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주님의 손과 나의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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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벌서 7월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하계수양회 1차가 약 11000명 접수한 가운데 잘 치루워 졌습니다. 토요일 점심 식수 인원이 약 8000명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하계수양회를 생각하면 많은 것들이 떠오릅니다. 그중에 가장 떠오르는 것은요.. 형제 자매님의 미소인것 같습니다.
그리고 봉사의 손길과, 전도하는 그 손길이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손에 대해서 생각을 해볼려고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배푸신 손과 내가 행해야 하는 손이 무엇이 있을지 한번 시편의 말씀으로 교훈을 받아 볼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손은 어떻습니까?
그러면 우리의 손은 어떻습니까?
시편 144:1, “1 나의 반석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저가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며 손가락을 가르쳐 치게 하시도다” 시편 144:7 “7 위에서부터 주의 손을 펴사 나를 큰 물과 이방인의 손에서 구하여 건지소서” , 시편 144:11 “11 이방인의 손에서 나를 구하여 건지소서 저희 입은 궤사를 말하며 그 오른손은 거짓의 오른손이니이다”
방금 읽은 시편을 보면 손이 세번 나옵니다.
1절에 보면 “나의 반석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저가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며 손가락을 가르쳐 치게 하시도다” 여기 저가 내 손을 하나님이 가르치시고 싸우게 하셨다. 여기 다윗의 손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의 손을 훈련시키시고 전쟁을 위해서 훈련시키고 손과 손가락을 훈련 시켰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윗의 손이 나와 있고 7절에 보면 “위에서부터 주의 손을 펴사 나를 큰 물과 이방인의 손에서 구하여 건지소서” 7절에는 위에서부터 주의 손을 펴사, 주의 손이 여기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1절에는 다윗의 손이 나오고 7절에는 주님의 손이 나오고 그 뒤에 “이방인의 손에서 구하고 건지소서” 이방인의 손이 여기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8절에도 “저희 입은 궤사를 말하며 그 오른손은 거짓의 오른손이니이다”,
11절 “이방인의 손에서 나를 구하여 건지소서 저희 입은 궤사를 말하며 그 오른손은 거짓의 오른손이니이다”
여기 다윗의 손이 나와 있고 주의 손이 나와 있고 이방인의 손, 이방인의 손이 얼마나 거짓된 손인지 8절과 11절에서 두 번이나 강조해서 그 오른손은 거짓의 오른손이라고 그렇게 강조했습니다.
시편144,편을 기록한 다윗은 구약 시대에 구원을 받은 사람의 대표적인 모습이며, 신약시대의 참된 성도를 대표한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이 시편을 통해서 어떻게 다윗이 신앙생활을 잘 할수 있었는지 알수 있습니다.
7절을 통해서 보면 주의 손을 의지한 다윗을 알수 있고 주의 손에 붙잡힌 다윗을 볼수 있습니다.
다윗은 이방의 세력에서 잘못된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사울을 피해 돌아 다녔을때. 여호와께 묻지않고 돌아다닐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울을 쉽게 죽일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주의 손의 붙들려서 주의 손을 의지했던 자였습니다.
시편 144:8 “8 저희 입은 궤사를 말하며 그 오른손은 거짓의 오른손이니이다” ,시편 144:11 “11 이방인의 손에서 나를 구하여 건지소서 저희 입은 궤사를 말하며 그 오른손은 거짓의 오른손이니이다”
방금 읽은 이방인의 손에서 나를 구하여 건져달라는 다윗의 기도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주님의 손을 붙잡고 살아가는데 구원받기 전에는 우리가 마귀의 손아래 놓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붙잡은 손들은 이세상의 것들을 붙잡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헛된 것들이었습니까? 이세상의 것 내가 구원받지 않았다면 이 세상의 것을 붙잡고 계속 살았을것입니다. 그 손을 놓고 주님의 손을 붙잡은것 그것 놀라운 일 아닙니까?
우리가 정말 구원받기 어려운 시기에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세상에 좋은것이 너무많고 볼것도 많고 그렇지 않습니까? 요즘 욜로 족들이 있지 않습니까?
