엎드리어 감사하니(눅 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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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드리어 감사하니(눅 17:11-19)
<서론>
어릴 적 선친에게 호되게 혼난 일이 있었습니다. 어찌나 쌔게 혼이 났던지 오십 중반이 된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시골에 살았지만 저는 하고 싶은 것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태권도를 상당히 오랫동안 했고,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보이스카웃이 되어서 무주에서 열리는 세계잼버리에 가보고도 싶었습니다.
학교 특별활동을 통해 보이스카웃을 하며 잼버리에 대한 꿈을 키워갔습니다. 어느덧 시즌이 다가오면서 등록을 해야하는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새벽마다 나가는 신문배달(3년) 알바로는 비용을 대기에는 턱도 없었습니다. 고민을 하던 중 선친에게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아빠! 내가, 집안에서 해야 하는 일들이 있는데 그것도 열심히 하고, 학교 안 가는 날은 아빠 페인트작업장에서 페인팅 예비 작업인 사포질 이물질제거...등 열심히 하겠으니 잼버리 비용을 대 주세요.’
나름 설득력 있고 합리적인 제안 같지 않습니까? 저는 의기양양하게 아빠가 당연히 이 제안을 수용하실 것으로 생각 했습니다.
그런데 왠 일 입니까? 아빠의 크고 거친 손바닦 스매싱이 제 등짝을 강타했습니다. 쨕!! 어찌나 아팠던지 그 자리에 어프러져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선친이 말씀하셨습니다.
‘얌마! 이~ 나하고 니 관계가 그것 밖에 안 되는 겨? 무언가 조건이 있어야 내가 너 한티 일을 시킬 수 있고, 너도 그 일을 할 수 있는 겨?’
‘나한테 너는 내 아들이여! 그려서 나는 너 한티 잼버리가 아니라 그 할애비래도 다 혀 줄 수 있는겨, 그리고 너 한티 나는 니 애비여! 그려서 너는 내가 시키는 것은 감사허고 기꺼이 헐 수 이어야 혀! 겨~아녀~’
오늘 강론 제목은 「감사」지만, 그 감사가 나오는 「관계」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감사는 쥐어짜야 나오는 참기름 같은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감사는 하나님과의 관계, 믿음으로 회복된 관계 속에서 기꺼이 흘러넘치는 화수분(성경의 표현대로, 물이 솟구치는 분천)이 어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가, 우리의 찬양이, 우리의 기도가, 충성봉사가 그래야합니다. 구원의 감격 가운데 감사와 기쁨으로 흘러나고 넘쳐나는 향기로운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본론>
1. 감사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의 고백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구원받은 성도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의 고백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 고침 받은 열 명의 나환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중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시게 되었습니다. 그 때 한 촌에 들어 가셨는데, 거기서 나병환자 10명이 예수께로 나아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자 멀리 서서 소리 질렀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13)
이들의 호소는 매우 절박했습니다. 부정한 자들로 낙인 되어, 마을에 살지도 못하고, 사람들 가까이도 가지 못하는 이들은 ‘오직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셔야만’ 절망적인 질병에서 나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14)
그런데, 고침 받은 10명의 나병 환자 중 한 사람만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15, 16)
주님은 이렇게 묻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17)
“아홉은 어디 있느냐!”는 주님의 물음은 「주님과 성도의 관계에 대한 도전」입니다. 즉, ‘신앙은 예수님과 예수를 주로 고백한 성도의 관계’라는 것을 들추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는 주님의 선언이후, 나병환자들은 “제사장에게 가다가” 깨끗함(나음)을 받았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은혜입니다. 9명의 고침 받은 사람들은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정결법에 따라, 더 이상 부정하지 않다는 사실을, 제사장에게 확인 받으려 달려갔을 것입니다.
그들은 빨리 제사장에게 가서 깨끗하다는 판정을 받고, 그 다음 속히 그리운 가족들을 만나야한다는 생각으로, 오직 자신의 필요와 유익이 채워졌으니 더 이상 주님을 볼 필요가 없었습니다.
9명의 고침 받은 이들에게는 예수님이 자신들을 고쳐 주셨다는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지금 자신들이 깨끗하다는 사실 하나만 중요한 것이었고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마치 마트에서 필요한 물건들을 카트에 담은 사람이 캐셔에게 결제를 하고는 뒤도 안돌아보고, 가족과 저녁 해 먹으러 달려가는 모습과 똑같았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신앙은 달랐습니다. 그는 나병이 아니어도 멸시받고 천대 받는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병까지 걸렸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어쩌면 나병환자 중에서도 더 차별 받는 천민중의 천민처럼 차별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이 받은 이 놀라운 은혜가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주체 할 수 없을 정도 감격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토록 큰 은혜를 받고 제일 먼저 생각난 분이 있었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주신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는 ‘예수께 돌아가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나서 제사장에게 가도 늦지 않는다!’ ‘감사가 먼저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병들었다→기도했다→기도했다→고쳐 주셨다」로 끝나는 거래가 아니라, 신앙은 하나님과의 사귐이며, 그로인한 하나님과 우리 성도의 관계의 회복입니다.
은혜의 최종 목적지가 병이 낫고, 건강해지고, 부자가 되고, 취직이 되고, 출세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 받은 내가, 하나님과 그 분이 주신 은혜를 가지고, 하나님과 더 깊은 사귐으로 들어가 삶이 신앙생활입니다.
