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가 밭을 산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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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가 밭을 산 이유
[서론]
우리 인생에는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불청객이 있습니다.
바로 고난, 더 정확히는 고통입니다.
그 고통의 끝판왕이 바로 죽음이라 말할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피할수 없는 고통입니다.
우리 시대의 멘토인 아주대병원 외상센터 이국종 교수님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도 인생의 99퍼센트는 비극이라고 말씀하시더라구요.
온갖 상처와 질병으로 병원을 찾는 수많은 환자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하셨을 거 같습니다.
유명한 희극배우였던 찰리 채플린의 명언이 있습니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라고 말입니다.
최근 우리에게 큰 충격을 준 사건이 있었습니다.
시청 근처에서 큰 교통사고가 나서 9명이 죽었습니다.
은행직원 4명이 죽었는데 승진을 축하하며 회식하고 나오는 길에 변을 당했습니다.
시청직원도 2명 있었는데 야근 마치고 식사하고 나왔다가 변을 당했습니다.
그 사건이 있기 바로 전까지도 자신이 이런 변을 당할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아니, 영상보면 1-2초전에도 몰랐을거 같습니다.
이 분들도 참 안타깝지만 갑자기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슬픔에 잠긴 가족들과 친구, 동료들도 안타깝기만 합니다.
이상기후로 인해 이번에 남부지방에 큰 비가 내렸습니다.
갑자기 내린 엄청난 비에 6명이 넘는 사람들이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잠시 차에서 내렸다가 물살에 휩쓸려간 중년의 아주머니도 있었습니다.
엠티왔는데 잠시 편의점에 들린다며 나갔다가 변을 당한 의대생도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그들이 될수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피할수 없는 비극이 일상입니다.
우리는 이런 비극적인 세상을 어떻게 두 발로 딛고 용기내서 살아갈수 있을까요?
[본론]
먼저 오늘 말씀의 배경을 알아보겠습니다.
1-5절입니다.
2절에 보면 예루살렘은 이미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의 군대에게 포위되어 있습니다.
이때가 시드기야 제위 10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드기야가 총 11년을 통치했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예루살렘 멸망 몇 개월 전임을 알수 있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예루살렘 성이 바벨론 군대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성문을 닫아놓고 밖으로 나갈수도 안으로 들어올수도 없습니다.
그 기간이 18개월동안 지속됩니다.
성안에 갇혀서 나가지도 못하니 안에서 먹거리가 다 떨어지면 끝장입니다.
심지어 땅에 기근이 들고, 성 안에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분명 백성들에게는 이런 믿음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성전이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은 안전하다.”
“하나님이 계시는 이 곳은 어떤 나라도 침공할수 없다.”
그런데 현실은 그게 아닌거 같은 것입니다.
백성들은 어떤 심정일까요?
백성들은 자신들의 믿음과 다른 현실에 굉장히 혼란스러워 합니다.
커져가는 고통과 두려움에 패닉상태가 되어 절망에 빠지고 맙니다.
그럼 시드기야 왕은 어떨까요?
그는 거짓 예언자들에게 속아 절대로 예루살렘이 망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에게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버텼습니다.
분명 이집트가 자신들을 도와줄거라는 헛된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다릅니다.
이미 엄청난 규모의 바벨론 군사들이 예루살렘을 포위하여 기회만 노리고 있습니다.
분명 시드기야 역시 굉장한 두려움에 휩싸였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시드기야는 끝까지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에게 항복하지 않으면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심지어 시드기야 왕도 비참한 모습으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갈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러니 화가 난 시드기야는 그를 궁전 감옥에 가둬 버렸습니다.
그는 여전히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현재 당하고 있는 위기는 군사력이 약해서가 아닙니다.
다른 나라가 도와주지 않기 때문도 아닙니다.
더욱이 하나님이 바벨론의 마르둑 신보다 약해서도 아닙니다.
이것은 온전히 백성들의 죄악 때문인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정이 어려워진다고 해서 사람이 쉽게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습니다.