한번뿐인 인생 재미지게 살다가 가자 하는 주의 잖아요! 그러한 세상에서 우리가 살았는데 그 잘못된 손에서 벗어나서 하나님께 붙잡힌바 된 사람이 바로 여기에 앉아 있는 여러분들인것입니다.
정말 놀라운것입니다. 진짜인 오른손을 붙잡아 보니깐 내가 잡고 있었고 그것이 올바른 손인줄 알았는데 거짓의 오른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 않습니까? 지금 다윗은 그것을 말하고 있는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는것을 잠시 생각해보면 다윗에게 역사했던 그 의로운 오른손이 우리를 나를 붙듣것이 아니겠습니까?
충분히 잘못된 손들이 움직였었는데.. 그것에 붙잡히지않고 주님의 손에 붙들려서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것은 정말 놀라운것입니다.
시편 31:15 “15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와 핍박하는 자의 손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 여기 주의 손이 나오고 내 원수와 핍박하는 자의 손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속에서는 주의 손이 있다고 다윗은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인 됨과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있습니다. , 즉 세상에 어떤 손보다 하나님의 손이 더 크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중심으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시편 144:2 “2 여호와는 나의 인자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는 자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내 백성을 내게 복종케 하시는 자시로다” 이 말씀통해서 알수 있습니다.
2절에 하나님을 나의 무엇무엇이요 이렇게 일곱번이나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자기와 연결시키고 있는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은 하고 얼마나 연결시키며 살고 있습니까? 서두에 제가 말씀드린 하나님의 손에 대해서 안다고 믿는다는 분들이 과연 그 하나님의 손과 나를 얼마나 연결을 시키며 살고 있냐는 것입니다.
다윗은 일곱번이나 이렇게 하나님과 나와 연결한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
우리도 생각해보십시요! 구원을 받을때나 구원의 말씀을 들으때 어떻습니까? 정말 하나님이 나의 전부이구나 하고 깨닫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3-4절 말씀이 나의 말씀이 되지 않습니까?
시편 144:3–4 “3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관대 저를 생각하시나이까 4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
다윗은 확실한것을 붙잡은 사람입니다.
소경이었다가 눈을 뜬 사람이 하는말은 많은 말을 하지 않고 딱 이 한마디 했습니다. 변론의 자리에서
요한복음 9:25 “25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확실한것을 붙잡은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었냐면 난 소경이었다.. 하지만 난 지금 본다 이것이 증거다 이렇게 말을 하고 있는것입니다
다윗도 나의 평생에 주님의 도우심으로 살아왔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의 인생의 전부이다. 이렇게 말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시편 144:1 “1 나의 반석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저가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며 손가락을 가르쳐 치게 하시도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을 나의 반석이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이렇게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을 돌아볼까요? 우리는 어떠한 모습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손의 이끌려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의 손을 의지 하며 아니면 다른 방백들의 손을 의지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그런데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이 나에게 배푸신 손을 의지 하지 않은채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손을 의지 하는 것보다 방백들의 손의 의지하면서 살지 않습니까?
어떻게 나를 도와줄 사람들을 찾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고 도와 주지 않으면 이러한 말을 하죠. 왜 나를 도와 주시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을 혹 원망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왜 나의 친척들은 구원시켜주지 않으십니까? 이렇게 때를 쓰고는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무엇이라 하겠습니까?
민수기 11:18–23 “18 또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 몸을 거룩히 하여 내일 고기 먹기를 기다리라 너희가 울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애굽에 있을 때가 우리에게 재미 있었다 하는 말이 여호와께 들렸으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실 것이라 19 하루나 이틀이나 닷새나 열흘이나 이십일만 먹을 뿐 아니라 20 코에서 넘쳐서 싫어하기까지 일개월 간을 먹게 하시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 중에 거하시는 여호와를 멸시하고 그 앞에서 울며 이르기를 우리가 어찌하여 애굽에서 나왔던고 함이라 하라 21 모세가 가로되 나와 함께 있는 이 백성의 보행자가 육십만명이온데 주의 말씀이 일개월간 고기를 주어 먹게 하겠다 하시오니 22 그들을 위하여 양떼와 소떼를 잡은들 족하오며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들 족하오리이까 2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
여호와의 손이 짧아 졌는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 이러한 말씀을 하실것입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졌을때가 있었는지 물어보는 것입니다.
