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본받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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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240517 금요기도회 [데살로니가전서 2:1-16]

제목: 나를 본받으라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2:1-13

데살로니가전서를 계속 읽다 - 가족이 된 교회, 사도의 변론

오늘도 주님의 말씀을 함께 나누는 모든 분들께 선하신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하시길 축복합니다.
저희는 지난 번에 데살로니가전서 1장을 함께 읽으면서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이 서로 행했던 ‘사랑의 수고’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를 위해 로마 제국 안에서, 로마 사회 안에서 로마 시민이 그리스도인이 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를 살펴보았지요. 로마 제국의 큰 관심 중 하나는 제국의 안정된 통치였습니다. 넓은 땅과 다양한 민족을 다스리는 제국이 반란에 민감했던 이유기도 하지요. 나사렛의 목수의 아들이 노예나 반역자에게 내려지는 십자가 형벌을 받은 것 역시 그 중 하나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국의 안정된 통치를 위해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을 필요가 있었던 로마는 ‘황제 숭배’를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활용했지요.
이런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일종의 스캔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로마라는 제국과 온 세계를 넘어서 심지어는 온 우주의 통치자, 왕으로 고백하기 때문이지요. 이는 더 이상 ‘로마 시민’으로 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인 어려움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지요.
그래서 데살로니가 교우들은 실제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믿음이 열매를 맺는 것을 두고 바울은 감사의 인사를 전하지요.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는 자가 되었으니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그 중에서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서로를 위해 감당했던 ‘사랑의 수고’를 두고 감사의 인사를 아끼지 않습니다. 어려운 시기, 환난을 지나가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와 자매, 또 하나님을 아버지로 둔 새로운 가족이 된 교회가 서로 기꺼이 땀을 흘리고 삶을 지탱해 준 것이 바로 데살로니가 교회라는 열매가 되었던 것이지요.
성도님들께서도 편지를 써보셨을테지만, 우리가 편지를 쓸 때면 흔히 ‘인사’를 가장 먼저 씁니다. 그리고 받은 편지에 답장을 한다면 기쁜 마음으로 편지를 잘 받았다, 당신의 편지에 기뻤다, 이런 감사를 나타낼 겁니다. 그런 후에는 본론으로 들어가겠지요. 고대 그리스와 로마 사회에는 더욱 엄격하게 ‘편지쓰는 규칙’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인사말이고, 또 어떻게 본론이 시작되고, 무엇을 이야기하려는 편지인지 읽는 이들이 분명히 알 수 있었다고 하지요. 그런 그리스-로마 관습을 따르면 1장은 전형적인 인사말에 해당하고, 오늘 본문 2장부터 우리는 바울이 쓴 이 편지, 데살로니가에 보낸 첫 번째 편지의 본론을 읽게 되는데요, 인사말과는 다른 분위기가 느껴지지요.
1장에서 바울은 주로 ‘너희’, 그러니까 ‘데살로니가 교우’들을 두고 칭찬과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3),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6),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7).” 2장에 들어서는 어조가 달라집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이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아나니(1) 우리의 권면은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속임수로 하는 것도 아니라(3) 우리는 너희에게서든지 다른 이에게서든지 사람에게서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였노라(6)” 본론에 들어와서 ‘너희’에서 ‘우리’로 초점이 옮겨간 것이지요. 여기 ‘우리’는 1장 1절을 볼 때 바울과 실루아노, 디모데를 가리킬 것입니다. 이 세 사람이 데살로니가에서 선교사역을 했던 장본인들이겠지요. 그런데 내용과 느낌을 보면 바울이 ‘변명’, 혹은 자기 ‘변호’하고 있다는 인상을 줍니다.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씨앗을 뿌린 이 사람은 어째서 그들 스스로를 변호하고 있는 것일까요?