죽음을 앞두고도 자기 고집을 꺾지 않는 사람이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니 망해서 하나님께 돌이킬수 있다면 그것 또한 은혜입니다.
사람의 고집이란 인간의 죄성 밑바닥에 깔린 장판과도 같습니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변명하고 남탓으로 돌리는게 인간의 죄성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보십시오.
변명하고 서로 죄를 미루고 정죄합니다.
그럼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악함과 죄에 대한 고집을 얼마나 잘 깨닫고 있습니까?
최근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 주님 앞에 진심으로 회개한 적이 있습니까?
금쪽같은 내 새끼 최근 에피소드를 보니까 아이가 계속 도둑질을 합니다.
부모가 매번 변상하다가 이번에는 아이에게 직접 사과하게 만듭니다.
그런다고 아이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는 회개가 이런 모양만 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계속해서 죄를 방치하면 죄에 대한 내성이 생깁니다.
죄에 대해 무뎌지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이 영혼의 습관이 되어 더욱 고치기 힘들어 집니다.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돌아봐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런 위기의 상황에서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특이한 상징행동을 요구하십니다.
상징행동이란 하나님의 메시지를 말이 아닌 독특한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6절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아나돗의 밭을 사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나돗은 예레미야의 고향으로 예루살렘 근처의 땅입니다.
그 곳을 지금 사라는 것입니다.
고엘제도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에 따라 밭을 사라는 것입니다.
고엘제도가 뭐냐면 일종의 공동체를 위한 복지제도 입니다.
가족이나 친척중에 누군가 어려움에 처하면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형태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땅에 대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땅은 모두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아무리 자신의 소유일지라도 함부로 땅을 사고 팔수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친척 중에 빚을 져서 땅을 팔거나 잃게 되는 경우가 발생할수 있습니다.
이때 그 땅을 다른 친척이 사서 다시 돌려줘야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친족의 어려움을 다른 친족중 누군가가 구제해주는 것입니다.
룻기에서 보아스처럼 어려운 친족의 구원자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명령을 예레미야에게 하십니다.
문제는 예레미야가 그 땅을 사야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결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내와 자식이 없습니다.
땅을 물려줄 후손이 없습니다.
그리고 70년 동안 돌아오지 못할 땅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압니다.
그래서 지금 많은 돈을 들여 고향땅을 사아햘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또한 친척 하나멜이 땅을 사달라고 예레미야에게 요구하는 것도 의심스럽습니다.
지금 예루살렘이 포위당했는데 왜 하필 이때 자기 땅을 팔아 돈을 챙기려는 것일까요?
어쩌면 하나멜은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놀랍게도 이런 그의 요구를 들어주라고 하십니다.
예레미야는 감옥에서 많은 증인들을 앞에 두고 매매 계약서를 작성합니다.
그리고 그 매매 계약서를 옹기 그릇에 담아 잘 보관합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어땠을까요?
예레미야의 행동이 굉장히 어리석게 보였을 것입니다.
속으로 예레미야의 행동을 비웃었을 것입니다.
자기가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해 놓구선 그 땅을 산다는게 말이 안되는 행위입니다.
스스로를 부정하는 모순된 일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나라가 망하는 마당에 어떻게든 땅을 팔아 이득을 남겼으면 남겼지, 왜 땅을 사겠습니까?
기업이 망할거 뻔히 알면서 주식을 팔지 않고 사는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럼 하나님은 왜 이런 이상한 명령을 하신 것일까요?
이런 상징행동을 통해 말씀하시려는 바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회복과 구원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지금은 심판할수 밖에 없지만 나중에 하나님이 다시 구원해주시겠다는 메시지입니다.
빼앗겼던 예루살렘 땅을 다시 찾아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마치 고엘제도에서 예레미야가 한 것처럼 하나님이 예루살렘의 구원자가 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역시 이런 하나님의 명령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지금은 심판의 때인데 구원을 이야기하니 도대체 이해하기 힘든 것입니다.
