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한 영혼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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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비유
예수님의 비유
누가복음 15장 1~10절
사람들이 보기에는 별것 없어 보이는 단 한 명이더라도 그 한 사람의 가치는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성경은 결코 하나의 가치를 무시하거나 작은 것을 작다고 낮게 평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처럼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것인데 나중에는 굉장히 커진다고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이 한 명의 가치가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겠습니다.
1. 비유를 말씀하신 배경 (1~3절)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사람의 이야기와 또한 잃어버린 동전 하나를 찾는 여자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이 말씀을 하시게 된 동기와 배경이 무엇인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창녀들처럼 무시당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당시 종교인들 눈에는 크게 거슬렸습니다. 그래서 수군거립니다. 그러한 그들의 비난과 편견을 꿰뚫어 보신 예수님은 오늘 이 비유들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바리새인들과 제자들에게 분명히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의도로부터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사람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는 가운데 본문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를 대표하던 바리새인의 종교는 외적인 형식에만 몰두하던 위선적인 종교였습니다. 겉으로 어떻게 하면 멋지게 보일까에만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그들은 예수님을 비난하고 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자기들이 중요시하는 율법의 가장 중요한 본질을 놓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율법의 본질과 핵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율법 중에도 가장 핵심이라고 하는 십계명에서 1번부터 4번까지의 계명이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에 관한 말씀이고, 5번부터 10번 계명까지가 이웃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그들이 회당에 열심히 모였지만 왜 모였습니까? 또 그들이 헌금을 열심히 드리고 십일조도 다 드렸지만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엄숙하고 경건한 표정으로 회당에 드나들고 또 예루살렘 성전에도 가서 제사 드리고 찬양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가 경건하다는 칭찬을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인정을 받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계속 위선적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잃어버린 인간을 찾아 이 땅에 오셨습니다. 십자가 죽음과 부활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을 제자로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당시에는 물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별로 없었지만, 즉,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나아가 복음을 전하여 믿게 하고 제자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주님의 관심과 의도를 따라서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그들을 구원하고 주님의 제자로 만들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바로 그 사명을 위해 존재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형식에만 몰두하는 가운데 자기들과 함께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은 의롭다고 여기며 모이고, 또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조롱하고 손가락질하고 정죄하면서 ‘저것들은 우리와 어울릴 수 없다.’라는 식으로 구별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들과 함께할 수 없다고 정해놓은 부류의 사람들과 어울리는 예수님을 보고 비난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도 구원하러 오셨고, 하나님의 구원에서 소외되어야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기를 원하셨습니다.
2. 잃은 양을 찾는 목자 (4~7절)
오늘 본문에는 2개의 비유가 나오는데, 사실 누가복음 15장 전체를 보면 3개의 비유가 나옵니다. 그중 세 번째인 소위 ‘탕자의 비유’가 가장 유명합니다. 그 앞에 두 비유가 나오는데, 같은 내용을 두 번에 걸쳐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입니다. 첫째 비유를 보면, 양 100마리를 가진 사람이 그중 한 마리를 잃어버렸다면 다른 양들을 들에 두고 잃은 한 마리를 찾아 나서며, 또 찾았을 때 크게 기뻐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이 첫 번째 비유를 보면, 100마리의 양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그중 한 마리를 잃어버립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다른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을 들에 두고 잃은 한 마리를 찾아 나서며, 또 찾았을 때 크게 기뻐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아주 익숙한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종종 일어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직접 듣던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이 말씀을 듣고 다 고개를 끄덕끄덕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익숙한 삶의 이야기를 통해 천국의 기쁨을 설명하는 데 사용하십니다. 그런데 4절에서 예수님이 질문형식으로 말씀하시는데,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이전까지 계속 놀라운 말씀을 가르치셨고 또 엄청난 기적도 일으키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가운데 ‘이분이 우리 민족이 기다리던 그 메시아(구원자)인가?’ 하는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는데, 예수님이 죄인과 세리 같은 이상한 사람들과 같이 어울려 다니는 겁니다. 말씀을 들어보고 기적 행하는 것을 보면 저분이 메시아가 맞는 것 같은데, 메시아(그리스도/구원자)라면 어떻게 저런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다는 말인지 의아한 겁니다.
