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창한 나무가 꾸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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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240426 금요기도회 [데살로니가전서 1:1-10]

제목: 창창한 나무가 꾸는 꿈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1:1-10

데살로니가 전서 - 바울의 선교와 편지

신약성경에는 모두 27개의 문헌이 포함되어 있지요. 그 중에서 ‘바울’과 관계된 편지가 13편이 있습니다. 성경에 수록된 이 편지들 중에서 가장 일찍 작성된 편지는 어떤 것일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 교회로 보낸 첫번째 편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박해자였던 바울이 회심하고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서 선교하던 사역 초기의 편지라고 볼 수 있겠지요.
사도행전 17장에는 바울이 어떻게 데살로니가 지역에 이르게 되었는지가 나옵니다. 빌립보에서 전도하다가 감옥에 갇히고 풀려나 데살로니가에 이르게 되었지요. 아마 이 때 함께 선교하던 누가는 빌립보에 남고 바울과 실라만 데살로니가로 갔던 것 같습니다. 사도행전을 참고하면 두 사람이 데살로니가에 체류했던 기간은 그리 오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지요. 사도행전 17장 2절에서는 이렇게 씁니다.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했다고 쓰고 있기 때문이지요.
바울은 도시를 돌아다니며 하나님의 도를 전할 때 전략을 세웠습니다. 가장 먼저 유대인들이 모인 회당에 들어가 말씀을 강론했지요. 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께서 하셨던 것처럼 성경을 펴 읽고 구약성경을 예수님에 대한 말씀으로 해석을 합니다. 사도행전은 이렇게 세 번의 안식일을 보냈다고 전합니다.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전서을 읽어보면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이방인들이 많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9절과 같은 본문이 그렇지요. 유대인들 뿐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활발하게 복음을 전했던 바울과 실라는 데 살로니가에서 충분한 시간을 가졌겠지만 세 안식일이라는 표현이 전해주듯 오래 머물진 못했을 겁니다. 사도행전 17장 5절에서 두 사람이 전한 복음이 유대인들을 격앙시켰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요.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다’ 결국엔 밤 중에 베뢰아로 피신하게 됩니다. 아쉬운 마음을 가지고서 데살로니가를 떠나게 된 것이지요.

바울의 감사인사 -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지지 않을 믿음

교우 여러분께서는 언제 ‘기쁨’을 느끼십니까? 우리 말에 ‘즐겁다’는 말과 ‘기쁘다’는 말이 서로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는 것 같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찾아보니까 ‘기쁘다’는 말은 ‘욕구가 충족되어 마음이 흐뭇하고 흡족하다’라고 설명을 하고, ‘즐겁다’는 말은 ‘마음에 거슬림이 없이 흐뭇하고 기쁘다’라고 씁니다. 얼핏 설명만 봐서는 크게 차이가 없는 것 같지요. 우리가 말의 뜻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실제로 그 말의 쓰임이니까요, 사전은 흔히 이 말들을 어떻게 쓰는지 이렇게 예를 적어둡니다. “즐겁게 지내다.” “나는 요즘 하루하루가 즐겁다.” “다시 만나게 되어 정말 기쁘다.” “시험에 합격한 것이 기뻐서 잠이 오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즐겁다’는 것은 나 자신의 내적인 상태, 내 안에서 흘러나오는 마음의 형편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반면에 ‘기쁘다’는 것은 나의 바깥에서, 외부에서 찾아오는 것이지요. 내게 찾아온 그 무엇으로 인해서 내 안에서 일어난 반응, 어떤 울림 같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퐁당퐁당 돌을 던지자”하는 동요가 있지요. 돌이 던져져서 냇물에 물결을 일으키는 것처럼, 기쁨이란 우리 바깥에서 찾아온 그 무엇에 만들어진 우리 마음의 물결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목사로 지내면서 기쁜 일은 아무래도 교우들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때란 생각이 듭니다. 병이 호전되었다든지, 나았다든지, 근심하던 이들이 기도중에 좋은 소식으로 들려온다든지, 말씀과 기도로 어려움 중에도 평안을 지켜나간다든지, 교우들의 이런 소식이 기쁨이 되지요. 개인적으로도 큰 기쁨과 감사가 되는 소식은 교우들에게서 말씀이 살아있는 말씀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입니다. 말씀을 통해 길을 찾고, 말씀을 통해 힘을 얻고, 말씀을 통해 어려움 중에도 순종했다, 말씀이 넉넉하게 이기게 하였다는 고백을 들을때 참 기쁨과 감사가 되지요.
