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7.07. 주일4부예배. 너는 돌아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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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디모데후서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서론
서론
혹시 이런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나요? (PPT Cut 1) “건강한 명사는 형용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 말은 목회자들의 목회자라고 불렸던 고 유진 피터슨 목사님이 10년 전 쯤 쓰신 “목회자의 영성”이라는 책에 등장하는 문구입니다. 그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서 명사가 오염될 때 형용사를 필요로 하게 된다면서 온 교회로 하여금 자신의 실상을 돌아보게 했죠. 더 이상 교회라는 단어 하나로 모든 교회를 묶어낼 수가 없고, 크리스천이라는 단어 하나로 모든 크리스천을 묶어낼 수가 없는 타락한 시대에 경종을 울리는 놀라운 문장이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센세이션을 일으켰던지 한동안 교회의 설교나 기독교 서적에 “진짜”, “Real”, “참” 같은 말이 붙은 제목들로 가득했던 것이 기억에 생생합니다.
그로부터 10년이 훌쩍 넘은 지금 교회는 어떻게 변화되었을까요? 다른 나라의 경우는 일단 접어두고 우리의 경우를 집중해봅시다. 이 나라, 이 민족의 교회는 과연 하나님의 경고를 귀기울여 듣고 진짜가 되었을까요? 이제 더 이상 교회를 말할 때, 크리스천을 말할 때 진짜, Real, 참 같은 말이 필요없을 정도로 우리는 건강함을 회복했을까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지금 이 민족의 교회는 그때보다 더욱 병들어 있는 듯 보입니다. 그때에는 적어도 진짜가 되어야 한다고, 교회마다 회복을 외치며 발버둥치는 노력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노력마저 식어버린듯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특히 경건이라는 부분에서 그렇습니다. 경건은 우리의 신앙 생활의 필수적인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이 경건이라는 말 자체가 너무 낯설어 졌습니다. 장로교 신앙의 기초를 놓았다고 할 수 있는 존 칼빈은 기독교 강요라는 책의 서문에 “프랑스 민족의 기독교 신앙에 도움을 주려” 이 책을 썼다고 밝혔고, 앞으로 적어갈 내용은 구원과 경건한 삶에 대한 기본 지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신앙은 크게 구원과 경건한 삶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지금 우리의 처지는 이 경건이라는 말부터가 어색한 지경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경건이라는 단어가 성경에 적게 등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축복이라는 단어만큼이나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경건인데, 우리에게 축복은 너무나 익숙하지만 경건은 너무나 낯설죠? 그러니 이 민족의 교회가 병들고 잠들어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조세호씨가 안재욱씨의 결혼식에 왜 못갔겠습니까? 모르니까 못 간 것 아닙니까? 우리가 왜 참된 경건에 이르지 못하겠습니까? 몰라서 그렇습니다.
(PPT Cut 2) 여기 두 장의 사진이 있습니다. 두 사진 중에 어떤 사진이 진짜 경건에 가까운 것일지 한 번 골라보세요. 겉으로 보여지는 것만을 보고 왼쪽이 경건해보인다고 선택했다면 우리는 경건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이 분명합니다. 겉으로 나타난 것 때문에 오른쪽은 경건과 멀어보인다고 생각했다면 우리는 경건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왜 지금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감이 좀 오십니까? 겉으로 보여지는게 전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모든 교회가, 모든 그리스도인이 겉으로 보여지는 것으로는 다 경건해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상을 파고들어보면 어떨까요?
(PPT Cut 3) 불륜, 성폭행, 횡령, 폭행, 도박, 세습. 이것이 이 나라, 이 민족의 교회의 실상입니다. 여러분은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바울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마지막 때에 있을 모습들에 대해 경고합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마치 바울이 내 모습을 들여다보고 써놓은 것 같지 않습니까? 겉보기에는 그럴듯하게 보이나 실상은 끔찍한 것들로 가득한 사람,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없는 사람, 과연 나는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까 사진에 나온 이들은 이미 들켰고, 나는 아직 들키지 않았고 정도의 차이밖에 없지 않나요?