여기 앉아 있는 형제 자매님에게 물어보십니다. 짧아 졌을때가 있습니까?
사람의 능력은 점점 좋아집니까? 점점 감소하게 됩니까? 나이가 들면 점점 힘과 기력이 떨어지지 않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능력은 절대로 소멸이 되거나 감소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3:8 “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에 보면 땅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분이신데.. 이 분은 천지를 창조하신분이고 피곤하지도 않으신분이고 곤비치 않으신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잊어버리고 살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응하신.. 나를 통해서 역사하심을 잊어버리고 살기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나를 돌아보면 나를 통해서 역사하심이 큽니까? 작습니까?
나에게 배풀어주신 은혜가 너무 큼을 느끼지 않습니까? 구원받은것도 주님의 은혜이고, 지금까지 내가 살아 있는것도 주님의 은혜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맞죠..
우리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다윗도 하나님이 자신에게 배풀어주신 그 크신 은혜를 마음에 지니고 살았던것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말을 남기지 않았습니까?
시편 116:12 “12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우리도 주님이 나에게 배풀어주신 은혜를 깨닫고 살아간다면 주님의 손에 의탁하며 살아갈수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중심으로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훈련을 받으면 살았습니다. 다윗은 이 두손으로 무엇을 했을까요? 훈련을 받으면서 하늘에다가 원망의 말을 했을까요?
아닙니다. 다윗은 두손을 모아 하나님께 간절히 빌었고 도우심을 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1절에 하나님께서 내 손을 가르쳤다고 말씀하고 있는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훈련을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긴 생활동안 훈련을 받았는지 말을 하지 않아도 다 알지 않습니까?
양을 칠때부터 하나님께 의지 하도록 훈련시키고, 10년간의 광야, 그리고 아들에게 쫒김을 받고, 계속적은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통일왕국을 이루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수 있었습니다.
시편 18:34 “34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내 팔이 놋 활을 당기도다”
하나님이 손을 훈련시켰다고 지금 말씀드리고있습니다. 얼마나 훈련을 시켰냐면. 놋 활을 당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놋 활을 당길려면 얼마나 큰 힘이 있어야 할까요?
하나님이 훈련시켜 놋 활을 당길수 있을정도로 많은 훈련을 시킨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떠한 훈련을 시키실까요?
우리에게는 독수리 훈련을 시키십니다.
신명기 32:11 “11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현대인의 성경으로 보면 이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11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흔들어 새끼가 떨어지면 날개를 펴서 새끼를받아 올리듯 하셨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고통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여 홍해를 가르시고 광야 40년을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결국 가나안 땅으로 이끄셨습니다.
이것을 신명기는 독수리가 새끼독수리를 양육하는 것으로 묘사를 하였습니다.
독수리의 둥지는 절벽위에 있습니다. 그곳에 새끼를 키웁니다. 어느정도 자라면 새끼가 계속 보금자리에 있지 못하게 어지럽게 만듭니다. 흔들다고 표현을 하고 있죠!
그래서 보금자리에서 떠나게 합니다. 떠나면 어디입니까? 낭떠러지입니다. 결국은 떨어지겠죠.. 그모습은 독수리는 그 위에서 너풀거리고 있는것입니다. 계속 보고 있는거죠..
영어성경에는 호바링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새끼 독수리가 땅바닥으로 곤두박질 치고 있을때 거의 부닥칠때 쯤 독수리가 날개로 받아서 다시 올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떨어뜨리고 이것을 반복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결국 새끼 독수리는 날개짓을 하게되어 하늘의 제왕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훈련시키는 것을 지금 신명기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훈련시키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돌아보면 정말 우리를 이렇게 훈련시키고 계심을 느끼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어떠한 훈련을 시키고 계십니까?
