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② - “차갑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자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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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전서 개역개정판 3장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말씀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들어가며
들어가며
오늘도 예배의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예배의 자리에 정말 잘 오셨고, 이 예배의 자리에 모인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가운데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주시고, 말씀해 주시는 은혜가 분명하게 있을 줄로 믿습니다. 이 시간 졸지 않고, 귀를 기울여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시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7월 한 달, 회복에 대한 주제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저번 주에는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회복에 관한 말씀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 이번 한 주를 보내면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갖고 사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저번 주에 나누었던 것처럼 하나님이 자녀라는 정체성을 갖고 살아갈 때 우리의 삶에서 주님의 인도하심과 역사를 경험하는 은혜가 반드시 있을 줄로 믿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회복에 대한 두 번째 말씀으로 신앙의 회복에 대한 말씀을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먼저, 여러분의 신앙은 안녕하십니까? 신앙이라고 하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러한 믿음, 안녕하신가요? 2019년 말에 시작된 코로나로 시작해서 많은 분들의 모습 속에서 신앙의 붕괴가 일어났습니다. 처음엔 괜찮다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점차 무너져 갔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러한 모습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코로나 때문에 제한이 되거나, 어떤 어려움이 없지만 신앙의 모습에서는 여전히 회복이 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죠. 교회를 떠난 분들도 많고, 교회라는 자리에는 있지만 자리에만 있을 뿐, 여전히 전과 같은 모습을 회복하지 못하는 모습들이 비일비재한 것을 보게 됩니다.
정말 간절히 소망하는 것은 하루 속히 회복이 되어지면 좋겠습니다. 교회를 떠난 분들, 또 교회라는 자리에는 있지만 여전히 미지근한 채로 그냥 자리만 왔다, 갔다 하는 그런 모습에서 벗어났으면 좋겠습니다. 한창 코로나 때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라는 슬로건이 참 많이 보였는데 정말 그 슬로건처럼 회복을 뛰어 넘어 다시 한 번 부흥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있는 것이 바로 우리 청년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이 시간, 말씀을 함께 나누는 가운데서 회복을 꿈꾸고, 또 회복이 이루어져서 부흥이 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하고 축복합니다.
본론
본론
1. 라오디게아 교회의 상황
1. 라오디게아 교회의 상황
우리가 오늘 읽었던 요한계시록 말씀에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 하나였는데 상황이 굉장히 심각했던 교회 중에 하나였고, 그 중에 꼴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상황이었습니다. 그 한 예로, 요한계시록에서 다른 교회들에게 편지를 쓸 땐 칭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에게 쓴 편지에는 단 하나의 칭찬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정말 심각하다고 했던 교회 중에 하나가 사데 교회인데 그 교회에는 그래도 믿음의 남은 자들이 있었지만, 라오디게아는 그것도 아니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라오디게아 교회가 얼마나 심각한 상황이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2.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
2.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
그렇게 심각한 상황에 있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에 대해서도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미지근한 모습이었습니다. 15절 말씀에서도 나오죠. “너희가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곧, 미지근하다는 것이죠. 저는 차를 마실 때 미지근한 게 좋은데 그럼 이게 좋은 표현일까요? 아닙니다. 이도, 저도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라오디게아 지역에는 두 도시가 있었습니다. 히에라볼리와 골로새입니다. 히에라볼리에는 뜨거운 물이 나왔고, 골로새에서는 찬 물이 나왔습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보고, 또 경험도 하지만 온천과 같이 뜨거운 물이 좋다고 합니다. 반대로 차가운 것도 회복을 하는 데 있어서, 또 어떤 건강에 있어서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미지근한 물은 어떨까요? 라오디게아 지역에는 이러한 물을 내는 수원이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이 두 도시들에 가서 가져와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물이 도착할 때는 어땠을까요? 물이 미지근해졌고, 또 많이 더러워졌습니다. 버려야 하는 상태가 된 것이죠.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상태입니다. 미지근한 상태, 버려야 하는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16절에 말씀에서도 “내가 너를 뱉어버리겠다”라고 말씀하고 있죠.
