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주의 자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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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마가복음 1:9-11(신약 52쪽)
설교제목: 우리는 주의 자녀입니다.
9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10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11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반갑습니다.
오늘도 은혜의 자리에 나오신 분들을 축복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입니다. 이 성경 이야기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왜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셨을까요? 또 예수께서 받으신 세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오늘은 이에 관한 얘기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세례에 대한 얘기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우리에게 ‘세례’라는 말은 익숙하지만, 이를 ‘침례’라고 부르는 교파도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침례교를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간혹 이 말은 혼동을 줍니다. 쉽게 말해 ‘세례가 맞냐, 침례가 맞냐?’ 하는 논쟁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혹은 ‘세례와 침례의 차이가 뭐냐?’는 궁금증이 생기기도 합니다. 어떻습니까? 우리 성도 분들께서는 세례와 침례의 차이를 알고 있습니까? 제가 자료를 찾아보니 이것이 생각보다 좀 복잡한 이야기입니다. 오죽하면 이 문제로 교파가 갈라져 있겠습니까?
우선 세례와 침례라는 말의 뜻을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세례는 한자로 ‘씻을 세(洗), 예식 례(禮)’를 씁니다. ‘씻는 예식’이라는 뜻입니다. 반면에 침례는 한자로 ‘잠길 침(浸), 예식 례(禮)’를 씁니다. ‘잠기는 예식’이라는 뜻입니다. 서로 다른 뜻을 가진 말이지만 사실 이 둘은 성경에 나오는 한 단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바로 ‘밥티죠’라는 헬라어입니다. 이는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의 9절에 나오는 ‘세례’라는 단어의 헬라어 원어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나라에서는 밥티죠라는 단어를 세례라고도 하고 침례라고도하고 서로 다르게 부르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사실 복잡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주로 장로교 선교사들이었기 때문에 이를 한글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세례로 번역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하나의 이유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밥티죠라는 헬라어 단어가 두 가지의 뜻을 다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밥티죠라는 단어는 보통 씻는다는 뜻으로 사용되지만, 물에 잠기다는 뜻을 가지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이 베푼 세례가 바로 물에 잠겼다가 일으켜 세우는 세례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래 성경에서 사용되는 뜻이 세례도 맞고 침례도 맞는 것입니다.
물론 방식에 차이는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세례는 머리에 물을 붓는 형식 또는 뿌리는 형식의 예식입니다. 반면에 침례는 물 속에 완전히 잠겼다가 일으키는 예식입니다. 이러한 차이가 발생한 배경은 따지고보면 원조가 무엇이냐는 논쟁에 근거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받은 세례 또는 세례 요한이 베푼 세례는 사실 침례의 방식 곧 물에 완전히 빠졌다가 일으키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방식이 원조고 이 방식이 옳다는 주장입니다.
반면에 일찍이 초대 교회부터 무조건 세례를 침례의 방식으로 행하지 않았습니다. 환자들의 경우에는 물에 잠그는 방식의 침례를 할 수 없었기에 물을 붓거나 뿌리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물이 부족한 환경에서도 물에 잠그는 침례를 할 수 없었기에 세례의 방식을 택한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미 구약성경 출애굽기에서 세례의 전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이 성막에서 손과 발을 씻도록 했습니다. 이것이 신약에서 세례로 발전되어 왔다고도 합니다. 결국 세례가 무조건 침례의 방식을 따르지 않았고 그것이 참으로 원조라고 말하기도 어렵다는 것입니다.
저는 장로교파에 속해 있으니 아무래도 장로교 입장에서 세례와 침례를 얘기하는 것일텐데요. 사실 이와 같은 의견이 생각보다 첨에하고 팽팽합니다. 현재에 장로교와 침례교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세례를 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세례와 침례와 관한 자료를 살피다가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세례가 맞니 침례가 맞니 하는 것을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왜 세례가 필요한 것인지를 아는 것이고 세례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사실 방법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세례를 받았던 침례를 받았던 모두가 동일한 것으로 인정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례를 받은 사람이 다시 침례를 받을 필요가 없고 침례를 받은 사람이 다시 세례를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방법은 달랐어도 그 의미는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세례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 구절을 통해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는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례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가 무엇인지를 알아봄을 통해서 우리는 세례가 의미하는 바를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마가복음 1장 9절의 말씀을 같이 읽습니다.
