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가모에게 보내신 편지

요한계시록 강해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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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 여러분 맹모삼천지교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맹자의 어머니가 자녀의 교육을 위해 세 번씩이나 이사를 하면서 아들을 가르친 내용입니다. 맹자는 이사를 하는 곳의 특성을 따라했습니다. 묘지로 이사를 했더니 곡소리 꾼을 따라했던 맹자였습니다. 다음 장소인 시장에 가니 장사아치들을 따라했던 맹자였습니다. 다음 장소는 공자를 묘시는 문묘에 갔더니 비로소 맹자가 관리들의 성품과 행동을 따라했고, 그때에야 비로소 공부에 관심을 갖던 맹자였습니다.
코칭 : 이 내용은 자녀의 교육을 위한 부모의 교육열을 나타내는 내용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있는 곳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나타내 주기도 합니다. 우리는 스펀지와 같아서 무엇을 먹고 마시는지에 따라 우리의 마음에서 나타납니다. 그래서 우리가 발을 밟고 서있는 곳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에 가득한 것을 낸다고 말씀하심으로 우리의 마음에 있는 것이 삶에 드러남을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거하고 계신가요? 여러분은 지금 마음에서 무엇을 나타내고 있으신가요? 현재 무엇을 내어가며 살아가고 계신가요?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은혜와 찬양, 감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도입 : 미국에 거주하는 교포들이 거주하는 지역은 특색이 있습니다. 돈이 어느 정도 생기고 나면 좋은 지역으로 이사를 갑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는 곳은 이런 특색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바로 학군입니다. 그리고 안전해야 합니다. 교통이 좋아야 하구요. 문화를 누릴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과 소통을 할 수 있는 한인교회가 있어야 합니다. 최소한의 특색이라도 갖춰져야 이사를 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지역은 누구나 환영할 만한 장소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갖춰졌는데, 이 곳에 사단을 숭배하는 예배당/ 사단교가 있다면 여러분은 가시겠습니까? 다 좋은데 사단교가 있는 지역입니다. 어떻게 하십니까? 사람들이 그러한 종교시설을 싫어하지 않고 좋게 여기는 지역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본문 : 오늘 말씀을 나눌 버가모 지역이 이런 지역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13절의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버가모는 소아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었습니다. 버가모라는 이름은 높은 곳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름처럼 높은 고지대에 거하여 뛰어난 절경이 있었고, 고지대에는 언제나 신전이 있었습니다. 절경이 정말로 뛰어나 많은 헬라신의 신전이 버가모 지역에 세워졌습니다. 제우스와 디오니소스신전이 세워져 사람들의 종교심을 끌어 올렸습니다. 무엇보다 황제에게 충성된 지역이다 보니 황제숭배 신전이 소아시아 7개의 지역에서 제일 먼저 지어진 장소였습니다.
사단의 권좌 : 황제 숭배에 대한 충성도가 높다보니 황제는 버가모 주민들을 어여쁘게 여겨 많은 문화적 혜택을 누리게 해주었습니다. 세금감면혜택과 경기장, 수많은 문화적 혜택이 주어졌습니다. 또한 20만권의 장서로, 로마에서 제일 많은 도서관을 세워주었습니다. 이 도서관에는 당대 제일 유명한 헬라철학이 구비되어 주민들의 이성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버가모 지역 주민들은 이성적이었고, 문화적으로 윤택했고, 정치적으로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삶을 유지 시켜 주는 것이 황제숭배 덕분이라 생각하며, 그들은 최고의 충성을 다했습니다. 지역 주민들의 마음과 마을의 한 복판에 이교신전과 황제 숭배 신전은 그들을 다스리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입니다.