말씀에 기록된 그대로의 모습이 우리 안에 버젓이 일어나고 있었음에도, 아무런 자각도 경각심도 없이 그저 죄악의 물결에 휩쓸려가고 있던 우리의 모습이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바울은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올 것이라 분명히 경고했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말하는 고통이 어떤 강제적인 핍박과 박해로 인한 것이리라 쉽게 오해하곤 합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십시오. 바울은 분명 우리 스스로 타협하여 우리의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을 잃게 만드는 미혹과 유혹이 가득할 때 겪어야 하는 고통을 말합니다.
우리는 미혹과 유혹에 넘어가 병들어 있습니다. 어쩌면 이제는 스스로 일어날 힘조차 잃어버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경건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되어버렸으니까요. 오늘 말씀이 선포되는 가운데 치유와 회복이 일어나길 간절히 소원해봅니다. 주님, 우리로 진리를 알게 하옵시고 진리의 길로 행하도록 인도하옵소서...
본론
본론
경건이란 무엇인가? 토마스 왓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PPT Cut 4)
“나는 보통 경건이란 하나님께서 인간 안에 새기고 만들어 놓으신 것으로, 인간이 육적인 존재에서 영적인 존재가 되게 하는 것이라고 답한다.”
토마스 왓슨은 장로교의 신앙의 기초를 놓은 중요한 책 중의 하나인 하나인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작성한 탁월한 신학자요 목회자였습니다. 그의 이러한 경건에 대한 정의는 탁월하지만, 오늘날처럼 신학적인 소양이 떨어진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단번에 이해가 되는 문장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내용들을 간단하게나마 정리를 하고 다시 들여다본다면, 그래서 이 정의를 이해하게 된다면 이게 왜 탁월한 정의인지 공감하게 될 것입니다.
또 한 명의 탁월한 신학자요 목회자의 도움을 빌려야겠습니다. 존 칼빈의 말입니다. (PPT Cut 5)
“내가 경건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결합된 경외심인데,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지식이 그것을 불러일으킨다” “이 경건은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사랑하고 경외하며 주로서 순종하고 예배하는 것을 우리의 삶에 만들어낸다.”
경건이란 우리 속에 있는 새로워진 그 무엇입니다. 우리의 겉이 아닌 우리 안의 그 무엇, 우리의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만들어내는 중심이랄까 내면이랄까 마음이랄까 무엇이라고 부르던 바로 그게 새로워진 것을 경건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칼빈이 가르치듯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의 그것을 새롭게 하고, 우리 안에 새롭게 된 그것은 새로운 행동을 만들어냅니다. 우리 안에 새로워진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경외로 가득차 있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행동을 이끌어냅니다. 지금 제가 계속해서 설명하고 있는 그것이 무엇일까요? 어렴풋이 짐작이 되실 겁니다.
자 다시 한 번 토마스 왓슨의 말을 빌려보겠습니다. (PPT Cut 6)
한 사람 안에 경건이 만들어질 때, 그 사람이 새 영혼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이전과는 다른 마음을 갖게 된다.
자, 이제 명확해졌습니다. 경건이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만들어진 새로운 마음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약 600년 전, 예레미야와 에스겔은 이러한 예언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두 예언자는 함께 소리 높여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 될 날이 올 것에 대해 예언을 했지요. 그 날이 오면 우리의 마음은 이전과 달리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행동을 이끌어내는 새로운 마음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이 변화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우리 속에 두심으로 일어날 것이구요.
이 예언이 있고 대략 600년이 흘러 마침내 예언이 성취되는 날이 이르렀습니다.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오셔서 약속된 예언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와 저주를 짊어 지심으로, 그래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이제 모든 주를 믿는 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시고,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 변하는 시대가 열렸습니다.
이 놀라운 역사의 증인인 베드로가 이렇게 담대하게 선포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또 한명의 증인인 바울도 함께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로마서 12:2 (NKRV)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에베소서 4:22–24 (NKRV)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령의 선물을 받아라. 마음을 새롭게 하는 변화를 받아라. 마음이 새로워진 새로운 인간이 되어라.