사도가 받은 오해

저는 대구 사람이라 경상도 방언이 익숙합니다. 다른 말들보다 경상도 방언이 더 정감있게 느껴지지요. 그런데 자주 오해를 받습니다. 상대방의 안부를 아주 따뜻한 마음으로 묻습니다. ‘밥 뭇나?’ 그럼 이렇게 답이 돌아오지요. ‘어, 밥 뭇따.’ 그럼 이런 오해를 받습니다. 싸웠냐고요.
그런게 아닙니다. 오해이지요. 우리가 같은 말을 쓰는데도 이런 오해를 할 수 있습니다. 국경을 넘어가면 더 쉽게 오해가 생길 수 있지요. 우리 나라에서는 초대를 받고 음식을 남기는 것이 어쩐지 불편하지요. 그러다 보니 목사가 자연스럽게 ‘먹사’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정반대라 하지요. 대접을 받고 빈 그릇을 남겨버리면, 그게 오히려 초대한 사람에게 결례라는 것입니다. 문화 차이에서 오해가 발생할 수 있는 것이지요.
문화 차이도 오해를 만들지만, 때로는 상황과 의도가 충돌하면서 오해가 생긱기도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을 읽어보면, 아마 바울과 데살로니가 교회 사이에도 그런 ‘오해’가 문제가 된 것 같습니다. 그 사이에 ‘돈’에 대한 서로의 입장 차이가 하나의 오해가 된 것이지요.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바울은 천막을 만들어 자기 생활비를 충당했습니다. 무겁고 두꺼운 가죽을 무두질하고, 재단하고, 세공하고, 바느질을 하는 기술을 가지고 직업활동을 했는데, 처음부터 바울이 그런 일 하는 사람이 아니었지요. 그는 율법교사였고,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당시 유명한 ‘가말리엘’이라는 율법 교사 밑에서 수학한 유대사회의 지식인 계층이었습니다. 고대사회의 직업은 아버지로부터 정해집니다. 아버지의 일을 아들이 이어 가업이 되는 식인 것이지요. 어부의 아들은 어부가 되고, 목수의 아들은 목수가 됩니다. 그런데 지식인 계층인 바울이 천막을 만드는 일을 한다는 것은, 인생의 어느 때에 특별한 이유와 목적을 세워 그 기술을 익혔다는 것이지요. 고상함과는 거리가 먼, 땀흘려서 일하는 힘든 육체 노동 기술을 익힌 까닭은 9절에 암시되어 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바울이 참 멋이 있지요. 신앙인으로서 정말 본받을 만한 삶입니다. 그래서 바울을 생각하면 한편으로 부끄러워지기도 하지요.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적이 있습니다.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복무를 하겠느냐’, 말하자면 명예직이고, 또 높은 임금을 받는 로마의 직업군인들과 다르게 바울은 스스로 자기 비용을 대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사역에 헌신하고 있음을 빗대고 있는 것이지요.
천막을 만드느라 배긴 굳은 살과 상처들을 보게 된다면 교회와 복음을 향한 바울의 열정과 사랑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로마 시민인 데살로니가 교우들에게는 오히려 이 일이 이상하게 비추어지는 것이지요. 데살로니가 교우들이 느낀 ‘이상함’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한 책이 있습니다. 프랑스의 인류학자인 ‘마르셀 모스’라는 사람이 쓴 ‘증여론’이라는 책인데 여기서 그는 다양한 문화권에서 사람 사이, 공동체 사이에 선물을 주고 받는 행위에 대해 연구하며 서문에다 이렇게 씁니다. “누구나 선물에 대해서는 선물로 답례하지 않으면 안된다. …말하자면 겉으로는 자유롭고 무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강제적이고 타산적인 이 선물의 주고받는 행동에 대해서 (이 책에서) 생각해보려고 한다.” 어느 문화에서나 ‘선물’을 준다는 것은 암묵적으로 ‘돌려 받을 것’이 그 속에 강제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실제로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선물’이라는 행위는 받은 것 이상으로 돌려주어야 하는 채무, 빚과 같다는 것입니다.
특히 1세기 로마 사회에서는 이것이 ‘명예’와도 관련이 있었습니다. 누군가에게 받고도 돌려주지 않는다면 ‘선물이라는 채무’를 갚아야 한다는 암묵적인 계약을 깨트리는 것 뿐 아니라 ‘생명과도 같은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로 여겨졌습니다. 받고도 주지 않는 것, 주고도 받지 않는 것은 그래서 불신과 증오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것이지요.
심지어 ‘눈에 보이지 않는 은혜와 호의’를 입었을 때는 굉장히 난감해지기도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기에 얼마만큼, 무엇으로 돌려주어야 하는지 가늠하기 어렵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우들이 바울에게 받은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복음이지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로마 사회에서 경험할 수 없었던 새 가족들을 받았습니다. 교회가 받은 것은 그 안에서 참되고 진실한 관계와, 서로를 위해 사랑의 수고, 땀흘림을 기꺼이 감당하는 넘치는 은혜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 데살로니가 교우들은 큰 채무를 지게 된 것이지요. 바울에게 갚아야할 선물의 큰 빚이 남겨졌습니다. 그 상황에서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우들의 신세를 지지 않습니다.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스스로 일하여 번 돈으로 생활비를 충당하고, 교우들에게는 전혀 아무것도 안받는다는 것이지요. 바울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데살로니가 교우들은 충분히 수치심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명예를 욕보이고,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와 가족이 아니다, 라는 메시지로 비추어질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오해에 더해서 둘 사이의 갈등을 부채질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데살로니가 교우들이 이전에 몸담았던 가족들, 친구들, 사회생활에서 맺었던 모든 관계들이지요. 그들이 ‘교회’가 됨으로써 어느날 갑자기 가족을, 친구를, 이웃과 직장의 동료를 빼앗긴 사람들입니다. 어느날 그 도시에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라는 사람이 등장한 이후에 말이지요. 그러니 이들은 데살로니가 교우들에게 ‘돌아오라’ 회유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의 의도를 왜곡합니다. “분명히 딴 속셈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거기서 나와 우리에게로 돌아오라.”고 말이지요.
충분히 그렇게 오해할 수 있었을 겁니다. 실제로 로마 사회에는 바울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도시와 도시를 돌아다니고, 거리와 거리를 돌아다니고, 집과 집을 돌아다니면서 지혜를 가르쳐준다고 하고선 ‘기부금’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일종의 지식 판매상입니다. 세일즈 맨이지요. 이들은 공동번역이 4절과 5절을 잘 옮긴 것처럼 ‘사람들의 환심을 사려고, 속임수로 탐욕을 채우려고’ 사람들에게 접근하던 자들로 소문이 나있었습니다.
바울과 그 동료들이 이 비난과 오해에 직면해야 했던 것이지요. 그들도 도시와 도시를 옮겨다니고, 거리과 거리를 누비고, 집과 집을 방문하며 ‘메시지’를 전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돈’을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사람’을 낚았습니다. 그런 그들 때문에 가족과 친구를, 동료를 빼앗겼다고 생각한 데살로니가의 로마 시민들은 그렇게 비난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간사함으로, 부정한 마음으로, 속임수로, 아첨하는 말로, 탐심의 탈을 쓰고 너희를 꾀어내는 것이다.”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 중심은 ‘행동’을 통해서 드러난다

