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3:1-20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1 viewNotes
Transcript
떠나심을 준비하시다
떠나심을 준비하시다
우리가 태어나면서 혼자 살지 않는 한 가정, 학교 그리고 직장 그외 각종 모임과 같은 곳에 참여를 하게 됩니다. 그런 모임에는 일부의 사람들만 참여 가능한 별도의 모임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운영을 위한 모임 같은 것이죠 . 회사에서는 고위직 회의일수도 있고, 학생은 자치운영회나 같은 것이죠. 저도 교회를 담임하고 있어 목사들의 모임 중에서도 교회를 담임하는 분들만 모이는 모임에 참석이 가능합니다.
오늘 본문도 특별한 모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제자들이라고 부르지만 요한 저자는 ‘자기 사람들을’이라고 말하고 그들을 특징지을 때 ‘사랑한다’고 표현합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신’ 예수께서는 사랑하는 자기 사람들을 별도로 만나고 계십니다. 이런 매우 특별한 모임에 속한 사람들과의 시간을 다루고 있는 내용이 무려 5장에 걸친 분량으로 요한복음 전제 21장을 비교하면 매우 많은 양을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죠.
그들만의 이야기지만 이제는 우리 모두에게 공개된 말씀이요 비밀이 없는 말씀이지만 당시로 보면 예수께서 유명인이자 어쩌면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받고 나중에는 한 자리씩 차지할 수 있는 그들의 시선에서는 ‘나만 참석할 수 있는’ 일종의 프라이드를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이런 생각은 보편적이라 할 수 있죠. 그냥 하는 말로 ‘그런 생각을 하는게 뭐가 잘못이야’하는 거죠. 2주전에 마태복음에서 포도원 주인이 한 데나라온을 주는 것을 통해 과연 세상의 방식과 하나님의 방식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는 것을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마(20장을 펼치자) 그 말씀이 끝나자 마자 예수게서는 마태복음에서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이야기 하는 짤막한 구절이 소개 됩니다. 마태복음 20:17 “17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그때 예수께서는 18절에 예루살렘에서 자신을 죽이기로 결의했다고 말씀하시면서 19절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소개하고자 하는 말씀은 이어서 나오는 20-28절까지의 말씀인데 20절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21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라고 요구를 합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은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당연한 생각의 흐름이 아니라 깊이 있게 살펴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께서는 ‘내가 마실혀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라고 하는 반문하십니다. 하지만 나머지 10명의 제자는 24절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계속해서 나오는 말씀이 마태복음 20:26–28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 말씀은 우리가 요한복음에서 앞서 살폈던 12장 20절부터 들려야 하시는 예수께서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다는 말씀, 26절에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는 말씀과도 같은 맥락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읽은 말씀에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모습을 통해 ‘섬기시는 예수’의 모습을 어떻게 요한이 그리고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죠.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과 달리 이들은 예수와 함께 있다는 것은 출세한 사람처럼 보였고 더 출세하기 위해 지금 확실하게 예수의 입으로 자신의 성공과 높은 자리에 대한 선언해주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 한껏 고조된 분위기 속에서 오히려 유일하게 가룟 유다만이 ‘아 예수께서 하시려는 나라가 그런 나라가 아니겠구나’하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역설 즉 아이러니를 눈여겨 보셔야 합니다 . 자기가 생각한 ‘도래한 메시아’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죠. 언제 알았을까요? 몇 차례 말씀을 드렸는데 가룟 유다는 처음부터 소개가 나옵니다. 6장에서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에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이렇게 소개된 다음 12장에서 ‘순전한 나드 한 근을 쏟은 마리아의 모습을 보고 왜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고 이런 식으로 허비하는가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혹시 이어서 나온 말씀이 무엇인지 기억하십니까? 요한복음 12:5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요한복음 12:6 “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그의 마음에는 말과 다른 속셈이 있었고 그 속셈은 그의 잘못된 행동을 기반에 두고 있었습니다. 즉 돈을 훔쳐 갔고, 어쩌면 더 큰 돈을 훔쳐갈 기회라고 여겼거나, 아니면 훔친 돈을 채워 넣을 기회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죠. 특히 팔아서 그 값으로 처러하는 물건이라면 얼마든지 판 돈과 입금할 금액을 다르게 해 자신의 목적이 무엇이든 착복할 수 있었던 것이죠.