(신명기32:11)에 나오는 것처럼 제 1단계는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한다는 것입니다.
푹신푹신한 깃털 둥지를 버리고 가시나무를 보금자리에 넣어서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나오라고 하는거죠..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떻습니까? 계속 편안한것만 추구하고 있으면 신앙이 성장합니까? 아니면 그자리 그대로 입니까?
우리에게 환란과 역경이 없다면 신앙은 성장하지 않습니다. 그냥 편안한것을 바라보고 살면 고난받을수가 없죠!
하나님은 그것을 아시기에 우리를 고난가운데로 넣으십니다.
요셉을 보겠습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말을 듣고 형들에게 갔습니다. 만약에 거기가 멀다고 때쓰고 가지않았다면 편안한 삶을 추구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요셉이 나오지 않았겠죠.
하나님은 요셉을 저멀리 성경을 보면 헤브론 골짜기에서 세겜까지 보내는 것입니다. 이 거리는 먼 거리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없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사람이 도단으로 갔다는 말을 듣고 어떻게 했습니까? 그곳까지 갔습니다. 30km를 더 간것입니다. 요셉은 아버지 옆에 가만히 있으면 고난이 없고 환란이 없었을 것인데
주님의 때가 시작되니 요셉을 훈련하기 시작한것입니다.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했죠.. 어려서 부터 미움시기를 받았지만 아버지 옆에 있어서 버틸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혼자 있는 상황이 이제 본격적인 주님의 훈련의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구원받고 나서 편안한 삶만 살고 계십니까? 아니면 고통중에 있습니까?
저는 중학교때 구원받고 계속 부모님 밑어서 광주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때 들었던 많은 말들이 온실속의 화초라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저도 광주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처음으로 부모님을 떠나서 이천이라는 곳을 오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직업군인으로 이천으로 왔습니다.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정말 많은 고난도 있었고 환란도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를 시험하는것을 느꼇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계신분들은 이러한 경험을 한번쯤 해보셨을 것입니다.
혹 아무런 고난과 역경이 없다면 아직 푹신 푹신 곳에서 나오지 못한 분일수 있는것입니다. 반듯이 주님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주님을 위해서 살아보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분이라면 이러한 훈련가정이 있을 것입니다.
욥도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었습니다. 죄를 짓지 않을려고 무단히 노력을 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 욥도 시험하기 위해서 훈련하기 위해서 자녀를 치시고, 재산도 날아가고, 자기의 몸도 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을때는 잘 섬겼는데.. 어려움이 있을때 보금자리가 가시나무로 가득찰때 어떻게 하는지 볼려고 주님은 더욱더 나를 몰아가는것 같습니다.
그리고 2단계는 신명기 32장에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주님은 우리를 그 역경속에 보내시면서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는것입니다. 멀리서서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왜요 보호 하기 위해서 더욱더 보고 있는 것입니다.
어미는 갓 날으려고 애쓰는 새끼를 보호하기 위하여 주변을 떠나지 않고 날아 다닙니다.
새끼는 어미를 보지 못하지만 어미 독수리는 누굴 보고 있습니까? 온통 신경을 새끼에게 집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그 환란과 역경, 고난속에 우리를 밀어 넣으시지만 항상 주님은 우리를 지켜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목하고 계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시편 32:8 “8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처음가본길을 어느 사람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거기에 두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한분은 알려주고 그냥 가버리는 사람. 한분은 알려주고 잘가나 못가나 지켜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은 후자인것입니다. 잘가나 못가나 지켜보고 계시고 잘못가고 있으면 거기 아니라고 알려 주십니다. 우리를 주목하고 훈계하고 계시는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신것입니다.
마가복음 6:48 “48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제자들이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주님은 제자들에게 벳새다로 가라고 하시고 그때부터 주님은 보고 계신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것은 시간입니다. 몇시입니까?