사도와 교회 사이에 신뢰가 깨지기 시작한 것이지요. 오해가 쌓여 진심이, 진의가 왜곡됩니다. 사도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건 오해라고, 적극적으로 변호하고 변명해야 할까요? 아니면 내가 부당한 오해를 받았으니 자존심 상한다고, 더 이상 안보면 그만이라고 끊어내면 될까요? 바울은 어떻게 합니까? 바울은 여전히 데살로니가 교회가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우들을 위해서라도 이 오해를 풀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이 편지를 쓴 것이지요. 그의 목적은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거나, 자존심을 지키는데 있지 않습니다. 그의 목적은 단 하나이지요. 12절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한’ 교회가 되도롭 돕기 위해서, 바울 자신이 이 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편지를 씁니다. 그리고 바울은 변명하는 대신, 자신의 마음과 뜻을 증명하려고 하지요. 어떻게 할까요? 바울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줍니다. 요한1서 3장 18절에서 장로 요한이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라고 말했던 것처럼, 바울은 비록 지금은 떨어져 있어서 행함과 진실함을 보여줄 수 없지만, 그가 어떻게 데살로니가 교우들을 대하였는지 상기시켜주는 것이지요. 멀리 떨어져 있어서 편지로밖에 다가갈 수 밖에 없기에 기억을 떠올려 보라고 권면하지요. 4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것을 기억하리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위탁받았으니,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행동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때에도 아첨하는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않은 것을 ‘하나님이’ 증언하십니다. 우리는 사람에게서는 영광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사도로서 권위가 없습니까? 하지만 오히려 여러분 중에서 마치 자기 자녀를 돌보는 어머니처럼 부드럽게 대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복음 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여러분에게 주기를 기뻐한 것은 여러분이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되었기 때문입니다.” 천막을 만들며 온갖 상처와 굳은 살 배긴 바울의 손을 다시 생각한다면, 밤낮으로 복음을 전하고 데살로니가 교회에 말씀을 가르치느라 붉게 충혈되었던 눈빛을 떠올려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과 그 동료들이 어떤 마음으로 교회를 대하였는지 말이지요.
바울은 말로 변호하는 대신 자신의 행동을 보입니다. 그의 행동이 그의 믿음을, 그의 행동이 그의 사랑을 증언합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우를 어떻게 대하였는지가 하나님께 받은 복음의 부르심에 대한 그의 헌신과, 데살로니가 교우를 향한 그의 사랑과, 그리고 이 모든 일의 한 가운데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그의 믿음을 증언합니다. 그리고 그의 헌신과 사랑과 믿음은 특별한 방식으로 드러나게 되지요.

