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믿음이 우리의 본이 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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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아브라함의 믿음이 우리의 본이 되는 이유
본문 : 롬 4:2-3
(롬4: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게 되었으면 그 일에 대하여 자랑할 것이 그에게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롬4:3) 성경 기록이 무어라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하느니라.
바울은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게 될 수 없는 사람이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은것 때문에 의롭게 여겨졌다는 것을 말하면서,
우리에게 성경 기록을 통해서 이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롬4:1) 그러면 육체에 관한 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발견했다고 우리가 말하리요?
바울은 자신의 조상을 따라 올라가면 그 끝에 아브라함이 나온다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무엇을 발견했다”
아브라함이 무엇을 무엇을 발견 했을까요?
예수님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의 행위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요8:39)
그리고 말씀하시길 아브라함은 나의 날 보기를 기뻐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요8:56)
(롬4: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게 되었으면 그 일에 대하여 자랑할 것이 그에게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게 되었으면”
아브라함은 행위로 의롭게 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설령 여러분이 아브라함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았다면,
여러분이 아브라함에게는 자랑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나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구원받은 여러분은 아직 구원받지 못한 그 어느 누구보다
더 나은 삶을 살고 계셔야 합니다.
이 부분에 오해가 없어야 합니다.
“저는 구원받았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을게 없는 사람입니다.”
라고 말하시면 여러분이 뭔가 주님이 원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나는 구원받았지만, 제가 구원받은 것은
제가 다른 누구 보다 구원받을 자격이 더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마땅히 다른 누구보다 나은 삶을 살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성령님이 계시고, 성경이 있고, 하나님의 구원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로 듣고 있고, 성도간에 교제를 하며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영광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마땅히 더 나은 삶을 살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그것이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영광을 나타내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직장에서 최고의 사원이라고 평가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훌륭한 아내로 주부로 평가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저 젊은 학생은 우리 학교에서 성격이나 행동이나 태도나
모든 면에서 가장 뛰어난 학생이라는 평가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실은 사람들 앞에서 영광(자랑)이 되는 본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른 세상 사람들보다
우리의 삶을 더 잘 관리하고 통제하며 살고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우리는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기준을 다른 사람이 아닌 하나님에게로 가져간다면,
당연히 그분의 완전한 거룩하심과 의로우심 앞에서 입을 닫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롬4:3) 성경 기록이 무어라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하느니라.
아브라함에게는 의(義)가 없었고,
하나님은 그에게 의(義)를 주시지도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스스로 의롭게 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의롭게 만들지도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의의 전가
아브라함이라는 사람 자체로는 결코 의롭게 될 수도, 의로워 질 수도 없는데,
그가 한 한 가지 행동때문에 의롭게 여겨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한 것은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창11:1)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창11:2) 그들이 동쪽에서부터 이동하다가 시날 땅에 있는 평야를 만나 거기 거하니라.
(창11:3)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는 돌 대신 벽돌을 취하고 회반죽 대신 진흙을 취하며
(창11:4) 또 이르되, 자, 우리가 우리를 위하여 도시와 탑을 세우고 탑의 꼭대기를 하늘에까지 닿게 하며 우리가 우리를 위하여 이름을 내고 이로써 온 지면에 널리 흩어짐을 면하자, 하더라.
이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신들이 흩어지는 것에 대해서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한 자리에서 함께 살고 싶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도시에 탑을 세우기로 결정합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하늘에 닿고자 함
그런데 이들이 쌓고자 하는 이 탑의 방향은 하나님에게 닿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까지 닿게 짓고자 합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지 아십니까?
서로 다른 믿음으로 인해서 서로 전쟁을 하고 다투고 싸우고 있는데,
이들은 그냥 하나님의 문제를 옆으로 빼놓고,
그냥 우리들끼리 행복할 수 있는 큰 가족과 같은 세상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놓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이들의 이런 상상 한 가운데 개입하시는 분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창11:5) 주께서 사람들의 자녀들이 세우는 도시와 탑을 보려고 내려오시니라.
