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13: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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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요한계시록 13:11-18
찬송가 543장 어려운 일 당할 때
오늘 본문은 앞서 등장한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에 대한 묘사에 이어, 땅에서 올라온 또 다른 짐에 대해 묘사합니다. 그 짐승의 특징과 역할, 그 목적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땅에서 올라온 짐승의 특징(11)
(11)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어린 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을 하더라
요한은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온 것과 같이, 땅에서 올라오는 또 다른 짐승을 보았습니다. 그가 본 그 짐승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는 어린 양 같이 두 뿔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꼭 기억해야 할 표현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린 양, 두 뿔에 주목하지만, 더 주목할 표현은 ‘~같이’입니다. ‘~같다’와 ‘~이다’는 때때로 엇비슷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다른 경우를 가리킵니다. 이같이 땅에서 올라온 또 다른 짐승이 제아무리 어린 양과 같이 두 뿔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는 결코 어린 양일 수 없습니다. 이후로도 그 짐승은 어린 양이신 예수님을 모방하고, 여러 이적을 보여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이어 그 짐승은 용처럼 말했습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표현은 ‘~처럼’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용의 실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계 12:9)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용은 마귀, 사탄을 의미합니다. 그가 용처럼 말을 했다는 것은 분명 그가 마귀(사탄)가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그는 사탄처럼 온 세계를 미혹하고자 했습니다. 땅에서 올라온 또 다른 짐승의 특징을 통해 그의 실상을 정리해보면, 겉모습은 어린 양처럼 보이나 용처럼 말을 하는 그는 분명 마귀, 사탄에 속한 존재였습니다.
이제 그 짐승의 역할과 목적이 무엇인지를 밝힙니다.
그 짐승의 역할과 목적(12-15)
(12) 그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사는 자들을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땅에서 올라온 또 다른 짐승의 역할을 확인하면서 우리는 그 짐승이 독립적인 존재가 아닌 종속적인 존재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 짐승은 먼저 나온 처음 짐승, 앞서 등장했던 바다에서 나오는 짐승(13:1)의 모든 권세를 대행했습니다.
두 마리의 짐승을 구분하는 데 다소 혼란스러울 수 있기에, 이제부터는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을 첫째 짐승으로 땅에서 올라온 짐승을 둘째 짐승으로 부르겠습니다.
둘째 짐승은 땅과 땅에 사는 자들이 바다에서 올라온 첫째 짐승에게 경배하게 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둘째 짐승이 첫째 짐승의 제사장과 같은 임무를 수행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여기서 땅과 땅에 사는 자들은 앞서 12장 12절에 기록된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과 반의적 병행 관계로 볼 수 있습니다.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이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천상 교회를 상징한다면, 이와 달리 땅과 땅에 사는 자들은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아닌, 예수님을 모방하는 첫째 짐승을 경배하게 됩니다.
첫째 짐승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모방하여 사람들의 오해를 의도적으로 일으켰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약속의 말씀을 따라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처음 짐승은 애당초 죽지 않았습니다. ‘죽게 되었던 상처’를 새번역은 이를 ‘치명상’으로 번역합니다. 첫째 짐승은 죽은 것이 아닌 죽을 수도 있는 상처로부터 회복된 것일 뿐이었습니다. 그것은 결코 예수님과 같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13)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둘째 짐승은 땅에 사는 이들이 첫째 짐승을 경배하게 만들기 위해, 불이 하늘로부터 땅으로 내려오는 이적을 보였습니다. 이는 과거 선지자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 숭배자들과 대결할 때, 여호와의 불이 내려와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신임을 확증한 사건(왕상 18:38,39)을 떠올리게 합니다. 둘째 짐승은 이를 모방해 땅에 사는 자들을 미혹했습니다.
(14)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둘째 짐승이 첫째 짐승의 권세를 이용해서 이적을 행하는 목적은 분명했습니다. 땅에 거하는 자들이 첫째 짐승을 경배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둘째 짐승은 이를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첫째 짐승의 우상을 만들 것을 전했습니다.
여기서는 첫째 짐승을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났다’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앞선 12절에서는 그를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로 소개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부활한 어린 양 예수님과 그 짐승은 감히 비교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15) 그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둘째 짐승은 첫째 짐승의 권세를 이용해 첫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우상이 말을 하게 했습니다. 생기를 주었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인간 창조를 상기시킵니다.
(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둘째 짐승은 하나님의 선지자, 어린 양 예수님을 넘어, 이제는 창조주 하나님까지 모방하고 나섰습니다. 우상이 말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이를 듣는 이들이 큰 두려움을 느끼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는 이미 기술의 발전으로 금속과 플라스틱의 조합체가 말을 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저희 집만 해도 ‘날씨가 어떠냐?’는 한마디에 오늘 날씨를 알려주는 기기가 한쪽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으로부터 생기를 받은 사람과 둘째 짐승으로부터 생기를 받아 말을 하는 우상 사이에는 크나큰 차이점이 있다는 점입니다. 전자는 생명이 있지만, 후자는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결정적으로 둘째 짐승은 첫째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는 자를 다 죽일 것을 전했습니다. 곧 땅에 사는 자들은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였을 것입니다. 이는 본문이 기록된 당시에 로마 제국에서 실제로 행했던 정책이었고, 그 이전의 바벨론 제국에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단 3)이었습니다. 둘째 짐승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자들에게 곧 표를 받게 했습니다.