밤사경입니다. 밤사경은 새벽3-6시입니다. 보일까요? 거리도 수라나 떨어져 있습니다. 약 5km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보일까요? 그런데 성경은 보시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말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다 보시고 관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45:15 주님은 숨어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말은 숨어서 우리를 계속 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주님이 우리의 눈에 보이면 어떠할까 좀더 조심하고, 좀더 열심히 하지 않을까? 그러한 생각을 해보곤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숨어 계시는 분입니다. 보이지가 않으십니다. 그런데 우리를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독수리의 새끼는 어미 독수리가 보이지는 않지만 독수리의 어미는 그 위에서 계속 어떻게 하고 있는지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너무 감사하지 않습니까?
3단계로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이러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독수리 새끼들이 둥지에서 기어 나오면 보고 있다가 새끼를 얹어 더 높은곳에 올라갑니다. 그리고 사정없이 떨어 뜨려 버립니다.
그리고 새끼들이 땅에 부딪칠 상황이 되면 쏜살같이 내려가서 다시 날개로 받습니다. 그것을 새끼 독수리가 혼자 날수 있을때까지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연단하시는 것입니다.
가끔씩 보면 내가 넘지 못한 일이 있어서 피해가면 또다시 똑같은 일을 주시는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한 일을 넘을수 있을때까지 주님은 반복적으로 주시는것을 경험을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훈련을 하신 목적은 너한번 고생해봐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명기 8:2–3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하려 하심이니라”
나를 겸손하게 만드시고, 또한 순종하게 만드시고, 하나님만 의지하게 만들려고 이렇게 훈련을 시켜 가시는 것입니다.
지금 환란중에 있습니까? 지금 고난중에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놋 활을 당길수 있도록 훈련을 시키고 있음을 알아야 할것입니다.
이렇게 훈련 시킨 이유는 싸우게 할려고 훈련을 시킨것입니다.
우리도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훈련 시킨 이유는 바로 영적 전쟁에서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 훈련을 시키는것입니다 .
우리는 구원을 받을때 입대를 한것입니다. 그것도 신병으로 입대를 한것입니다. 그러니깐 힘이 들죠. .왜냐 몸이 익숙하지 않기때문입니다. 익숙해질려면 많은 고난도 있어야 하고 노력도 있어야 합니다. 마귀는 인간수단방법으로는 이길수 없습니다.
마귀를 이길수 있는 방법은 성경대로 전쟁을 해야합니다. 그렇게 해야지만 이길수 있습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랑도 싸워야 하고, 이세상 풍조들과도 싸워야합니다. 이 싸움은 한번의 전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오실때까지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싸울때 대충하며 싸워야 할까요? 아니면 최선을 다해야 할까요? 한번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원하는것은 대충대충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온전한 삶을 원하십니다.
주님이 나에게 원하는 것은 마태복음 22:37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목숨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귀와 싸워야 하는데 목숨을 내놓고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하계수양회 무엇을 내놓고 싸워야 하는 것입니까? 나의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부인일것입니다. 내가 죽어야지 누가 사는 것입니까? 주님이 살기때문입니다.
나를 죽여가는 삶이 대도록 주님은 우리를 훈련해 가시는 것입니다. 나를 어떻게 죽일수 있을까요? 그것이 바로 고난이 있을때 당당히 맞서라는 것입니다 .
시련이 있을때 당당히 맞서라는 것입니다. 피하지 말고요.. 지금 내 앞에서 있는 큰 산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당당히 맞서서 싸우라는 것입니다.
내가 전도할 대상이 너무 큽니까? 당당히 싸워야 할것입니다. 하계수양회 온전히 참석입니까? 한번 싸워 보세요.. 주님이 길을 열어 주십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훈련을 묵묵히 감내하면서 나아가야 할것입니다. 포기하시면 않됩니다.
구원받고 난 이후에 우리의 손이 정말 주님이 원하는 손이 되어야합니다.
주님이 원하는 손이 되기 위해서 먼저 주님의 손을 배웠고, 그리고 주님이 우리의 손을 가르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훈련을 잘 받고 손에 힘을 키워야합니다.