여러분들은 성경에 약속된 성령의 선물, 마음의 변화를 받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새로운 마음 즉, 경건을 여러분 속에 일으키셨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들은 아직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교회에 와서 아무리 종교적인 모습을 보인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아마 대부분이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새로운 마음을 주시긴 하셨다고, 경건을 일으키시긴 하셨다고 고백할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 안에 일으켜진 경건이, 새로운 마음이 우리 속에서 가려지고 힘을 잃어간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중심을 들여다보며 정직하게 판단해보십시오. 경건이 우리의 마음 전체를 진리의 빛으로 가득 비추고 있습니까? 경건이 우리의 마음 전체를 선한 능력으로 가득 채우고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의 삶 구석구석 까지도 경건이 맺은 열매로 가득하다 할 수 있습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오히려 반대입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의 타락한 본성은 우리 마음을 거짓의 구름으로 메우고, 악한 정욕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도무지 경건이 우리 삶에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저는 지금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의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매주 예배의 자리에 나와 1시간 남짓 찬양하고 말씀을 들으며 기도하는 사람들, 단지 그것뿐인 사람들, 그저 경건의 모양만을 가진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 얼마나 엄중한 심판이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있는지 도무지 모르시겠습니까?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고 완악한지, 이제 우리는 예배마저 우리의 만족을 위해 사용합니다. 찬양과 말씀과 기도는 우리의 정서적이고 지적인 만족을 위해 제공되는 훌륭한 서비스가 되버렸습니다. 십자가의 보혈마저도 그저 우리의 죄 지은 흔적을, 그로 인해 찾아오는 죄책감을 지우는 지우개처럼 되버렸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마음을 채우고 다시 세상으로 나가며 우리는 말합니다. “주님 이번 주도 끝내줬어요. 이정도면 주님도 꽤 만족하셨을거라고 생각해요. 아..! 따라오시겠다는 말씀은 마시고 그냥 여기 계셨으면 좋겠어요. 고생스러우시잖아요. 대신 다음 주에 더 훌륭하게 예배드릴게요. 주님께서도 다음 주에 더 많이 채워주실거라고 믿습니다. 기대할게요! 다음 주에 만나요~”
도대체 누가 섬기는 자고 섬김을 받는 자인가요? 예배라는 형식은 있고 예배자라는 탈은 썼으나 예배가 아닌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속한 것들을 마치 언제든 내키면 꺼내어 쓸 수 있는 창고에 쌓아둔 물건처럼 생각하곤 합니다. 우리의 죄를 덮으시는 사랑, 우리의 무지를 비추시는 진리의 빛,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선한 능력 같은 것들이 무슨 자판기에서 버튼을 누르면 나오는 상품인 줄 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라는 부적을 꺼내들기만 하면 언제나 우리가 원하는 것들이 짠하고 하늘에서 내려올 것 같습니까? 그럴 리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속한 것들은 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주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잊고 살아갑니다.
