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손
Notes
Transcript
설교 240607 금요기도회 [데살로니가전서 3:1-13]
설교 240607 금요기도회 [데살로니가전서 3:1-13]
제목: 하나님의 손
제목: 하나님의 손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3:1-10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3:1-10
바울의 위로: 환난 중에 있는 교우들에게서 전해진 좋은 소식
바울의 위로: 환난 중에 있는 교우들에게서 전해진 좋은 소식
오늘도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시고, 함께 말씀을 나누는 모든 분들께 우리 선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하시길 축원합니다.
얼마 전에 문자 한통을 받았습니다. 핸드폰에 몇년 동안 받아보지 못했던 이름이 뜨더라고요. 다행히 돈 빌려달라는 문자는 아니었고, ‘잘 지내시냐’는 짧은 안부 문자였습니다. 곧장 통화 버튼을 누르고 연결이 되었을 때 제가 첫마디로 ‘결혼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이전 교회에서 청년부를 담당하면서 같이 시간을 보내었던 청년의 문자였지요. 몇년동안 연락을 하지 못하고 지내왔는데, 그 간단한 안부 문자에 ‘결혼’까지 제 생각이 미쳤던 것은 그 청년과 보낸 시간 때문이었지요.
인천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 연락이 왔던 또 다른 청년이 있습니다. 여러가지 사정과 형편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30대 중반이 큰 용기를 내어 늦깎이 대학생이 되었던 한 청년이 졸업하고 시험에 합격해 서울에 있는 한 병원에 간호사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너무 좋은 소식이지요. 그 친구가 20대를 어떻게 지나왔는지, 그리고 30대 중반에, 띠동갑이 넘는 친구들과 같이 학교를 다니면서 새로운 시작을 하고 마치기까지의 시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소식이 더 반갑게 느껴졌습니다.
부교역자들은 자리를 옮기는 일이 잦다 보니 오래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지만 그래도 간간히 이런 소식을 전해듣게 되면 마음이 참 좋습니다.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전해오는 좋은 소식은 우리의 기쁨과 감사가 되지요. 성도님들께도 그런 소식이 함께하시길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바울도 그런 소식에 기쁨과 감사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9절입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
우리가 두 차례 데살로니가전서 1, 2장을 함께 읽으면서 데살로니가 교우들이 겪었을 어려움, 환난을 생각해보았습니다. 당사자들, 그러니까 바울과 데살로니가 교우들은 이미 잘 아는 내용이라 편지에 구구절절 상세하게 쓰지 않았기 때문에 제3자인 우리는 편지만으로는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알기 어렵지요. 그래서 여러 증거들을 통해 가능한 일들을 추측해봅니다.
지난 설교를 통해 우리는 먼저 데살로니가 교회, 교우들이 겪었을 ‘고립’을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지금까지 남들과 다름없이 살던 평범한 삶에서 단절을 야기했습니다. 사람들은 적대감에 둘러싸여 고립될 수 있었고, 자연히 일자리를 잃고 궁핍해지거나 사회의 질서와 평안을 어지럽히는 무신론자들이라 비난을 받고, 로마 제국의 통치권에 저항한다는 의심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으로 어려움에 처하는 것이지요.
여기에 더해 바울과 데살로니가 교우 사이에서 이간질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을 겁니다. 둘 사이의 신뢰를 깨트리고 데살로니가 교우들이 교회에서 이탈하도록 흔드는 사람들이었지요. 이것이 데살로니가 교우들이 겪을 수 있었던, 가능성 있는 ‘환난’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겪을 환난을 염려했습니다. 그 어려움 중에 믿음에서 떨어져나가는 것을 걱정했지요. 3절에서 이렇게 씁니다. “아무도 이 여러 환난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라.” 환난에 데살로니가 교우들의 믿음이 ‘흔들릴 것’이 바울의 큰 근심입니다.
간혹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면, 특히 어린 자식들이 아프면 이런 마음이 들 때가 있지요. 차라리 내가 대신 아팠으면. 사랑하는 사람이 아픈데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보니 차라리 대신 아팠으면 합니다. 바울이 그러지 않았을까요? 멀리 떨어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형편, 급히 데살로니가 교우들에게로 달려가서 그들 곁을 지킬 수 없고, 그 믿음을 붙들어줄 수 없는 형편에 얼마나 애가 탔을지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 마음에 ‘디모데’를 보냅니다. 5절에서 이렇게 쓰지요. ‘나도 참다 못 하여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그를 보내었노니.’