황제를 숭배하지 않는 사람으로 인해 황제의 총애를 잃을 것을 두려워한 주민들을 교회의 교인들을 미워했습니다. 교회를 향해 적대적이었습니다. 이교를 믿지 않는 교인들 또한 미련한 자라했습니다. 주민들의 마음은 황제와 이교 신들로 가득찬 지역이 버가모 지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돈과 문화, 종교로 사람들을 다스리는 지역이 버가모지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황제숭배에 앞장선 버가모, 이교 신저으로 가득한 버모를 주님은 사단의 권좌라고 부르십니다. 버가모에는 치유의 신전인 아스클레오피스 신전이 있었습니다. 신전에서 치유 기도를 마치고 나면 밖에서 신에게 감사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사진 오른쪽에 동전을 보시는 바와 같이 뱀이 똬리를 틀고 칭칭 감겨져 있습니다. 이 지역은 뱀을 숭배했습니다.
이 뱀이 인간을 치유하고, 구원하는 신이라는 것이죠. 요한계시록/성경은 뱀을 사단의 상징으로 보고 있는데, 뱀을 숭배하며, 찬양하는 지역이야 말로 사단의 권좌라 불릴 만 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치유하며 구원할 분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믿습니다. 하지만 이 지역의 사람들은 뱀을 믿고 있었습니다.
코칭 : 요한계시록의 주제는 ‘누가 우리의 참된 통치자인가?’를 물어보고 있습니다. 버가모의 주민들은 우리의 통치자는 황제라고 외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버가모 교회는 우리의 통치자는 “하나님”이심을 주장했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이 통치자이시니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을 더욱 믿으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치료자-구원자는 누구입니까? 여러분의 통치자는 누구십니까? 우리는 풍요로운 세상 속에서 결단을 해야 할 것입니다.
1) 좌우의 날 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러한 버가모 지역의 교인들에게 나타나신 주님은 12절의 말씀과 같이 “좌우의 날 선 검을 가지신 이”로 묘사됩니다. 본문에서 나타난 검은 장검으로 조사가 됩니다. 사진을 함께 보실까요? 이 검은 길어서 말에서도 공격이 가능한 제일 센 칼이었습니다. 이 칼은 대개 총독이 가지고 있었고, 이 칼을 가진 사람은 즉결심판이 가능한 심판권을 나타내었습니다. 이러한 주님에 대한 비유는 심판하시는 주님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버가모의 반 기독교적 세력과 싸우시며 그들을 심판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심을 나타냅니다. 또한 사람의 생사는 적대적인 대적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검은 말씀으로 해석이 됩니다. “히 4:12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주님은 사람들을 말씀으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정당하며, 거룩하기에 심판당하는 그들의 결과는 옳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사람들의 폐부를 찌르며, 쪼갤 것입니다. 믿는 자나 아니 믿는 자나 주님의 말씀은 우리를 징계하십니다. 이 말씀은 믿고 회개하는 자들에게는 심판이 아닙니다. 사랑의 채찍입니다.
코칭 : 주님은 좌우의 날 선 검으로 사람들의 폐부를 찌르시며, 세속적이며 적대적인 세상 속에서 누가 참 통치자인가? 누가 참 구원자-치유자인가? 당신은 어디에 거하고 있는가를 질문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검/ 말씀이 나에게 다가왔을 때, 여러분에게는 심판과 두려움, 사랑의 채찍 무엇이 되시겠습니까? 믿음으로 주님의 말씀을 받아 말씀으로 온전해지는 열방교회의 모든 성도님들 되기를 소망합니다.