바울도 그렇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바울 역시 자신이 복음을 전한 교회가 어려움 중에도 잘 자라고 있다는 소식이 기쁨과 감사의 제목이 되지요. 6절에서 그는 이렇게 씁니다. “여러분은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서 우리와 주를 본받는 자가 되었습니다.” 나아가서 바울은 그 마음에 넘치는 감격으로 데살로니가 교우들을 칭찬하기까지 합니다. 4, 5, 7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지요.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 여러분, 여러분의 택하심을 압니다. 우리의 복음이 여러분에게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마게도니아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에 관하여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지,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다시 오실 것을 여러분이 어떻게 기다리고 있는지 말입니다.” 대체 데살로니가 교회가 어떤 삶을 살았길래 사도의 기쁨과 감사와 자랑이 되었을까요? 이 교회는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줄 수 있을까요? 본문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우들의 어려움 - 데살로니가라는 도시

며칠 전에 노회를 다녀오는데 차 안에서 장로님들께서 이런 말씀을 나누셨습니다. 전국에 맛집이라고 소문난 먹거리들의 뿌리가 인천에서 나왔다는 것이지요. 그러자 한 장로님께서 ‘아무래도 인천이 외지 사람들이 많이 출입하던 항구도시니까 그런 것 아니었을까요?’하고 답하셨습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제물포’를 찾아보니까 19세기 말에 외국과 두 차례 조약이 체결되면서 이곳이 개항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한국 최초의 서구식 공원인 자유공원도 이 즈음 만들어졌다고 하지요. 사람과 물자가 활발하게 오고가고, 또 외국의 말과 문화들이 넘쳐나는 도시, 제물포라는 항구를 낀 인천이라는 도시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자연히 새로운 것에 거부감이 없고, 전에 없던 창의적인 음식들도 많이 발전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데살로니가라는 도시도 비슷한 형편에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는 인천보다도 더 개방적이고 유행이 빨랐을 겁니다. 이 도시는 로마 제국 안에서 ‘마케도니아’라고 불리는 행정지역의 수도였습니다. 그래서 ‘마케도니아의 어머니’라는 별칭도 붙었지요. 동서로는 로마 제국이 닦아놓은 커다란 도로가 지나가고 있었고, 남쪽으로는 커다란 항구가 있어서 수많은 배들이 오고갔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데살로니가에는 구할 수 없는 것 빼고는 다 있다.” 사람이든, 물자든 풍부할 뿐 아니라 모든 것이 다양한 도시였지요.
만나볼 수 없는 인종이 없었고, 또 찾아볼 수 없는 신전이 없었습니다. 데살로니가는 로마 제국 안에서도 자치권을 가지고 도시의 행정을 처리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자유도시’였습니다. 이것이 상당한 특권이었지요. 그러다 보니 여러모로 도시 전체의 분위기가 로마 제국에 순종적이고 로마 황제에게는 충성을 다하는 도시였습니다. 도시와 시민들이 가진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지위, 그 특혜가 바로 제국 로마, 평화의 왕인 로마 황제에게서 오는 것이었기 때문이지요. 사람들의 삶의 그 풍요와 화려함을 로마에 직접 빚지고 있으니 로마 친화적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도시들에 비해서도 로마 시민으로서 참여하는 국가 종교인 황제 숭배가 아주 열심히 이루어졌습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신들을 위한 신전들이 크게 늘어섰지요. 모든 것이 풍부하고 풍요로운 이 도시에서 소비와 향락과 사치가 주는 즐거움을 주관하는 디오니소스 신과, 큰 항구를 가진 특색에 따라서 바다의 신 포세이돈 신앙이 사람들의 인기를 끌었지요.