저런 죄인들이 오면 막아야 하는데 오히려 환영하면서 사랑을 베푸시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교제도 하십니다. 심지어 마태(레위) 같은 사람도 열두 제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러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같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떻게 저런 죄인들과 어울리는지 이해가 안 가는 겁니다.
15장에서 세 가지 비유(잃어버린 한 마리 양, 잃어버린 드라크마, 잃어버린 둘째 아들)를 예수님이 연속해서 이야기하시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비난에 대해서 ‘그게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한 영혼이 얼마나 소중한지, 특히 너희가 죄인이라고 멸시하는 저 사람들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알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비난했기 때문에 세 비유를 연속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 영혼이 얼마나 귀한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연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결론으로 청중들을 끌어들이시고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2)라고 예수님을 비난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너무나도 당연한 대답을 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익숙한 삶의 이야기이지만 어쩌면 사람들이 듣기에 어쩌면 불쾌할 수 있는 역설(paradox)을 사용합니다. 이 역설의 뜻을 잘 파악하는 것이 본문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7절)
여기서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아 나선다는 상황과(4), 죄인 하나가 회개함으로 인한 기쁨이 의인 99명보다 더하다는 말씀(7)이 무엇인지를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과연 한 마리와 ‘아흔아홉’ 마리를 비교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아흔아홉 마리는 중요하지 않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잃어버린 한 마리가 왜 중요한지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핵심입니다. 이제까지 사회의 그늘 속에 무기력하게 방치되었던 그 ‘하나’라는 미미한 존재가 지금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를 부여받고 있습니다.
비록 ‘죄인 한 사람’이 대다수인 ‘의인 아흔아홉’에게는 별 존재가치가 없는 미미한 존재일 수 있지만, 그 ‘죄인 한 사람’이야말로 예수님이 지금 가장 중요하게 찾으시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마치 100이라는 ‘전체’를 완성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존재로 취급받고 있습니다. 100이라는 전체를 완성하려면 99는 불완전하고 반드시 하나가 더해져서 100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인 한 사람’은 천국에서 엄청난 기쁨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본문의 핵심입니다.
4절의 ‘잃다’라는 동사는 헬라어 원어로 주인이 가지고 있다가 단순히 잃어버린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잃은 양은 곧 예수님과 함께한 세리와 죄인들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1). 지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로부터 비난받고 손가락질을 당하고 멸시당하고 정죄받던 세리와 죄인들이 놀랍게도 하나님이 그토록 찾으시는 영혼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들은 도움이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주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시는 것처럼, 지금 죄인들을 그냥 무시하고 정죄하는 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과 교제하며 그들을 이끌어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을 보여 주십니다.
우리는 당연히 시험에 들거나 무슨 이유 또는 사정이 있어서 나오지 못하는 분들을 격려하고 권면해서 다시 우리와 함께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도와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교회가 할 일입니다.
그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은 즐거움이 굉장히 큰데, 그것이 여기서 어떻게 표현되어 있습니까? “즐거워 (양을) 어깨에 메고”(5)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기쁨은 물론 아직 교회 밖에 있으며 주님을 믿지 않는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찾는 기쁨을 가리킵니다.
오늘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비유’는 죄인을 찾는 기쁨을 강조하면서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는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특히 죄에 빠진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찾아 나서는 노력을 통해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게 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잃어버린 양은 저절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목자가 나가서 찾아와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 비유는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믿는 사람들의 책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나가서 찾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존에 믿는 사람의 신앙이 성장하면 주님은 당연히 기뻐하십니다. 우리 각자 예수님을 믿는데 내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더 영적으로 성장했다면 당연히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신앙이 어떻게 자라갈 수 있겠습니까? 신앙이 성장하는 가장 좋은 길이 바로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애쓰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은 성경을 공부하고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봉사하고 헌금하는 그런 것으로 성장하는 게 아닙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바로 관계 속에서 성장합니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묵상 해도, 나만 혼자 하지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전혀 없고, 나 혼자만 열심히 성경 읽고 기도한다고 신앙이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관계 속에서 성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하셨습니다. 관계 속에서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관계 속에서 살되 우리끼리만 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는 우리끼리 서로 사랑해야 하고, 더 나아가 주님을 모르는 분들을 주님께 인도하기 위해서 애쓰고 눈물로 기도하며 어떻게 하면 그 영혼을 주님께로 돌릴 수 있을지 늘 섬기고 사랑으로 나아가며 애쓸 그때 우리가 성장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실천할 때 성장하는 것이지, 듣기만 할 때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 한 영혼을 위해서 열심히 말씀대로 나아갈 때, 그러다 그 영혼을 찾았을 때,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한 우리도 기쁨이 충만해집니다.