(창11:6) 주께서 이르시되, 보라, 백성이 하나요, 또 그들이 다 한 언어를 가지고 있으므로 이 일을 하기 시작하니 이제 그들이 하려고 상상한 어떤 일도 막지 못하리라.
사람들에게는 상상하면 그 상상을 성취해 내는 힘과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개입하고 계시겠다는 것입니다.
(창11: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창11:8) 이처럼 주께서 거기서부터 그들을 온 지면에 널리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 세우기를 그쳤더라.
(창11:9) 그러므로 그 도시의 이름을 바벨이라 하였으니 이는 주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기 때문이라. 주께서 거기서부터 그들을 온 지면에 널리 흩으셨더라.
결국 이들은 흩어져서 또 다른 도시들을 건설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흩어진 민족들 중에서 한 민족에게로 이야기를 좁혀 가십니다.
(창12:1) 그런데 전에 주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 집에서 나와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창12:2) 내가 너로부터 큰 민족을 만들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크게 하리니 네가 복이 되리라.
(창12:5) 아브람이 자기 아내 사래와 자기 조카 롯과 하란에서 그들이 모은 그들의 모든 소유와 또 그들이 얻은 혼들을 데리고 가니라. 그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려고 나아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니라.
12장을 기준으로
11장까지는 모든 인류 전체를 보고 계시다가 12장부터 십자가 사건까지는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의 가족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다루시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떠나라고 하면 떠났고,
하나님께서 어느 방향으로 가라고 하면, 그 방향으로 움직였고,
네 친족과 아버지를 떠나라고 하면 그렇게 합니다.
이런 모습에 대해서 히브리서 11장에서 그가 믿음으로 행했다고 말합니다.
아브람이 이집트로 향함
(창12:10) ¶ 그 땅에 기근이 있었으므로 아브람이 이집트로 내려가 거기 머물려 하였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기 때문이더라.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가나안에 머물라고 했는데 이집트로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가나안에 가서 그곳에 머물라고만 하셨습니다.
별문제가 없을때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잘 하다가
어느 순간 문제가 생기면 이유과 근거를 만들어 말씀에서 돌아섭니다.
지금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어려운 상황이 전개되고 있으니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이 더 옳은 판단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창12:11) 그가 이집트에 가까이 이르러 들어가려 할 때에 자기 아내 사래에게 이르되, 이제 보라, 당신은 보기에 아름다운 여인임을 내가 아노라.
(창12:12) 그러므로 이집트 사람들이 당신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 여인은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되 당신은 살려 두리니
아브람은 이집트에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사실 이집트에 가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아내가 예쁘기 때문에
이집트 사람에 의해서 자신이 살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가 가나안에 머물러 있었다면 걱정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일어날 위험을 상상하면서도 스스로 그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창12:13) 원하건대 당신은 내 누이라고 말하라. 그리하면 내가 당신으로 인하여 잘되고 내 혼이 당신으로 인하여 살리라, 하니라.
사실 이런 남자는 절대로 결혼해서는 안되는 사람입니다.
안가도 되는 곳을 가면서
자신이 죽지 않기 위해서 아내를 다른 남자에게 넘겨주는 일까지
미리 계획하는 남자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금 아브람이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계시나요?
자신의 아내를 여동생이라는 명목으로 다른 남자에게 넘겨줌으로 해서
아무 죄책감 없이 편안하고 쉽게
자신의 아내를 추행 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천박하기가 이루 말할 수없는 생각이 아닐까요?
(창12:14) ¶ 아브람이 이집트로 들어갔을 때에 이집트 사람들이 그 여인을 보고 그녀가 심히 아름다운 것을 보았으며
(창12:15) 파라오의 통치자들도 그녀를 보고 파라오 앞에서 그녀를 칭찬하니라. 사람들이 그 여인을 파라오의 집으로 데려가매
(창12:16) 그가 그녀로 인하여 아브람을 선대하므로 그가 양과 소와 수나귀와 남종과 여종과 암나귀와 낙타들을 얻었더라.