만약 주님이 우리에게 ‘관계가 아니라 거래’를 원하셨다면, 천국행 티켓을 위해 헌금 얼마, 봉사 어느 정도, 예배 얼마만큼, 기도 얼마만큼의 컷트 라인을 정해 놓으시고... 천국 문 앞에서 저울과 계산기를 들고 서 계실 것입니다.
여러분,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 않습니까? 주님이 계산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답이 없습니다. 아들을 주시기까지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무엇으로 값을 수 있습니까?
평생 값아도 원금은 고사하고 이자도 채우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계산하시지 않으시고 선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계를 잘 이해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와 넓이와 무게 앞에 감격하고 감사하며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케 하신 예수님의 놀라운 사랑을 기초로, 더 깊이 더 풍성하게, 더 많이 주님과 가까워지는 삶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주님을 닮아가는 성화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는 주님의 물음은, 신앙생활의 최종 목적이 ‘병고침’으로 끝나는 9명의 신자(우리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신앙은 거래가 아니고 관계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하나님을 더 가까이하는 믿음, 하나님과 더 풍성한 교제를 나누는 믿음이 되어야합니다.
그렇게 회복된 관계를 드러내는 것, 하나님과의 풍성교제를 표현하는 것, 이 모든 것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고백이 「감사」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의 고백이 있습니까?
모든 것에 감사함으로, 나의 모든 것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의 고백을 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늘 기억(감사)합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늘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돌아와 감사하는 한 사마리아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19)
하나님께 은혜 받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그러한 면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할 때, 성도의 마음은 순수하며 하나님 중심이 될 수 있습니다.
감사하는 믿음이 될 때 영적 선순환은 계속됩니다. 우리는 감사하는 생활을 통하여 피조물로서의 올바른 지휘를 회복할 수 있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녀로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구원’ 육신의 구원(병 고침)뿐만 아니라, 영혼의 구원(하나님의 자녀 됨)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단지 병 나은 것만 이었다면, 구지 이 선언은 불필요했을 것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에서 ‘구원하였다’의 시상은 완료형입니다. 이 사마리아인이 예수께 돌아와서 감사했을 때 비로소 그에게 구원이 임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선언을 하시기 전,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기억하는 믿음이 생겼을 때에 그 사마리아인은 ‘이미 구원받았으며 지금 그는 구원받은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마리아인이 구원받은 시점은 언제일까요? 그가 하나님을 믿었을 때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확실히 믿고 신뢰했던 때입니다.
그런 믿음이 있었기에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를 드렸던 것이며, 이런 감사의 열매를 보시고 예수님은 그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인해 주신 것입니다.
품격 있는 성도의 삶이 무엇일가요? 은혜 보따리만 보고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잊지 않고, 은혜의 진원지인 하나님께 감사의 고백을 드리는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퇴근하는 아빠 손에 들린 치킨에만 흥분하는 행동은 유아기 때로 끝내는 것이 정상적인 인격입니다. 성숙한 자녀는 치킨을 먹으면서 가족을 생각하며 기꺼이 사들고 온 아빠의 사랑을 먹습니다.
똑같은 은혜를 받았지만, 9명의 나병환자는 ‘육체의 치료’라는 은혜 봉다리에만 흥분하여 그것만 낚아채서 제사장에게로 달려가고 가정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에게 진정한 구원이 있었을까요? 저는 장담할 수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주님이 확인해 주신 ‘구원 얻을 만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육체는 지금 당장은 깨끗하겠지만, 장담컨대 100년을 다 채우지 못하고, 나병환자의 썩는 육체와 다를 바 없는 흙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이들의 끝입니다.
우리도 한 자리에서 같이 예배하고, 한 목소리로 찬양하고, 한 마음으로 기도하고는 있지만, 나의 시선이 어디에 가 있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끝)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 성도는 모든 것에서 그리스도에게만 주목합니다.
예배하며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합니다. 찬송하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한 나머지 목 놓아 사랑을 고백합니다. 기도하면서 믿음의 기도에 응답하실 하나님을 확신하며 힘내서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 없이 교인이라는 이름만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자기가 바라는 그 봉다리(건강 재물 출세) 좀 내 놓으라고, 은혜의 봉다리에만 메달려 예배하고 기도하고 찬송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죄용서 받아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선언하신, 성도임을 믿고 고백하시기를 바랍니다.
한 사마리아 나병환자의 구원 받은 믿음은, 자신의 병을 고쳐주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믿음이 있었을 때, 이미 완료된 구원이었습니다.
그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주님의 선포는, 그가 이미 ‘구원받은 상태다’라는 것을 주님이 확인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믿음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주님의 직간접적인 선포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구원받은 성도입니다! 그렇다면 감사하고 있습니까? 바라기는 구원받은 성도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늘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나의 감사 Best 7」 쥐어짜서 쓰면 3개쯤 쓰면 쓸게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의 고백을 담아, 하나님의 은혜를 늘 기억하며 감사하면, 7개가 아니라 70개도 쓸 수 있습니다.
그 만큼 하나님의 은혜는 광대하고, 그만큼 하나님께 감사할 것이 많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믿음으로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부요하는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