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3:21-3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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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가 없다고 변명하지마라

지난 시간 13장을 시작하면서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셨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말씀을 살펴 보았습니다. 사랑하신다는 표현은 능동적인 표현이며 또한 과거에서 부터 이미 그렇게 하셨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선언을 3:16절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들을 통해서 나타난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에 대상인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사랑에 대상임을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그래서 찬송가에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 있네’라고 부릅니다. 무엇이 써 있나요? 하나님께서 사랑하셨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났으나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사람의 몸으로 보내시어 아들도 아버지의 사랑을 알아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이를 위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이죠.
요한 저자는 예수께서 아버지의 사랑을 아신다고 기록합니다. 태초에 아버지와 함께 하신 말씀이자 아버지는 모든 일을 아들에게 보이셨고 아버지가 있던 자리 아들이신 예수도 함께 계셨습니다. 그분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맡긴 양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끝까지’ 입니다. 13장의 시작은 그 사랑은 제자들에게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죠. 특징적으로 말한다면 ‘낮추어서 맞춰 주시는 섬기는 사랑’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낮은 자가 높이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죠. 그렇기 때문에 낮춰 주시고 맞춰 주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을 거부하는 이가 있습니다. 가룟 유다입니다. 오늘 본문의 가룟 유다에 대한 사건은 4복음서 모두에서 등장합니다. 그리고 저자에 따라 표현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지만 중요한 것은 사랑에서 벗어난 자, 배신한 자라는 사실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를 팔 생각을 넣은 것은 마귀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근거해 많은 사람들이 마치 가룟 유다가 마귀에게 조종 당했다는 식으로 표현하거나 요즘 뉴스에 나오는 범죄자들이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뭐가 씌웠나보다’고 마치 자기 정신이 몸에서 빠져나간 상태인 유체이탈적인 표현으로 말합니다. 이는 대단히 잘못된 생각이며 말도 안되는 변명으로 빠져 나가려는 조악한 말장난에 불과 한 것임을 아셔야 합니다.
또 한 사람 베드로는 예수의 발씻김에 스승으로 제자의 발을 씻기는 일은 없다는 논리로 거절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네가 나와 상관’없다는 예수의 말에 한술 더 떠서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달라고 초등학생 같이 반응합니다. 예수의 사랑하심에는 가룟 유다의 배신도 베드로의 변죽도 들어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는 아십니다. 그래서 알다는 단어가 예수님께 사용 될 때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할 때 ‘전지’ 즉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다는 의미이며 반면 대화의 대상자에게 사용 될 때는 ‘깨달아서 알겠냐’는 말로 깊은 사고와 이해를 동반한 요구를 나타냅니다. 배워서 아는 것은 ‘경험’을 통해 확실하게 아는 것에 이릅니다. 그런 앎에 있으면 복이 있다고 예수께서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지난 2015년부터 공부하는 동안 늘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지금은 ‘그냥 하는 거야’하다보니 절반에 도달했고 그때는 이제 절반만 더 가자 하는 마음이 생기면서 끝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처음에는 몰랐던 지식이 생기고 마음에 들었던 그만두고 싶은 마음을 조금씩 이기는 경험을 했습니다. 아는 것을 가르치고 그러면서 이길이 맞는지 궁금했던 부분에 가끔씩 빗줄기가 내리 쬐듯 하는 경험이었죠. 물론 자주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비슷한 생각을 하는 분들과 모이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서로를 격려하면 생각한 길에 대해 들어주고 그렇게 계속할 수 있는 힘이 생긴 것입니다. 물론 좋은 선생님을 만나 길의 안내를 받는 도움도 그중에 하나인 것이죠.
혹시 지금이 여러분에게 일이나 학업이 그렇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내 미래가 어떻게 될지, 때론 이렇게도 해보고 싶고 지금 길을 벗어나 다른 길로 도전도 해보고 싶을 것입니다. 어떨 때는 ‘그냥 하는 게’ 답일 때도 있고 어떨 때는 다른 도전이 나을 때도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때론 ‘절반 왔으니 절반만 가자’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건 그래도 늦지 않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도 답답하다면 잠시 옆을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의 성장을 즐거워 해주는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습니다. 그들의 말이 인사치레가 아니라 여러분을 응원하고 있는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방법을 통해 저와 여러분을 이끌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저의 긴 여정 속에서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다’는 말씀이 무엇인가 하는 감이 조금 생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난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고 그럼에도 아시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잘 깨닫지도 못하고 대답도 어리숙한 베드로 같은 우리에게 ‘낮추어서 맞추어 주시는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것을 ‘영접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관계에서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19절 ‘지금부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일러 둔다’ 아무리 일러 두어도 말에 그쳐서는 안되는 것이죠. 그렇게 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이렇게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2:21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예수님을 통해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은혜라는 것은 ‘사랑하셨다’는 말은 또 다른 표현입니다. 사랑 받지 못하는 존재를 사랑해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사랑 받을 존재로 태어납니다. 그래서 요한은 요한복음 1:12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자녀로 삼아 사랑 받을 존재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저버리고 다른 방법인 ‘율법’으로 대신한다면 십자가의 죽음은 헛된 것이라고 한 것이죠.