끔찍한 결말을 맞고 싶지 않다면, 지금부터 제 설명에 귀기울이십시오. 아까 말했듯 우리를 언제나 사랑으로 빛으로 능력으로 충만하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우리 속에 성령을 두신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서 일하셔서 새로운 마음을 만들어내시는데, 그것을 우리는 경건이라 부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없는 마음이라는게 있습니까? 어떤 인격에게 속하지 않은 마음이라는게 있을 수 있냐는 겁니다. 그럴 수는 없겠지요. 이 새로운 마음도 분명히 주인이 있고 어떤 인격에게 속해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 마음은 누구의 것일까요? 우리 속에 만들어내시긴 했지만 이 새로운 마음의 주인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새로운 마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요약하자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시고, 성령님께서는 우리 속에 일하셔서 예수님의 처소를 만드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속에 계십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 속에 있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새로운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이기에, 그 안에는 사랑이 가득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새로운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이기에, 그 안에는 진리가 가득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새로운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이기에, 그 안에는 능력이 가득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로잡아 우리의 마음을 온통 예수님의 마음으로 가득 채우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사랑으로, 진리로, 능력으로 충만해지길 원하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억지로, 강제로 그렇게 하시지는 않으십니다. 이는 마음과 마음 사이에, 인격과 인격 사이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억지로 하는 사랑은 참 사랑일 수 없고, 강제로 하는 순종은 참 순종일 수 없다는 것 쯤은 우리는 너무 잘 압니다. 예수님은 가장 예수님다운 방법으로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영 어두워지지 않도록 완전히 능력을 잃지 않도록 신비한 방법으로 우리를 지키고 계시고, 우리가 기꺼이 마음을 열어 주님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우리의 마음 전체가 주님의 마음이 되길 꿈꾸시며 끝없이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경건은 마음과 마음 사이에서, 인격과 인격 사이에서 일으켜집니다. 오직 관계 속에서 주어지는 것이라구요. 기꺼이 우리 마음을 열어 주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내 마음 전체를 주님께서 채워가시도록 내어드리는 자에게는 주님께서도 기꺼이 일하실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사랑과 진리와 능력으로 가득 채우셔서 우리 삶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들이 가득 열매맺도록 이끄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주님께서는 그저 기다리실 것입니다. 또한 주님은 우리의 거짓되고 욕망에 찬 손짓에는 응답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결코 주님이 속으셔서 우리에게 이용당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정직하고 간절한 손짓에는 늘 신실하게 응답하실 것입니다. 언제나 풍성한 긍휼로 우리의 생각보다 더욱 크게 일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무엘상 2:30 (NKRV)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또한 시편 기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편 2:12 (NKRV)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하나님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통해 똑같은 말씀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여기서 “부인하다”라고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 “ἀρνέομαι”인데, 이 단어는 의도적으로 숨기고 외면하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저 경건의 모양만으로 만족하는 자들을 향해 주님은 오늘도 손을 펼치고 계십니다. 우리 속에서 일하셔서 사랑과 진리와 능력으로 가득 채우시려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며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주님의 음성과 손길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애써 숨기고 외면하지 마십시오. 그러한 태도로부터 분명하게 돌아서십시오. 돌아선다면 우리 속에 일하시는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경건의 능력이 어떤 것인지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예수님과의 친밀함이라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이 친밀함이 없이는 누구도 경건의 능력을 맛볼 수 없고, 경건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너무 많이 실패하고 맙니다. 주님과의 친밀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온전히 주님의 것이 되기까지 더욱 자주, 더욱 깊이 주님을 찾고 의지해야 합니다. 기쁨으로 찬양하며 마음을 주께로 활짝 여십시오. 깊이 말씀을 묵상하며 진리의 빛으로 마음을 비추십시오. 진실하게 기도하며 선한 능력을 마음을 채우십시오. 날마다, 매순간 그렇게 하십시오.
이것은 분명 훈련이 필요한 일입니다.
디모데전서 4:7 (NKRV)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경건의 능력을 맛보고 참된 경건에 이를 수 있도록 오늘 각자가 구체적인 결단을 내리시길 주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말씀을 정리하려 합니다. 경건이란 무엇입니까? 우리 속에 일어난 새로운 마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 되도록 기꺼이 주께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께서 우리 안에 채우시는 사랑과 진리와 능력을 따라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경건의 시작과 경건의 마침이 전부 예수 그리스도인것이 놀랍지 않으십니까? 이 진리를 깊이 깨달은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경건해지기 위해 실제적인 노력을 하십시오. 어떤 사람은 경건에 대해 대단히 여겨질 정도로 논할 수 있으면서도 정작 자기 영혼은 그 능력과 달콤함을 느끼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팡이가 모세의 손에 들려 하나를 이루었을 때에는 많은 선한 일이 나타났으나 모세의 손을 떠났을 때에는 뱀이 되었음을 기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와 친밀함을 누리지 못한 가룟 유다는 그분에 관하여 정말 자세히 전해줄 수 있었겠지만 결국 그 끝은 파멸이었음을 기억하십시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