야곱도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필이 힘이 있다..그렇게 된 이유는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손은 힘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전능자의 손의 힘을 입어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시편 144:7 “7 위에서부터 주의 손을 펴사 나를 큰 물과 이방인의 손에서 구하여 건지소서”
그래서 위에서부터 주의 손을 펴서 나를 보호해 달라고, 그리고 그 손으로 나를 훈련 시켜 달라고 다윗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의 전능하시는 손아래 우리가 있는 것이고 우리는 그 손을 붙잡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주의 손을 붙잡고 함께 하고 있을때 어떠한 역사가 일어납니까? 그것은 바로 전도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원하는 손인것입니다.
처음은 주님이 알려주시고 가르쳐 주시고 훈련시키고, 주님의 의지하는 법을 알게 하여 주시고 우리가 주의 손의 의지하고 함께해서 결국은 많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이 손을 사용하는 것을 주님이 원하는 손인것입니다.
사도행전 11:21 “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 오게 된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더욱더 주님에 손을 다른이에게 알려 주어야 합니다. 잡으라고요! 지옥으로 달려가는 그 영혼에 대해 우리가 손을 내밀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주변에 그러한 손을 기다리고 있는 분이 있을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 손을 붙잡아 듯이 우리도 다른이에게 그 엄청난 손을 알려 야 할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원하는 손은 성경을 넘기는 손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처음 찾았던 말씀 잠언 10:4 “4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손을 게으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됩니다. 정말 그렇게 됩니다. 우리의 손이 말씀을 넘기는 것을 게으게 하면 영적 가난이 찾아오게 됩니다. 그러면 신앙의 힘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생동안 성경의 책장을 넘겨야합니다. 손으로 성경을 붙잡아야 합니다. 평생에 듣던 성경.. 평생에 보던 성경.. 이렇게 되어야합니다.
그리고 넘어져 가는 형제 자매님을 붙드는 손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4 “14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는 세상으로 더욱더 밀치는 손이었습니다. 하지만 구원 받은 후로는 넘어져 가는 자를 붙들어주는 손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의 하나의 행동 행동들이 한 형제를 살릴수도 죽일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손은 넘어져가는 분들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움켜쥐는 손에서 베푸는 손으로 바뀌어야합니다
신명기 15:7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먼저 구제입니다. 내 손을 불쌍한 사람에게 편다는 것은 마음이 열려 있어야 가능한것입니다.
하나님쪽으로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은 틀림없이 형제 자매님 쪽으로 마음이 열려 있고, 불쌍한 영혼 쪽으로 마음이 열려 있기에 내 손도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외선교에 가면 더많은 물질을 드리고 헌물도 하는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소망을 잡는 손으로 바뀌어야합니다.
무엇을 잡아야 하겟습니까? 주님의 우리에게 내려 주시는 상급을 바라봐야 합니다.
시편 128:2 “2 네가 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것이라는 말씀처럼 우리는 주님의 교회안에서 부지런히 주님의 일을 해야 할것입니다 .
이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내려 주신 법칙입니다.
뿌린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여기 앉아 있는 형제 자매님은 어떠한 손을 가지고 싶으신가요?
기도의 손, 소망을 잡는 손, 베푸는 손, 붙잡는 손 어떠한 손을 가지고 싶으신지요!
여기에 가장 아름다운 손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위로의 손입니다.
우리가 어렸을때 가위 바위 보를 하지 않습니까?
어떠한 글을 읽었는데요! 남자는 가위바위보하면 무엇을 내라고 말을 합니까? 남자는 주먹이지 이렇게 말을 하잖아요!
그리고 여자는 가위를 낸다고 하잖아요!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내어야 할까요! 보를 내어야 한다고 어떠한 글귀를 읽게되었습니다.
왜 보일까! 고민해 본적이 있었습니다.
주먹을 이기는 것은 보입니다. 맞죠. 우리는 가끔 이 주먹으로 형제 자매님을 때리지는 않지만, 언어의 주먹으로 형제자매님을 상처를 주는 것같습니다.