우리가 의인 99명에 집중해서 훈련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그것도 귀중하지만, 하늘에서는 잃어버린 영혼 하나가 돌아오는 것을 의인 즉 이미 믿는 사람 99명이 더 잘 믿게 되는 것보다 더 기뻐한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신분과 소속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충격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이미 믿는 사람이라면 첫 번째 부류인 ‘지역사회’를 제외한 나머지 네 개 중 어딘가에 속할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잃어버린 영혼 하나를 찾아 나서기 위해서는, 그냥 편안하게 쉬운 길로 편안하게 자기중심적인 신앙생활을 해서는 불가능합니다. 힘들고 피곤하지만, 먼저는 당연히 기도와 말씀으로 자신을 훈련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군중에서 등록 교인으로, 헌신한 자로, 또 핵심 사역자로 나아가는 겁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이 바로 우리가 힘을 합쳐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기도하며 섬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찾았을 때 우리는 주님께 큰 기쁨을 드리게 됩니다. 그 순간 하늘에서 엄청난 축제가 벌어집니다. 그러니까 한 영혼을 위해 목숨을 거는 교회가 될 때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가 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우리도 행복한 사람들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행복을 다른 데서 찾으려고 하면 되지 않습니다. 행복은 주님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면 정말 행복해집니다.
여러분, 그런데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며 찾아 나서는 사람들의 특징이 뭡니까? 예를 들어 이런 겁니다. 내가 구역 공부를 하는데 지금 막 믿어보려고 하는 사람이 공부를 같이 듣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지난 수업 시간에 결석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필기한 것을 복사해서 주려고 복사했는데, 복사되어 나온 것을 보니 복사기의 토너가 없어서 그런지 상태가 흐려서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이때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우리가 주관식에는 약하기 때문에, 객관식으로 보기를 드리겠습니다.
1) “이거 복사기가 고물인가? 누가 이것을 맡았는데 이렇게 제대로 관리를 안 해?”
2) “그래도 자세히 한 번 그 종이를 보세요. 그러면 보이니까 가져가서 잘 읽어보세요.”
3) “내가 지금 시간이 없으니까, 나중에 다시 복사해서 드리겠습니다.”
4) “이것은 제가 쓴 글씨라 저는 알아볼 수 있어요. 이건 흐리니까 저에게 주시고, 원래 제가 쓴 것을 가져가서 보세요.”
당연히 4번입니다.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그럽니다.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며 소위 믿음이 좋은 사람들은 그렇게 합니다. 믿음이 좋다는 게 뭡니까? ‘믿습니다!’라고 하면 믿음이 좋은 게 아닙니다. 사실 그것을 정확히 정의하기가 힘들지만, 믿음이 좋은 사람은 따뜻합니다. 친절합니다.
물론 따뜻하고 친절하다고 다 신앙이 좋은 사람은 아닙니다. 신앙이 없어도 친절할 수 있고 따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믿음이 좋다면,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제대로서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쌩쌩 찬바람이 불지 않습니다. 따뜻합니다. 친절합니다. 차가운 사람은 믿음이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 영혼을 정말 귀하게 여긴다면 따뜻함으로 남을 배려할 줄 알게 됩니다.
3. 잃은 동전을 찾는 여인 (8~10절)
두 번째 비유도 첫 번째 비유와 같이 ‘기쁨’이라는 주제를 반복합니다. 그런데 잃은 동전을 찾는 기쁨에는 앞 비유와 달리 독특한 면도 있습니다. 첫째로, 즐거워하는 주체가 여자라고 나와 있습니다.