그런 도시, 1세기의 로마 제국 안에서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 교회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요?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변화를 수반할까요? 어쩌면 많은 사람들에게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큰 변화를 가져오는 일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일요일에 없던 고정적인 스케쥴이 생기는 것, 전에 읽지 않던 책을 읽는 것, 전에 가지지 않던 침묵과 명상의 시간을 갖는 것 정도가 변화라면 변화일까요? 예배하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것 정도 말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내적인 변화만을 가리킬지도 모릅니다. 그렇지요. 우리 마음에 할례를 받고,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기경하고, 그래서 마음의 밭이 새로워지는 것, 새 존재가 되는 것, 삶의 방향을 바꾸고 생각과 태도와 행동의 터전을 옮기는 것, 이 모든 것이 성경이 강조하는 아주 중요한 변화입니다. ‘회심’이라고 하지요. 여기에 더해 자라나는 것이 ‘성화’입니다. 회심과 성화를 통해 우리 삶의 모양이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1세기 로마 제국 안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런 변화와는 질적으로 달랐습니다.
1세기 로마 제국, 데살로니가 도시 안에서 로마의 국가 종교인 황제 제의에 참여하고 작은 단위의 경제 공동체를 만들어 생활하던 사람들, 특히 유대인에게는 이방인이라 불리던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어제와 다른 삶에 떨어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오늘 대한민국에 살다가 외국의 밀림이나 사막 한가운데 떨어지는 것 같지요. 지금까지 맺어왔던 수많은 관계와 네트워크에서 끊어지는 것을 뜻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단순히 만나던 사람 만나지 않는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생계의 어려움에 직면하고 생명의 위협을 받는 일이기도 했지요.
로마 제국 안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일터는 단순한 직장과 달랐습니다. 수많은 직업은 그 자체로 공동체 역할을 했고 그 안에서 일상의 수많은 일들을 공유했습니다. 대장장이에게는 대장장이의 신이 있고, 천을 짜는 이들에게는 천을 짜는 신이 있는 것처럼 일터의 공동체는 또한 함께 예배하는 종교공동체이기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될 때, 이 공동체에서 떨어져나가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더 일자리를 찾을 수 없게 되는 것, 노동해서 열심히 일하고 생산할 물건을 팔 수 없게 되는 것, 경제적인 궁핍을 겪어야 하는 것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로 가정신이 있었습니다. 가정 역시 종교공동체였지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더 이상 그리스도와 더불어 다른 신들을 함께 섬기지 않는다는 것은 가족들에게 외면당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럼 사회에서는 어땠을까요? 그리스도인이 된 데살로니가의 교우들은 더 이상 도시의 축제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만을 참 하나님으로 믿기 시작할 때 황제가 베풀어준 로마의 평화와 데살로니가 도시의 모든 특권에 감사할 수 없게 됩니다. 황제가 이 땅의 참된 통치자, 우리의 삶에 평화와 풍요를 가져다주시는 참 신이시다, 온 도시가 열광할 때 그 황제의 통치 아래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유대인 청년이 참 하나님, 온 우주의 통치자이다, 하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고 냉소적인 이들에게는 비웃을만한 일이 됩니다. 그래서 바울이 십자가의 복음이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라고 이야기했던 것이지요. 나아가 로마 제국과 황제에 충성된 신민이라 자처하는 데살로니가 시민들, 이웃들에게 이런 태도는 불경건한 사람들, 불순한 의도를 가진 사람들, 독선적인 사람들, 사회의 평화를 깨트리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만민의 ‘적’이 되는 것이었지요.