우리는 형제 자매님을 위로 해준다고 하면서 가끔 주먹으로 가위로 위로를 해줍니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죠. 우리는 여기에 계신 형제 자매님 모두 보로 손을 피고 위로를 해주어야 합니다.
주먹과 가위는 나의 경험, 나의 방법으로 위로를 해주는 것입니다. 주님이 위로 해주실때 어떻게 위로를 해주었습니까? 사람의 방법입니까? 아니면 주님의 방법입니까?
네 맞습니다. 주님은 주님의 방법으로 아주 알맞은 방법으로 위로를 해주었습니다.
누가복음 5:12–13 “12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 몸에 문둥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1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문둥병이 곧 떠나니라”
방금 읽은 말씀을 보면 지금 문둥병 걸린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어떻습니까? 고칠수 있습니까? 우리는 할수 없으니깐 가까이 가기도 싫잖아요!
그런데 주님은 어떠한 방법으로 이 문둥병 걸린 환자를 고치셨습니까?
그냥 말로 너의 병이 낳았다 그렇게 해도 낳았을텐데…
주님은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이렇게 행동으로 하셨습니다. 우리는 가끔 우리의 방법으로 이렇게 하면 되잖아요! 이렇게 말할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형편과 사정을 모르는체 그냥 무심코 던질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때 상처가 더욱더 깊어 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처럼 그 형제 자매의 마음에 손을 대어야 합니다. 같이 그 상황에서 아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때 우리는 정말 큰 위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같이 우는 것 아니겠어요.. 우리의 말이 전혀 위로가 되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우리 위로는 주님이 나에게 배푸신 전능자의 손이 필요할때가 있는것입니다.
또한 징계로 여러가지 어려움으로 고통 받고 있는 형제 자매님이 있을수 있습니다. 그럴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더욱 붙잡아 주어야합니다.
베드로도 환경을 보고 물속에 빠진 사건을 기억할것입니다. 물에 빠지기 전에 베드로도 주님을 보고 열심히 물위를 걸었던 분입니다. 얼마나 대단합니까?
하지만 그러한 믿음의 선진들도 물에 빠질수 있다는것을 알아야 하는것입니다. 징계일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릅니다. 그런다고 그냥 두면 됩니까?
않됩니다. 주님이 그때 손을 내밀어서 건져 주었습니다. 우리도 같습니다. 그런 분에게 더욱더 가까이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굴속에 들어가 있습니까? 더욱더 찾아가야합니다.
그 굴속에서 나오는 방법은 찾아가는것입니다. 엘리야도 450명의 바알선지자와의 전투에서 이기고 이세벨이 죽일려고 하니깐 스스로 광야로 들어갔잖아요!
그곳 로뎀나무 아래에서 엘리야는 나만 남았다고 주님 저를 데려가달라고 그렇게 원망스러운 말을 했는데 주님은 어떻게 했습니까?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까?
열왕기상 19:5–8 “5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6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7 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8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주 사십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어루만저 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먹을것을 주시고 그러니깐 다시 힘을 내서 40주야를 행하여 호렙산에 이르렀지 않습니까.
우리도 같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힘이 빠질때가 있습니다. 그럴때 더욱더 어루만져 주어야합니다. 잘하고 있다고 우리 같이 함께 뛰어보자고 내가 도와 주겠다고 그러한 위로의 말이 그 형제 자매에게는 큰 힘이 될수 있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4 “14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우리의 손은 판단하는 손, 상처 주는 손이 되어서는 안되며 안위하고 붙들어 주며 오래 참아 주는 손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손은 펴는 보자기입니다. 알겠죠!
우리가 기억할것은 바로 위에서 부터 내려오는 주님의 손이라는 것입니다. 그 손을 붙잡고 나는 누굴 또한 붙잡아야 겠습니까? 형제 자매님을 위로해주고 붙잡는 손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가장 아름다운 손들입니다.
오늘은 주님이 내게 주신 손에 대해서 살펴 보았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손을 통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았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손은 나를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 교회와 주님을 위해서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