왜 미리 말해줍니까? 그 이유는 사랑 때문이고 그리고 믿게 하려고 하는 것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를 따라 다니며 생각한 것은 새로운 나라를 정치적이면서 로마의 압제를 벗어날 독립 운동과 같은 세상이었죠. 그래서 제자 둘을 형제로 둔 어머니는 예수께 청탁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이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받게될 제자들의 고난 즉 핍박은 더 커질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진실하다. 진실하다’ 라는 표현은 내가 하는 말은 ‘참이다’라는 신적인 권위를 부여 합니다. 최근 뉴스에도 대통령이 화를 냈느냐 안했느냐 또는 사단장이 지시를 했느냐 지도를 했느냐 하는 것으로 매우 시끄럽습니다. 땅에서 부여 받은 권력자의 말도 이러할진대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신적인 권위를 가지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라는 말씀은 앞으로 일어날 예수의 죽음 앞에서 제자들이 믿는 믿음을 버리지 않고 확신에 거해야 합니다. 확실히 알기 위해 ‘중요한 경험’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며칠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후에 부활하신 예수는 40일 동안을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 이어 50일째는 성령께서 오셔 각 사람의 마음에 좌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조석변개 합니다. 아니 5분 전후가 다르게 변하는 게 우리의 마음인데 이런 마음에 심겨야할 믿음이 언제든 불면 날라 갈 먼지처럼 가볍다면 큰 일이죠. 가룟 유다의 마음에 뿌린 배신의 씨가 열매를 맺는데 얼마 걸리지 않은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성경은 잠언 4:23 “23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변하는 우리를 1장에서 먼저 ‘영접하는 자’는 자녀의 권세를 받는 다는 말씀을 가르치시고 다시 본문 20절에 예수께서 심화 시키는 것입니다. 자녀의 권세는 아버지와 함께 앉아 먹고 마십니다. (에베소서 1:5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관계를 맺으시고 처음 하신 것이 ‘먹고 마신 사건’입니다. (출애굽기 24:11 “11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
이런 자리에 있는 가룟 유다는 어떠합니까? 예수께서는 사랑을 누리지 못하는 한 사람 때문에 괴로워(타랏소) 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정말 말귀를 못알아 듣는 사람입니다. 배신의 현장이 어디입니까? 함께 식사를 나누는 자리입니다. 함께 식사를 하는 사이의 배신은 그 어떤 배신보다 큰 것입니다. 배신 소식에 22절 제자들은 서로 의심(아포레오/ 어리둥절_유일한 사례/ 신약 다른 곳에서는 ‘당혹’으로 표현) 했지만 가룟 유다는 그 작은 무리 속에서도 숨어 있습니다. 어쩌면 신뢰를 얻은 인물이고 한편으로는 돈 궤를 맡아서 도둑질 했지만 그를 믿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 생각에 예수를 팔 생각까지는 아니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요한은 처음부터 그를 ‘예수를 판 자’라고 소개합니다. 그러니 그가 했던 행동은 선의가 없는 행동이었고 가식적인 행동이었음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누가 그렇게 상황을 만들었습니까? 가룟 유다 자신이 그 길로 저벅저벅 걸어간 것입니다.