(창12:17) 주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로 인하여 파라오와 그의 집에 큰 재앙들로 재앙을 내리시매
(창12:18) 파라오가 아브람을 불러 이르되, 네가 내게 행한 이 일이 도대체 무엇이냐? 네가 어찌하여 그녀를 네 아내라고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느냐?
(창12:19) 네가 어찌하여, 그녀는 내 누이라, 하였느냐? 내가 그녀를 취해 내 아내로 삼을 뻔하였도다. 그런즉 이제 네 아내를 보고 그녀를 데리고 네 길로 가라, 하며
(창12:20) 파라오가 자기 사람들에게 그에 관하여 명령을 내리니 그들이 그와 그의 아내와 그의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이 다음에 일어날 일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집에 돌아온 그날
우선 오늘 당장 사래가 돌아온 그날 집안 분위가는 어떨까요?
자신을 다른 남자 품에 팔아 넘기다시피한 남편에게 좋은 마음이 들까요?
자신을 아내가 아니라 여동생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목숨을 구걸한 남자에게
남편이라고 부르고 싶을까요?
먼 미래를 한 번 생각해 볼까요?
모세가 이집트 왕 파라오와 담판을 짓는 일이 생깁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거짓말하는 분이 아니시라고 말을 하면,
파라오가 동의 할까요?
이집트 사람들은 아브라함에 대한 첫 인상을
자신의 아내를 계획적으로 팔아넘긴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아내를 넘기고 낙타와 여러 재물을 얻어간 사람으로 여길 것입니다.
아직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혹시 갈보리 십자가 사건 이전에는
행위로 구원받았다고 주장하실 수 있는 분이 계시나요?
아브라함은 십자가 사건 이전에 구원받은 사례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는 절대로 행위로 구원받은 사람의 본보기로 사용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주의 말씀이 임하여
(창15:1) 이 일들 뒤에 주의 말씀이 환상 속에서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네가 받을 지극히 큰 보상이니라, 하시니
우리는 성경대로 믿는 사람입니다.
롬4:3 에서 “성경 기록이 무어라 말하느냐?”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창15:1에서 주의 말씀이 아브라함에게 임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지금 하는 이야기는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창15:1) 이 일들 뒤에 주의 말씀이 환상 속에서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네가 받을 지극히 큰 보상이니라, 하시니
(창15:2) 아브람이 이르되, 주 하나님이여, 무엇을 내게 주려고 하시나이까? 나는 아이가 없이 지내오며 내 집의 청지기는 다마스쿠스에서 온 이 엘리에셀이니이다, 하고
“당신께서 저에게, 그리고 저의 민족에 대해서 약속을 주시는데,
나에게는 아들도 없고 나라도 없고 민족을 이룰 백성도 없습니다.”
(창15:3) 또 아브람이 이르되, 보소서,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은즉, 보소서, 내 집에서 태어난 자가 내 상속자이니이다, 하매
“나에게는 상속해줄 아들이 없으니 내 집의 종에게 주겠습니다.”
(창15:4) 보라, 주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이 사람은 네 상속자가 아니요, 오직 네 배 속에서 나올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더라.
(창15:5) 그분께서 그를 데리고 밖으로 나아가 이르시되, 이제 하늘을 쳐다보고 별들을 셀 수 있거든 세어 보라, 하시며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씨가 그와 같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별보다 많은 자손과 상속자를 약속해 주십니다.
이 말씀은 몇 십년간 폐경이 된 아내와 자식 하나 없이 살아온 남자에게
정말 믿을 수 없는 충격적인 말씀인 것입니다.
(창15:6) 아브람이 주를 믿으니 그분께서 그것을 그에게 의로 여기시고
여기에 지금 로마서 4장에서 제시한 성경말씀을 정확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지금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너를 통해 이룰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겠느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말만 듣고 평가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까지 들여다 보시고 그 믿음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순간 그 상황을 기록하게 하신 것입니다.
“지금 이순간 부터 내가 그의 믿음을 근거해서 그를 의롭다고 여기겠다.”
