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결기간을 통해 깨닫는 장차 주실 영광의 기쁨 2024 0715 레1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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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550장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 546장 주님 약속하신 말씀 위에
레위기 12:6–8 (NKRV)
6 아들이나 딸이나 정결하게 되는 기한이 차면 그 여인은 번제를 위하여 일 년 된 어린 양을 가져가고 속죄제를 위하여 집비둘기 새끼나 산비둘기를 회막 문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7 제사장은 그것을 여호와 앞에 드려서 그 여인을 위하여 속죄할지니 그리하면 산혈이 깨끗하리라 이는 아들이나 딸을 생산한 여인에게 대한 규례니라
8 그 여인이 어린 양을 바치기에 힘이 미치지 못하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가져다가 하나는 번제물로, 하나는 속죄제물로 삼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속죄할지니 그가 정결하리라
산부의 정결기간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큰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그 은혜는 오늘의 고통을 인내하게 하고, 장차 주실 영광의 기쁨으로 오늘을 살게 합니다.

문맥 이해 : 우리 몸 자체에서 기인한 부정

레위기 12장, 몸의 부정에 관한 내용. 어제 오늘의 본문인 12장은 특별히 여성의 출산에 관해서 부정해지는 것과 정결해지는 조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잘못 이해하면 여자만 부당하게 부정의 프레임을 씌우는 것이 아닌가 할 수 있다. 하지만 내일부터 이어지는 13, 14, 15장까지 보면, 남성이나 여성이나 둘다 유출병의 부정함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여성의 생리나 남성의 설정과 같은 특별한 성별에게 국한되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으나, 남녀의 가치를 구분하여 차별을 두는 정결법은 아니다. 그래서 오늘은 12장에서 나오는 여성만이 할 수 있는 위대한 일, 출산에 관한 이야기이다. 레위기의 정결예법에서 출산의 부정함이 왜 나오게 되었을까? 그 세부적인 관심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를 통해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일까 함께 나누고자 함.
앞서 아들을 출산했을 때와 딸을 출산했을 때 부정한 상태의 기간이 달랐음.
딸을 출산한 것에 대하여 더 긴 정결기간을 요구하는 것은 인도 남부와 고대 히타이트와 같은 다양한 문화에도 존재했음. (밀그롬)
딸을 출산했을 때, 산모에게 더 긴 정결기간을 요구하는 것은, 오히려 산모와 상대적으로 약한 여자아이를 보호하기 위함으로 해석할 수 있다.
보호법으로 이 본문을 해석하자면, 이 정결기간은 산후 조리기간이다. 우리나라도 삼칠일이라고 해서, 예전에는 출산하면 집 대문에 금줄을 달게 되어 있었다. 면역력이 약한 신생아를 보호함과 동시에 산모의 회복을 돕는 기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격리됨은 온 마을의 축복의 상징이었다. 그 격리를 통해 사람과의 접촉이 가능한 시간을 기다렸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의 부정함의 의미는 죄로 인한 더럽혀짐이 아닌, 보호를 위한 격리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부정함은 죄가 아님.
이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출산 자체가 죄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번제와 속죄제의 제물을 가지고 오지만, 그 출산 자체로 인해 여인에게 죄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깨끗한 상태로 나아가는 틀이 지켜져야 함을 의미한다. 그런데도 속죄제를 이야기하는 것을 한 주석가는 이렇게 해석한다.
“출산 과정에서 부당하게 자녀 축복에 대해 욕심을 부린 경우, 혹은 해산의 고통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인내하지 못하는 따위의 실제적인 죄를 속죄하기 위해 드려졌을 것이다.”
즉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것은 축복받을 만한 것이지만, 그 과정 가운데 일어나게 되는 실제적인 죄를 경계해야 함을 이야기 한다. 극한의 고통은 사람이 인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고통 중에 웃으라고 하는 것은 가스라이팅에 가깝다.
우리나라가 현재 세계에서 출산율이 가장 낮다고 한다. 젊은 가임기의 여성이 아이를 낳지 않는 것. 여러가지 복합적이고 복잡한 이유들이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고통으로 인한 두려움이 아닐까 한다. 해산의 고통은 모든 어미가 겪어야 하는 숙명이다. 자신의 몸 속에 다른 생명이 자라나고 있다는 것은 신비하면서도 한 편으론 무서운 일이다. 특히 고등생명체로 갈 수록 잉태와 출산의 과정은 생명을 담보로 하는 일이다. 예전에는 자녀를 출산하면서 죽는 경우도 허다했다. 이 해산의 고통은 출산의 순간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잉태하고 10개월을 품고 있는 임신 기간 전체를 말한다고 하겠다. 이것을 누가 대신할 수도 없다. 오롯이 어미가 겪어내야만 하는 인내의 시간이다.
