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 사는 성숙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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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서론
하나님은 오늘 이 자리에 나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를 기뻐 하십니다.
특히, 하나님 앞에 자원하는 심령으로 나와왔다는 것에 하나님은 더욱 기쁘실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처럼, 모든 관계는 자유하고 자발적인 관계 일때 진정으로 행복한 관계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이뤄집니다.
성령은 우리의 죄성을 밝히 보이시고 죄의 비참을 알려주시고 구원의 귀중함을 알게 하시고 우리에게 믿음을 알게 하십니다.
그 구원의 은혜에 믿음으로 화답하는 것은 우리의 자유의지 입니다.
그 어떤 억압이나 압력이 없는 상태에서 자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찬양과 사랑의 고백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가장 아름다운 예배요 신앙의 고백이 됩니다.
모든 종교는 의무가 수반이 됩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의무가 될 수 없고 그야 말로 순수한 자발적인 감정이고 자발적인 헌신으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 사울의 회심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사울은 진정한 사랑의 기술, 즉 사랑의 방법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것이 아닌, 조용히 다가와 부드럽게 나의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폭력으로 권력으로 절대 얻을 수 없는 인간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 잡는 것은 그분의 강력한 사랑의 힘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울이 바울이 되어가는 첫 걸음을 보여줍니다.
그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숙되어가는 과정 속에 그 영혼이 얼마나 깊은 자유를 누렸는지 집중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나는 예수를 믿음에 있어 아무것에도 얽메이지 않고 얼마나 자유롭게 그분을 섬기고 사랑하고 있는지 깊히 묵상하시는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시간의 자유
방향의 자유
하나님의 자유
1.시간의 자유
1.시간의 자유
음악을 악보대로 연주하는 것은 기본이고 그 표현을 얼마나 디테일 있게 하느냐에 따라 예술의 경지로 인정을 받습니다. 기술적으로 뛰어난 연주자들도 결국은 지휘자의 지도를 받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지휘자는 음정과 박자 뿐 아니라, 강약과 느리고 빠르고를 조절하여 그 곡의 감정을 최대한 살려 내는 즁요한 작업을 하는 사람 입니다. 그래서 지휘자에 따라 같은 곡도 다르게 해석 됩니다.
축구의 드리블도 감속과 가속이 중요합니다. 테니스도 배구도 강타를 때릴 때가 있고 연타를 때릴때가 있습니다.
결국 주어지는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고 그 시간을 빠르게 보낼 것인지 느리게 보낼 것인지 또 강한 힘을 들일 것인지 힘을 빼고 보낼 것인지를 조절하는 자유가 스스로에게 있을때 행복감을 느낍니다. 반대로 나에게 이런 자유가 없이 끌려다니며 환경과 조건에 따라 휩쓸린다면 순간 순간이 정신이 없을 것입니다.
회심의 만남이 있기 전의 사울은 자진모리 장단으로 몰아치는 것과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연속되는 포르테 시모의 강도 로 연주되는 듯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사울은 맹수와 같았습니다. 사울은 경주마와 같았습니다. 사울은 한 순간도 헤엄을 치지않으면 숨을 쉴 수 없는 참치와 같았습니다.
그때 다메섹 도상에서 부드럽고 잔잔한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의 인생은 잠시 멈추게됩니다.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그 시간 동안 세상은 멈춘 것같고
주께서 주시는 환상만을 보며 아주 특별한 영적 시간을 보냅니다.
주님께서 그의 눈을 막고 세상과 단절 시키시고 보여주신 환상 속의 세계는 주님의 말씀 하시는 데로 척척 이뤄지는 세계였습니다.
아나니아 라는 사람이 올 것이라면 정말로 왔고 그가 안수 하니 정말로 눈이 떠졌습니다.
시간이 멈춘 곳에서의 경험은 사울의 삶을 송두리채 바꿔놓았습니다.
눈을 뜨고 그의 육체는 다시 강건하여 졌지만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그를 진정으로 강하게 한 것은 그 사흘간 경험한 주님의 세계 였습니다.