2) 순교자의 교회, 충성된 증인 안디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버가모 교회는 적대적인 세상 속에서 순교자를 낳은 교회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박해가 따르더라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순교의 자의 피, 순교자의 열매는 교회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순교의 열매는 안디바였습니다. 13절의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안디바의 죽음은 놋으로 만든 송아지에 사람을 넣고, 불태우는 사형의 방법을 썼습니다. 너무나도 극심한 사형의 방법이었습니다. 이 안디바는 누구일까요? 안디바는 주석 속, 교회의 전승에서는 버가모 교회의 리더 혹은 담임목회자로 조사가 됩니다. 사도바울이 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며 자신의 후임으로 세운 담임목사입니다. 안디바는 타협을 하면 박해를 면하고, 죽음을 피할 수 있었지만 거절하였고,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이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 충성된 증인으로 입을 열지 아니하고 신의를 지키는 충성된 신하의 모습과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를 무엇이라 부르시나요? ‘충성된 증인’이라 부르십니다. 이 충성된 증인은 아무에게나 쓰이는 단어가 아니었습니다. 이 칭호는 예수님에게 쓰인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계 1: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런데 이 충성된 증인의 칭호에 언제나 따라오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입니다. 본문을 다시한번 봐주세요. 주님은 충성된 증인으로 죽으셨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안디바는 2:13절의 말씀을 보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충성된 증인으로 믿음을 지키다 죽임을 당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충성에는 언제나 죽음과 대가가 따릅니다. 다른 선택이 없기 때문입니다. 안디바는 자신을 아끼지 아니하고 충성스럽게 자신을 드렸습니다. 여러분 충성을 하다보면, 자신의 죽음(상처와 낙심)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믿음의 생활을 하다보면 자신을 부인해야 하는 상황을 맞이합니다. 그때 여러분 피하지 마십시오. 충성을 경험할 때입니다. 자신의 깨어짐을 경험할 때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생명을 경험할 때입니다.
적용 : 안디바는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 아니었습니다. 리더의 부재는 교회 공동체의 큰 와해를 가져왔습니다. 영적 지도자의 부재는 방향과 힘을 잃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버가모 교회 속 리더의 죽음은 와해보다는 생명의 풍성함을 가져왔습니다. 왜냐하면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었을 때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 영적인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 원리를 따라 안디바는 믿음을 지키며, 자신을 아낌없이 죽기까지 내어주었습니다. 그는 순교하며 희생하는 리더였습니다.
이처럼 리더/목회자의 자기 부인/ 자기 죽음에 부서와 교회의 생명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내어 놓지 못하는 목회자, 죽지 않는 공동체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이 사실을 버가모 교회의 교인들은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안디바처럼 적대적인 세상 속에서도 자신을 포기하며, 자기 자신을 내어 놓는 일에 아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담임 목회자가 죽음에 이르러도 공동체가 무너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성도들 자신도 환란 속에서 믿음을 지킨 것입니다.
코칭 :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여 자기 자신을 내려놓으실 수 있으신가요? 여러분은 성도와 교회를 사랑하여 자신을 포기하고 내려놓으실 수 있으신가요? 우리 자신이 살아있다면 우리는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눅 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여러분은 현재 어떻게 주님을 따르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적대적이며, 고난의 상황 교회 공동체들을 어떻게 대하고 계신가요? 이 질문은 어려운 질문입니다. 그러나 세상과 진리 가운데서 갈팡질팡하는 자들에게는 치명적인 질문 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께 대가를 지불할 믿음이 있으신가요?
이처럼 버가모 교회는 주님 앞에 충성된 교회였습니다. 리더의 충성스러움을 따라 성도들도 주님 앞에 충성되었습니다. 믿음을 지키고 신실했습니다. 고난과 환란 앞에서 교회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삶에 따라오는 죽음과 자기부인은 교회와 성도들을 영적으로 더욱 강하고 충성스럽게 해주었습니다.
우리 열방교회의 성도님들의 삶도 주님 앞에 한 알의 밀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자신을 충성스럽게 내어드리는 믿음의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버가모 교회르 향해 주님께서는 칭찬만 하시지 않았습니다. 많은 책망을 하십니다. 그들이 받은 책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몇 사람으로 인한 신앙의 좌초를 겪을 일이었습니다.