‘나를 본받으라’ - 성육신적인 삶

그것을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신학 책을 읽다보면 incarnation이라는 단어를 접할 때가 있습니다. ‘성육신’이라고 번역되는 말이지요. 이것과 더불어서 짝 지어 등장하는 말이 ‘케노시스kenosis’, 곧 ‘자기 비움’이지요. 자기 비움과 성육신, 이것이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인 그의 헌신과 믿음과 사랑입니다. 7절에서 ‘유순한’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에피오이’를 본문을 복원하기에 따라 ‘네피오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합니다. 그렇게 읽으면 ‘어린아이들처럼’, ‘자녀처럼’이라고 번역할 수 있겠지요. 그렇게 다시 7절과 11절을 읽어보면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보인 자기비움과 성육신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드러납니다. “바울과 그 동료들은 권위있는 자처럼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데살로니가 교우들을 대할 때 때로는 어린아이로, 때로는 어머니로, 때로는 아버지로 행동하였다.”는 것이지요. 단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4절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위탁 받았기에,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또 8절에서 데살로니가 교우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는 바울의 자기 비움과 성육신적인 행동을 통해 빌립보서 2장의 찬미를 떠올립니다. ‘너희는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처럼 되셔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 마음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사랑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자기를 비워 데살로니가의 교우들을 위해 어린아이도, 어머니도, 아버지도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를 고집하지 않고, 다만 온전한 부르심에의 헌신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새로운 가족이 된 형제와 자매를 향한 사랑으로 언제든지 자기를 비우고 그들로 채울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는 말이 아니라 그 삶으로 그 헌신과 믿음과 사랑을 증언했습니다.
그런 바울이 오늘 전하는 마지막 절, 13절의 말씀을 함께 읽어보았으면 합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저는 이 말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이것이 바울의 편지라고 생각할 때 의도된 수사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바울이 이런 의도로 한 말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지요. “여러분이 우리에게 들은 바, 이 말씀도 사람의 말로 듣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줄 압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서 역사할 것입니다.”
바울은 이 말로 이렇게 말하는 것 아닐까요? “나를 본받으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았던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 닮기를 소망하는 ‘나를 본받으라.’ 그리하여 서로 소명에의 헌신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서로를 향한 사랑으로 자기를 비우고 성육신적인 삶을 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 “이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줄 압니다.”
얼마전에 인터넷에서 이런 질문을 본 적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 다니고 신앙생활하며 예수 믿는 것이 ‘죽은 후에 천국을 가기 위한 것’인가, 하고 말이지요. 아닐겁니다. 그것만이 신앙생활의 목적이 되어서도 안되고, 예수 믿고 교회됨이 그것이 전부여서도 안되겠지요. 우리는 어째서 교회를 출석하고 공동으로 신앙생활을 하며 예수를 믿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기도하고, 말씀으로부터 무엇을 듣습니까? 참 하나님이시자, 참 사람이신, 참되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 땅을 사셔서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하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사람되는 것, 그리하여 이 땅에서 참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사는 것, 예수 닮아가는 것이 우리의 교회됨이고, 신앙생활이고, 예수 믿음이지요.
우리가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 닮아가는 삶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나를 따르라’ ‘이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줄 압니다.’ 말하는 바울의 목소리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처럼 자기를 비워 하나님와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성도 되기를 소원합니다. 자기를 비워 기꺼이 그들과 같이 되는 삶과 행동으로 우리의 소명에의 헌신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서로에 대한 사랑을 증언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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