지금까지 그가 행한 모든 악행에도 불구하고 그를 의롭게 여기셨고,
그것을 기록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은 사람의 생각
(창16:1) 그런데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그에게 아이를 낳지 못하더라. 그녀에게 한 여종이 있었는데 그녀는 이집트 사람이요, 그녀의 이름은 하갈이더라.
(창16:2)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이제 보소서, 주께서 나를 막으사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하녀에게 들어가소서. 내가 혹시 그녀로 말미암아 아이들을 얻을까 하나이다,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니라.
지금 읽은 두 구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라거나 “주께서 말씀하시돼"라고 되어 있거나,
“주께서 사래에게 말씀하시길” 이라는 표현을 찾을 수 있나요?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서 사람의 도움이 필요로 하거나
사람에게 죄를 짓게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창16:3)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자기 하녀 이집트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자기 남편 아브람에게 주어 그의 아내가 되게 한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한 지 십 년이 지난 뒤였더라.
아브람에게는 이미 아내가 있기때문에 또 다른 아내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은 후 십년이 지나도 여전히 자식이 없자,
사래는 뭔가 다른 방법을 사용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믿음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롬10:17)
이들은 그저 자신들의 내면의 소리에 근거해서, 자신의 수준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엉망으로 만들고, 그분의 계획에 찬물을 끼얹는 것입니다.
(창16:4) ¶ 그가 하갈에게 들어가니 그녀가 수태하니라. 그녀가 자기가 수태한 것을 알고 자기 눈으로 자기 여주인을 멸시하므로
(창16:5)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당하는 부당한 일을 당신이 당하기 원하나이다. 내가 내 하녀를 주어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녀가 자기가 수태한 것을 알고 자기 눈으로 나를 멸시하니 나와 당신 사이에서 주께서 판단하시리이다, 하니라.
이 구절들에서 우리 모두가 안고 있는 문제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대로 믿고 기다리는 일이
우리 생각처럼 편하지도 쉽지도 않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상상력을 동원해서
뭔가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서 한 일이니,
방법이 조금 잘못되도 하나님이 용서해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스스로를 혼란 속으로 집어 넣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하갈도 이 일로 인해서 어려움을 겪게 되고,
사래도 이 일로 인해서 불편한 일을 겪게 되고,
아브라함도 이 일로 인해서 두 연인으로부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서로 남 탓을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의 편에서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지 않고
자신의 판단과 기준으로 일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누군가 내 편이 되어주기를 바라면서 살아갈까요?
우리는 왜 하나님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삶을 힘들게 망치며 살아갈까요?
성경에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분명히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분의 기대만큼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잘못된 방법을 취합니다.
우리는 매일 이런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 그런 일을 하면 안된다고 말해주면,
당신이 내가 처한 상황을 잘 몰라서 그렇다고 반박을 합니다.
지금 아브라함의 상황을 한 번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에게 아들이 생길거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10년이 지나도록 사래에게 자녀가 생기질 않습니다.
이런 상황이 오자 이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기다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래는 더 좋은 생각이라는 것을 하게 됩니다.
여종을 아내라고 부르면 아브라함의 아내를 통해서 자녀를 얻은 것이니
괜찮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말고 말씀대로 하자고 하면,
당신이 나의 입장과 상태를 잘 몰라서 그렇다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일에는
여러분의 입장과 상태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만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수의 의견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신학대학 교수 70%가 괜찮다고 말하거나, 우리 교회 성도들
열명 중 9명이 좋은 의견이라고 말한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사래도 지금의 문제가 있기 전까지는 자신의 생각이 좋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막상 문제가 생기니까 남편 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아내가 다른 젊은 여자를 품에 넘겨주었을때는
아마 하나님이 이런 좋은 선물을 주셨다고 생각하고,
신나게 그 길로 달려갔을 것입니다.
(창16:6) 그러나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보라, 당신의 하녀는 당신의 손 안에 있으니 당신이 기뻐하는 대로 그녀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그녀를 학대하니 하갈이 그녀의 얼굴을 피해 도망하니라.