모두 구원을 이야기할때 예레미야는 심판을 외쳤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심판을 받고 있는데 구원을 이야기하라는 것입니다.
순종을 하긴 하지만 이해할수 없기에 그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의 뜻이 불분명하면 먼저 기도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면 순종부터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 기도를 통해 파악해야 합니다.
16절부터 25절입니다.
예레미야는 그의 기도에서 먼저 하나님의 능력과 성품을 찬양합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은 못하실 일이 없으시다고 선포합니다.
또한 은혜를 수천대에 베푸시지만 조상의 죄는 자손이 반드시 치르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각 사람의 행실대로 갚아주시는 공평하고 정의로운 분임을 강조합니다.
이런 능력과 성품의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회고합니다.
하나님은 놀라운 기적들을 행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광야를 거쳐 결국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도착하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이스라엘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들은 이런 하나님의 큰 은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배신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26-35절을 보면 이스라엘이 행한 죄악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심판하실수 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에 우상을 세워놓고 섬겼습니다.
또한 자기 자식을 제물로 불태워 몰렉신에게 드리는 가증한 일을 행했습니다.
하나님이 예언자들을 통해 수없이 경고했지만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를 하는 예레미야의 마음은 어떨까요?
“그래, 심판은 당연한거야. 우리는 혼 좀 나야해”
이렇게 생각할까요?
아닙니다.
예레미야는 나라가 멸망할 위기 앞에서 누구보다 고통스러워하고 슬퍼합니다.
백성들의 죄악때문에 일어난 일인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인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라의 멸망은 그에게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일일 뿐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이때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땅을 사라고 하셨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행동을 통해 백성들에게 소망을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더 큰 슬픔과 고통의 때가 오겠지만 그것이 끝이 아님을 알리고자 하신 것입니다.
죄악에 대해 심판을 해야만 하지만 그게 하나님의 최종 계획이 아님을 알려주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마음을 어떻게 다 파악할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원래 뜻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입니다.
이제 36-44절입니다.
예레미야가 기도가운데 했던 질문에 대해 하나님의 대답이 등장합니다.
왜 예레미야에게 땅을 구입하게 하셨는지 대답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때가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이 땅에 모아 안전하게 살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다시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들과 영원한 언약을 맺어 영원히 떠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눈 앞이 암담한데 소망을 바라본다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입니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은 먹구름 뿐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감춰진 해를 보는 것은 믿음의 영역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에 믿을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죽음 뒤에 부활이 있다는 것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죽음은 비극이고 절망이지만 그 뒤에 부활이라는 소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주 저는 믿음은 희망 고문처럼 헛된 소망을 품는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잘못된 믿음은 현실을 파악하는 눈을 가리고 미래에 대한 허황된 기대를 갖게 만듭니다.
그렇다고 현실만 바라보는게 믿음인 것은 아닙니다.
올바른 믿음은 분명 현실 너머의 소망을 보게 합니다.
올바른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냉혹한 현실 비극적인 현실 속에서도 살아갈수 있는 힘을 줍니다.
비극적인 예루살렘의 현실 속에서 예레미야가 산 것은 밭이 아닙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약속을 산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소망을 산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암담한 현실을 피할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저지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뒤에는 하나님의 회복과 구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포기하지 않는 사람, 영원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현실도 비극이 일상입니다.
그 비극의 주인공이 내가 아니라는 법이 없습니다.
두려움과 불안 속에 살아갈수 있는 환경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주님이 주신 약속이 있습니다.
비극과 절망의 먹구름 너머에 소망이라는 태양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유는 그 믿음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죽음이라는 비극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소망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예레미야처럼 한조각 땅을 사는 믿음의 순종이 필요합니다.
그 한 조각이 하나님 나라의 겨자씨입니다.
절망의 시대에 하나님이 우리 교회에게 요구하시는 믿음의 순종은 무엇일까요?
절망의 시대에 하나님이 내게 요구하시는 믿음의 순종은 무엇일까요?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구원과 부활의 소망을 줄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