오늘 편지는 그렇게 데살로니가 교회로 향했던 디모데가 다시 바울에게로 돌아와 전해준 소식을 듣고서 쓴 것으로 보입니다. 6절에 이렇게 쓰고 있지요.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8절을 함께 읽어 볼까요?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내가 이제 살겠다.’ 디모데가 데살로니가 교우들이 전해준 소식에 바울의 마음이 놓인 것이지요. 이제 살겠다는 겁니다. 데살로니가 교우들의 믿음이, 그들의 삶이 바울의 위로가 됩니다. 데살로니가 교우들의 믿음과 삶을 통해서 바울은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게 되는 것이지요. 데살로니가 교우들 덕분에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립니다.
전에도 한번 소개해드린적이 있지요. ‘우리는 누군가의 기도응답’이라고 말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우들은 바울의 기도응답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믿음과 삶이 바울의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고,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됩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기도응답입니다. 하지만 반대로도 생각할 수 있을겁니다. 데살로니가 교우들의 삶과 믿음은 바울의 기도응답입니다. 반대로 바울도 데살로니가 교우들을 통해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의 위로와 기쁨과 은혜의 역사를 경험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누군가를 위해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의 위로와 기쁨과 은혜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우들을 사랑한 것처럼, 누군가를 사랑할 때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이지요.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했던 말은(행 20:35) 참으로 복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예수께서 ‘서로 사랑하라’라고 하신 말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하신 말씀은 단순한 명령을 넘어섭니다. 우리는 사랑할 때 이 땅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우리는 사랑할 때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합니다. 사랑으로 누군가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느끼고,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나라를 삽니다. 그러니 우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우들을 사랑한 것처럼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들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그들의 믿음과 삶을 통해 위로와 기쁨과,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들을 경험하는 복이 함께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이렇게 고백해보면 좋겠습니다. ‘나는 누군가의 기도응답입니다.’ 옆사람을 바라보시며 이렇게 축복하면 좋겠습니다. ‘당신은 누군가의 기도응답입니다.’
미리 준비된 환난: 영광과 함께 고난을 받는 성도의 길
미리 준비된 환난: 영광과 함께 고난을 받는 성도의 길
오늘 바울의 편지를 보면 이 외에도 눈에 띄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우들이 겪는 환난에 바울이 무척 무거운 마음으로 근심한 것과 별개로 바울이 이런 환난을 미리 짐작했다는 것입니다. 4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씁니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장차 받을 환난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는데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우리가 전에 여러분들에게 환난이 있을 것이다, 하고 말했는데 그야말로 말한대로 되지 않았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너희와 함께 있을 때’가 언제일까요?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오래 머물지 못했기 때문에 아마도 데살로니가 교우들이 바울에게서 복음을 전해들을 때, 혹은 그 복음을 받아들이고 초신자로 지내던 어느 때였겠지요. 아주 초기에 이 이야기를 먼저 했던 것을 감안한다면 바울의 복음에서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처음부터’ 핵심내용이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거나 가르칠 때 ‘환난’에 대한 이야기를 빠트리지 않았던 것이지요. 성경에 수록된 바울의 편지 중 데살로니가전서가 가장 먼저 기록된, 초창기의 서신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반대로 가장 마지막에 기록된 편지, 후기에 작성된 것이 로마서입니다. 로마서에서는 바울이 전한 복음의 메시지를 보다 다듬어진 말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7절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바울은 이것이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사는 삶의 본질로 보았던 것 같습니다.
예전에 한 특강 강사에게서 이런 말씀을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일즈맨이다.’라는 겁니다. 세일즈맨은 상품을 판매하는 사람이지요. 이들은 사람들이 오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판매합니다. 세일즈맨은 필요가 있어서 물건을 사러 오는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찾아가서 그 상품을 사야하는 필요를 느끼게 만드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무척 어려운 직업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전하는 ‘복음’이 바로 그런 것이라는 말이지요.
세일즈는 낯선 사람들이 애초에 필요한 물건이 아닌 것을 ‘사고싶은 마음’이 들도록 만들어야 하기에 참 어려운 일입니다. 없던 마음이 생기게 하기 위해서 상품을 돋보이게 만들고,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하고, 상품의 장점은 부각시키고 단점을 가려야합니다.