로마 시대에, 데살로니가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교회가 된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순식간에 ‘섬’이 되는 것이었지요. 모든 관계가 끊어지고 단절되고 고립되는 것. 더 이상 사람들의 신뢰를 받을 수 없고 경제적으로 궁핍에 처할 수 밖에 없게되는 것, 어제까지의 평범한 호의가 오늘부터 적의로 뒤바뀌는 것을 경험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교회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이 9절에서 전하는 감사 인사의 이면에 담긴 데살로니가 교우들의 삶이었지요.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만일 누군가가 데살로니가 교우들에게 이렇게 묻는다고 상상해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어 좋은 일이 생겼습니까?’ 그럼 데살로니가 교우들은 어떻게 대답했을까요?

교회가 된다는 것은 가족이 된다는 것

교회가 된다는 것, 예수를 믿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이전의 삶에서 단절된다는 것이지요. 어제까지 누리던 경제적 지위, 정치적 자유, 존경과 편안하고 안락한 삶, 데살로니가 도시의 풍요와 즐거움과 환희와 축제, 로마황제의 신민이라는 자부심과 풍요와 부, 모든 것에서 등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어 좋은 일이 생겼습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들은 무엇이라 대답했을까요?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어서 사는 삶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지요.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고, 매 맞고, 여러번 죽을 뻔 하고, 태장과 돌을 맞고, 배가 침몰해 바다에 빠지고 강과 강도와 동족과 이방인과 시내와 광야와 바다와 거짓 형제들의 위험도 당하였고, 자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르고 굶고 춥고 헐벗었다.”고 말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우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어쩌면 그들이 또한 이렇게 대답하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가 되어서 가족을 얻었습니다. 형제를 얻고, 자매를 얻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이 말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바울이 자주 언급하는 이야기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9절에 이렇게 쓰고 있지요.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으니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우리가 너무 흔하게 이 말을 쓰다보니 바울과 데살로니가 교우들이 전하는 그 감동을 함께 느끼기가 어려운 듯합니다. 여기서 ‘형제’라는 말은 진짜 피를 나눈 형제를 뜻합니다. 데살로니가 4장 9절에서 ‘형제사랑’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필라델피아’라는 이 말이 교회가 세워지고 바울이 편지에서 이렇게 쓰기 전에는 친족,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 한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난 형제 사이에서만 쓰던 말이었지요. 피로 맺어진 가족 사이에 쓰던 이 말을 바울이 교회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게 된 사람 사이에서 씁니다. 교회는 진짜 가족이 된 것입니다. 교회가 된 사람들은 세상에서 섬이 되고, 새 가족을 얻게 된 것이지요.
교회가 가족이 되었다, 데살로니가 교우들이 가족을 얻게 되었다, 이 말의 뜻이 무엇일까. 그래서 바울의 감사가 다시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는 이 편지를 쓰면서 가장 먼저 이렇게 감사 찬양과 고백을 나눕니다.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우리가 오늘 소망의 인내까지는 다 살펴볼 수는 없지만 특별히 ‘사랑의 수고’라는 이 말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τοῦ κόπου τῆς ἀγάπης” 사랑의 수고라는 이 말에서 ‘수고’로 번역된 ‘코포스’라는 그리스어는 복음서에서는 흔히 ‘괴롭게 하는 것’ ‘번거로움’으로 번역됩니다. 바울 서신에서는 ‘일한 것’, ‘수고’ 따위로 번역되지요. 그러니까 ‘사랑의 수고’라는 말은 무엇입니까? 사랑으로 괴로움에 처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번거로움을 감당하는 일이지요. 사랑으로 일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수고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우들에게 이 사랑의 수고 중 하나는 문자 그대로 땀흘려 일하여 일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2장 8-9절에서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라고 전하는데, 여기서도 ‘수고’라는 말을 쓰고 있지요. 바울이 스스로 천막을 만들어가면서, 땀흘려 일하고 손에는 굳은살을 박혀 가면서 일했던 것, 그 노동을 가리킵니다.