배가 좌초가 되는 것은 높은 파도를 만나서도 아니고, 큰 빙산을 만나서도 아닙니다. 바람을 읽지 못해 배의 방향이 틀어지고,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 바로 자신의 방향을 바꾸지 않았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배는 작은 바람에 서서히 틀어져 갑니다. 그러나 작은 파도를 무시하고 방치하면, 이미 때는 늦어버린 것입니다. 되돌릴 수가 없습니다. 작은 문제를 방치하고 용납하거나 관용하게 되면 우리의 삶도 작은 죄악의 문제로 인해 좌초를 격게 될 것입니다. 오늘 나눌 버가모 교회가 바로 이러했습니다. 그들은 큰 빙산과 같은 문제는 잘 피하고 견디었지만 작은 문제로 보이는 것에 대해서는 타협하고 용납하던 교회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순교의 피를 흘린 교회, 죽음을 무릎 쓰고 환란을 이긴 성도들이 신앙의 좌초를 겪고 있다고 하십니다. 신앙을 지킨 강인한 용사를 넘어트린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한 사람의 교훈이었습니다. 오늘 등장한 한 사람의 교훈은 성도들의 삶에 피할 수 없는 문제들을 타협하게 만드는 교훈이었습니다. 물질, 성, 가치의 문제 앞에 완벽하지 않아도 되게 하였습니다. 조금씩 타협해도 괜찮다고 성도를 유혹했습니다.
처음에는 그의 교훈이 큰 바람처럼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의 가르침은 그들의 마음의 방향을 점차 큰 갈래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성도들은 복음에서 멀리 벗어나 세상과 연합한 우상숭배자가 되어버렸습니다. 타협한 성도들의 마음은 하나님과 세상, 두 주인을 섬기는 자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적용 : 삶에서 타협하는 작은 문제가 우리를 복음 진리에서 떠나게 할 수 있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작은 문제는 이겼지만, 그들은 자신의 삶에 찾아오는 작은 문제들을 단호하게 무찌르지 못했습니다. 이들이 겪는 문제 앞에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은 삶에서 찾아오는 타협의 문제 앞에 어떻게 대처하시나요? 알아차리지 못하는 순간에 우리를 복음 진리에서 벗어나게 하는 문제가 있지 않으신가요?
오늘 말씀을 상고하며 우리를 진리 위에 온전히 세우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복음 진리/ 복음의 핵심을 굳게 붙들어야 할 것입니다. 히 2:1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가만히 있으면 떠내려갑니다. 날마다 우리를 진리 위에 세워야 합니다. 날마다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화 : 운동선수는 기본기가 중요합니다. 기본기 속에서 실력이 나옵니다. 축구를 잘하는 선수를 보면 언제나 기본기 연습을 가장 열심히 합니다. 저의 고등학교에 차두리 선수가 다녔었는데, 차두리 선수가 틈이 나면 오버헤드킥을 연습했다는 소문이 났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차두리 선수가 2002년 월드컵 이탈리아전에 오버헤드킥을 날렸던 장면을 보고 연습이 정말 중요하구나를 떠올렸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매일 행하는 복음에 참여함이 우리를 복음에서 멀리 떨어짐으로 방지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로 가고 계시나요? 작은 바람과 타협으로 여러분은 멀리 떨어져 가고 계시지 않으신가요? 여러분은 복음에 참여하고 있으신가요? 여러분의 영혼을 소중히 여기셔서 복음으로 자신을 날마다 세웁시다.
1) 니골라-발람의 교훈
버가모 교회는 책망받는 교회가 되어버렸습니다. 14-15절의 말씀을 보면 버가모 교회에 교훈을 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니골라입니다. 본문은 그가 발람처럼 교인들을 시험한 것으로 보입니다. 니골라와 발람은 맥을 같이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구약성경에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고, 시험에 빠트렸던 것처럼 신약시대의 교회를 니골라가 발람처럼 시험하고 넘어트린 일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발람은 이스라엘 청년들을 욕정으로 꼬드겨 우상과 연합하게 만든 자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발람의 꾀를 통해 니골라당의 교훈이 무엇인지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발람은 모압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알고 있는 이방 선지자였습니다. 모압에 누구보다 뛰어난 영험한 능력이 있던 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모압왕 발락이 이스라엘에게 저주를 명하여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하시고, 저주하기를 원하지 않은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돈을 위해 저주하였던 자입니다. 그는 결국 영적인 능력은 있지만 돈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타협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고, 그들의 약점을 이용해 청년들을 음행에 빠지게 한 거짓 선지자가 되어버렸습니다.