복음을 그렇게 사람들에게 전한다면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요? “여러분, 이 복음을 들어보십시오. 여러분이 이 복음을 듣고 취한다면 여러분의 인생이 달라질 것입니다. 일단 한번 들어나 보십시오. 필요한 것은 다만 믿음 뿐입니다. 손해볼 것 하나 없습니다. 하지만 얻게 될 것은 무궁무진 합니다. 그저 죽은 후 보이지 않는 천국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행복을 얻게 될겁니다. 인생에 확신을 얻게 될 것입니다. 모든 지혜의 주인이신 분이 여러분이 성공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다 공급해주실 것입니다. 머리털에서 발끝까지 우리를 지으신 분이 여러분을 건강케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강건하고 잘 될겁니다. 이 땅에서 장수하고 번성할 것입니다. 여러분, 이 복음을 믿으십시오.” 사실 이것이 오늘날 많은 교회가 하고 있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복음을 그렇게 전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데살로니가 도시에서 월세를 주며 점포를 빌려 장막을 만드는 공방을 운영하면서 찾아오는 손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이야기하면서, 또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말씀을 강론하면서, 그렇게 자신의 선포를 듣고 이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바울은 말했을겁니다. “여러분, 유대인들이 고발하고 로마 법정에서 십자가 형벌로 죽으신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죽고 부활하셔서 로마의 권세도 죽음도 이기시고,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이셨습니다. 우리가 그와 함께 세례를 받는다면 우리는 그의 부활과 함께 하나님의 아들들, 딸들이 될 것입니다. 죽음과 세상의 권세가 더 이상 우리를 사로잡지 못하고, 온전한 자유를 예수와 함께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모든 것이 잘 될것이다, 저는 그렇게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예수의 죽음과 함께 세례를 받아 하나님의 새로운 가족이 된다면 그 복된 영광과 함께 환난도 찾아올 것입니다. 앞으로 어려운 시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이 세례를 받으시겠습니까?”
이것이 좋은 전략일까요? 우리가 바울의 복음을 듣는다면 과연 어떤 선택을 내릴까요? 애초에 필요도 없는 상품을 사게끔 하려면 나쁜 것은 철저하게 가리고, 좋은 것만 드러내야지요.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메시지’가 애초에 ‘어리석고 거리끼는 것’임을 잘 이해했습니다. 세일즈맨으로 따지자면 그가 판매해야 하는 상품이 이미 단점이 너무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단 것이지요. 고린도에 보낸 첫번째 편지 1장 23절에서 복음의 메시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고린도와 데살로니가와 같은 도시의 이방인들에게 어떻게 들렸을지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십자가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입니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다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방인들, 여러분 그리스 로마 사람들에게는 미련한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이들은 아무리 두드려도 깨지지 않을 것 같은 로마 제국에 항거하다 형벌을 받은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바위를 치는 계란을 누가 지혜롭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바로 그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그리스도라 부릅니다. 사람들이 로마황제를 찬양할 때 부르는 ‘구주’라는 이름으로 그를 부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매단 사람이 아니라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을 왕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에게는 이 모든 것, 우리의 믿음이 어리석어 보일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의 교우들에게도 십자가가 그렇게 들렸을 것을 이해하면서도 바울은 처음부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구주로 믿을 때 좋은 일만 생기리라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예수와 함께 세례를 받는다면 그 앞에는 환난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장차 받을 환난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는데.’ “여러분, 이 복음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모든 것이 잘 되리라고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앞으로 어려운 시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이 길에 환난이 드리울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신자들에게, 예수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사는 사람들에게 환난은 불가피한 것, 필연적인 것으로 선포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이 로마 제국에서 하루하루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로마제국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걸어가기 때문이지요.
