될 것입니다.
천사가 나타나면 잘못된 복음일지라도 쉽게 믿게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서 천사에 대해서도 경고를 해 주고 계십니다.
(갈1: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선포한 복음 외에 어떤 다른 복음을 너희에게 선포하면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천사가 전한다는 것은 그만큼 무게감이 있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다고 믿음을 멈추지 않는 마리아
천사가 마리아에게 아기를 잉태하게 될 것을 말했더니,
마라아가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 날 수 있냐고 천사에게 되묻습니다.
마리아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마리아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이 마리아가 하나님을 믿는 것을 멈추게하지 못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이 그 일을 어떻게 해내실지 알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그녀가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거듭남을 설명할 수 있나요?
여러분은 거듭나신적이 있으십니까?
거듭나신 분은 아멘이라고 한 번 해 보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어떻게 거듭났는지 설명할 수 있는 분이 계신가요?
여러분이 저에게 성경구절을 찾아서 읽어주실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설명해 주실 수 있는 분은 안계실 것입니다.
관련 구절로 교리를 말해 줄 수 있는 분은 계시겠지만
거듭나는 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지
그 현상과 과정을 설명하실 수 있는 분은 없으실 겁니다.
(요3:3) 예수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을 볼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요3:4) 니고데모가 그분께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태어날 수 있나이까? 그가 자기 어머니 태에 두 번째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 있나이까? 하매
(요3:5)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에서 나고 성령에게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3:6)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에게서 난 것은 영이니
(요3:7) 내가 네게 이르기를, 너희가 반드시 다시 태어나야 하리라, 한 것에 놀라지 말라.
(요3:8) 바람이 마음대로 불매 네가 그것의 소리는 들어도 그것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에게서 난 사람도 다 이러하니라, 하시니라.
(요3:9) 니고데모가 그분께 응답하여 이르되, 어찌 이런 것들이 있을 수 있나이까? 하매
니고데모가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는지
이해가 안간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이해할 필요가 없다.
어떻게 가능한지를 묻지 말고
내가 말하는대로 다시 태어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흥미롭지 않으신가요?
거듭남의 신비는 지금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더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나 해드리겠습니다.
이 말씀은 신약에서 가장 핵심적인 구절입니다.
구원을 말하는 가장 중요한 구절이고 교리입니다.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이 구원을 받게되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거의 이천년 전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이 구절의 말씀은 지금까지도 어느 누구도
신학자이든, 종교학자이든, 유명 목사든지, 신학교 교수든지
그 원리가 어떻게 되는 것인지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학자나 전문가나 목사가 있지 않습니다.
지금도 우리들의 반응은 "어찌 이런 것들이 있을 수 있나이까?”입니다.
사람이 나이를 먹고도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죄인이 성령으로 태어난다는 것일까요?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은 사람들의 죄를
어떻게 2천년 전에 흘린 피로 씻어서
그들의 죄가 없어지게 할 수 있는 걸까요?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 궁금증을 해결하려고 시간을 보내다가는
분명히 너는 지옥에서 눈을 뜨게 될 것이다.
궁금해하지 말고 너에게 있는 믿음을 실행하거라.
우리는 결고 그 이유를 알수 없을 것입니다.
그 이유들을 찾는 방식으로는 결코 믿음으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질문에 어는 누구도 논리적인 답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질문들에 답을 구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믿음으로 살 수 없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이고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히11:1) 이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우리는 하나님께서 증거를 보여주시면 믿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너희가 믿어라! 그러면
그 믿음이 너에게 증거들을 제공해 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중에 어느 누구도 거듭난다는 것이 어떻게 되는지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거듭나야한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어서 거듭나게 되면
그때 비로는 사람들을 향해서 “나는 거듭났다”고 간증할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리고 내가 거듭났음을 다른 다름들에게 증언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아직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증거를 보여주면 거듭나겠다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평생 거듭날 수 없을 것입니다.
(딤후1:12) 이런 까닭에 나도 이 일들로 고난을 당하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나는 내가 믿어 온 분을 알며 또 내가 그 날을 대비하여 그분께 맡긴 것을 그분께서 능히 지키실 줄 확신하노라.
바울이 지금 믿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장례식장에 와있는 사람들, 병원에 누워있는 사람들,
해고통지를 받은 사람들, 자녀들의 문제로 울고 있는 사람들,
결혼생활에 문제가 생긴 사람들, 미래의 확신이 사라져 혼란스러운 사람들,
교회에 대한 근심,
지금 믿음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시나요?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누가 그러는지, 왜 그러는지, 어떻게 이런일이 있는지,
무엇을 위한 것인지, 바울은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알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나를 지켜 주실 분,
바울에게는 자신을 능히 지켜주실 한 분을 알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한가지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 한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무슨일을 하시는지 어떻게 그 일을 하시는지는 모르지만
그분이 모든 일을 잘하시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지만, 주님은 거짓말쟁이가 아니시고,
반드시 다시 오실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어떻게 나를 이 어려움에서 건지실지 모르지만,
그분은 어둠의 골짜기에서 조차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시23:4) 참으로 내가 사망의 그늘진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악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시며 주의 막대기와 주의 지팡이가 나를 위로하시나이다.
여러분들은 지금 믿음을 가지고 계십니까?
지금 가져야 하는 믿음은 여러분이 찾고자 하는 해답들 가운데
두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이 지금 두어야 하는 믿음은 모든 것에 답이 되시는 그분 안에
두어야 합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을 붙들게 되면 그분 안에 있는 모든 해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다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왜 누구는 죽고 누구는 사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왜 어느집은 잘되고 어느 집은 어려운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열심히 일하는데도 하는일 마다 안되고,
어떤사람은 매일 노는거 같은데 잘되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집은 고액과외를 시켜도 잘 안되고
어떤 집은 학원도 제대로 보내지 못하는데 좋은 대학에 가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누구를 믿어야 하는지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확신을 놓아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구원해 주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언젠가 이 땅에 우리가 삶을 마치면
우리는 그분의 임재 앞에 눈을 뜨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이 아무것도 모르겠다면, 한 분 주님만 아시면 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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