마가복음 1:9(신약 52쪽)
9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방금 읽은 성경구절은 말해줍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지만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의 세례는 무엇입니까? 보다 앞선 마가복음 1장 4절에서 이렇게 나옵니다.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깐 세례 요한 베푼 세례는 ‘죄를 용서받는 세례’입니다. 여기서부터가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믿기로 ‘죄가 없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죄를 용서받는 세례’를 받으신 것일까요? 사실 이에 관한 마가복음의 설명은 없어서 이것은 성경의 난제입니다. 다만, 동일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마태복음 3장 15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쉽게 말하면,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저는 그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구절 가운데 있음을 봅니다. 마가복음 1장 11절의 말씀을 다시 한번 같이 읽습니다.
마가복음 1:11(신약 52쪽)
11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립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이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아들로 부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이 보통 특별한 분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앞서 나눴던 성경 구절에서 예수님은 세례 요한보다 크신 분임을 확인했지만, 오늘 나눈 성경 구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아주 존귀한 분으로 소개되고 있음을 봅니다. 비유하자면 이 장면은 마치 그런 겁니다. 우리가 잘 아는 춘향전에서 거지꼴을 하고 나타난 이몽룡이 사실은 암행어사였음이 밝혀지는 부분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앞에서 설명을 못했지만, 예수님을 갈릴리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갈릴리라는 촌구석에서 온 허름한 행색의 사람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이 밝혀지는 순간입니다.
한편 제가 이러한 예수님의 세례의 장면을 보면서 깨닫게 되는 세례의 의미란 이런 것입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우리 또한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받는 놀라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결코 죄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고자 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세례를 통해 나타내 보인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세례 받기 전에도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세례를 받는 일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에게 모범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물속에 몸을 담궜다 일어나는 행위가 아닙니다. 또 세례 요한의 말처럼 죄를 씻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 딸로 불려지는 일이며 그와 같은 놀라운 영광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어떤 느낌인지 상상이 되십니까? 미운 오리 새끼 동화 아시죠? 미운 오리가 자신이 백조였음을 깨닫는 순간이 어땠을까요? 신데렐라라는 동화도 아시죠? 왕자를 만나서 하녀와 같던 자신의 인생이 공주로 바뀐 순간은 어땠을까요? 세상에서 무시당하고 멸시당하던 이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새로워져서 모두가 소망하고 바라는 존재로 변화하는 것은 얼마나 놀랍고 대단한 일일까요? 세례를 받는 다는 것은 마치 그와 같은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어떤가요? 정말로 세례를 받을 때 혹은 세례를 받고 나서 우리는 그와 같은 황홀한 변화를 경험하셨나요? 물론 그런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제 어리석은 짐작에는 많은 경우에 그렇지 못했을거라 여겨집니다. 왜 그럴까요? 저는 그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구절을 통해 알 수 있음을 봅니다. 마가복음 1장 10절을 다시 한번 같이 읽습니다.
마가복음 1:10(신약 52쪽)
10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방금 읽은 성경구절은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결국 우리의 변화는 세례냐 침례냐하는 방식의 있지 않습니다. 성령을 통해 우리는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는 세례나 침례가 필요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세례를 행하던 침례를 행하던 관계없이 그곳에 성령이 임하셔야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 혹은 침례는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는 하나의 방법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세례는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가 중요하다고 해서 세례를 여러 번 받는 것은 아닙니다. 딱 1번만 받으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세례라는 예식이 아니라 성령의 임재이고 그에 따른 변화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분들께서 이것을 꼭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제가 알기로 여기에 계신 분들은 거의 다 세례를 받으신 것으로 압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의 자녀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주의 자녀답게 살아가지 못하는 것은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임재를 간구하여야 합니다. 그로 말미암아서 우리는 주의 자녀답게 살 것이니 말입니다. 바라건데 오늘 말씀에 의지하여 주의 자녀다운 삶을 이루며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