칼과 창으로, 육중한 전차와 수많은 군인들을 내세워 끊임없이 다른 이들의 생명과 터전을 빼앗아 영토를 확장하는 것이 명예인 로마 황제의 통치 아래에서 교회는 벌거벗겨져 수치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예수를 왕으로 섬기기 때문입니다. 폭력과 엄혹한 형벌로, 피와 살이 튀기는 콜로세움의 자극적인 검투경기와 수많은 농노들이 피땀흘려 일구어낸 포도로 만든 술과 고기로 제국의 평화를 유지하는 로마 제국 안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을 통해 참된 평화가 왔고, 그 사랑으로 평화가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자기를 높이며 탐욕을 채우기 위해 타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로마 제국 속에서 교회는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신 예수를 따라서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런 복음은 로마 제국, 세상의 ‘스캔들’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쫓아가고 열광하는 것이 헛되고 거짓된 것임을 폭로하는 스캔들이지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가 붙들고 항변하자 예수님이 말씀하시지요.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 스캔달론이다.” 여기 스캔달론이 ‘스캔들’의 어원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셔야 한다는 것을 드러내시자 예수님과 함께 높은 자리에 오르고자 하였던 베드로의 자기중심적인 욕망을 폭로하였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이 베드로의 스캔들이 되자, 베드로도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넘어지게 하는 돌, 스캔들이 되었던 겁니다.
예수의 복음을 따르고, 십자가에 달린 이를 평화의 왕, 구세주로 고백하는 것, 자기만 사랑하는 것을 거절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로마 제국 안에서 살 때 그동안 로마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폭로되는 것입니다. 그간 얼마나 탐욕과 욕망의 노예가 되어 폭력과 착취로 타인을 짓밟고 희생하며, 자기를 우상으로 삼아 이기적으로 살아왔는지, 그동안 모든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져서 숨겨져 있던 것들이 ‘복음의 다른 삶’을 통해 드러납니다.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와 로마 제국이 대조될 때 세상의 실상이 드러나는 것이지요. 그런 복음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스캔들, 걸려넘어지게 하는 돌입니다. 그 돌을 치워버리고 싶어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그러니 복음을 오롯이 살아가는 자들에게 환난은 피할 수 없는, 불가피하고 필연적입니다. 예수께서 요한복음에서 하신 말씀을 생각하게 되지요. ‘빛이 세상에 와서 어둠을 비추니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여서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자신의 행위가 드러날까싶어 빛으로 오지 않는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고, 복음의 삶을 살아서 세상의 빛으로 산다면 우리가 겪는 환난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빛이 세상의 어둠을 드러내기 때문에 어둠을 드러내는 빛은 세상의 스캔들이 됩니다. 넘어지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정말 빛으로 산다면 그 넘어지게 하는 것 치우려는 자들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우리는 여전히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자본과 탐욕을 지혜로 삼고 자기를 우상으로 삼는 세상 속에서 예수를 하나님의 지혜와 온 우주의 통치자로 여기며, 근본적으로 다른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바울은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복음을 살게 되면 장차 환난도 함께 받게 될 것입니다.’
환난을 이기는 두 가지: 소망과 사랑
환난을 이기는 두 가지: 소망과 사랑
이것이 필연적이라면, 예수와 함께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에게 불가피한 일이라면 이 환난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믿음을 흔드는 고난 가운데서도 이 걸음을 이어나갈 수 있을까요? 데살로니가 교우들은 어떻게 그 환난을 견디어 내고 오히려 그들의 삶과 믿음이 바울의 위로와 기쁨이 될 수 있었을까요? 오늘 말씀 속에서 우리는 한 가지 위로와, 우리의 환난을 뚫고서 지나갈 답을 듣게 됩니다. 본문 2-3절을 함께 읽어보았으면 합니다.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이는 너희를 굳건하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 아무도 이 여러 환난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위하여 세움 받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
여기서 바울은 디모데를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니까?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 이 본문을 원문으로 보면 한글 번역이 의미를 축소시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일꾼’이라는 말이 συνεργὸν τοῦ θεοῦ(쉰-에르곤 투 데우)로 쓰고 있는데, 우리가 쓰는 개역개정에서는 ‘쉰 에르곤’이라는 말을 ‘일꾼’으로 번역한 것이지요. 이 말은 두 단어가 합쳐진 것입니다. ‘쉰’이라는 말은 ‘함께’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다른 하나 ‘에르곤’은 ‘일, 행위’를 뜻합니다. 직역하면 ‘함께 일하는 사람’이라는 말이지요. 달리 말하면 ‘동료’, ‘동역자’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가리켜 ‘그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 하나님의 동료, 동역자’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바울은 지금 굉장히 디모데를 높여 부릅니다. 바울이 자주 쓰는 말에 ‘둘로스’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종’이라는 말이지요. ‘종’은 ‘주인’의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자주 자신과 동료들을 하나님의 종,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릅니다. 종과 주인의 관계는 동료, 동역자의 관계와 다릅니다. 그만큼 바울이 디모데를 ‘쉰에르고스’ ‘동료, 동역자’라고 부른 것은 굉장히 특별하지요. 바울이 디모데를 가리켜 하나님 옆에있는 사람, 하나님 옆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이라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이 말을 아주 쓰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말을 사용할 때는 언제나 ‘바울 자신의 쉰에르고스’라고 씁니다. 함께 복음 사역에 헌신한 사람들을 가리켜 ‘나의 동역자’, ‘나와 함께 수고하는 자’라고 쓰는 것이지요. 한 가지 예외가 고린도전서 3장 9절인데,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라는 말을 씁니다. 하지만 제3자를 두고서 ‘하나님의 동역자’라는 말은 오직 데살로니가전서 3장에서 디모데에게 쓴 경우가 유일합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이상하게 들릴 수 있는 것이지요.