마치 어머니가 어린 아이의 기저귀를 갈고, 밤새 우는 아이를 달래가며 양육하는 수고처럼, 마치 아버지가 하루 온종일 바깥에서 땀흘려 일하면서 괴로움을 감당하며 가족을 부양하는 것처럼, 데살로니가 교회, 교우들은 실제로 서로를 위해 일 했던 것이지요. 하루하루 그들의 삶에서 실제 마주치는 모든 어려움 어려움, 삶의 고난, 외로움과 고독, 차별과 소외, 적대와 비난, 때로는 박해와 폭력을 경험하는 형제, 내 가족을 위해 교우들은 서로가 사랑으로 하는 수고를 감당합니다. 기꺼이 어려움에 처한 형제를 위해 괴로움을 감당하고, 기꺼이 어려움에 처한 자매를 위해 땀흘리고 고생하고 애써 일했던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입니다. 이들은 서로를 위해 땀흘리고, 서로를 위해 괴로움을 감당하고, 서로를 위해 번거롭고 수고로운 일을 기꺼이 행합니다. 이들은 ‘가족’이 되었기 때문이지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하나님 아버지를 둔 이들은 혈연으로 연결된 형제라는 말을, 자매라는 말을 서로에게 쓰며 사랑의 수고를 더해갑니다. 교회가 되었기에 세상에서 섬이 된 사람들, 경제적인 궁핍과 삶의 위협을 겪는 이들이 땀 흘려 일해 번 돈으로 서로의 삶을 채워준 것이지요.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물이 잘 공급되어야 할겁니다. 시기에 맞는 적절한 일조량이 주어져야겠지요. 필요하다면 가지치기를 하는 수고도 있어야 할겁니다. 이 모든 돌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좋은 열매, 달고 향기로운 열매를 맺기 위해서 이 모든 것보다 결정적인 것이 있다합니다. 열매가 맺힐 즈음 되어서 찾아오는 ‘목마름’입니다. 비가 오지 않는 날들이 이어지고, 나무가 바짝 말라버릴 것처럼 태양볕이 내리쬘 때 나무는 가장 단단하고 달고 향기로운 좋은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열매 맺어야 할 때 비가 내려 목마름 없으면 어떻게 될까요? 물은 많지만 향기가 옅고 맛이 싱거운 열매가 맺힌다는 겁니다.
교회에 찾아온 고난이 그런 것 아니었을까요? 데살로니가 교우들은 고난을 통해 참된 교회가 됩니다. 고난을 통해 예수와 더불어 그들이 참된 가족임을 확인하지요. 그들은 고난을 통해 서로의 어려움을 위해 사랑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가족이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 위에서 땀흘리시고, 십자가 위에서 괴로움을 당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으로 땀흘리고 괴로움을 감당하는 데살로니가 교우들, 그들이 곧 바울의 기쁨과 감사가 되었던 것이지요.
교우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와 자매가 되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서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심으로써 새로운 가족을 얻게 되셨습니까? 저와 여러분에게 그러한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리스도의 형제와 자매가 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름으로써 우리에게 새로운 가족이 주어지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교회가 되었을 때, 우리가 교회가 되어 찾아오는 고난을 우리가 너무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으로 인해 참된 가족이 된 우리의 형제와 자매와 기꺼이 그 고난과 아픔을 나눈다면, 그리하여 우리가 서로를 위한 사랑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그 삶으로 들어가 기꺼이 괴로움의 멍에를 함께 겪는다면, 그 고난과 어려움이 도리어 우리에게 좋은 열매로 맺히게 될겁니다. 우리가 서로 그리스도와 함께 주어진 새로운 가족과 나의 아픔과 연약함을 나누며 서로 그 짐을 질 때 우리는 창창한 푸른 나무가 꿈꾸는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그 은혜가 우리와 함께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날이 갈 수록 하나님의 자랑,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가족, 그런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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