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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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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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는 바울이 그의 영적 아들인 디모데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입니다. 특히 에베소에서 에베소 교회를 섬기고 있는 디모데에게 목회자로서의 사명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편지입니다. 그래서,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에게 보낸 디도서를 묶어서 목회서신이라고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목회자로서 사역을 감당할 때에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소명이 흐려질 때, 목회자로서 삶이 때로 힘에 겨울 때에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를 통해서 다시 격려와 도전을 받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목회서신은 목회자들에게만 적용이 되는 것인가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저는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와 같이 사제와 성도들의 구분이 명확한 곳에서는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는 사제들만 읽으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 개혁된 교회는 목사와 성도들의 차이가 로마 카톨릭 교회와 같이 사제와 평신도라는 구분으로 나눠지지 않습니다. 목사와 성도님들은 모두
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입니다.
우리 개신교회에서는 목사라는 직분을 포함하여 모든 직분들이 교회에서 감당할 사역의 다르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지, 본질적으로 다른 계층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목사는 성도들과 동일한 성도입니다. 다시 말하면, 목사 이기 이전에 한 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가르치고 성도님들을 돌보는 일을 감당하는 것이지, 목사가 다른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특별한 존재라고 믿지 않습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디모데전후서를 목회자들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주신 것이라고 설교하면서도, 목회자 스스로가 성도들과 구별된 무슨 특권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한다면, 스스로 일관성을 무너뜨린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위로하는 일을 감당하는 목사를 존경하고 여러분들이 귀하게 여기는 것은 나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권면을 우선은 목회자가 받아야 하고, 그 목회자를 통해서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가 받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구조를 먼저 살펴보면,
바울은 먼저 1) 우리가 믿고 확신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기록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러한 2)확실한 믿음에 따른 삶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마지막으로 3)본인의 그렇게 살아왔다고 증언합니다.
이러한 구조에 따라서, 먼저 살펴볼 것은 우리가 믿고 확신하는 것이 무엇인가입니다.
1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실재하시는 분이십니다.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사람이 만들어 낸 허상이 아닙니다. 연약한 인간들이 영원을 꿈꾸며 만들어낸 상상의 존재가 아닙니다. 그 분은 확실히 살아계시며,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며, 우리의 삶을 지키시고 인도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은 창조주 이시며, 만유의 주인이십니다.
창조주 이시기에 모든 것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 지를 가장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가 만유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은 그 분께 복종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자기의 유익이 아니라, 우리의 유익을 위하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그 분의 주권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은 우리에게 유익한 일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고백은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그와는 달라야 하는 것이지요. 바른 교훈을 받아야 하고 자기의 사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릅니다. 많은 스승을 두지 않고 단 하나의 스승, 곧 하나님을 스승으로 둡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이율배반적이 됩니다.
우리들은 귀를 기울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끊임 없이 경책을 받고 또 때로 위로를 받으며 그 분의 장성한 분량까지 변화되어 성장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 성도들이 모여서 함께 훈련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듣기를 감사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을 받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가 심판주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에는 세상의 권력자의 심문을 받고 죄 없이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세상의 권력자들은 진리에 따라서 심판하기 보다는 권력관계, 개인의 유익에 따라서 심판하는 자들일 수 있습니다. 제가 모든 판사와 법집행하시는 분을 나쁘게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인간으로서의 한계로 말미아아 공정한 심판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인간과 다릅니다. 그 분은 모든 것을 명명백백하게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앞에 숨기울 것도 없고 과장될 것도 없습니다. 그 분의 눈으로 우리 마음을 꿰둟어 보시며 우리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 분은 반드시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가 나타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나라가 확실하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실 이것이 우리에게 소망이 되고 기쁨이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 심판에서 구원받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복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복음을 듣지 못하고 복음을 믿지 못한다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예수님이 심판주로 오신다는 것과 그 분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은 우리에게 저주가 될 뿐입니다.
우리는 죄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엄중한 기준과 마음과 생각을 꿰뚫어보시고 아시는 그 분앞에서 우리는 심판을 면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그 앞에서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이 없다”라고 항변해 보아도, 그 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이 역사상 한 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 심판자 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예수님이 심판주로 오신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은 변함없는 진리이며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요구되어 지는 것은 구원 얻게 하는 복음인 것입니다. 복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그래서, 복음은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다른 어떤 무거운 일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복음을 들고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을 얻습니다.
복음으로 구원얻게 된 우리들에게 이제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가 확실하게 믿는 것과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묶어서 바울은 2절에서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 확실한 사실과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라는 것은 언제나라고 다시 말할 수 있고, 그것을 조금더 의역하면, 우리의 삶의 목적을 바로 그 복음을 전하는 일에 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원화 참된 진리를 알고 믿는 자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라면, 삶의 태도가 달라지게 됩니다. 2절 후반부에서 이렇게 권면하지요. “범사에 오래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경책=유죄 선고하다
경계=꾸짖다
권하라=위로하다 격려하다
이 과정들의 기초는 바로 오래 참음입니다. 오래 참는다는 것은 그냥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의미로서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이유를 3-4절에서 설명합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듣기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아직 그들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도 모르고 심판주 예수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인생을 그렇게 살아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고난의 삶이 결국에 하나님 앞에서 면류관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바로 주의 나타나심,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는 우리들도 바울과 같이 인내함으로 경책하고 견계하며 권하며 복음을 전하는 아름 다운 삶을 살게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