모압 왕은 끝내 저주가 통하지 않자 더 많은 꾀를 내라고 그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그는 여기서 그만 둘 수 있었지만, 이스라엘 청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는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않음을 알고, 그들의 약점을 이용해 벌거벗은 모압의 여인들을 앞세워 음행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음행은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신전 창기들을 이용하여 이스라엘 청년들이 바알과 종교적이며 영적으로 연합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알브올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청년들이 죄의 문제 앞에 굴복하고 넘어지게 만들어 우상과 연합하게 만드는 그의 꾀는 적실했습니다. 발람의 꾀는 가장 연약하고, 깨닫지도 못한 부분으로 타협하게 넘어지게 만드는 계략이었습니다. 그의 꾀는 모든 청년들을 범죄 하게 했습니다. 이러한 발람의 파급력이 니골라 당에게도 있어서 버가모 교회를 뒤 흔들고, 배교하게 만들었습니다.
적용 및 코칭 : 교회의 역사 속에 순교의 신앙도 불 붙듯이 역사했지만, 타협과 배교의 문제도 심각하게 역사했습니다. 타협하면 고생하지 않고, 타협하면 고난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타협하면 헌금 잘하면서 편하게 신앙을 잘 이어갈 수 있는 발람의 선택지가 그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발람의 이야기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교훈으로 다가옵니다. 돈에 타협하며 이스라엘을 저주한 것처럼, 돈에 타협하며, 하나님을 떠나도 된다는 편한함의 타협입니다. 니골라당의 교훈은 영육이원론으로 육은 더러워도 된다는 가르침으로 발람의 꾀처럼 성도들을 성적인 타락에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타협하고 더러워지도록 방조하게 만든 교훈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질문 앞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수 많은 금은 보화를 거절하시고 고난을 선택할 수 있으십니까? 왕의 보화와 진미를 거절 하실 수 있으신가요? 여러분은 자신의 쾌락을 포기하고 주님을 선택할 수 있으신가요? 주님은 교회 앞에 말씀하시면서 이 싸움에서 이기라고 권면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의지하여 승리하는 성도가 되십시오. 우리들은 연약합니다.
발람의 이야기 속 교훈은 끝까지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배교한 이스라엘이 바알과 연합 된 후, 상황은 무섭게 변했습니다. 범죄하지 아니한 청년들은 우상과 연합한 모두를 창과 칼을 들고 죽였습니다. 발람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가나안 입성 전 하나님은 모압과 암몬을 이스라엘에게 모두 넘기셨습니다. 이 때 발락왕과 발람은 처참하게 칼에 찔려 죽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칼에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발람과 그 꾀에 빠진 모두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처럼 배교하고 범죄한 버가모 교회에 주님은 16절의 말씀처럼 좌우의 날선 칼을 들고 찾아오셨습니다. 사실 버가모 교회가 심판 직전의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이 칼은 모두를 심판할 심판의 칼입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죄에 대한 징계와 심판 밖에 없습니다.
적용 및 코칭 : 저는 이 말씀을 보며 버가모 교회가 참으로 심각한 상황에 처했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첫사랑-처음 행위를 버려 책망을 받았고 촛대를 옮기는 지경까지 갔다면, 버가모 교회는 세상-세속화에 빠져 심판의 경고에 대한 주님의 책망을 받고 있습니다.