성경은 2절에서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장례를 준비하기 위한 여인의 행동을 옹호하시는 것처럼 보인 예수로 인해 어쩌면 말과 숨은 속셈이 달랐던 가룟 유다는 그제서야 다른 시각으로 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아 내가 잘못 알았구나, 여기 있다가는 좋은 꼴 못당하겠구나’ 그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지금의 상황을 뒤짚을 수 있는 ‘반전의 카드’ 말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실 때 어떤 조직에 속해 있다가 자기의 자리가 좁아지고 조직에서 머리가 되지 못하고 꼬리 밖에 안되겠다 싶으면 나갈 궁리를 하고 그에 걸맞는 명분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때 많은 경우가 제일 높은 사람과 한 판해거나, 조직의 가치에 대해서 도전해야 나름 명분도 서고 그동안 깊이 개입하면서 보던 안좋은 꺼리들을 폭로하면서 자신에게 유리한 명분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죠. 예수와 함게 있었다는 것은 가룟 유다에게는 치명적인 걸림돌입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뒤집을 방법은 유일하게 예수를 부정하는 방법 밖에 없고 행동은 ‘예수를 파는 것’입니다. 얼마후 예수께서 붙잡혀 있는 시간 베드로에게 ‘너도 같은 무리가 아니냐’할 때 베드로 역시 ‘아니다, 나는 그들 중에 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부정하게 됩니다. 우리 역사에서도 일본에 부역한 자들이 대체적으로 처음부터 일본을 선택하고 앞잡이가 된 것이 아닙니다. 독립군에게 자금을 대거나, 전달하거나 또는 더 깊이 들어가 조직을 위해 나름 열심히 했던 인물들 중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붙잡힐 위기가 오거나 잡히면 자기가 살기 위해 그에 걸맞는 행동을 해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밀정이 되고 각종 정보를 넘기다가 마지막에는 중요한 인물을 팔아 넘기는 것이죠.
배신이란 그렇게 붙는 수식어 입니다. 가룟 유다는 본문 30절에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고 하는 기록 이후에는 그를 찾아 볼 수가 없고 마태와 누가만이 그의 처참한 죽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한결같이 13장에서 제자 무리에서 유다가 제거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감정을 실어 유다를 나쁘게 말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즉 통치하는 곳에서는 제거 될 수밖에 없는 상황임을 의미하는 신학적 의도가 있는 것이고 악이 제거되고 난 예수께서는 진정한 비밀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알려 주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이해하려면 오늘 본문에서 여러차례 나오는 단어가 있는데 ‘아신다’는 것입니다. 기억을 더듬으면서 보면 1장에서 나다나엘을 미리 아셨고, 4장 사마리아 여인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5장에서는 ‘안다’는 용어를 아버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증언하시는데 그 증언이 참인 줄 안다고 매우 특이하게 사용하십니다. 본문 20절 까지 7번이나 안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한글 단어로는 같지만 7, 12절에 ‘알리라, 아느냐’라는 단어는 다릅니다. 7.12절의 앎은 ‘깨닫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85번 사용된 ‘안다’는 지식과 경험이 통합본 처럼 알게 되는 것이죠. 그럼에도 하나님의 2위 성자 예수님의 앎을 경험이라고 말하기에는 한계가 있죠. 즉 한 분이신 삼위 하나님의 앎은 그 자체이며 앎의 시작이자 끝이시죠.
그래서 1장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식’이 있다 없다 할때 하나는 배워서 아는 것, 하나는 지혜라고 할 때 경험해서 아는 두 가지 앎을 함께 이르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께서는 아느냐, 알게 된다는 경험을 통해서 깨닫게 될 것이고 17절에 너희가 이것을 알고 할 때 ‘인지’ 된 상태가 됩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아시는’ 주님의 행동에 집중해야 합니다. 떠날 줄을 아셨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어지는 행동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이죠. 사실은 이 또한 말입니다. 올바로 아는 것은 행동과 이어지고 행동에는 생각이 따릅니다. 사랑하는 생각, 그래서 표현되는 예수의 행동은 무엇인가요? 오늘 본문에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것이죠. 반면 유다의 마음에는 예수를 팔 생각이 들어감으로 비교가 보여집니다. 앞서 우리는 가룟 유다의 상태를 살폈습니다.
