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빛을 비추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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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유상섭. 사도행전 II. 생명의 말씀사
서론
바울과 실라는 복음을 전해야만 했습니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나서 이 진실을 땅 끝까지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그가 주님께 받은 소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어떤 박해가 올지라도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아내는 것이 그에게 가장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사명을 끝까지 지킴으로써 고난 가운데에 있을지라도 있는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여 예수의 빛을 비추어 주었습니다.
그들에게 고난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상황은 면밀히 살펴보면, 아주 최악인 상황입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복음이 비로마주의라는 이유 하나로 고소를 당했습니다. 그래서 심하게 매질을 당했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그들에게 쉼은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일반 상식과는 다르게 성경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그들에게 고난은 중요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16장)
25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그들에게 고난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복음 전하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는 것이죠.
그 결과로 죄수들이 그 기도 소리와 찬송의 소리에 흠뻑 빠져들게 됩니다.
다시 본문을 읽어보겠습니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16장)
25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은 듣다. 라는 동사입니다.
헬라어로 익히 사용하는 듣다의 동사는 보편적으로 ‘아쿠오 ἀκούω’를 사용합니다.(성경에서 430번 사용)
그러나 이 본문에서는 보편적인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에파크로아오마이 ἐπακροάομαι’라는 동사를 사용합니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단 한 번 사용되어지는 단어인데요. 이 의미는 그 소리에 취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고통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도와 찬송을 택하니, 죄수들에게 큰 감동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예수의 빛이 비추어진 것이죠.
그런데 그 상황 가운데 갑작스레 큰 지진이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는 마치 사도행전-4장-31절과 같아요. 두 본문 함께 읽어볼까요? 먼저 사도행전-4장-31절이에요.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4장)
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σαλεύω)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이번엔 16장-26절입니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16장)
26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σαλεύω)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여기서 나오는 진동과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였다는 의미는 같은 단어입니다. 즉, 갑자기 나타난 지진의 소동은 갑작스런 천재지변이 아니라, 기도하는 장소에서 하나님의 주도로 일어난 역사라는 겁니다.
그 가운데 일어난 상황은 더 대단합니다. 일반적으로 옥중 문이 열리고, 죄수들을 옥죄던 사슬이 풀려났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자연스레 연상되는 것은 ‘탈옥’입니다. 그러나 일반 상식을 벗어나 아무도 탈옥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간수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해서 자결을 선택하죠. 그가 자결을 선택한 이유는 로마의 법 때문이었어요. 간수가 죄수들을 관리하지 못할 경우에 그들의 형벌을 대신 받아야 하는 법이 있어서, 이에 대하여 심문 받고 죽느니 자결하는 것은 합리적인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습을 발견한 바울은 간수를 다급히 불러 만류하였고, 이 간수는 두려움 마음을 갖고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게 됩니다.
그리고 묻죠. 어떻게 하면 구원 받겠냐고.
간수가 물었던 구원은 복음서에서 나온 율법사와 부자 청년이 영생에 대하여 물어본 질문과 유사합니다. 또한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에게 진리에 대해서 들었던 유대인들이 물어본 것과 유사합니다. ‘그러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 물어보았죠. 이 예시 질문들의 공통점은 구원에 관한 것이고, 일반적인 구원에 대한 질문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에서 선생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부를 때 사용하는 퀴리오스라는 단어입니다. 즉, 이 질문은 ’신적인 대상에게 묻는 구원’에 관한 것입니다. 그에게 바울과 실라의 모습은 정말 대단히 느껴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라는 이 호칭은 하나님께서 진동을 일으키시지 않았다면 간수의 입에서 죄인을 향하여 결코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즉, 고난보다 복음 전함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들의 상황 가운데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간수의 마음을 연 것이죠.
고난 중에도 주님의 사명을 다 하고 있을 때, 우리가 할 수 없는 일들을 하나님께서 모두 감당하십니다.
간수가 죄수의 말을 경청할까요? 혹은 간수가 죄수에게 주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경우가 얼마나 있을까요?
간수는 하나님이 일으키신 역사 앞에서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렸고,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밤, 그 시각에 즉시 바울과 실라의 아픈 몸을 치료해주고, 온 집안이 주를 영접하게 됩니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16장)
33 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씻어 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34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간수가 죄인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오는 것과 죄인을 치료하고 죄인이 말한 복음을 듣고 영접하는 일은 참으로도 이례적인 일입니다. 처음에 그는 기도와 찬송을 부르는 상황에 잠든 자였어요. 그러나 천재지변을 겪고 난 후 바울과 실라, 그리고 그들이 전하는 복음이 죄목이 되지 않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이 상황에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간수에게 있어서 바울과 실라는 그저 죄인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개입으로 오해가 풀리고, 한 가정을 구원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고난 앞에서도 우리는 예수의 빛을 비추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 받기를 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세상이 예수 이름을 믿는 자를 미워할 것이라 말씀하셨어요.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 주며 임금들과 집권자들 앞에 끌어 가려니와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이렇게 말씀하셨지만, 여러분.

18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

19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고요. 그 예수의 빛을 또한 전하라, 비추라 말씀하셨습니다.
당연히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함이신데, 고난이 싫다고 피하고, 자기중심적인 선택을 할 때에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위해 선택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에 새겼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이나 성경의 때나 인간의 본질은 똑같습니다.
성경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은 자기중심적인 자를 미워하십니다.
1 세상을 창조했던 그 시기에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보다 자신의 욕구에 더 충실 했기 때문이에요.
2 아담과 하와가 낳은 가인과 아벨 형제 이야기에서도 가인이 아벨을 시기하여 사랑하기보다 살인을 택합니다.
3 사울 왕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순종을 하지 않고, 자신을 위해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을 질투하여 죽이려 했어요.
4 하물며 다윗 왕도 우리아의 아내였던 밧세바를 흠모하여 밧세바를 간음하고 우리아를 은밀하게 죽도록 만듭니다.
5 (신약)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능력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존경하지 않았고, 자신들의 권위를 빼앗길까봐 살인을 계획합니다.
6 예수님에게 찾아왔던 부자 청년은 구원을 받기 위하여 묻자, 예수님의 답변에 실족하여 떠납니다.
지금이나 오래 전이나 인간의 욕구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무슨 행동을 하던 가리지 않는 것을 봅니다. 즉, 이 세대나 전 세대나 인간의 본질은 다르지 않다는 겁니다.
성경이 말하는 말씀이 우리와 어떤 연관이 있는가를 질문할 수 있으나, 성경에서는 분명히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흐름을 타고 있는 것을 조명해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어떤 시대에서 살아가던지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세대를 본 받지 않고 오직 주님을 따름으로 분별되어 살아가라 말씀하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바울과 실라처럼 고난 중에도 예수의 빛을 전하는 자가 되어, 진리를 모르는 자에게 진리를 깨우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어찌해야할 지 모르는 상황 가운데에 있더라도, 주님을 향한 중심적인 마음을 갖고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이처럼 진동을 일으키실 것이고, 부족함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청소년 때는 긍정적으로 표현하면 아름다운 날개를 펼치기 위한 누에고치의 시간이기도 하지만, 어둡게 표현하자면 누에고치 안에 갖혀 있는 신세라 할 지 모르겠어요.
생각의 차이이죠.
복음은 갇혀 있는 자를 자유케 하는 것입니다. 주변에 학업 때문에, 관계 때문에 힘들어 하는 친구들이 있다면 복음으로 다가가 교회에 초청하시길 바래요.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통해서 일하실 것이고, 갇혀 있는 친구들에게 예수님이 다가가 그들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고난 중에도 예수의 빛을 비추는 자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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