지체하여 작은 바람-타협에 휩쓸려 가면 기회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싸우라고 하십니다. 이기라고 하십니다. 벗어나라고 하십니다. 16절의 말씀에 전해진 회개의 외침은 정말로 다급한 주님의 외침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이 음성에 들을 귀가 있으신가요?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서 계십니까? 알지도 못한 사이 세속화에 휩쓸려 내려가고 있지 않으신가요? 여러분은 이 싸움에 동참하고 계십니까?
바울은고후 7: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우리에게 자신을 지켜 깨끗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주님과 싸우는 결과”를 맞게 될 것입니다.
로마의 세속화를 거절하지 못하고 타협하는 교회에 주님은 검을 드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삶에 개입하셔서 그들을 심판-징계하시고 온전케 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하지 않고서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징계하심에 순종하며 지금 돌아오고 회개하며 돌아옵시다. 성의 문제에 대해, 물질에 문제에 대해 자신을 지키십시오.
2) 회개하며 돌아오는 자들에게 주시는 복
주님은 회개하며 돌아오는 자, 이기는 자에게 어떤 복을 약속하십니까? 17절의 말씀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1) 새 이름이 적힌 흰 돌을 주심
주님은 시험과 싸움에 이기는 자에게 감추었던 만나와 새 이름이 적힌 흰 돌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흰 돌은 고대 올림픽 우승자에게 주어지는 상급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왕과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새 이름이 적혀져 왕을 볼 수 있는 증표가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우승자에게 주시는 흰 돌을 주셨다는 것은 세상과 싸워서 영적 순결을 지킨 우리를 자신의 보좌에 친히 초청하십니다. 그리고 왕이 주는 이름은 왕께 나아갈 수 있는 권세를 주십니다. 그리고 왕을 보고 교제할 수 있는 특권을 주십니다.
우리는 누구의 이름을 받느냐로 인생이 달라집니다. 짐승의 이름을 받는 자는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다음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계 14:11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쉼을 얻기 위해 타협을 하였지만, 짐승의 이름으로 타협을 한 자에게는 쉼이 없습니다. 그 쉼은 영원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소망하며, 이 싸움을 끝까지 이겨 나가야 합니다. 왕이신 주님을 뵙 때 우리는 변하지 않는 영원한 쉼을 얻게 될 것입니다.
(2) 감추어졌던 만나를 주심
이어서 17절의 말씀을 보면 만나를 주신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만나는 어느 순간 백성들의 수중에서 사라졌습니다. 만나는 가나안땅에 들어가기 전 매일 이스라엘을 배불렸던 것이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며 언약궤 안에 광야에서 일어났던 모든 사건의 물건들이 들어갔습니다. 언약의 두 돌판과 아론의 싹난 지팡이, 그리고 만나였습니다. 어느 순간 이 물건들은 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물건들이 우상처럼 변하지 않도록 사라지게 하신 이유도 있었겠지만, 어느 순간 성경에서 언급이 되지 않습니다.
만나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과 교제에 관련이 깊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이셨습니다. 백성들은 노예근성으로 하나님을 믿지 못해 만나를 더 많이 거두고, 썩혔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신실하게 채워주심으로 그들을 대하였습니다. 이는 세상과 자신의 가치에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도록 훈련하셨던 손길이었습니다. 40년이 가까울수록 백성들은 만나 때문에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내일 또 만나를 내려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만나를 주시는 분임을 믿고 우리가 세상의 가치에 타협하는 것을 중단하는 순간, 하나님은 우리를 책임지시며 신실하게 대하심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3) 영적 경계선을 확고히 세워라
버가모 교회의 문제점은 환란에 대한 믿음은 잘 지켰지만, 삶의 경계선은 지키지 못한데 있습니다. 타협하지 말아야 될 점을 확고히 지켜야 했지만, 한 사람의 교훈은 신앙의 용사인 그들을 무너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세상의 구분점은 명확해야 합니다. 돈에 대해, 성에 대해, 신앙에 대해 자신을 명확하게 세워야 합니다. 버가모 교회는 처한 상황 속에서 삶의 아주 작은 부분부터 타협해 나갔습니다. 돈의 문제에 있어서, 음행의 문제 있어서 조금씩 타협했고 발람과 같은 길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이 일은 크게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작은 바람이 불어 배의 방향을 바꿨고, 그것을 허용하고, 타협하여 완전한 타락으로 빠지게 된 것입니다.