이어서 라오디게아 교회에는 또 다른 모습이 나오는데 아쉬움을 느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부자로 여기고,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말씀 17절을 부면 그들을 표현하기로 부자라고 표현을 하는데, 이것은 결코 좋은 표현이 아니었습니다. 이때 쓰인 표현은 부패하거나 불경건한 모습으로 묘사될 때 쓰인 표현입니다. 라오디게아 지역은 상당히 타락했던 곳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모습에서 벗어나야 했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불경건한 모습으로 물질의 이득을 얻고, 물질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우상숭배도 만연했죠. 이것이 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지 못했고, 어떠한 상태인지를 알지 못했습니다.그것이 이들의 현실이었죠.
3. 삶의 적용
3. 삶의 적용
지금까지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을 보았는데요. 안타깝게도 이러한 모습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보고, 경험하고 있는 교회가 바로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거든요. 그들의 모습이 어떠하다고 했었죠? 미지근하다고 했었습니다. 마음이 식어버린 것이고, 열정이 없는 모습이 미지근한 모습이죠. 이러한 모습이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아까도 코로나를 이야기했지만, 코로나를 겪은 이후에 좀처럼 회복이 되지 않습니다. 온라인 예배에 익숙해져서 예배의 자리에 나오는 것이 쉽지가 않죠. 온라인 예배를 경험하다 보니까 그것이 얼마나 편한지, 씻지 않아도 되고, 움직이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편한지 모릅니다. 그렇게 예배를 드리면 안 됐지만, 그렇게 예배를 하다 보니 그것에 익숙해졌습니다. 그래서 이제 교회에 나올 수 있는 상황이 돼도 교회에 나오지 않습니다. 편안함에 익숙해져서 내 입맛에 맞게 예배를 하죠. 예배를 드린다는 표현도 참 어렵습니다.
그리고 예배의 자리에 나와도 좀처럼 회복이 되지 않습니다. 코로나를 경험해서든, 그게 아니든 예배의 자리에는 있지만 미지근한 모습이 있습니다. 그날 찬양이 어떻든, 말씀이 어떻든 문제가 되지 않고 그냥 한 시간 보내려고 하는 마음들이 있습니다. 오는 것도 힘들고, 안 오자니 뭔가 마음 가운데 찔리기도 하고, 그냥 늘 그래왔듯이, 그렇게 자라왔듯이 형식적으로, 습관적으로 예배에 참석을 합니다. 오랜 세월 그렇게 있다 보니까 알기는 잘 알죠. 그러나 그 마음에는 차지도, 뜨겁지도 않음으로 하여금 그 미지근한 상태에서 계속 지속됩니다. 신앙에서도, 삶에서도 달라지는 게 없죠.
그리고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 중 하나가 아쉬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삶에서 아쉬울 게 없었죠. 돈도 있고, 그러니 힘들다거나 아쉬운 상황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 마음 대로 살아갔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요. 이와 같은 모습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있죠. 예배에 나오지만 갈급함이 없습니다. 지금 내가 힘든 것도 없고, 문제도 없기 때문에, 또 예배도 늘상 있기 때문에 크게 예배에 간절함이 없습니다. 그러니 예배에 한 번 빠져도 크게 문제라 생각하지 않고, 일상에서 내 마음 대로 사는 것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냥 종교생활을 하는 거죠.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는 그러한 모습을 보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합니다. 17절 말씀에서, 실제로는 불쌍하고, 비참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왜 그렇게 말씀한 걸까요? 그들에게는 하늘에 대한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 가운데 없기 때문이죠. 돈 많은 그들이 우리가 생각하기엔 아닌데 왜 불쌍합니까? 왜 비참하다 하고, 가난하지 않고 부유한 것 같은데 왜 가난하다고 할까요? 우리가 저번에도 보았듯이 이러한 자들은 땅에 매인 자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이 그들에게 전부이기 때문에 그렇죠.