반면 예수께서는 ‘저녁 먹는 중’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시고 - > 사랑하는 생각 -> 장소에 구애 받지 않고 일어 났습니다. 왜일까요? 이렇게 발을 씻는 행동은 성전에 들어갈 때와 손님으로 집에 방문 했을 때 입니다. 그러나 지금 식사 도중에 라는 정보를 통해 예수께서는 해야 할 시간이라면 저녁 먹는 중에 하기에는 부적절한 때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세하게 표현된 예수의 행동을 주목해 보세요. 저자는 ‘저녁 잡수시던 때 제자들의 발을 씻겼다’라고 하지 않고 그의 행동 하나 하나를 기록함으로 아시는 주님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마음을 행동하신다는 것입니다. 간혹 이런 말을 씁니다. ‘행동에 꾹꾹 눌러 담았다’ 사랑하시는 생각에 끝나지 않고 마치 마음 먹은 것을 구체적으로 행동으로 옮긴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베드로는 부정적으로 표현됩니다. 왜 일까요? 스승으로 제자의 발을 씻기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발을 씻겨 주는 행동 자체가 생소한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스승으로 제자의 발을 씻기는 상황은 생각도 해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반면 예수께서는 사랑하시는 방법은 우리의 행동을 넘어서는 것이죠. 그러니까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이 어떠하신지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알게 된다’는 것은 반역자, 죽어서도 땅에 발을 붙여둘 수 없는 치욕의 형벌인 십자가 형이 어떻게 나를 위한 죽음이 될 수 있는가? 도무지 생각이 연결되지 않을 때, 예수께서 저녁 식사 도중에 스승으로 제자의 발을 씻기는 생각으로 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의 삶에 감사를 하고 예수를 주님으로 인정하는 시작은 삶에서 겪을 수많은 일들에 대해서도 믿고 나아갈 수 있는 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께서는 이 과정을 통해 사실 이 과정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죠. 그럼에도 기회를 이용해 베드로에게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한다’는 이해의 한계에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라고 베드로의 수준에 맞게 설명합니다. 경험했다고 아는 것은 아닙니다. 알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경험이 없는 사고는 공허합니다. 예수께서 아신 것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과의 사랑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고에서 저녁 식사 도중에 행하시는 경험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길 수 없다는 개념만을 가진 베드로에게 ‘너와 나의 관계가 없는’ 예수의 직접적인 화법은 ‘이 후에는 알게 되’는 과정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마트에서 장난감을 사달라고 떼 쓰는 아이를 마치 버리듯 떠나는 부모의 직접적인 행동은 아이에게 맞는 수준이죠. 지금 여러분에게 이런 방법은 통하지도 않을 뿐더러 떼를 쓸 일은 없지만 무엇인가 떼를 쓴다면 적당한 설명과 이해의 과정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무튼 베드로는 ‘내 발뿐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 유명한 베드로의 수준이 여기까지 입니다. 3년 동안 예수님과 동행했다 하더라도 베드로가 가진 경험은 하나님 나라에 새롭게 변혁되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예수께서는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고 하시며 그것이 팔 자인 가룟 유다와 연결되었음을 말씀하십니다. 이미 유다의 마음은 불편했을 것입니다. 유다의 깨달음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마음이 떠난 유다에게는 이제 모든 것이 불편해졌을 것입니다. 가룟 유다에게 필요한 것은 이 자리를 벗어날 적절한 때만 남은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선생이 제자의 발을 씻기는 것은 생각도 해 본적이 없는 상황으로 ‘너희도 그래야 한다’는 말씀을 가르쳐 주십니다. 새로운 개념입니다. 즉 개념이 없는 발을 씻기는 행동이 오늘 한국교회에 얼마나 많습니다. 한 때 유행했던 세족식을 기억하시죠. 이제는 그런 것조차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맹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스승이 보인 본을 따라 제자들도 그렇게 씻어 주는 것이 옳다고 말슴하시고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가 중요합니다. 우리도 아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는 것을 즐기는 요즘 시대가 아닙니까? 하지만 아는 것을 사고하고 사고한 것을 행동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 스스로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보이신 본을 따라 ‘주일에 예배’를 하는 것, 시간을 들여 모이는 것, 기도하는 것, 찬양하는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집에서 예배할 때 방문만 열면 되는 환경이 어색했지만 얼마 못가 그것조차도 힘들어한 경험이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차분하게 ‘사고’하는 힘을 키워야 합니다. 저야 어쩔 수 없다하더라도 여러분은 시간을 내어 책을 보고 사색하는 힘을 키워야 하는 것이죠. 주님은 다시한 번 ‘진실로 진실로’라고 말씀하시면서 ‘좋이 주인보다 크지 못한’ 너희가 아는 경험이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함’으로 연결하여 예수의 십자가 죽으심에 대한 하나님의 크심을 17절 ‘알라’는 것입니다.
긴 여정을 가야하니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