현대의 교회는 버가모 교회보다 더 어렵고 명확하지 못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지금은 관용주의가 심각해서 모두의 의견을 존중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교회는 이에 발을 맞추어 모두를 옳다하는 죄의 길로 빠져 모두에게 열린 교회, 사랑으로 품는 교회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구분이 진리로 명확하지 않고 사람들의 편의에 맞춰져 우리는 그들보다 더 심각한 상황에 놓여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타협이 일상인 우리의 삶, 작은 일을 크게 보지 않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예화 : 프란시스 쉐퍼는 영적 간음과 육적 간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의 삶에 찾아오는 간음/우상숭배/배교는 어디서부터 시작되는가? 영적 간음/하나님을 떠남이 먼저인가? 육적 간음인 우상숭배가 먼저인가? 그는 이 시작점을 동시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시작점은 영적 간음이라 합니다. 우리에게 영적 간음이 일어났을 때는 내가 하나님을 떠났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났을 때, 우리의 삶에 우상은 자연스럽게 세워집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마음이 있다면, 여러분의 경계선은 무너졌습니다. 우리에게 경계선이 사라졌기에 작은 타협은 큰 문제로 다가 올 것입니다. 루터는 새가 머리에 앉은 것은 막을 수 없지만, 머리에 둥지 트는 것은 막을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타협이 찾아오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타협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4) 회개하라
주님께서는 우리를 좌우 날선 검으로 폐부를 찌르시며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교회는 세상과 구분되어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의 가치를 따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경계가 무너져 버립니다. 여러분의 삶은 진리로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나요? 해이 해져 있지 않으신가요? 여러분의 삶에 진리가 명확하게 역사하고 있으십니까? 세상의 유혹이 여러분에게 다가왔을 때 그것을 막을 힘이 있으신가요?
여러분 느헤미야는 무너진 성전을 다시 세우고 성벽을 세웠습니다. 이처럼 교회에 진리의 울타리를 다시 세워야 합니다. 교회와 세상을 가르는 울타리는 진리의 말씀인 복음입니다. 좌우의 날선 검과 같은 말씀, 우리의 심령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말씀의 칼날이 둔해지면 우리의 삶의 경계선은 약해져 세상으로 합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버가모 교회의 상황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무장시켜 주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뿐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너지면, 교회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무게와 깊이와 진리성이 약화되고 무너지면, 따라오는 것은 목사들의 삶의 타락이고 교인들의 삶의 타락과 영적 해이입니다. 하나님의 양날 선 검과 같은 말씀이 우리의 철판같이 강한 양심을 꿰뚫고 그 안의 죄성을 찔러 죽이지 못한다면, 우리의 죄성은 버젓이 고개를 들고 교회 안에서 조차 행세하려고 들 것입니다. 진리가 무너지면 경건도 무너지고 윤리도 무너집니다. 그래서 주님은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고 버가모 교회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내 입의 검으로 싸우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또한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그 말씀, 좌우에 날선 진리의 검을 들고 손에서 놓지 않아야 합니다.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갈 때, 우리가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며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을 때 심판은 불현 듯 찾아올 것입니다.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떳을 때는 주님이 칼을 들고 우리 앞에 서 계실 것입니다. 그 칼은 누구를 막론하고 피해가지 않았습니다. 레위지파 비느하스의 칼처럼 주님은 그러한 자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 칼을 피할 자 누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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