오늘날 이 물질로 하여금 얼마나 잔혹한 일들이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심지어는 있을 수 없는 가족 간의 살인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한 유튜버의 사건이 터졌죠. 돈이 뭐길래 그렇게 이 사람, 저 사람을 물고, 뜯고 하는지, 그들에게는 그것이 전부이고, 우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복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역설적이게 가난한 자가 왜 복됩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늘의 것을 사모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을 사모하고, 바라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가난한 자들에게 하나님은 채워주시고 인도해 주심으로써 그들이 복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면 이 말씀에 나온 부자들보다 더 못한 자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누리며 살아간다고 하지만 그렇지도 않고, 하나님의 은혜도 경험하지 못한 자들은 이도 저도 아닌 모습인 것이죠. 늘 말씀을 드리지만,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너무나 큰 특권이 있습니다. 그 특권, 그 은혜가 무엇이냐면 슬플 때 기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고, 담대할 수 있는 놀라운 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나의 노력으로는 안 되지만, 내 안에 계시는 주님이 계심으로써 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누릴 수 있는 놀라운 특권인데,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도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자들을 향해 그들은 부자라고 하지만 실상은 그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모습을 한 번 되돌아 보기를 원합니다. 차갑습니까? 뜨겁습니까? 오늘 말씀에서는 둘 중 하나만 하라고 합니다. 결코 미지근한 상태로 있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미지근한 상태를 주님께서는 뱉어버리신다고 말씀합니다.
4. 주님의 충고
4. 주님의 충고
이어서 오늘 말씀에서는 주님께서 충고를 하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곧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모습입니다. 먼저는 제련된 금을 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냐면 믿음의 강건함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제련된 금이 어떻습니까? 강하고 단단하죠. 이와 같은 강건한 믿음으로써 살아갈 것을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를 무너지게 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죠.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어떠한 상황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세상과 타협하고, 흐르는 데로 흘러가야겠습니까? 주님께서 하신 말씀과 같이 믿음의 강건함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세상이 말하는 대로 선택하며 살아가지 말고, 늘 주님 안에 거하며 주님의 것을 선택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다음으로는 흰옷을 사라고 말합니다. 이것의 의미는 정결함, 순결함입니다. 라오디게아 지역은 우상숭배와 더불어 음행과 같이 타락한 지역이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라고 예외는 아니었겠죠. 그래서 흰옷을 사라는 것, 정결하고 순결함을 가질 것을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흰옷을 사는 것, 정결함과 순결함을 우리 또한 갖추어야 합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라고 하는 우리가 술에 취해서 본이 되지 못하고, 다른 것을 의지하고 우상처럼 더 우선시 한다면 우리 안에 어떻게 정결함이 있겠습니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내 정욕대로 산다고 한다면 라오디게아 교회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늘 흰옷을 가짐으로써 우리 안에 정결함과 순결함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마지막으로는 안약을 사라고 말씀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계속해서 보았지만 그들은 눈 뜬 장님이었습니다. 그들이 무엇이 잘못된지 알지 못했죠. 그렇게 자기 마음 대로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께서는 안약을 사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눈 먼 채로 살아가지 말고, 안약을 삼으로써 분별력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안약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써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다른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보고, 똑같이 선택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내 앞에 있는 상황 속에 올바르게 판단하고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 말씀과 같이 안약을 통하여 볼 수 있는 것을 보고, 올바른 판단과 분별력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정리
정리
여러분, 오늘 말씀을 나누면서 어떤 생각들이 드십니까? 오늘 본문의 19절 말씀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로, 사랑하는 자일수록 가르치고 벌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나누면서, 또 우리가 일상을 보내면서 마음의 찔림이 있다고 한다면 아직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놓지 않고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길 원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계속해서 생각나게 하실 것이고, 찔림과 어떤 때는 징계도 내리실 수도 있습니다. 그때 돌이킬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단순히 ‘왜 이러는 거야?’라는 생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분별력을 가짐으로써 우리의 모습을 돌이킬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20절 말씀을 다같이 읽어볼까요?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3장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주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늘 두드리고 계십니다. 내 마음에 찔림이 있는 것, 또 깨닫게 해주시고, 생각나게 하시는 것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의 문을 계속해서 두드리고 계십니다. 그때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무시하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겠습니까? 우리가 주님께로 문을 연다면 주님이 내 안에 들어와 더불어 먹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주시고,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신앙의 회복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회복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걸어간다면 분명한 승리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21절 말씀처럼 우리가 그 승리의 길을 갈 때, 주님과 함께 하는 놀라운 영광 또한 누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22절 말씀에서 이렇게 말씀을 마칩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