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 육신이 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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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rche & logos

“태초에”라고 시작하니까 창세기 같습니다. 창세기도 이렇게 시작합니다. 창1:1
창세기 1:1 NKSV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태초에”라는 말은 히브리어로는 רֵאשִׁית (베레쉬트) 입니다. ‘시작’이라는 의미입니다. 헬라어로는 ἀρχή(아르케)입니다. 우주의 시간적 시작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인간은 시간 속에 살기 때문에 태초를 시간적 의미에서 처음이라고 말합니다. 시간을 따져봤을 때 가장 먼저 시작된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간 안에 갇혀계신 분이 아닙니다. 시간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시간도 물질입니다. 어려운 말로는 물리입니다. 물리적 시간도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아르케라는 말을 더 살펴보면요. 고대 사회에서는 ‘원리,원인’이라는 용어로 사용했습니다. 만물의 가장 근본된 원리가 무엇일까? 만물의 가장 처음 원인이 무엇일까? 만물을 존재하게 만드는 가장 처음의 상태와 물질은 무엇일까? 를 생각했을 때 고대 철학자들은 그것을 물이라고 하기도 하고요, 어떤 무한자라고 부르기도 하고요. 불이라고 하기도 하고요. 피타고라스는 숫자라고 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고대 사람들은 만물의 시작과 원인을 밝혀내고자 연구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것을 logos라고 말하고 그 logos는 곧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즉 하나님입니다.
이 logos 개념도 고대 철학에서 플라톤은 ‘우주 만물을 이루는 이성적 원리가 logos’라고 생각했습니다. 일종의 신의 정신, 신의 이성, 신의 말 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이 logos가 인간을 진리로 깨우치고 플라톤이 말한 모든 것의 원형인 이데아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매개체 역할을 하는 것이 logos입니다.
요한복음 헬라 사람을 대상으로 기록하면서 그들이 알고 있던 신적인 정신, 만물의 정신이 곧 말씀인데 그 말씀은 예수다.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이라는 logos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냥 말이 아니라 소리가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로서 존재하는 인격체입니다. 신으로부터 나온 logos가 살아서 운동력 있게 움직여서 실행을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와서 실행에 옮기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는 것이 아니고 지키지 못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한번 뱉은 말씀은 그대로 실천될 수 밖에 없는 말과 행동이 일치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고 그 예수께서 만물을 지으셨습니다.
2. 잠언의 지혜자
그런데 이것은 헬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고만은 할 수 없습니다. 히브리적 사고에도 이미 logos와 같은 지혜는 신적 존재로 등장합니다. 잠언 3:19 에도 나옵니다.
잠언 3:19 NKSV
주님은 지혜로 땅의 기초를 놓으셨고, 명철로 하늘을 펼쳐 놓으셨다.
잠언에서도 하나님께서 지혜로 세상을 만드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인들도 이미 ‘지혜’라는 것을 만물의 근본 원인으로 보았고, 태초부터 함께 한 존재로 의인화하고, 그 지혜를 찬양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지혜를 높은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헬라철학이든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든 서로 용어는 달랐지만 ‘지혜자’에 대한 인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지혜자 되신 ‘말씀’이 만물의 근원되시고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4절. 생명, 빛
그리고 4절에 그 태초부터 있었던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는데 그 생명은 빛입니다. ‘생명’은 한자로 하면 ‘날 생’자의 ‘명령 명’입니다. 그 의미를 보면 ‘살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살라는 명령’을 주십니다. 마치 에스겔 16:6 ‘피투성이라도 살아있으라’라고 명령하신 살라는 명령이 떠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살라고 명령하시고 살아나게 하십니다. 그 명령을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보내심을 받아 그 말씀 그대로 실행되어지십니다. 우리를 살리시는 겁니다.
에스겔 16:6 NKRV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하고
그리고 ‘생명’자를 반대로 하면 ‘명을 살리다’가 됩니다. 생명은 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을 따라 예수께서는 그 명대로 살아내는 삶을 사셨습니다. 이것이 예수 안에 있는 ‘생명’입니다. 우리에게도 생명이 있다면 살라고 하시는 명령을 따라서 명령대로 살아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생명이라는 것이 밥 먹으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고요. 하나님의 명령대로 사는 것에 의미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니 태초부터 계신 만물의 정신되신 원리인 logos 즉, 말씀, 즉 예수는 명령대로 살라고 하십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명대로 살아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예수의 생명이 우리 안에 빛을 비춰서 우리를 일어나게 하시고요, 우리를 살아나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그 명령을 주셔서 그 명령대로 살아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빛이 어둠을 비춰서 어둠 속에 있는 자들을 깨우십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셔서 말씀이신 예수께서 빛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어둠은 깨닫지 못하고 이기지 못합니다. 여기서 5절에 ‘비추다’(φαίνω, 파이노)는 문법적으로 현재형으로 쓰였습니다. 그러니 창조 때에만 빛이 되셔서 비추이신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재창조하시며 빛을 비추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빛되신 사역이 계속되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빛으로 오셨지만 어둠의 존재들은 깨닫지 못합니다. 이 어둠은 무엇을 의미하냐면요.