시간을 멈출줄 아는 자유를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사울이 바울이 되는 과정에서 그 초창기 사역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보통 성공스토리는 전성기에 촛점이 맞춰저 있기 때문 입니다. 결론 부터 말씀 드리자면 사울의 초창기 사역은 살해위협과 불신, 알 수 없는 긴 공백기로 이뤄져 있습니다.
다메섹에서 잠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전합니다.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그랬더니, 사람들은 그가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고 놀라고 그를 배신자로 여겼습니다.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급기야 다메섹에 쫓겨나듯 도망 칩니다.
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리니라
그리고 예루살렘에 가서도 환영 받지 못하고
베드로와 요한 정도의 소수의 사도들만 만나고 헬라인들과 논쟁을 벌이다가 또 살해위협을 받고 자신의 고향인 다소로 쫓겨 갑니다.
우리가 아는 바울은 대 사도 입니다.
신약성경의 상당부분을 집필하였고
소아시아의 핵심적인 교회들을 설립했으며
당대의 유력한 왕과 정치인들 앞에서 전도했으며
이신칭의 교리와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 대한 탁월한 해설을 남긴 위대한 신학자 입니다.
그런 그의 초창기 모습은 초라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의 초창기에는 의문점이 남는 공백기가 존재 합니다.
바울이 회심한 시점을 AD 34년 정도 이고 그가 예루살렘을 방문하 시기가 37년 이라고 봅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다메섹에서 있던 기간은 아주 짧습니다. 사울은 이 3년 동안 어디서 무엇을 했을까요?
더글라스 레드포드는 이 기간을
바울의 숨겨진 세월(Hidden Time) , 잃은 시간(Missing Time)
이라고 명명 했습니다.
이 기간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다메섹에서 잠깐 전도하고
아라비아 사막에서 3년을 보내고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왔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보름을 지내다가 다소로 보내지고
그곳에서 10년을 보낸 후 안디옥 으로 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13년의 시간 이후와 이전으로 사울의 사역은 나뉩니다.
이 기점으로 그의 신학은 깊어졌고 선교사역은 더 체계적이고 활발해졌으며 그의 논쟁은 훨씬 강력한 교리적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사흘간의 환상체험을 통해 복음 전도자로 거듭났고
13년의 사막과 다소의 시간을 통해 더 성숙했습니다.
신학자들은 사울의 13년 동안 수도사 처럼 기도와 묵상만 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회심 후 즉시 복음을 전하는 사울의 성향은 13년이 지나 다시 역사 기록에 바울로 등장할때도 여전히 그의 추진력과 열심은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공백 기간에도 똑같이 복음을 전하는 삶과 성숙기를 가졌을 것이라 추축할 수 있습니다.
인생은 열정기와 성공기 그리고 실패의 반복 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열정기와 권태기 그리고 성숙기로 나누기도 합니다.
사울은 열정기를 지나 일종의 실패를 맛보고 그저 주저 앉아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성숙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13년은 잛은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충분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럴 가치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모세는 왕자의 신분을 내려놓고 40년 동안 과묵한 양치기로 살았습니다.
히든 타임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성경은 공통적으로 침묵하지만 그 후의 그들의 행적은 그 시간들이 그저 시간 낭비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기 계신 분들 중에 비자를 기다리거나 아니면 열심히 일할 기회를 기다리며 히든 타임즈를 보내고 있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사울이 그랬듯이, 시간의 주권을 갖고 자유롭게 충분하게 그 시간을 사용 하여 영적 성숙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정한 때가 되면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을 줄로 믿습니다.
거창한 시작도 위대한 비젼도 아닌 오늘 하루 하루의 성장 목표를 향해 정진 하십시오. 오늘 공평하게 주어진 24시간을 어떻게 하면 주님을 위해 쓸것인지 고민하며 사용 하십시오. 그러다 보면 그 시간의 쌓이고 주님의 시간이 만나면 빛을 발할 줄로 믿습니다.