이 여인을 시작으로 아랍사람들이 생겨났고, 이슬람 종교가 생겨났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많은 전쟁과 죽음이 생기게 됩니다.
의롭다 여겨진 후에도 여전히 죄를 범하는 아브라함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람은 자신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창세기 15장에서는 그가 하나님을 믿고 의롭다고 여김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6장에서 이들의 모습은 여전히 엉망인 상태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문제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와,
구원은 보장이 되는지에 대해서 논쟁하기에 앞서서
우리가 명확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로마서 4장에서 신약 성도들의 구원의 예시로 등장한 아브라함은
구원받기 이전에도 의롭지 못한 사람이었고
구원을 받고 난 후에도 의롭지 못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삶 어느 순간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제시한 말씀에
믿음을 두었다는 것 이외에 그 어떤 다른 이유나 조건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에게 좋은 남편의 본이 될 수 없습니다.
그의 삶은 가정 안에서나 밖에서나 우리에게 본이 되는 삶의 모습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그는 우리에게 선한 삶의 모델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그는 한가지 일에서만 우리의 본이 되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이 제시할 수 있는 모델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그 방법은 우리가 삶의 어느 순간 주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그 순간 우리에게 하늘나라에 들어가는데 필요한 온전한 의를
전가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고나서 지옥이 아닌 하늘나라에 들어 갈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은 바로 이것 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고 의롭다고 여겨지는 것 외에
그의 매일의 삶은 우리에게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도 마땅히 훌륭한 삶을 살았어야 하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의 눈앞에 있는 형제가 오늘은 구원받은 형제 같아 보이지만,
내일은 그렇게 보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여러분의 눈 앞에서는 지체가 구원받은 형제 자매처럼 행동하지만,
여러분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행위로 구원받지 않는 것은 다행입니다.
신실하지 못한 우리의 모습을 인정하게 된다면,
우리가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더 좋은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주님을 믿었던 날이 있었는지 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구원자로 받아들인 날이 있었는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반복되는 잘못
(창20:1) 아브라함이 거기서 남쪽 지방으로 이동하여 가데스와 수르 사이에 거하며 그랄에 머물렀더라.
(창20:2)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 사라를 가리켜 이르기를, 그녀는 내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가니라.
한 번 사고를 치고 수십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바보같은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구원을 받고 시간이 지나면,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바꿔주신다고 말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아브라함의 모습을 통해서도
구원을 받고 몇 십년이 지나도
여전히 과거의 죄를 짓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창20:3) 그러나 밤에 하나님께서 꿈에 아비멜렉에게 가셔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가 데려온 여인으로 인해 너는 죽은 자가 되었나니 그 여인은 한 남자의 아내이니라, 하시니라.
(창20:4) 그러나 아비멜렉이 그녀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였으므로 그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 민족도 죽이려 하시나이까?
아비멜렉은 이교도 사람이고, 그는 무할례자 입니다.
아브라함은 또 다른 이방 민족에게 존경받을 수 없는 행동을 합니다.
여러분이 구원받았다고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창20:5) 그가 내게 이르기를, 그녀는 내 누이라,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또한 그녀도 스스로 이르기를,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순전한 마음과 무죄한 손으로 이 일을 행하였나이다, 하매
(창20:6) 하나님께서 꿈에 그에게 이르시되, 참으로 네가 순전한 마음으로 이 일을 행한 줄을 내가 아노라. 나 역시 너를 막아 내게 죄를 짓지 아니하게 하였나니 이런 까닭에 네가 그녀에게 손대는 것을 내가 허락하지 아니하였노라.
하나님께서 순전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죄에서 멀어지도록
돕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20:7) 그러므로 이제 그 남자에게 그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대언자이므로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만일 네가 그녀를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모든 것이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방인에게 아브라함이 나의 대언자라고 말씀하실때,
마음이 어떠셨을까요?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함을 얻기 전에도 후에도
엉망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아브라함을
내 사람이 아니라고 부인하지 못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은 여러분이 구원받고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하나님을 부끄럽게 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해도
하나님은 거짓말 하실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에
절대로 여러분을 모른다고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신약 구원의 본으로 제시된다는 것은
우리가 무언가를 잘못했다고 해서
구원을 놓치거나 잃어버릴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창20:8) 그러므로 아비멜렉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 자기의 모든 종을 불러 그들의 귀에 이 모든 일을 말하매 그 사람들이 심히 두려워하더라.