그 짐승의 표, 육백육십육(16-18)
(16)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둘째 짐승이 주는 표는 앞서 기록된 십사만 사천의 이마에 찍혀진 ‘하나님의 인’과는 대조적으로 병행되는 부분(7:2-4)입니다. 그는 먼저 표를 받을 대상을 밝혔습니다. 작은 자와 큰 자, 부자와 가난한 자, 자유인과 종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었습니다. 이는 구원의 복음이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전해졌던 것과 유사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 둘의 상반된 차이는 짐승의 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에서 비롯되지만, 복음은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의 사랑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입니다.
이어 표를 받는 위치를 밝혔습니다. 앞서‘하나님의 인’이 십사만 사천 명의 이마에 찍힌 것과 같이, 짐승의 표도 이마나 오른손에 받게 했습니다. 이마와 오른손은 신체 중 가장 잘 드러나 보이는 부분으로, 사람들은 이를 통해 서로가 누구에게 속한 존재인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17)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새번역 17)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사람, 곧 그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을 나타내는 숫자로 표가 찍힌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팔거나 사거나 할 수 없게 하였습니다.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을 나타내는 숫자로 된 표를 받지 않는 사람은 큰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는 일체 매매를 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팔거나 사거나 할 수 없었습니다. 이는 경제활동의 금지를 넘어, 즉각 생존의 위협이었습니다. 만약 오늘 당장 짐승의 표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그 어떤 것도 사거나 팔 수 없다면, 과연 우리는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까요? 계속해서 짐승의 표를 거절할 수 있을까요?
며칠이나 거절할(버틸) 수 있을지를 잠잠히 헤아려 보면 좋겠습니다.
여기서 짐승의 표를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당시 사람들이 빈번히 이름과 그에 해당하는 수를 병행해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히브리어와 마찬가지로 헬라어 알파벳이 각각의 숫자를 나타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표현 방법을 게마트리아(Gematria)라고 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영어 알파벳을 사용해 잠시 설명하겠습니다. A부터 I까지를 숫자 1부터 9까지로, J부터 R까지를 숫자 10부터 90까지로, S부터 Z까지를 100부터 800까지로 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요한을 영어로 John이라고 하는데, 이를 숫자로 바꿔보면 J는 10, O는 60, H는 8, N은 50입니다. 이를 다 더하면 128이 나옵니다. 따라서 128은 요한이라는 이름의 수가 되는 것입니다.
(18)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
끝으로 요한은 짐승의 수를 세어 볼 것을 권하면서 그것이 사람의 수며, 그의 수가 육백육십육이라고 밝혔습니다. 이를 두고 많은 사람은 과거부터 오늘까지 게마트리아를 통해, 그 수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를 추론함에 큰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시대마다 사람마다 다양한 의견을 제시했는데, 혹자는 이 수를 가리켜 과거의 타이탄(신화 속 신들)이라고도 하고, 혹자는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 교황, 히틀러 등의 인물이라 주장했습니다. 또 특정 집단, 신용카드, 컴퓨터, 베리칩 등이라는 주장도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중 지금까지 가장 널리 인정되는 의견은 이 수가 네로 황제를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본문이 기록된 당시 로마 제국의 통치자인 네로를 육백육십육과 연결하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그러나 이 수를 단순히 역사 속에 존재했던 한 인물을 지적하기 위한 것으로만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이미 많은 상징을 제시하고 있기에, 그 수가 지닌 상징적 의미를 헤아려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성경에서 7은 하나님을 상징하는 수로 완전과 거룩함을 의미합니다. 반면 6은 7에 가장 근접했지만, 미완성과 부정, 완전에 도전하는 세력을 상징하는 수입니다. 6이 세 번 반복된 것은 사단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모방하여 자신이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 나타낼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짐승의 수, 사람의 수 육백육십육은 불완전한 존재로서 완전한 하나님의 지위를 노리고 도전하는 존재나 세력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계시록을 통해서 종말의 때가 언제인지를 알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계시록을 통해 종말의 때가 곧 있을 것을 전해주셨습니다. 우리가 알고 싶은 것과 하나님이 알려주시는 것 중에서 우리가 더 집중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사탄은 오랫동안 정치적 폭정과 거짓 종교를 결합하여 세상을 지배해 왔습니다. 바빌론, 로마 황제, 무슬림 정부, 로마 가톨릭 왕자들과 교황청, 17세기 영국의 스튜어트 왕, 20세기 나치와 공산주의 전체주의 국가 등 모든 시대의 신자들은 이러한 부정한 박해 세력의 동맹 아래서 고통을 겪어왔습니다.
이데올로기는 크게 다르지만, 이러한 모든 권력은 폭력과 경제적 불이익을 통해 사람들을 공통의 우상 숭배를 중심으로 통합하는 악마의 방법론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이 원리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이 세상에 순응하라는 압력에 저항하는 것이 왜 그렇게 어려운가요? 교회는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핍박에 맞서 용기와 소망과 사랑을 갖출 수 있도록 준비시켜야 합니다.
어린 양과 같은 존재는 이 세상에 순응하라고 끊임없이 우리를 압박하고 미혹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온전히 쫓아야 할 것은 어린 양 같은, 어린 양처럼 보이는 존재가 아닌, 어린 양이신 예수님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핍박에 맞서 용기와 소망과 사랑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 주님을 힘입어 성경을 열어 말씀의 빛을 받고 시작하는 우리의 오늘은, 분명 지혜로운 사람, 영적으로 건강한 주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하루가 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땅과 땅에 사는 자들에게는 땅에서 올라온 짐승으로부터 온갖 미혹과 핍박이 있을 것을 미리 보게 하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삶의 자리에서 어린 양과 같은 이가 아닌, 어린 양이신 예수님만을 온전히 믿고 살아갈 수 있는 분별력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성경을 열어 말씀을 빛을 받아 누리게 하심에 감사를 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