“8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9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8-9절)
‘드라크마’는 ‘은전의 명칭’입니다. 이 여자는 열 개의 동전 중 하나를 잃고서 그것을 찾기 위하여 쉴 새 없이 애쓰고 있습니다. 그 모습은 앞 비유에서 목자가 그랬던 것처럼 잃은 자를 찾는 주님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 은전의 성격은 고대 유대 사회에서 이 여자에게 ‘결혼 지참금’이었을 수도 있고, 남편이 사랑의 증표로 맡긴 ‘예물’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가정의 비상시를 위해 준비해 두었을 수도 있고, 유대인들의 축제 시에 사용할 소중한 저축금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분명히 그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둘째로, 이 여자가 동전을 찾고 나서 기뻐하는 행동은 곧 잃은 자를 찾고 즐거워하는
하나님의 기쁨, 하늘의 기쁨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10절)
이 여인의 즐거움이 곧 하나님의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앞의 비유에서 목자는 양 100마리를 채우기 위해 한 마리를 찾아 헤맸으며, 이 뒤에 이어지는 ‘탕자의 비유’에서는 아버지가 온전한 가족을 회복하기 위하여 얼마나 둘째 아들을 기다렸는지를 보여 줍니다.
15장의 두 번째 비유인 드라크마 비유에서는 이 여자도 앞의 목자나 뒤의 아버지와 같은 열심과 애정으로 10개의 동전을 회복하기 위하여 잃은 한 개를 부지런히 찾고 있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찾고 있습니까? 8절을 다시 보면, 잃은 동전을 찾기 위해 여인은 3중적인 노력을 기울입니다. 불을 밝혀놓고, 집을 쓸며, 동전을 발견할 때까지 부지런히 찾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흔아홉을 들에 두고 떠나는 목자의 노력이나, 또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을 날마다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과 같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신다고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깨지고 넘어지고 말을 안 들을때에 벌하시는 게 아니라 감싸주시는 사랑입니다. 감싸주시면서 바른 길로 가도록 인도해주십니다. 배신하고 저주해도 감싸 안아주시는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완벽하기 때문에, 내가 뭘 잘하면 더 사랑하시고 내가 잘못하면 덜 사랑하시는 게 아닙니다. 그 사랑은 똑같습니다. 완벽하기 때문에 더 좋아질 수도 없고 더 나빠질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한 영혼을 그렇게 사랑하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도 그렇게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안 계셨으면 내 인생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래서 외아들 예수님을 보내주셨고 목숨을 내어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한 영혼을 위해 목숨을 걸며, 한 영혼을 찾아나서는 개인과 교회가 되어야 할 이유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 땅에는 있는데 천국에는 없는 것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로 나가자고 하면서 영혼 구원하여 제자를 만듦으로 그렇게 하자고 했습니다. 영혼 구원하여 제자를 만든다는 것은 예배, 교제, 양육, 봉사, 전도와 선교입니다이 다섯 가지 중에 무엇이 천국에 없겠습니까?
일단 천국에는 죄가 없습니다. 그래서 죄인이 없기 때문에 전도가 없습니다. 선교가 없습니다. 다 믿는 사람인데 무슨 전도를 하겠습니까? 우리가 힘쓸 다섯 가지 중에 전도와 선교는 천국에 없습니다. 예배하고 교제하고 섬기는 것은 천국에도 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예배할 것이고, 끊임없이 서로 사랑하며 교제할 것이고, 끊임없이 서로를 섬기며 천국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에는 죄가 없기 때문에 죄인이 없고, 그래서 전도나 선교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죄를 가지고 들어갈 수 없는 완벽한 곳이기 때문에 당연히 죄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아서 왔으니까 전도할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선교헌금도 보내고 기도 하는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와서 예배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나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 사는 동안 천국에는 없는 죄와 전도 중에 어느 것을 하며 사시겠습니까? 열심히 죄를 지으며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열심히 전도에 힘쓰며 사시겠습니까? 죄가 무엇입니까?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 나는 당신이 필요 없습니다. 내가 알아서 합니다. 내가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안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 자체가 죄입니다. 믿는 사람도 하나님을 믿으면서 실질적으로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 죄의 핵심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그게 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거부하고,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내 편안과 내 안락을 위해 삶을 살아야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잃어버린 한 영혼을 위해 최선을 다해 찾아나섬으로써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 인생이 되어야겠습니다. 바로 그러한 우리 각자의 삶과 우리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