(창20:9) 그때에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에게 무슨 일을 행하였느냐? 내가 무슨 일로 네게 죄를 지었기에 네가 나와 내 왕국 위에 큰 죄를 가져왔느냐? 네가 마땅히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내게 행하였도다, 하고
여러분이 구원을 받고도
세상 사람들에게 이런 평가를 받아야 한다면 부끄러운일 아닐까요?
세상 사람들도 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일을 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꾸지람을 들어야 한다는 것을 부끄러운 일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중에는 교회 사람들과는
사업을 진행하기를 꺼리는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세상사람들이 짜증날 정도로 경우에 없는 일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돈을 지불하지 않고, 약속을 잘 지키지도 않고,
자신의 말을 존중하도록 만들지도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다니는 사람에게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네가 마땅히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내게 행하였도다”
세상 사람들이 여러분이 전해주는 전도지를 받지 않고
바닥에 던져 버리는 것이 그들이 밑도 끝도 없이
예수님을 미워해서가 아닙니다.
아브라함 처럼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해서는 안되는 일들을 하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구원받은 사람들보다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더 많은 이해를 갖고 있다는 것이 슬픈 일 아닐까요?
세상 사람들이 교회다니는 사람들이 술집에 앉아서 술을 마시고
아내가 아닌 여자와 노닥거리고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있다면,
그들이 구원을 받아야 할 필요를 느낄 수 있을까요?
아비멜렉은 의로움에 대해서
아브라함보다 더 높은 수준의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확실히 검증할 수 있는 것은
아브라함은 자신의 행위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는것입니다.
(창20:10) 아비멜렉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가 무엇을 보았기에 이 일을 하였느냐? 하니
(창20:11)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 까닭은 분명히 이곳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므로 내 아내로 인해 그들이 나를 죽일 줄로 내가 생각하였기 때문이라.
우리의 문제가 또 다시 드러나고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은 아바멜렉이 아니라
아브라함 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유죄로 만들고 싶은 아브라함
(창20:12) 또 그녀는 참으로 내 누이니라. 그녀는 내 어머니의 딸은 아니나 내 아버지의 딸로서 내 아내가 되었노라.
(창20:13)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내 아버지 집을 떠나 떠돌아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그녀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가게 될 모든 곳에서 나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당신이 내게 베풀 친절이라, 하였노라.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내 아버지 집을 떠나 떠돌아다니게 하실 때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유죄로 만들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결혼하고 난 뒤에 계속해서 아내에게 이런 일을 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고 어떻게
그를 의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사실 그래서 하나님은 한번도 아브라함이 의롭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나를 믿으면 내가 그를 의롭다고 여겨주겠다고 만 하셨습니다.
여러분도 정직하게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면, 구원받기 전이나 후에나
성경말씀과 일치하는 삶을 살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갖지 못한 의로움을 인정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완전하게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방법 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은 여러분에게 자신을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자신을 신뢰하고 믿으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것을 취할 것입니까?
여러분을 곧바로 지옥으로 떨어지게 만드는 세상의 철학을 선택하실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죄로인해 기록대로 죽으셨고, 묻히셨다가
사흘 후에 성경기록대로 다시 일어나신
그분을 믿고 구원을 받을 것인지, 결단을 내리셔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로마서에서 아브라함을 우리 구원의 예시로
선택한 이유를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스스로의 노력과 수고로 의로움을 성취하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구원받을 자격이 전혀없는 우리와 같은 죄인일 뿐입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소망이 주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이 이루어 놓은 구원의 길을
믿음으로 붙잡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공로로 의롭게 되는 길 이외에는 아무런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