2. 방향의 자유
2. 방향의 자유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인격을 짓밟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인간이 진정으로 인간이 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가두는 것은 죄이고 해방하는 것은 은혜이다.” -존 스토트-
예수를 구주로 영접했다는 것은 해방의 은혜를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유는 죄의 해방으로 부터 시작 됩니다.
죄 (히)“하타트”는 실수, 길을 잃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회개나 회심도 그 가던 방향을 돌린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죄의 해방이라는 것은 길을 잃었던 자가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방향을 찾는 과정 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이 자유인 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자유인의 조건에는 가고 싶은 곳을 갈 수 있는 거주 이전의 자유도 포함됩니다.
북한 같은 나라에서는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습니다.
북한 주민들은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자유는 있지만 방향이 없이 떠돌아 다니는 것은 진정한 자유 라고 할 수 없습니다.
대양을 항해하는 배가 목적 없이 해적선이나 난파선 처럼 헤메고 다닌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일종의 방황 입니다.
사울은 겉으로는 자유로운 여행자 였지만 예수를 만나고 나서야 나침반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향방 없이 열심히 뛰어다니며 신자들을 잡아 들였지만 향방 없이 공중에 헛주먹질을 하는 장수와 같이 그의 싸움에는 소득이 없이 희생자만 늘어났습니다.
목적지가 분명해야 방향의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사울의 13년의 히든 타임즈는 주님이 주신 나침반을 가지고 별자리를 보는 법을 배우고 그것을 이용해 항해를 하는 법을 배우는 기간 이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 그는 예수는 그리스도 라는 나침반을 열심히 전하기도 하고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방향을 찾고 보니, 파도도 조류도 나아가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비바람 몰아쳐도 돌이 날아와도 맞고 가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나침반이 정확히 북쪽을 가르키고 있다면 가야 합니다. 예수가 그리스도 라고 가르키고 있다면 가야만 합니다.
사울이 비난과 살해위협 중에도 굽히지 않고 힘을 더 얻어 예수가 그리스도라 증언 하였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우리에게 익숙한 이 복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이라는 고백은 신학적으로 바울만의 독특한 고백 입니다.
이 문구는 사도행전 다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고 성경 학자들은 말합니다.
신자를 강하게 만들고 새힘을 주고 불신과 저항 속에서도 계속해서 십자가 향하여 걸어가게 하는 힘은 복음에 대한 확신이고 하나님을 향한 방향이 주는 확고한 믿음 입니다.
세상과 죄악의 영향을 벗어나서 자유롭게 하나님을 향할 수 있는 자유로운 항해자가 되는 것이 구원 받은 신자가 누리는 방향의 자유 입니다.
3.하나님의 주권이 주는 자유
3.하나님의 주권이 주는 자유
사도행전을 서술하는 방식 중에 교회를 통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을 정말 훌륭하게 묘사했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구성원들의 연합과 동역 입니다.
빌립의 사마리아 선교에서는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 성령을 주셨고
사울의 회심에서는 주님과의 만남과 함께 스데반과 아나니아 그리고 바나바외 베드로를 사용하여 한 사람의 대 사도를 만들어 내십니다.
특출난 한 사람을 들어서 획기적이고 드라마틱한 결과를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이 아닙니다.
요즘 시대는 자신을 들어내야 살아 남는 시대 입니다.
과장되고 부플려진 자아를 내세워서 라도 성공을 얻고자 혈안이 된 시대 입니다.
무엇인가 멋있는 생각과 말을 하고 있어 보여 할 것 같은 압박이 보이지 않게 사회를 휘감고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이 분명하고 내면의 힘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명함을 금박으로 치장하려는 생각 따위를 하지 않는다” -마티아스 뇔케-
우리의 자아를 들어내고 포장하고 부플리는 시대에 살고 있다.
자아 즉 영어로 이고 Ego에 대한 프로이트의 전통적인 정의는 우리의 무의식적인 욕망이 날뛰는 말이라면 이고는 그 위에 앉아 있는 사람 이다 라고 정의 했다.