누가 고통을 즐거워하겠는가. 특별히 요즘 시대 젊은이들은 더 그런 현상이 두드러지는 것 같다. 힘든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성장을 위한 고통의 순간을 견뎌내려고 하는 그 역치 값이 꽤 낮아보인다. 표면적으로 보면, 이 사회가 발전했다. 의료 기술이 발달해서, 출산과정에서 사망하는 산모의 숫자가 엄청나게 줄었다. 산후 조리원. 정부의 지원. 사회 인식. (예전에는 딸 낳으면..)
모든 여성에게 출산을 무조건 해야만 한다고 무지성으로 강요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한편으로 성경적 가치관에서 출산의 의미가 과연 해산의 고통을 감내할만한 것인가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사건 이후로 하나님이 여자에게 주신 벌은 해산의 고통이었다. 게다가 오늘 본문에서 보는 것처럼 해산의 고통에 더해 산혈로 인한 부정의 프레임까지 씌워졌다. 1차적인 의미로만 보자면 해산의 고통이 진실로 하나님의 저주로만 여겨진다. 그러나 자세하게 성경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창세기 3:16 “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죄를 범한 여자가 받은 하나님의 벌이다. 그러나 14절, 17절을 보자.
창세기 3:14 “1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창세기 3:17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뱀은 분명하게 하나님의 심판을 저주로 받았다. 다시 저주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은 땅에게 적용될 때이다. 즉 사람이 하나님꼐로 받은 고통의 이야기는 뱀에게 내려진 저주 심판과는 다른 성격이 것이며, 하나님이 여자, 즉 모든 인류에게 이 고통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다른 계획을 깨닫기 원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소망이다.
15절을 보면 뱀에게 내려진 저주가 여자와 연결이 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죄가 얽힌 관계가 된 뱀과 여자가 서로 원수가 되는데, 그 죄의 고리를 깨부실 후손이 여자에게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창세기 3:15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15절의 이 후손 이야기를 우리는 메시야 예언으로 해석한다. 그런 의미에서 임신하는 고통이 크게 더해지긴 하겠지만,(없던 것이 생긴 게 아니다. 있는게 더해졌다는 것) 그 수고하고 자식을 낳는다는 것을 구원의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임신하는 “고통”을 더하게 하신 것은 죄의 결과가 얼마나 아픈 것인지, 그리고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깨닫게 하는 것에 있다. 특히 고통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아차브라는 단어인데, 여기에는 새기다, 각성시키다라는 어원에서 온 말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이 고통을 통해 하나님이 죄의 결과를 얼마나 아파하셨는지, 또 우리에게 얼마나 큰 고통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그러나 이 고통 자체가 죄는 아니다. 임신하고 해산하는 것 자체가 죄가 아니다. 오히려 구원의 비밀을 알게 하는 축복인 것이다.
임신과 출산이 얼마나 위대한 일이냐 하면,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대로 우리 사람을 지은 것처럼,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자신의 형상을 닮은 아이를 창조해낸다. 하나님의 창조능력을 유일하게 공유하는 사람은 여성이다. 그런 의미에서 해산의 고통은 장차 얻을 영광에 비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레위기 본문의 출산한 여성이 그 산혈로 인해 부정하게 되어 격리되는 것은 그 죄로 인함이 아닌, 부정에서 정결로 나아가는 틀, 그 의식을 통해 하나님께 온전한 감사를 드리는 시간인 것이다.
그것에는 빈부의 격자가 없다. 힘이 미치지 못하면.
여전히 여기서도 하나님의 헤세드가 발동된다. 레위기의 제사는 가난한 사람이나 부요한 사람이나 그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을 향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 그러나 신약의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부요함을 가지고 거룩함에 등급을 매겼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들의 의로 삼았다.
하지만 명확하게도, 하나님은 우리들의 마음의 중심에 관심이 있으시지, 제물의 경중이나 재산의 유무에 관심이 있으시지 않았다. 오히려 제물을 바치는 당사자가 온전하게 하나님 앞에 자신이 바쳐지는 심정으로 나아오는지가 중요했다.
우리가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예물을 드리는 것은 그 모든 은혜의 근원이 주님이시라는 고백이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의 고백이 오늘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기를 원한다.
Romans 8:17–18 NKRV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자녀가 되려면 출산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 구원의 영광을 누리기 위해선 고난도 함께 있을 것이다고 바울을 말한다. 그 고난은 모든 의미의 고난일 것이다. 마음의 법과 죄의 법이 서로 싸우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고난, 즉 예수 믿고 구원받은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신분이지만, 현실의 삶에서 그 두 법이 서로 투쟁하며 겪게 되는 고통이 분명하게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그 고난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장차 주실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 해산의 고통을 비롯한 인간사에서 겪게 되는 모든 고통은 아프다. 인내하기 쉽지 않다. 예수 믿으면 고통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냐를 깨닫는 것 같다. 우리 신앙생활은 장차 받을 영광을 기대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받을 영광에 대한 기대감이 오늘의 고통을 잊게하고, 오늘의 현실에서 소망과 희망을 발견하게 한다.
1 Peter 5:10 NKRV
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고난 중에 있습니까, 고통 중에 있습니까, 우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우리의 터를 견고하게 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가 되길 축복.
이 고백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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