마치 상황이 그렇게 만든 것처럼, 세상을 원망하듯 말하거나, 네가 나에게 조금만 상냥하게 대해 줬으면 하면서 자신의 범죄의 원인을 상대에게 있듯 말하는 사건은 지금도 매일이 멀다하고 뉴스에 오르고 있지 않습니까? 이어지는 내용은 요한복음에 묘사된 장면으로 베드로가 25절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있는 요한이라 추정되는 이에게 머릿짓을 하며 물어보라고 싸인을 합니다. 이제 예수께서는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십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가슴에 기대어 있던 요한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추측해 볼 때 저자가 직접 겪은 내용을 기록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예수께서 대답’하셨는데. 그렇게 떡 조각을 받은 가룟 유다에게 어떤 일이 일어 났습니까?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유다에게 예수께서는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아마도 이 말은 모두에게 들렸던것으로 보입니다. 이어지는 28절에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자가 없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오히려 명절인 유월절에 ‘우리가 쓸 물건을 사라’ 하거나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사탄의 결과는 즉 가룟 유다의 결심입니다. 그렇게 30절에 그 조각을 받고 나갔습니다. 그 때가 밤입니다. 빛이 있을 때는 우리에게는 기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삶에도 이런 결정을 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결정에 앞서 기도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책임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을 빌려 사고하고 일의 전후를 살피는 최소한의 우리가 할 일입니다. 때론 감정에 치우쳐 섣부른 판단으로 일을 그르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작은 일부터 결정을 앞두고 기도하는 습관을 키워 나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이제 이 사건에 대한 다른 복음서를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는 열두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고 함으로 22절 그들이 몹시 근심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주님께 ‘나는 아니지요’라고 반문합니다. 이런 질문은 ‘그래 아니다’를 전제한 질문입니다. 이 때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판다’고 알려 주시는 건 이제 누가 손을 넣나 보자는 의미가 아니라 즉 당사자는 알게 되는 상황입니다. 그러면서도 이런 과정이 24절에 ‘기록된 대로 이루어지는 성취의 관점을 유지합니다. 따라서 유다는 결국에 예수를 팔게 될 사람으로 하나님의 성취 사건에서 보여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했다고 말씀하시고 유다 역시 ‘나는 아니지요’라고 다른 제자들 처럼 ‘그래 아니다’라는 답을 요구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제자들과 같이 묻는 가식적인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네가 말하였도다’라고 말합니다. ‘너야’라고 말하지 않고 ‘네가 말하였도다’라고 했을까요?
이는 가룟 유다에게 기회를 잃는 시간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뻔히 거짓말을 알고 물을 때 ‘이게 마지막이야 잘 생각하고 대답해’라고 해도 자녀는 ‘잘못했습니다’라는 기회를 놓치고 마는 경우가 가장 흔한 예가 되는 것이죠. 너 스스로가 알면서도 모두를 속이려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 역시 ‘나는 아니지요’라고 묻는 의도에 대해서 ‘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그렇게 말하는 의도’를 너는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배신의 강을 건넌 유다에게 한 조각을 적셔서 주셨고 사탄이 그 속에서 역사를 시작합니다. 마태는 ‘팔리라’는 말씀에 비춰 유다는 그렇게 마음 먹은 상태에서 첫째는 예수를 속이고, 둘째는 동료를 속이고, 셋째로 예수를 배신하는 길이 맞다고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44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는 요한의 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마가도 거의 유사하게 기록하면서도 가룟 유다가 ‘나는 아니지요’라는 말을 한 사실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마가에게 있어 마태의 기록과 마찬가지로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시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마태의 기록처럼 하나님의 역사에 배신하는 유다 조차도 포함된다고 했다면 마가의 시선에는 ‘기록된 대로’가 더 중요한 의미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기록을 통해 핵심인 예수의 구원 사역은 ‘기록된 대로’ 일어나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계획이 인간 가룟 유다의 배신과 파는 행동이 매우 중요한 역할처럼 보이고 그런 일이 없더라면 마치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없는 것처럼 해석되지 않도록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님은 인간 저자를 붙잡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어떤 모습으로든 역사의 현장에서 사용하십니다. 그렇다고 자녀 삼은 우리를 가룟 유다처럼 사용하는 것 아니냐고 불안하다고 말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개인도 그렇고 때론 교회도 이 땅에서불완전해 여지 없이 무너진다 해도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는 성경의 방식이며 마지막 날까지 계속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보기에는 얼마나 연약합니까 그러나 너무 풍족해서 곁길로 빠지는 것보다 지금처럼 부족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작은 일에도 감사함을 느끼는 것이 더 나은 것입니다. 그 가운데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계속해서 개혁되기를 바라는 소망을 갖고 있습니다.
누가는 3절로 더 간단하게 전합니다. 누가 역시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간다’고 간단하지만 ‘이미’라고 말합니다. 마태와 마가는 가룟 유다를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이라고 한다면 누가는 ‘매우 강하게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고 저주하듯 말합니다. 그리고 누가의 두 번째 기록인 사도행전 1:18 “18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고 가룟 유다의 최후가 ‘화’를 당하는 모습을 기록합니다. 그리고 마.막,눅은 매우 짧게 기사를 다루는 반면 요한은 더 길게 다루고 있고 요한 만 알만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유다의 배신의 사건이 마무리되자 31절 그가 나간 후에 라고 시작하며 가장 깊은 비밀이 오픈됩니다. 여러분! 여기에 우리는 가족인 분들만 눈에 보이지만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교회라는 새로운 가족이 보이게 될 것이고 지금과는 다를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준비가 되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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