어째서 바울은 디모데를 하나님의 동료, 동역자라고 부를 수 있었을까요? 디모데가 바울과 함께하기 때문일까, 장차 교회의 젊은 지도자, 목회자가 되기 때문일까? 아니면 권위있는 예루살렘 교회의 파송을 받았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습니다. ‘쉰-에르고스’ 이 말을 단순하게 생각하면, 그가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디모데가 행한 하나님의 일은 무엇입니까? 다시 2절과 3절을 보면 ‘너희를 굳건하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 아무도 이 여러 환난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함이라.’ 위로와 돌봄. 디모데는 환난 중에 있는 데살로니가 교우들을 위로하는 손길입니다. 믿음이 약해 흔들리는 데살로니가 교우들을 붙들어주는 손길입니다. 아직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분치 않은 데살로니가 교우들을 가르침으로 든든하게 하는 손길입니다. 로마 제국이 그들에게 갖다주는 환난 중에서 힘있게 예수를 그리스도로, 하나님을 왕으로,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라 교회로 살도록 곁에서 함께 붙드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일을 하는 디모데는 그래서 하나님의 동역자가 됩니다.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사야를 통해 전하신 이 말씀처럼 디모데는 하나님의 오른손이 되어 데살로니가 교회를 붙들어주는 것이지요.
디모데 뿐이겠습니까? 조금만 관점을 바꾸어 볼까요? 오늘 이야기는 바울이 근심하고 염려하며 애가 타서 하나님의 동역자 디모데를 보내었다,는 이야기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바울은 돌아온 디모데가 전해준 이야기를 듣고서 오늘 편지를 썼다고 하지요. 데살로니가 교우들에게로 가서 그들에게 위로를 전하고 환난 중에 흔들리는 그들을 붙들어주었던 디모데가 돌아와 전해준 데살로니가 교우들의 이야기를 통해 오늘 바울이 하는 고백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제 살겠다.’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우리가 모든 가난함과 어려움 중에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다. 너희가 주 안에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섰다는 소식을 들으니, 이제 우리가 살겠다.’(살전 3:8-9) 그러면 데살로니가 교우들 역시 쉰-에르고스, 하나님의 동역자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교우 여러분, 우리가 서로 그렇게 하나님의 손이 되어줄 수 있기를 하나님 앞에서 다짐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서 서로 사랑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한다면 우리는 서로를 통해 하나님의 위로와 기쁨과 은혜의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복음의 길 위에 서서 걸어가는 도중에 환난을 당하고 흔들릴 때 서로 붙들어주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그리하여 서로를 통해 ‘이제 내가 살겠다’ 고백하는 그런 사람들이 된다면, 하나님의 손이 되어서 하나님의 동역자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서로를 통해서, 교회를 통해서 넉넉하게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게 되겠지요.
우리가 서로에게 선한말을 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서로의 아픔을 보듬고 연약함을 붙들며, 서로를 위해 격려하고 위로함으로써, 곁에서 흔들리는 믿음을 기꺼이 붙들어줌으로써 하나님의 손, 하나님의 동역자가 된다면, 그 부르심에 순종한다면, 우리에게 결코 좋은 일들만 있지는 않겠지만 그 모든 일을 넉넉히 이기고 은혜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부르셨습니다. 서로를 향한 사랑을 나타내보임으로써, 서로를 위해 기도함으로써, 서로에게 위로와 기쁨이 됨으로써 하나님의 손길,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참 복된 교회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