1. 로고스가 알려주는 것에 반대되는 영적 무지를 가리킵니다.
2. 하나님을 대항하는 죄와 악을 가리킵니다.
3. 생명의 빛에 반대되는 사망을 가리킵니다.
4. 빛을 이기려고 하는 악의 세력을 가리킵니다.
이 어둠에 있는 자들은 벌써 심판을 받은 자들입니다. 요한복음 3:19 에 보면요.
요한복음 3:19 NKSV
심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빛이 세상에 들어왔지만, 사람들이 자기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빛에 속하지 않고 어둠에 속한 삶을 산다면 그것은 심판 받은 삶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빛을 좋아하지 않고 어둠을 좋아하는 것 그것이 심판 받은 것입니다. 빛을 사랑하지 못하는 삶, 사랑을 사랑하지 못하는 삶, 선을 따르지 않는 삶, 부정과 욕망과 분노에 갇혀 사는 삶 그것이 심판 받은 삶입니다.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고 죄를 좋아하는 삶이 심판 받은 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둠에 침잠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영원한 빛이신 하나님의 은총을 고백하기 위해서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자신의 어둠으로 깊이 들어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있었던 자신의 어둠을 말하며 고백합니다. 육체와 물질, 성공과 출세의 욕망, 쾌락 이 모든 어두움을 자신의 고통스러운 과정이라며 인정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고백 속에서 자신의 모든 삶에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는 것을 깨닫고 고백합니다.
우리 삶에서 버려야 할 순간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로완 윌리엄스, 상처입은 앎, p.147)
요한복음은 빛과 어둠을 대조시키며 비유를 많이 사용합니다. 빛과 어둠을 굉장히 강조합니다. 우리가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도 빛과 어둠을 대조하며 어둠이 아닌 빛의 삶을 살고자 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어둠이 아닌 빛을 따라 살고 싶고, 빛에 속한 자녀가 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어둠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삶의 어두운 부분을 잊거나 무시한 채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어둠은 언제나 우리 안에 있고 우리를 덮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어둠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가져야 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우리 삶에 드리워진 고통, 죄,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겪어야 하는 일들이고, 살아내야 하는 경험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우리 안에 주신 빛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은 어둠이고 나를 덮으려는 어둠이 있지만 나에게 주신 생명의 빛을 움켜쥐고 있어야 합니다.
명대로 살라는 그리스도의 생명과 그 빛이 우리 안에서 모든 어둠을 이겨낼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명대로 살아내는 자는 모든 어둠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 생명되시고 빛되신 예수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십니다. 그 생명을 영접하는 자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12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특별한 권한이 아닙니다. ‘우리 아버지가 하나님이야’의 의미가 아닙니다. 영접하면 나에게 특별한 권한이 생기고, 특별한 권력을 쥐게 되고, 특별한 신분으로 상승하는 것처럼 생각될 수 있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권세’라는 것은 힘을 말합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ἐξουσία(엑수시아) 는 자유로운 힘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는 자유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지 못했는데, 어둠에 속하고 진리를 따라 살아가지 못했는데 하나님께서 내 안에 영접되셔서 이제 나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갈 수 있는 죄로부터의 자유로운 힘이 생긴 것입니다. 어둠에 얽매이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갈 수 있는 자유로운 힘, 내적 능력이 생겼다 이 말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자유로운 힘이 생길 수 있냐면 이것은 무엇에 속해있지 않기 때문일까요? 세상의 것들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에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영원한 것에 속한 권세이기 때문에 세상 것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혈통으로 난 것이라면, 육정으로 난 것이라면, 사람의 의지로 난 것이라면 그것에 얽매이게 됩니다.
하나님 자녀의 권세가 집안 혈통으로 난 것이라면 집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요. 학벌로 얻은 것이라면 학벌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돈으로 얻는 것이라면 돈을 많이 벌어야하는 것에 얽매이게 됩니다. 우리의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주도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럴 수 없는 것은 모든 사람과 세상의 물질을 초월한 하늘의 힘에 이 자녀됨의 권세가 있기 때문에 세상 그 어떤 것도 침범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것으로부터 자유하는 믿음의 자유로운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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