라이언 홀리데이의 <에고 라는 적> 책에서 현대 사회에서
이고는 지나친 자기 의식이라고 정의 하면서,
“이고(Ego)는 당신이 원하는 것,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잠재력, 선함)을 방해하는 적이다. 이고(Ego)는 기술의 온전한 습득이나 창의적인 통찰의 소유, 다른 사람과의 협력, 소중한 것들을 유지하는 일, 성공의 지속 등을 방해한다.”
자신이 주인인 상태가 Egotist 자기 중심주의자 입니다.
자기 자신이 가장 중요한 존재라고 믿는 건강하지 못한 믿음을 말합니다.
자유는 주권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는 진정으로 선하고 의로운 상태로 나를 통치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리 얽메이는 것이 없는 일명 자유로운 상태라 하여도 나의 생각과 나의 삶이 죄로 향하고 있다면 자유가 아닙니다.
내가 주인이라 착각 할뿐 사실 그 삶의 주인은 죄입니다.
사울은 이고이스트 였을 것입니다.
이고이스트(egotist 자기 중심주의)와 이고이스트(egoist 이기주의)는 엄연히 다른 개념 입니다.
이고이스트(egoist)는 그야말로 이기주의자 입니다.
이고티스트(egotist) 자존심을 위해 자신의 욕망, 이익을 희생 할 수도 있는 사람이기 때문 입니다.
분명한 것은 사울의 내면은 하나님이 주인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그의 회심 과정과 13년의 히든 타임즈를 통해, 하나님이 다스리는 영혼의 평안과 안식을 체험 했을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는 내가 죽고 하나님이 사는 삶은 결국 그리스도와 함께 선한 내가 부활하는 삶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사울은 죄악된 자아는 죽이고 선한 자아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는 과정을 겪었습니다.
그의 본래 성품은 열정적이고 추진력 있는 청년 이었습니다.
앞에서도 말씀 드렸습니다만 복음은 그 사람의 인품을 완전히 파괴하지 않습니다. 죄악을 도말 하고 본래의 훌륭한 성품과 하나님의 거룩한 사명을 만나게 하여 위대하게 쓰임 받게 합니다. 사울이 바울 되어 그 엄청난 사역을 감당한 것은 바로 복음의 역사 입니다.
나의 자아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깨달으면 생각지도 못한 광대한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울타리 안에 가두었다고 하여 자유 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울타리는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의 울타리 입니다.
우리가 답답함을 느낄 정도의 크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과장된 자아가 하나님의 품을 답답하게 여기게 우리를 속일뿐 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품에 있을때, 그분의 지경 안에서 원없이 뛰어 놀며 자유를 만끽 할 수 있습니다.
성숙한 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싫은 것이 눈에 더 잘보이고 하기 싫은 일이 늘어나는 것은 성숙은 아닐 것입니다.
하기 싫은 일을 기꺼이 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원치 않는 일도 주님을 위해 기꺼이 하는 것이 성숙 입니다.
어릴때는 하기 싫은 것때문에 괴롭고 자유롭지 않았다면
성숙하면 나보다 남을 위해 나보다 교회를 위해 기꺼이 동참하고 협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을때 우리는
열망하지만 겸손 할 수 있습니다.
성공을 해도 자비로울 수 있습니다.
실패를 해도 소망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위대하지만 겸손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설교는 구원 받은 여러분이 원대한 꿈과 비젼을 가지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미 가장 귀한 구원을 소유하였습니다.
그 받은 구원을 통해 누려야 할 자유를 누리시기를 권면 하는 설교 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24시간을 자유롭게 지휘하고 있는지?
내가 원하는 방향이 진정 하나님이 원하는 방향인지?
나의 자아에 눌려 살고 있는지 아니면 드넓은 하나님의 품 속에서 자유를 만끽 하고 있는지 생각 해보시기 바랍니다.
누군가가 시켜서 하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자유와 자원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시는 성숙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